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잉카 제국

鶴山 徐 仁 2007. 12. 21. 20:10
잉카제국의 역사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 지방에는 BC 2000년경에 초기 신전(殿)이 출현하였고, 이후 차빈 ·모티카 ·나스카 ·티아우아나코 문화 등이 잇따라 번영하였다. 1200년경부터 지방적인 국가 형성기로 들어가, 각지에 왕국 ·수장국() 등 정치조직이 성립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강대하였던 것은 페루 북해안 지방의 찬찬(Chan Chan)이라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치무(Chimú) 왕국이었으나, 잉카제국은 그들 여러 왕국 중에서 가장 늦게 나타나 치무를 비롯하여 각지의 지방적 정치조직을 정복 통합하고 전()안데스 지대에 걸치는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잉카제국을 건설한 잉카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16세기에 잉카를 정복한 에스파냐인이 채집하였던 전설에 의하면 만코 카팍이라는 전설적 인물이 13세기경, 자기의 부족을 이끌고 남페루 고원()의 쿠스코에 정주하여, 그곳에 태양의 신전을 축조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이 만코는 태양의 아들로서 숭앙되고, 잉카제국 초대()의 황제라고 불렸으나, 그와 그에 잇따르는 7명의 황제들에 대한 전승은, 확실한 역사성이 희박하다.

그러나 13∼14세기에 잉카족이,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정된 소지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여 주변의 다른 부족, 특히 남쪽 티티카카호() 북안의 아이마라족과 대치하였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 잉카제국이 쿠스코에서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초에 제9대 파차쿠티황제 시대부터이다. 그 이후의 역사는 연대기적으로 구전()에 의하여 전해진 자료가 있기 때문에, 구체적 사실이 알려져 있다.

발전의 계기가 된 것은 잉카족과 창카족의 싸움이다. 창카족은 쿠스코 남서쪽의 안다와이러스 지방에 본거지를 두고, 페루 중부고원의 아야쿠초 지방까지 정치적으로 지배하였던 대부족이었으나, 쿠스코의 잉카족 정복을 기도()하여 대군을 보내왔다. 그것을 당시 왕자였던 파차쿠티가 영격()하여 쳐부수었기 때문에, 쿠스코가 갑자기 중부 페루고원까지의 넓은 영역의 정치집단을 그 지배하에 넣을 수 있었다.

영토의 확대와 더불어 파차쿠티는 태양신전을 개축시키고 그곳에서 일하는 처녀의 제도와 각종 의례를 정하여, 정치적 통합을 위한 정신적 중심이 되기 위하여 쿠스코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동시에 정복지에 관리를 보내서 그 정치조직을 쿠스코의 산하에 놓는 일도 적극 추진하였다. 이 대개혁이 단행된 것은 1430년대 말에서 1440년대에 걸쳐서였다.

그 후로도 파차쿠티의 정복사업은 계속되었다. 남쪽 티티카카 지방의 아이마라족이 정복되고, 또 페루 고원의 북부까지 잉카의 군대가 쳐들어갔다. 또한 볼리비아코차밤바 지방의 평정도 실행되었다. 다음 대()인 투파크 잉카가 성장하자 그의 지휘하에 페루 북해안 지방의 공략이 시작되었고, 치무왕국도 잉카의 군문()에 항복하였다.

군사정복의 확대에 따라 각지방의 도로가 정비되고 고원의 깊은 골짜기에도 다리가 놓여져 유명한 잉카 왕도()의 도로망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업적을 남긴 파차쿠티는 1474년경에 죽었다고 알려진다. 다음의 투파크 잉카 유팡퀴 황제의 시대에도 정복사업은 속행되어, 에콰도르 지방과 칠레 ·아르헨티나의 북부도 잉카의 영토가 되었다. 질서가 확립된 행정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각종 공공건축도, 태양신전과 성채를 중심으로 각지에 세워졌다. 잉카제국의 근본적인 형태는 이 투파크 잉카 시대에 이루어졌으며, 이 잉카가 죽은 것은 1493년경이었다.

다음 대의 와이나 카파크 시대에는 영토 확대는 없었으나 국내의 여러 제도를 계속해서 강화하는 한편 변경의 에콰도르 지방 개척에 힘을 쏟았다. 이 때문에 황제가 수도 쿠스코를 떠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쿠스코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자층과 에콰도르의 키토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층과의 사이에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즉, 1525년 와이나 카파크가 죽자, 아들 중의 하나인 우아스카르는 쿠스코에, 또 다른 아들인 아타우알파는 키토에 본거()를 두고 서로 대립하였다. 1532년 양자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어, 아타우알파가 쿠스코 세력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그 직후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페루에 침입하여, 북고지()의 도시 카하마르카(Cajamarca)에서 아타우알파가 체포됨으로써 잉카제국은 붕괴하였다. 그 뒤 에스파냐인은 쿠스코를 점령하여 식민지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망코라는 잉카인이 반란을 일으켜, 쿠스코 북서쪽 계곡을 거점으로, 그 아들들이 71년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는 사실()도 있다.

 

잉카제국의 멸망

약 500명의 병력에 멸망 당함

 
1. 잉카내의 내전....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이 잉카제국에 오기전에 잉카는 이미 내전으로 힘이 약화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1526년 잉카제국의 황제 와이나까박은 죽으면서 제국은 와스까르와 아따와르파에게 반으로 나뉘어 지게 되고 와스까르와 아따와르파는 결국 전쟁에 돌입합니다. 결국 아따와르파가 승리하지만 제국은 여전히 분열된 상태에서 전쟁으로 힘까지 약화됩니다.

2. 잉카내의 전설....
거기에 잉카제국내에 존재하였던 한 전실상의 이야기가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에게 도움을 주게됩니다. 잉카 제국에는 전설 속에 백인처럼 몸이 하얀 "비라코차"라는 인물이 존재하였습니다. 태양을 섬기며 태양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비라코차는 바다로부터 와서 잉카의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결코 힘을 사용하지 않으며, 잉카인들에게 문명을 가르쳐 주고 사라졌습니다. 그뒤 잉카인들은 그가 사라진 방향에서 다시 되돌아 온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3. 백인들의 등장(에스파냐 정복자들)
그후, 비라코차가 사라진 방향에서 희한하게 생긴 동물(즉, 말)을 타고 처음보는 무기(즉, 화승총)들고 몸이 하얀 여러명의 사람들이 나타남니다.
그들이 바로 에스파냐의 피사로일행이었습니다. 잉카사람들은 처음보는 동물들과 물건들, 그리고 그들이 몸이 하얀 백인이라는 사실에 전설의 인물들로 착각을 하였습니다. 한편 피사로는 그러한 사실을 재빨리 간파하고 스스로 전설속의 비라코차로 행세하였습니다.

4. 잉카의 멸망
잉카 황제는 아타와르파는 전설의 "비라코차"가 다시 돌아왔다는 말에 비무장의 수행원만 데리고 그것을 확인하려 피사로와 만나게 됩니다.
그때, 피사로는 신부(神父)를 앞세워 성경을 내줍니다. 그러나 말도 안통하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잉카의 황제는 그것을 땅바닥에 내던졌으며, 에스파냐군들은 하나님을 거부한 사탄들이라며 일제히 뛰어나와 비무장한 인디언들을 기습 공격합니다. 일단 황제가 사로잡히자 후위의 무장한 인디언도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였으며 에스파냐군은 짧은 시간에 단 한 명의 병력손실도 없이 잉카 제국을 정복하게 됩니다. 이후 인디언들은 저항을 하지만 사실상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잉카 제국의 멸망
에스파냐의 피사로, 잉카 정복(1533년)

  1531년 에스파냐 인 피사로는 186명의 병사를 이끌고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의 고원지대에 자리잡은 잉카 제국에 도착했다. 


  그는 제국에 일격을 가하고 황제를 체포, 감금해버렸다. 그리고 우상숭배, 근친결혼, 일부다처를 했다는 죄명으로 황제에게 화형을 선고했다. 잉카 인들은 화형당하면 영혼이 사멸한다고 믿고 있으므로, 황제는 피사로에게 간청하여 기독교로 개종하고 교수형을 당했다.

 

  피사로가 잉카 제국을 완전히 정복한 것은 1533년의 일이다. 이보다 앞서 에스파냐의 코르테즈가 멕시코의 아즈테크를 정복했다. 그의 정복활동은 1519년에 시작되어 1521년 끝이 났다. 코르테즈와 피사로가 이처럼 쉽게 정복에 성공한 것은 총과 기마술 덕분이었다. 특히 총의 위력은 대단해서 원주민들은 불을 뿜는 총구 아래 힘없이 쓰러져갔다. 


  기원전 8천년경 아메리카에서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유럽과 아시아가 각각 독자적인 고대문명을 발달시켰듯이 아메리카에서도 독특한  문명이 일어났다. 중앙 아메리카 멕시코 고원의 마야 문명,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의 잉카 문명이 그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은 몽고족이다. 몽고족의 일파가 시베리아를 거쳐 베링 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들어갔으며, 차츰 남쪽으로 내려가 남아메리카 남단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살게 된 것이다.


  6세기경 중앙 아메리카의 유카탄 반도에 마야 제국이 세워졌다. 주인공은 마야 족, 이들은 화려한 궁전과 장대한 규모의 신전을 짓고,  토기와 금, 음, 동으로 된 세공품을  만들어 썼다. 복잡한 문양으로 건물을 장식하고 조각에도 능했다.  또 상형문자를 만들어 쓰고 달력을 만들어 농사에 활요했다. 마야 문명의 수준은 오리엔트 문명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으며, 10세기경까지 번영을 구가했다.


  마야 족의 뒤를 이어 문명의  꽃을 피운 것은 톨테크 족이었다.  이들은 멕시코 계곡에 살면서 마야 문명을 흡수하여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톨테크 문명을 발전시켰다.


  톨테크 문명이 쇠한 뒤 마야 문명과 톨테크 문명을 융합 발전시킨 것이 아즈테크 문명이다. 아즈테크 문명은 오리엔트 문명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신전을 짓고 태양신을 비롯, 농사와 관계깊은 비, 바람, 대지의  신과 조상신, 씨족신을 섬겼다.  농사는 옥수수가 주종이었으며, 각종 직물과 염색기술이 발달했다.


아즈테크 문명은 13세기에 시작되어 1521년 코르테즈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코르테즈가 당시 아즈테크의 인구는 약 500만에 달했다고 한다.


  잉카 제국의 문명은 안데스 산맥의 고원지대, 지금의 페루에서 일어났다. 피사로가 이곳을 점령 했을 때, 잉카 문명의 수준은 유럽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완벽한 관개시설을 갖추어 고원지대인데도  대규모 농사를 지었으며, 토목기술이  발달, 곳곳에 도로와 수로를 건설했다. 석조건축술은 정교하고 건물은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기하학적 무늬를 놓은 화려한 빛깔의 직물이  만들어졌으며 토기와 금, 은,  동기들이 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의술이 발달하여 뇌수술도 해냈다. 그러나 문자는 발명되지 않았고, 실의색과  매듭에 의해 뜻을 나타내는 퀴푸를 사용했다. 그러나 잉카 제국의 찬란한  문명도 피사로의 총 앞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메리카를 손에 넣은 에스파냐는 식민지 개발에 열을 올렸다. 식민지 개발은 원주민에게는 하루아침에 살던 땅에서 쫓겨나 백인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백인의 우수한 무장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식민지로 이주해온 백인들은 원주민의 땅을  나누어 갖고 원주민을 동원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또 광산개발에 나서 막대한 이익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 원주민들은 가혹한 강제노동과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그러자 에스파냐 국왕은  원주민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도록 하는 한편, 원주민을 보호하고 대신 아프리카 흑인들을 데려와 일을 시키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이후 에스파냐의 식민지에서는 흑인노예제가 성행했으며,  아울러 노예무역이 커다란 돈벌이로
등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