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지도자 잘못 만나면 잘 나가던 나라도 한 순간 몰락

鶴山 徐 仁 2007. 10. 15. 15:19
  • [조선 인터뷰] 미얀마 야당 ‘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 아웅 민트 쉐 회장
    “젊은 세대들 ‘왜 우리만 이 모양인가’ 불만 팽배
    노동자 일당이 1000원인데 버스 요금은 700원
    내년 올림픽 앞둔 중국, 국제 여론 무시 못할 것”
  • 인터뷰=여시동 국제부 차장대우
    • 버마 야당인 민족민주동맹(NLD) 한국 지부는 부천시 부천역 근처 주택가 골목에 있었다. 대여섯 평도 안 돼 보이는 이 옹색한 사무실에서 아웅 민트 쉐(Aung Myint Swe·47) 지부 회장을 만났다. 최근 대규모 버마 민주화 시위가 세계적인 이슈로 등장하면서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이 지부가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버마는 군사정권이 ‘미얀마’로 국호를 바꾸었지만 이번 인터뷰에서는 군사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NLD의 입장을 반영, 버마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왜 한국으로 왔나.

      “버마에 있을 때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버마와 한국은 독립 이후 정치역정이 비슷하다. 1960년대 초반에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정권이 들어섰고, 이후 힘든 민주화 항쟁들이 있었다.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한국 경험을 배우고 싶었다.”

      ―인터넷에 떠있는 시위 진압 동영상을 봤나.

      “버마에서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시위대를 진압봉으로 내려치고 군홧발로 걷어차는 군인들 만행에 새삼스럽게 분노했다. 한국이 시련을 이겨냈듯이 우리도 지금의 시련을 이겨낼 것으로 확신한다. 하지만 한국의 1980년대 군사정권에 비해 지금 버마의 군사정권은 수십 배 더 잔혹하다.”

      ―민주화 시위가 계속될 것으로 보나.

      “일단 소강 상태다. 목격자들 증언에 따르면 이번 사태로 이미 1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군부는 10여명 사망 주장). 군사정권의 강경 진압과 통신 수단 차단으로 시위대가 잠시 흩어졌지만 조만간 다시 결집할 것이다.”

    • ▲ 아웅 민트 쉐 버마 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회장이 부천시 심곡동 사무실에서 버마 민주화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 ―이번 시위는 정부의 에너지 가격 인상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한다면?

      “군부가 지난 1988년 정권을 탈취할 때부터 국민들은 정부를 반대해 왔다. 특히 외국 실정을 잘 아는 젊은 세대 사이엔 “왜 우리만 이 모양인가”라는 불만이 팽배해 있다. 육체노동자 일당이 한국 돈으로 1000원 정도인데 버스 요금은 500~700원이다. 이래가지고 먹고 살 수 있겠나?”

      ―버마는 1960년대만 해도 한국보다 경제 수준이 높았다. 왜 이렇게 됐나.

      “군부가 집권한 1962년 이전까지 버마는 아시아 지역에서 잘사는 편이었다. 한국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나오기 44년 전인 1962년에 이미 유엔 사무총장(우탄트)을 배출한 나라가 버마다. 나라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쿠데타로 집권한 네윈(Ne Win)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경제 자유를 억압하고 자원을 팔아 계속 무기를 사들였기 때문이다. 국가 예산의 60%가 무기 사는 데 들어갔으니 경제가 온전하겠는가. 국가 사업은 군인과 그 친척들이 다 나눠 먹었다. 국가 지도자를 한 번 잘못 만나면 잘 나가던 국가가 한순간에 몰락할 수 있다. 버마의 비극은 지도자의 형편 없는 리더십에서 비롯됐다.”

      ―1960년대엔 후진국에서 군사 쿠데타가 드물지 않았지만 버마는 군부 통치 상황이 오래가는 것 같다. 국민들의 저항이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 국내에서 끊임없는 저항이 있었다. 1988년 8월 8일을 뜻하는 소위 ‘8888’ 대시위 외에도 1962년 학생 시위를 비롯해 1974년과 75년, 92년, 2003년 등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다만 군부 탄압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했을 뿐이다. 시위 때마다 수백 명씩 희생자가 나왔다. 언젠가 NLD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Suu Kyi) 여사가 지방을 다닐 때 군부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칼로 그를 찌르려 하자 수치 지지자들이 번갈아 가며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들은 기꺼이 대신 칼에 찔려 쓰러졌다.”

      ―군사정권이 1989년에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어 유엔 승인을 받았다. ‘버마’와 ‘미얀마’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버마’라는 말은 원래 버마족이라는 민족 이름에서 연유했다. 과거 왕조시대 때부터 버마족 출신 왕이 주로 다스렸기 때문에 외부에 국호가 버마로 알려지게 됐다. 버마에는 버마족 외에 샨족, 카렌족, 몬족 등 소수 민족들이 많기 때문에 국호를 특정 민족 이름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국호를 바꾼 건 1988년 시위가 ‘버마 시위’라는 이름으로 국제 사회에 널리 알려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군사정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버마’를 고수한다. ‘미얀마’라는 말은 ‘빠르다(fast)’는 뜻의 ‘미얀’과 ‘강하다(strong)’는 뜻의 ‘마’가 합쳐진 말인데, 버마 국내에서 여러 민족이 함께 있을 때는 국호로 쓰기도 한다.”

      ―버마 민주화운동 하면 아웅산 수치 여사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수치 여사가 NLD 사무총장이기 때문에 민주화 세력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윈틴(U Win Tin) 등 다른 지도자들도 많다. NLD 중앙위원인 우윈틴은 수치 여사를 민주화 투쟁에 입문시킨 민주화운동의 대부(代父) 같은 존재다. 1989년부터 지금까지 감옥에 갇혀 있지만 일반인들의 존경심은 대단하다.”

      ―현 정권은 집권 명분으로 국가 통일 유지와 불교 전통 수호를 내세우고 있는데(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어이없다’는 실소가 터져 나옴).

      “군부는 그렇게 얘기할지 모른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말이다. 국가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바로 군부다. 또 불교 전통을 유지한다는 주장은 정권 유지 차원에서 사찰에 가식적인 지원을 하면서 생색을 내는 말이다.”

      ―버마의 민주화는 버마인들의 노력과 함께 국제적 지원이 없으면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맞는 말이다. 특히 인접한 중국은 오랫동안 버마 군정과 무기 거래 및 경제 교류를 하면서 돈독한 후원 세력으로 행세해 왔다. 중국 입장에서는 버마가 민주화되면 친(親)서방 국가로 변하고 중국 반체제 인사들이 버마에 근거지를 만들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년 올림픽 개최를 앞둔 중국 정부가 국제 여론을 계속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족들은 어떤가. 고단한 삶을 원망하지 않는가.

      “아내와 아들(17), 딸(15)은 버마에 남아 있다. 나는 지방 공무원으로 있다가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면서 결혼 전에 내 결심을 아내에게 알렸다. 가족들은 위험하고도 힘든 삶을 감내할 의지가 있다. 1998년 한국으로 건너온 뒤 한 번도 가족을 만나지 못했지만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망명신청을 받아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 민주화된 조국에 돌아가 한국식 발전 모델을 실험해보고 싶다.”

       

    • 아웅 민 스위 버마 NLD한국지부회장이 버마 민주화운동의 뿌리와 버마 군부독재가 왜 없어져야 하는지 이야기 하고있습니다. /전기병 기자

    • 아웅 민트 쉐는 누구

      -1960년 버마 양곤 인근 톤과시(市) 출생

      -1988 톤과시 행정관으로 있다가 군정 부패 비판하며 민주화 운동 투신

      -1998년 한국 입국

      -1999년 NLD 한국지부 창설, 한국지부 회장

      -2003년 한국 망명 승인 받음

      -2003년~현재 태국, 일본, 호주 등 방문해 해외민주세력 연대 활동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0/07/200710070063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