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고을 안동은 알아도, 예천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예천은 널리 알려진 관광지가 아니다. 그래서 깨끗하고, 조용하다. 소백산 자락에 자리한 작은 도시는 한적한 전원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예천은 단정하다. 조신한 아낙의 한복 고름을 닮았다. 소백산맥 끝자락에 자리해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산들은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둥글둥글한 경주 산의 여성스러운 느낌에 비해, 예천 산의 자태는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둥근 봉우리와 뾰족한 봉우리가 어우러져 조화롭다. 울창한 소나무 숲은 포근하면서도, 양반의 기개가 느껴진다. 물이 맑은 고장 예천, 첫 번째 행선지는 회룡포다.
산에 이르니 번뇌가 쉬어지는구나 하물며 고승 지도림을 만났음이랴. 긴 칼 차고 멀리 나갈 때는 나그네의 마음이더니 한 잔 차 로 서로 웃으니 고인의 마음일세. 맑게 갠 절 북쪽에는 시내의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지는 성 서쪽 대나무 숲에는 안개가 깊구려. 병 으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졸음만 오고 옛동산 소나무와 국화는 꿈 속에서 잦아드네. - ‘장안사에서’,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가 장안사에 머무르며 지은 시다. 회룡포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산 중턱 회룡대에 그의 시가 걸려 있다. 땀을 식히며 느끼는 옛 시인의 정취는 유서 깊은 회룡포의 역사를 상상하게 한다. 원래 이름은 ‘의성포’였다. 조선조에 귀양지로 되었던 것을 고종 때 의성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의성포’로 하였다고도 하고, 1975년 큰 홍수가 났을 때 의성에서 소금 실은 배가 이곳에 와서 ‘의성포’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사람들이 경북 의성군으로 착각할까 봐, ‘회룡포’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예천군 용궁면에 자리한 회룡포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비상하는 용처럼 마을을 휘감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높이 190m의 비룡산을 350도 되돌아서 마을을 끼고 흘러 회룡포 마을을 육지 속의 섬으로 만든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절경이다. 이규보의 시 옆에는 회룡포의 사계절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다. 동행한 문화제 해설사는 ‘심리테스트’라며 농을 건넨다. “회룡포의 사계절 중에 어떤 계절이 가장 마음에 드세요? 골라보세요.” 겨울을 골랐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전경은 소담스러웠다.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은 냉철한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된답니다. 칼럼이나 기사를 쓰는… 제대로 고르셨네요.” 봄을 좋아하는 사람은 문인(文人),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은 열정적인 사업가란다. 풍성한 수확의 계절 가을을 고른 사람은 맘씨 좋게 자신의 것을 나눠주는, 자선 사업가와 같은 직업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작은 마을을 휘감는 강은 역동적이다. 하지만 강이 그려낸 선은 여성스러운 생명력이 느껴진다. 마을을 품고 있는 강은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을 연상시킨다. “저 마을에서는 유난히 인재들이 많이 태어나는 걸로 유명해요. 예천의 양반 고을이죠.”
예천에는 진호 국제 양궁장이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인 이곳은 국제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미리 전화를 해서 체험 예약을 하면 양궁선수 출신의 강사에게 간단한 지도를 받고 직접 활을 쏴볼 수 있다. 양궁 체험은 무료다. 3m, 5m 거리의 과녁으로 선수들처럼 먼 거리는 아니지만 양궁의 맛을 느껴보는 데는 손색이 없다. 화살을 걸고 활을 당기고 숨을 고르고 시위를 놓는 순간의 정적과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노란 과녁에 명중했을 때의 쾌감을 직접 느낄 수 있다. 양궁장을 찾은 날은 마침 예천군 소속의 장용호 선수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장용호 선수는 지난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의 양궁 단체전 우승의 주역이다. “하루에 2백~3백 발 정도를 매일 쏩니다. 6월 중순에 대회가 있어서 컨디션을 조절하고 있어요. 마음먹은 대로 화살이 날아갈 때가 가장 기분이 좋습니다. 여러분들도 체험하시면 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예천읍 청복리에 자리한 장승마을에서는 장승을 직접 깎아볼 수 있다. 장승마을 주인 김수호씨는 10년째 예천에서 장승을 깎고 있다.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장승 공원, 스페인 대사관, 영화 ‘극락도’의 장승들이 그의 작품이다. 장승마을에는 그가 현재 작업 중인 미완의 장승들이 누워 있다. 장승들의 근엄하고 무서운 표정은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 입구에는 그의 작품과 손님들이 체험하며 직접 깎은 장승이 함께 서 있다. 예천군 감천면에 자리한 신라 식물원에서는 직접 화분을 만들 수 있다. 네모난 유리 화분에 석탄볼과 갖가지 색깔의 돌을 깔고 마음에 드는 화초를 골라 묻는다. 식물을 직접 손으로 느껴보고 화분을 만드는 체험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연의 소중함을, 그리고 손수 식물을 기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준다. 특히 이곳은 주인 부부가 손수 가꾼 공간이라는 점이 자연스럽다. 집도 손수 짓고 나무도 손수 심었다. 정원에는 관상용 닭들이 뛰어다닌다. 안쪽에는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할 수 있는 빈터도 마련돼 있다. 더운 여름날 주인 내외가 내오는 시원한 오미자차의 향이 유난히 짙다. “식구가 늘어나니 집도 점점 커졌어요. 처음에 부부가 살 때는 방 한 칸이었죠. 아이가 태어나면서 방을 한 칸 더 만들고…. 이곳의 모든 것은 다 제가 손수 만든 겁니다.” 신라 식물원은 간판이 없다. 그래서 아는 사람만 찾아온다. 그리고 한 번 찾은 손님들은 꼭 그곳을 다시 찾는다. 주인 내외의 사람 좋은 미소에 손님의 마음도 넉넉해진다. “소풍 오시는 기분으로 들렀다 가세요. 먹을 것은 가지고 오시고요. 저희가 라면은 끓여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차는 얼마든지 리필해드립니다.” 예천 ‘별’ 천문대는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인상 깊은 장소다. 과학책이나 TV에서만 봐오던 별들을 직접 망원경으로 관찰할 수 있다. 천문대 공원 내에는 숙박 시설이 있어 예천 관광의 포스트로 삼기에도 손색이 없다. 진호 국제 양궁장과 회룡포도 가깝다(자가용으로 10분 정도 소요). 문경새제, KBS 드라마 촬영장, 석탄 박물관도 천문대에서 20~30분이면 갈 수 있다. 천체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무중력 체험도 가능하다.
친환경 도시인 예천은 지금 ‘2007 예천 곤충 바이오 엑스포’ 준비가 한창이다. 곤충 바이오산업은 농가 소득을 증대하는 중요한 수단임과 동시에 예천의 소중한 관광자원이다. 미리 방문한 엑스포 행사장은 준비가 한창이었다. 새 건물을 단장하고 가족들이 어울릴 수 있는 공원을 꾸미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엑스포 행사장 주변에는 내천이 흐른다. 물이 맑은 고장 예천다운 맑은 물이다. 새로 지어진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니, 투명한 물속으로 내천 바닥의 돌들이 보인다. 8월 11일부터 22일까지 열리는 엑스포 행사 기간에는 관광객이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곤충을 손으로 만져보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전무하다. 방아깨비, 귀뚜라미, 소금쟁이, 메뚜기 등의 곤충은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다. 예천 곤충 엑스포에서는 교과서에 수록된 9가지 대표적인 곤충들을 비롯해 장수하늘소, 사슴벌레 등 수십여 종의 곤충을 직접 보고 만져볼 수 있다. 예천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도드라지는 전원도시다. 나무가 좋고, 산이 좋으니 물이 맑은 것은 당연하다. 1박 2일의 짧은 여정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마음은 두 갈래였다.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풍성한 예천이 한층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언제나 도시 사람들의 손때가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또 하나였다. “제가 자동판매기 커피 한잔 사드리겠습니다. 여기가 용궁 아니겠습니까. 예부터 지상낙원을 두고 용궁이라고 했습니다. 물 맑은 고장 예천 회룡포에서 맑은 물로 만든 커피를 마시니 이제 운수대통, 만사형통 하실 겁니다. 하하하.” 회룡포를 보고 내려오는 길, 문화재 해설사 할아버지가 자판기 커피 한 잔을 권했다. 예천은 지상 낙원이라고 할 만큼 화려한 곳은 아니다. 소박하고 아담한 자연이 정겨운 전원도시다. 하지만 산 좋고, 물 좋고, 사람 좋으니 어쩔 수 없었다. 지상낙원이라는 말도, 운수 대통하라는 덕담도, 믿을 수밖에. |
'대한민국 探訪'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악산의 4계절 (0) | 2007.08.09 |
---|---|
5억년간 곰실곰실 자라난 대금굴 (0) | 2007.08.09 |
불볕더위야 물러가라, 몽계폭포가 있다. (0) | 2007.08.05 |
강원도 3대동굴 기행 (0) | 2007.08.05 |
충청도의 방조제도배 해안을 아시나요? (0) | 2007.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