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에 세계대전이 있었다고 말하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몽골-기독교-이슬람 사이의 三角 전쟁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몽골고원을 통일한 뒤 몽골군대가 西征을 시작하였다. 全員이 騎兵인 몽골군대는 중앙아시아와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을 차례로 점령하고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쳐들어가 기독교 국가들을 짓밟았다.
한편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敎皇의 지시에 따라 예루살렘 부근을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십자군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교황은 몽골군대와 손을 잡고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려고도 했다.
사진 : 다마스쿠스에 있는 이슬람 문화권의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큰 大모스크. 서기 700년경에 만들어졌다. 이 모스크를 지은 움마야드 왕조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고 100년도 안된 기간에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걸친 이슬람 대제국을 건설했다. 압바시드 왕조는 이 움마야드 왕조를 무너뜨리고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겼다. 그 뒤 500년간 바그다드는 이슬람 세계의 로마였다. 서기 1258년 바그다드는 몽골군에 유린되고 도서관은 불타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바그다드는 이 타격에서 영원히 회복할 수 없게 된다.
유럽으로 쳐들어간 몽골군대는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 바투가 지휘했다. 중동의 이슬람 세계로 몰려든 군대는 몽골제국의 네 번째 황제 몽케 칸(칭기즈칸의 막내 아들 툴루이의 아들)의 동생 훌레구였다.
당시 이슬람 세계의 중심은 바그다드였다. 이슬람은 사우디 아라비아 사막에서 발상하여 삽시간에 유럽, 중동, 아프리카의 3대륙으로 퍼져갔다. 이 대팽창을 지도한 것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정한 움마야드 왕조였다. 서기 751년 압바시드 왕조가 움마야드 왕조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겼다. 그 뒤 500년간 바그다드는 이슬람 문명권의 수도 역할을 하면서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웠다.
이 바그다드가 훌레구의 몽골군대 말발굽에 짓밟힌 것이 1258년이었다. 몽골군의 바그다드 점령과 파괴는 샤머니즘을 믿는 야성적인 몽골군대에 의한 이슬람 문명의 정복이란 상징성을 띤다. 이는 세계사의 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사진 : 요르단에 있는 페트라. 바위 산 사이의 협로를 빠져나오면 바위를 파들어가서 만든 신전이 나타난다. 요르단에선 이곳을 세계新7大불가사의
로 지정받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몽골군대는 이곳 주변까지 진출했다. 페트라의 신전을 만든 사람들은 서기 2~3세기경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곳을 무역로의 중계지로 발전시켰다.
몽케 칸은 동생 훌레구에게 약30만 명의 군대를 주었다. 몽골군의 세계정복 역사상 최대의 兵力이었다. 몽케 칸은 훌레구에게 바드다드를 공격할 때 칼리프(이슬람교의 교황인 존재)가 항복하면 살려주라고 지시했다. 당시 압바시드 왕조는 지금의 이라크와 이란 일부만 지배할 정도로 힘이 빠져 있었으나 바그다드는 이슬람 문화권의 정신적 중심이었다. 중세에 로마 교황의 힘은 로마 주변밖에 미치지 않았으나 바티칸이 全기독교의 정신적 수도였던 점과 비슷하다.
바드다드 칼리프는 항복을 촉구하는 훌레구의 최후통첩을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특별한 抗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알라 神이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몽골군대는 바그다드를 간단하게 점령했다. 약탈과 학살이 시작되었다. 2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바그다드 도서관의 古書들은 불태워지거나 티그리스 강으로 던져졌다. 인류의 지혜를 담은 고문서의 잉크가 강물에 풀려 검게 변했다. 훌레구는 칼리프를 융단에 둘둘 말아 그 위로 말이 짓밟고 지나가게 하여 죽였다.
몽골군대는 바그다드와 그 주변의 灌漑(관개)시설도 파괴했다. 수천년간 발전된 관개시설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지탱한 농업시설이 파괴된 뒤에도 재건되지 못했다. 몽골군이 재건할 人力을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그다드는 이 파괴로부터 영원히 회복할 수 없었다.
훌레구의 몽골군은 여세를 몰아 중동으로 쳐들어갔다. 1258년 몽골군은 다마스쿠스를 비롯하여 지금의 시리아, 이스라엘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훌레구는 카이로를 수도로 하여 이 지역을 다스리던 맘루크 왕조의 술탄(이슬람 국가의 왕) 쿠투즈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최후통첩문에서 훌레구 칸은 “우리는 눈물이나 후회 따위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집단이다”고 했다.
사진 : 요르단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死海. 해발 마이너스 400m로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염분이 약30%나 되어 사람이 둥둥 뜬다. 마시거나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아프다. 몽골군대는 이곳까지 진출했으나 맘루크의 중기병한테 졌다.
맘루크는 지금의 러시아 남부 평원지대에 살던 투르크 계통의 騎馬전사 집단이다. 이들은 말 달리고 활을 쏘면서 싸우는 데는 몽골군에 못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집트의 아유비드 王朝는 노예상인들로부터 이 투르크 騎馬전사들을 수입하여 맘루크 부대를 만들었다. 그들은 십자군을 상대로 잘 싸웠다. 아유비드 王朝내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나자 맘루크 부대의 지휘관이던 쿠투즈가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면서 맘루크 왕조가 탄생했던 것이다.
쿠투즈는 처음엔 훌레구에게 항복할까 생각했으나 민심이 抗戰 쪽이었다. 그는 몽골 사신들을 죽이고, 다마스쿠스가 함락될 때 탈출했던 맘루크 장군 바이바르를 사령관으로 삼아 훌레구에 저항하기로 했다.
바햐흐로 몽골군과 이슬람 군대의 결전이 벌어질 상황이었다. 맘루크만 무너지면 이슬람 세계는 완전히 몽골 지배하에 들어간다. 이때 우연한 사건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
1259년 宋을 공격하던 제4대 몽골 칸 몽케가 戰死한 것이다. 페르샤(지금의 이란)에 있던 훌레구는 본국의 왕위계승 과정에 참여하기 위하여 大軍을 이끌고 귀환하였다. 부하 키부카에게 약2만 명의 병력만 맡겨놓았다. 키부카가 지휘하는 2만의 몽골 輕騎兵과 쿠투즈와 바이바르가 지휘하는 2만의 맘루크 重騎兵은 지금의 이스라엘 가자 지구 부근에 있는 아인 잘루트에서 결전했다.
두 군대는 서로의 전술에 밝았다. 인종적으로는 몽골-투르크의 형제관계였고 기마전술에 도통한 戰士들이었다. 처음에는 맘루크가 불리했으나 쿠투즈가 투구를 벗어던지고 “이슬람이여!”라고 외치며 선두에서 돌진하자 전세가 逆轉되었다. 몽골군은 패배하고 키부카 장군은 붙들려와서 처형되었다. 몽골군의 西進을 저지한 이 전투는 이집트와 이라크 일대의 이슬람 문명권을 수호했다. 맘루크는 같은 해 지금의 시리아 홈스에서도 몽골군을 무찔렀다.
몽골군은 이런 패배를 당하면 반드시 복수전을 펼친다. 페르샤에 본부를 둔 일칸국의 몽골군대는 1281년, 1299년, 1300년, 1301년 네 차례 시리아로 쳐들어왔으나 맘루크 군대는 이들을 패퇴시켰다.
사진 : 요르단의 페트라.
아인 잘루트의 승리를 이끈 쿠투즈 술탄은 歸路에 부하 사령관 바이바르에 의해 암살되었다. 바이바르도 물론 맘루크 奴隸戰士 출신이었다. 술탄이 된 바이바르는 맘루크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한 영웅이었다. 그는 몽골군대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땅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던 십자군을 몰아내는 전쟁에서도 이겼다.
바이바르는 이때 의외의 동맹국을 찾아냈다. 그때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의 동생 베르케는 지금의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킵착칸국, 또는 영어로 골든 호르데, 즉 金帳國으로 불린 이 나라는 약250년간 러시아를 통치하게 된다. 베르케는 어머니를 따라 이슬람 교도가 되었다. 베르케는 사촌형제 사이인 훌레구가 이슬람의 정신적 중심인 바그다드를 무자비하게 파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개했다.
그는 사신을 보내 바이바르 술탄의 맘루크 제국과 동맹했다. 이 동맹엔 이슬람이란 공통분모 외에 중요한 점이 배경에 있었다. 맘루크의 노예戰士들은 고향이 킵착지역이었다. 지금의 러시아 남쪽 초원지대이다. 베르케 칸은 킵착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투르크 騎馬戰士들을 모아 이집트를 본거지로 삼고 있던 맘루크로 계속해서 보내주었다. 뿐만 아니었다. 陽動작전도 해주었다.
베르케는 사촌형제인 훌레구가 맘루크를 치려고 하면 훌레구의 일칸국을 침범하여 병력을 분산시켜주었다. 화가 난 훌레구는 일칸국의 군대를 킵착칸국이 지배하던 코카사스 지방으로 원정 보냈다. 1263년의 일이었다. 이 원정에서 훌레구 군대는 대패했다. 이는 칭기즈칸의 후손들끼리 싸운 최초의 전투였다. 피보다 신앙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1260년에 몽골군대가 맘루크에 패배함으로써 이집트 침공에 실패했고 그 14년 뒤엔 몽골-고려 연합군이 일본에 상륙했다가 大敗하여 일본 정벌이 불가능해졌다. 대팽창하던 몽골제국이 東西 양쪽에서 거의 동시에 제동이 걸린 셈이다. 몽골군대는 1257년, 1285년, 1287년 세 차례 월남에 쳐들어갔다가 여기서도 패배했다. 몽골군은 1231년부터 42년간 일곱 차례 이상 고려로 쳐들어왔으나 완전한 항복은 받아내지 못했다. 일종의 종전협정에 따라 고려 왕조는 망하지 않고 몽골제국의 駙馬國(부마국)이 되었다.
몽골군대가 고전하거나 패배한 맘루크, 고려, 일본, 월남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인종적으로 몽골, 투르크계통이므로 유목민족의 생리와 騎馬전술을 알았다. 몽골 군대는 전법이 다른 유럽, 이슬람 군대에 대해선 백전백승했으나 뿌리가 같은 군대에는 苦戰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