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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자리 | |
내 주변엔 ‘욱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 꽤 많다. 욱하는 기운이 나를 향해 쏟아질 땐 열대지방에서 내리는 세찬 소나기 ‘스콜’을 맞는 기분이다. 갑자기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기세도, 비가 그친 후 시원해지는 느낌도 어째 비슷하다.
최근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욱하는 면모’를 보여준 사람은 정부의 한 고위관리였다. 평소 차분하게 브리핑을 잘하는, 아주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내가 취재하고 있던 어떤 문제 때문에 ‘확’ 돌았다.
다행히 현장에서 맞부딪치지는 않았다. 그의 분노는 수화기를 통해 왈칵왈칵 쏟아져 나왔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고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다시 안 볼 사이도 아닌데 어쩌나. 사정을 잘 알아보지도 않고 격분해서 저렇게 할 말 안 할 말 다하고 나면 나중에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나는 불운하게도 길거리에서 그와 마주쳤다. 난감해 하고 있는데 그는 개운한 표정으로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아, 그렇다. 그는 소위 ‘뒤끝 없는 성격’의 소유자다. 화낼 때는 화끈하게, 하지만 돌아서면 곧 잊어버리고 만다.
그와 아무렇지도 않게 한참 이야기하다가 돌아서면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감정을 폭발시킨 후 수습할 일을 걱정하는 것은 나처럼 욱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그는 실컷 터뜨렸으므로 이제 잊어버렸다. 시원하겠다 싶어서 그 욱하는 성격이 부럽기까지 했다.
한국 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던 일본인 친구가 늘 ‘욱하는 한국인’이 놀랍다고 했다.
“일본 사람들은 벼르고 벼르다가 참을 수 없을 때 싸워요. 싸울 때는 인간관계를 끝낼 각오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직장에서 낮에 그렇게 죽일 듯이 싸우다가 저녁 때는 하하 웃으면서 같이 술 마시고 푸는 것을 보면 기적 같다니까요.”
자기 마음 짚어서 남의 마음이라고, 다들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니까 성격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실 나는 늘 ‘욱하지 못하는 소수’에 속한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우연한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욱하는 사람들에게 황당하게 당하는 사람들의 비밀결사’를 조직할 뻔했다.
그날 화제는 공교롭게도 ‘욱하는 성격’이었다. 말이 별로 없는 후배가 불쑥 “선배, 나는 뒤끝 없다는 사람들이 싫어요”라고 말한 후 갑자기 봇물 터지듯 하소연이 시작됐다. 평소 조용하던 사람들이 당당하게 “내가 좀 꽁한 데가 있어서”라든지, “나는 뒤끝이 있어서”라는 식으로 ‘사회적으로 지탄 받는’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면서 욱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괴로움을 털어놓았다.
이렇게 피해자(?)가 많은데도 왜 그 ‘뒤끝 없다’는 성격은 긍정적으로 인정 받는 것일까. 그것은 외향적인 사람이 내성적인 사람보다 세 배쯤 많아 세상이 외향적인 사람들 중심으로 굴러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얼마 전 ‘내성적인 사람들이 성공한다’는 책을 보니, 외향적인 성격은 ‘넓이’의 인생을 만들고 내성적인 성격은 ‘깊이’의 인생을 만든다고 한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다양한 경험을 하며 넓게 살아가는 반면, 조용한 사람들은 작은 경험을 되새김질하며 깊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욱하는 인간의 전형인 내 친구는 “우리같이 막 화내는 사람들은 너처럼 몇 달 전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글까지 쓰는 인간들이 더 무서워”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당장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지금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걸 표현하는 시기와 방법이 다를 뿐이다. 스콜처럼 쏟아지느냐, 이슬비처럼 내리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내리는 비의 양은 같다. 결국 내가 모르는 다른 성격의 세계를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요즘 나는 누가 스콜의 기세로 무섭게 욱해도 ‘시원하겠다’ 생각하고 잊어버린다. 역시 아는 것이 힘이다.
강인선 논설위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