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사적순례(史跡 巡禮)

鶴山 徐 仁 2007. 6. 6. 23:53

 
史跡 1호  경주 포석정지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
 
 史跡 2호  水原 華城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과학기를 이용하여 실용적으로 쌓았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史跡 14호  부여 능산리 고분군
 
 
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史跡 18호  경주 임해전지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史跡 20호  신라 무열왕릉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史跡 21호  김유신 묘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 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史跡 41호  경주 황오리 고분군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70여 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10여 기의 무덤이 흩어져 남아 있다.
 
史跡 55호  소수 서원
 
 
조선 중종 36년(1541)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史跡 73호  수로왕릉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이라고 부른다.
 
史跡 104호  황산 대첩비지
 
고려 말에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군을 무찌른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있던 자리이다.
황산대첩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유명한 싸움으로,
당시의 승리 사실을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10년(1577)에 대첩비를 세우게 되었다.
 
史跡 105호  칠백 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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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1592)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명의 병사들을 위한 무덤과 사당이다.
조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 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그들이 전사한 후 조헌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칠백의총이다.
 
 史跡 112호  이충무공 묘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무덤이다.  
아산군 금성산에 무덤를 만들었다가 16년 후인
광해 6년(1614)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앞에는 정조 18년(1794)에 세워진 어제비(御製碑)의 비각이 있다
 
 史跡 114호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완도)
 
 
정유재란 때 (1598년)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의 군사들이
힘을 합해 왜군을 물리쳤던 장소이다.
 
 史跡 116호  해미 읍
 
해미는 태종 14년(1414)부터 효종 2년(1651)까지 군사의 중심지였는데,
이 성은 세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하여,
성종 22년(1491)에 완성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 1,000여 명을 처형시켰던 곳으로,
김대건 신부도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천주교인을 처형한 회화나무와 사형대 등이 남아 있는데,
이 회화나무에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서 고문을 하였으며,
그 흔적으로 지금도 철사줄이 박혀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읍성으로는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어
 대표적인 표본이 되며,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지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유적이다.
 
史跡 118호  진주성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聖地)이다.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230호  유관순열사 유적
 
 
 3·1운동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유적으로,
생가와 매봉교회, 유적비 그리고 봉화를 올렸던 봉화터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가문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6년에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시위에 참가하였고,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에 시위운동을 벌여
열사의 부모를 비롯하여 19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유열사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20년 10월에 순국하였다.
시신은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무덤을 잃어버렸다.
 
 303호  남원 광한루원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각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한후 ‘광한루’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를 건립하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춘향제가 열린다.
 
 272호  남원 만인 의총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가전사한 사람들을 함께 묻은 무덤이다.
왜군은 임진왜란때 전라도지방을 차지하지 못해서 결국 패했다고 생각하여,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선조 30년(1597) 7월말 왜군 11만명이 황석산성과 남원을 공격하였다.
남원은 지역적으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
국가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왜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남원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만 여명의 관리와 군사, 백성이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이후 전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한곳에 합장하였으며
광해군 4년(1612) 충렬사를 세워 8충신을 제향 하였다.
처음 이 무덤은 남원역 부근에 있었으나 민가에 둘러싸이게 되어
1964년 현재 자리로 이전하였다
 
 158호  문무대왕 릉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134호  제주 삼성혈
 삼성혈은 제주도의 고씨·양씨·부씨의 시조가 솟아났다는
3개의 구멍을 말한다
3시조들은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사냥해 먹고 살다가,
다섯 곡식의 씨와 송아지·망아지를 가지고 온 벽랑국의 세 공주와
각각 결혼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구멍은 품(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하나만 바다와 통하고 나머지는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 중종 21년(1526)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과 비석을 세우고,
주위에 울타리를 쌓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380호  제주 목관아지
 관아란 벼슬을 가진 사람들이 일을 보던 건물로서 제주목 관아터는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였다.
관아터 남서쪽에는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 세종 30년(1448)에 세운 관덕정(보물 제322호)이 있다
 
 135호 부여 궁남지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383호  논산 돈암서원
 김장생(1548∼1631)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1년(1633)에 건립한 서원이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139호  김포 문수산성
 갑곶진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키던 조선시대의 성이다.
조선 숙종 20년(1694)에 돌을 이용해 쌓은 석축산성으로
순조 12년(1812)에 고쳐 쌓았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이다.
 
 147호  문경 관문 (제1,제2,제3관문 및 부속성벽)
 
 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이다.
이곳은 고려 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로로 자리잡았다.
조선 선조 2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시의 군사와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장군은
조령에서 왜군을 막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왜병을 맞서 싸우다가 패하고 말았다.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개의 관문을 완성했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문을 조동문 혹은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한다.
현재의 시설은 페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155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
 
 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현충사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사당을 세우고,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그 뒤 200년간 사당을 잘 운영해 오다가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하였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사업을 마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170호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172호 신라 오릉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182호  신라 선덕여왕릉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다.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등을 세웠으며,
김유신, 김춘추와 더불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191호  고려 공양왕릉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재위 1389∼1392)과
그의 부인 순비 노씨의 무덤이다
공양왕은 이성계 등에 의해서 즉위한 이름뿐인 왕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원주로 추방 되었다가 태조 3년(1394)에
삼척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태종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229호 매헌윤봉길의사 사적지
 윤봉길의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사적지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집과 성장한 집이 따로 있는데,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라 하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집은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저韓堂)이라 한다.
 
 231호  홍성 홍주성(조양문,아문,산성)
 
충남 홍성군에 있는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와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아문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며
‘홍주아문’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일이 있다.
 
232호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노량해전으로 더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선조 31년(1598)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이 도망가는
왜적들을 무찌르다 관음포 앞바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 이 때 이순신 장군은 적의 탄환에 맞아 최후를 마쳤다.
이에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부르며, 마주보는 해안에는 이락사가 있다
그 후 순조 32년(1832)에 왕명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단과 비, 비각을 세웠다
1965년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인 ‘대성운해(大星殞海)’와
‘이락사’라는 액자를 경내에 걸었다.
 
 244호  연천 신라 경순왕릉
 신라 56대 마지막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264호  단양 온달산성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이미 성산성이란 이름으로 있었던 기록이 있다.
 
293호  전봉준선생 고택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전봉준은 조선 고종 27년(1890)인
30세 때 동학에 몸을 담아,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리들의 횡포에 맞서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조직해 동학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옛집은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302호  순천시 낙안읍성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낙안 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 중 하나이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308호  완도 청해진 유적
 청해진은 신라 흥덕왕 3년(828) 장보고가 설치한 해군기지이자
무역기지로,전라남도 완도 앞바다의 작은섬인 장도에 있다
당시 이곳은 신라와 당,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장보고(?∼846)는 평민 출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장군이 되었으나
해적들이 신라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것에 분개하여
신라에 돌아와왕의 허락을 받고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은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번영을 누리며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장보고는 왕위계승과 관련된 권력다툼에 휘말려
자객 염장에 의해 846년 암살당하였고,
문성왕 13년(851)에 청해진은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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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跡 10호  서울 성곽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史跡 56호  행주 산성
 임진왜란(1592)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 형식과 같다.
 한편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선조 26년(1593)에 왜병과의 전투에서 성 안의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현재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남아 있으며
권율 장군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다.
 
 史跡 57호  남한 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史跡 11호  송파 풍납리 토성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史跡 101호 서울 송파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史跡 330호  효창공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는 곳이다.
원래는 효창원으로, 정조의 큰 아들인 문효세자·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숙의 박씨의 자녀인 영온공주의 무덤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문효세자의 묘를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면서 효창원은 효창공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김구·이동녕·차이석·이봉창·윤봉길·조성환·안중근을 비롯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무덤를 모시게 되었으며,
매년 이 분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무덤지역이 넓고
소나무숲이 울창하며, 무덤 주위로 산책로가 있다.
 
史跡 267호  서울 암사동 선사주거지
 아차산성을 마주하는 한강변에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B·C 4,000∼3,000년기에 걸친 유적이다.
20여 기의 집터와 딸린시설, 돌무지시설이 드러났다.
. 바닥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가 많이 나왔으며 돌도끼,
그물추, 불에 탄 도토리 등이 출토되었다.
한강유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이며,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중 최대의
마을단위 유적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당시 생활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신석기인의 문화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史跡 162호  북한산 성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로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史跡 193호  동구릉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과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史跡 194호  헌릉·인릉
 헌릉은 조선 3대 태종(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무덤이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서 아버지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웠다
인릉은 23대 순조대왕(재위 1800∼1834)과
순원왕후 김씨(1789∼1857)의 무덤이다.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대신 정치를 돌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외척에 의한 정치가 극에 달하였으며, 사회가 혼란해졌다
 
 史跡 209호  남양주시 사릉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史跡 297호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약 2.7㎞ 되는 백제 전기의 토성이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성벽을 쌓고,
나무 울타리로 목책을 세웠던 흔적도 확인되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만들기도 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도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문터와 집자리,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되었고,
출토유물로는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과
여러 종류의 토기류, 철제 무기류 등이 나왔다.
특히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은 중국 서진(265∼316)대의
유물이어서 시대 확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백제의 도성인 위례성이라는 견해와 방어용 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위치·규모·출토유물로 볼 때 백제 초기 군사적·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유적이며,
주변에 풍납토성과 백제 석촌동 무덤들을 비롯한 백제 전기의
유적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있는 곳이다
 
史跡 132호 강화 산성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 그리고 관아 시설은 1234년에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어,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 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史跡  133호  강화 고려궁지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史跡 136호  강화 참성단
 마니산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한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참성단이 과연 단군의 제천단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강화도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고,
단군과 연관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상고시대에 무시못할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史跡 225호  강화 초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왜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史跡 227호  강화 광성보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史跡 323호  파주 윤관장군묘
 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관(?∼1111)의 무덤이다.
그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史跡 358호  파주 소령원
 
 조선 19대 숙종(재위 1674∼1720)의 후궁이며 21대 영조(재위 1724∼1776)의
어머니인 숙빈최씨의 무덤이다.
숙빈최씨는 최효원의 딸이며 숙종 44년(1718)에 49세로 죽었다.
효심이 지극했던 영조는 최씨의 무덤 근처에다 막을 짓고
무덤를 받들었으며, 친필 비(碑)와 비각을 4곳에 세웠다.
위패는 조선시대 역대왕이나 추존된 왕의 생모인 7명의 후궁을 모신
칠궁(七宮)중 육상궁에 모셨다.
 
  史跡 299호  경기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3·1운동때 일제가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현장이다.
3월 10일경에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그 후 4월 5일에 발안 장날을 기하여 교회 청년들과 시장에 모인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고 시가 행진을 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사격과 매질을 가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는데,
격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져 경찰부장을 죽이게 되었다.
4월 15일 일본군은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한 후,
출입문과 창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제히 집중사격을 했다.
또 교회당 밖으로 시체를 끌어다 모아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불을 질렀다.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다니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마구 칼로 찔러 죽였다.
1982년 제암리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의 증언으로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23위의 유해와 희생자들의 조끼단추, 동전, 못, 병들이
함께 출토되어 이곳에 표석을 세우고 합동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불탄 예배당터에는 순국기념탑을 세우고,
국·내외 관계자료를 모아 기념관에 전시해
국민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Nam T.S - Le Temps Du Ne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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