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은 궁전, 제사시설, 궁원, 고급관원 거주지역, 도로, 성문 등을 갖추었다. 이뿐이랴. 도성 주변엔 홍수를 막을 토성과 제방, 그리고 대형 고분을 조성했고, 배후 전략적 요충으로서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을 쌓았다.
AD 200년 무렵 풍납토성의 모습이다. 한성기 백제 도성인 풍납토성은 연인원 100만명이 쌓은 명실상부한 고대국가의 도성이었다.
올해는 풍납토성 발견 10년이 되는 해.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대형의 석조건물지와 제사구덩이, 6각형 주거지는 물론 포장도로, 벽체건물지 등 백제도성의 면모를 알려주는 유구와 유물들이 쏟아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3~14일 서울올림픽파크텔에서 ‘풍납토성, 500년 백제왕도의 비전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주제 발표자로 나서는 신희권 서울중부권 문화유산조사단장은 ‘풍납토성의 도성구조 연구’라는 글에서 AD 200년쯤의 풍납도성 내부 모습을 추정했다.
일단 ‘궁전종묘구’와 ‘성문 및 도로’ ‘궁원(宮苑·궁궐의 정원)’, 그리고 ‘고급관원들의 거주지’ 등으로 크게 나눴다. 풍납토성의 핵심인 ‘궁전종묘구’에서는 주거지, 저장공, 구상유구, 폐기장 등 220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국가제사터인 여(呂)자형 주거지와 거대한 폐기구덩이가 발견됐다. 제사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12마리분의 말머리가 대표적이다.
한편 이곳에서 발견된 대형 건물지는 한성백제 시대 최대 건물지다. 구조도 일반 건축물과 다르다. 이곳에서 출토된 다량의 기와와 전돌을 볼 때 당시 왕성 내 궁전 건축이나 예제 건축의 일부로 평가될 만큼 위상이 높다.
최근 이곳에서는 직경 16m, 깊이 1.2m의 원형구덩이가 발견됐다. 여기서 수습한 유물만 평기와 5000여점, 와당 30여점이다. 건물이 붕괴했거나 혹은 국가시설 증·개축 때 나온 건축자재를 폐기한 장소였을 것이다. 결국 풍납토성의 중앙부는 궁전이나 제사건물, 관청건물 등이 밀집분포했을 것이다.
또한 최근 발굴한 105평 규모의 수혈건물지는 AD 200년쯤 폐기된 것으로 판단된다. 종교적·제사적 성격의 공공건물로 평가된다.
두번째, 풍납토성 내부에서는 도로 41m와 성문 3곳이 확인됐다. 도로는 왕성내 중요 공간을 분할하거나 중요 시설을 감싸던 핵심 도로였을 것이다. 궁성의 외곽을 감싸는 순환도로일 수도 있다. 도로는 도시구조 연구의 핵심적인 자료다.
또한 중간 지점에 있는 ‘풍납오거리 길’에는 당시 도성의 정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왕성의 구성 요소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궁원, 즉 연못과 같은 조경유적이다. 발굴 결과 연못유적이 두 곳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고급 관원 거주지다. 풍납토성에서 확인된 가장 특징적인 유구가 바로 6각형 대형 주거지다. 길이 10m, 폭 7m가 넘는 대규모이다. 유물들 가운데는 전돌, 토제 초석, 토관 등 일반 주거지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건축재가 보인다. 특히 중국계 도자기가 다량 출토된 것으로 보아 높은 신분 계층인 고급관원들의 저택으로 추정된다.
신희권 단장은 “도성 내외의 전반적인 구조로 볼 때 백제는 이미 AD 2세기에 고대국가의 면모를 확립했다”며 “몽촌토성이 축조된 3세기쯤 한성백제는 전성기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기환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