지금으로부터 꼭 40년 전인 1968년 초, 조선일보 지면을 주된 무대로 하여, 평론가 이어령씨와 시인 김수영씨 사이에 전개되었던 유명한 논쟁이 있다. 거기서 다루어졌던 쟁점은 "문학의 자유에 대하여 적대적인 상황 앞에서 문학인은 과연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놓고 벌였던 두 사람의 논쟁은 그 당시 우리 문학의 지적 수준을 대표할 만한 무게를 갖는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위와 같은 문제는 비록 세부적인 차이는 있을지언정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방식으로 오늘날의 문학인들에게도 여전히 던져지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그때의 논쟁문들을 정독해 볼 때 무엇보다도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당시의 수많은 문학인들이 '대중의 검열자'를 겁내고 있다고 지적한 이어령씨의 발언이다.
지금에 와서 볼 때 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인 이유는, 그 논쟁이 있은 후 4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논쟁에서 언급된 다른 두 가지 억압적 요소들 중 첫 번째 항목인 '정치권력의 탄압'은 많이 약화되었고 두 번째 항목인 '상업주의의 횡포'도 얼마쯤 극복되었지만 바로 이 '대중의 검열자' 문제만은 아무런 변화 없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령씨가 '대중의 검열자' 문제를 거론하면서 구체적으로 든 예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 탄압을 비판하면 우리 사회 내에서 어용 문학인으로 몰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다시 말하지만, 오늘날의 대다수 문학인들 사이에서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어령씨가 사용한 '대중의 검열자'라는 표현을 좀 더 익숙한 말로 바꾸면 '다수의 통념'이 될 것이다. 이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문학인들에게는 두려운 일로 남아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유능하고 정력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수입을 올리는 기업인들을 긍정적으로 다룬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런 긍정적 기업인이 엄연히 존재하며 그들의 존재가 현대 사회에서 분명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그런 작품을 발표했다가는 독자들로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어용 문인'으로 비난당할 거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국 작가 에인 랜드의 야심적 대작 '아틀라스'나 '마천루'와 같은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는 나오기가 어렵다.
노조의 횡포 때문에 정작 노동자가 피해를 보고 고통을 겪는다는 내용의 작품을 발표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다. 현실 속에 그런 사례가 실제로 있으며 그것이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함축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그러니까 영국 작가 앤서니 버제스의 화제작 '1985년'과 같은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는 나오기가 어렵다.
해방 직후에서 6·25까지의 기간에 전개된 좌익과 우익의 역사적 투쟁을 다룰 때, 좌익 쪽의 폭력성과 과오가 우익 쪽의 그것보다 훨씬 컸다는 것이 엄연한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 점을 작품 속에 정직하게 반영하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다. 자칫하면 극우니 파쇼니 하는 말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종류의 공포를 극복하고, 대중의 통념이 어떠하든, 리얼리스트의 관점에서 포착된 '의미 있는 것'이라면 망설임 없이 작품세계 속에서 살려내는 용기야말로, 우리 문학인들이 문학의 자유를 제대로 확보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그 점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 40년 지난 논쟁을 끄집어내어 음미해 보는 일의 보람 가운데 하나이다.
위와 같은 사실을 지적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여 말해 둘 것이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다수의 통념을 형성하는 대중들 자신도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중들 자신도 현실의 참모습 앞에 마음을 열 줄 아는 존재로, 역사적 진실에 대해 리얼리스트의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야만 한다.
이동하 서울시립대 교수·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