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게는 국제사회로부터 명예롭지 못한 훈장이 몇 개 주어져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불명예 훈장'이 다름 아닌 '테러 지원국 지정'과 '교역(交易)상의 엄청난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적성국(敵性國) 낙인'일 것이다.
북한이 미국이 정하는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랐던 것은 1988년이었다. 대한항공(KAL)기 폭파사건(1987년) 발생 이듬해의 일이다. 그 후로 벌써 만 20년이 흘렀다. 적성국교역법 적용 대상에 올랐던 것도 한국전쟁 직후(1950년 12월)부터 거슬러 오른다. 북한으로서는 KAL기 폭파사건 이후 눈에 띄는 테러행위가 없었다고 주장할는지 모르지만, 해제 조치를 쉽게 내릴 수 없는 '이유'도 적지 않다.
미국은 북한이 시리아·리비아 등 테러지원국에 미사일 기술을 반출한 혐의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북한이 테러단체에 무기 수출함으로써 대(對)테러 국제협정 및 의정서 의무를 불이행한 것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미 국무부가 북한의 테러지원국 재(再)지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불가피한 사유가되는 것이다.
북한은 일본인 납치 건('2003년 테러보고서'에 명기)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이렇다할 해명과 사과가 없다. 더 거슬러 올라 1970년 일본 항공기(JAL)를 납치한 적군(赤軍)파 테러리스트를 아직껏 보호하고 있는 그들이다. 명실상부한 국제사회의 '불량국가'인 것이다.
북한의 '핵시설 불능화'와 맞물려 있는 현안(懸案)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이고, '적성국교역법 적용 종료' 해결이 또 다른 현안이다.
북한이 '2·13합의'에 따른 초기조치 이행을 기피할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BDA 동결 자금 반환이 기술적인 문제로 일시적인 제동이 걸려 북핵문제의 진전이 일시적으로 주춤하고 있지만, 미국의 BDA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가 분명한 이상 근본적인 문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 김정일 정권은 이미 조총련(朝總聯) 기관지 등을 통해 "조선(북한)이 비핵화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자면 미국이 먼저 조선을 적대시하는 법률적 및 제도적인 장치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선전공세를 펴고 있다. 미국이 이 두 현안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보여줘야 북한도 핵 시설 불능화 조치 협의에 응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일각에서는 미 행정부가 이라크 사태 등에 따른 부정적 이미지 불식 등 외교적인 성공을 필요로 하고 있어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북핵 문제가 성과를 낼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부시 대통령이 '영변 핵 시설 폐쇄' '고농축우라늄(HEU)문제' '이미 추출한 플루토늄 문제' 등 핵 시설 '불능화' 문제를 임기 내에 관철하려 들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막판까지 "대량살상무기 관련 자금을 풀어줄 수 없다"며 버텼던 미 재무부가 결국 BDA 자금의 전액 해제를 막지 못한 것은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의 시그널일 수도 있다. BDA 문제 해결과정에서 미국이 보여준 전향적인 자세가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에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는 관점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많은 이들이 '부시의 돌변'을 의아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미(美)·북(北)관계에 파란 불이 켜졌던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0년 10월 북한의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특사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면서 양국은 적대관계 종식을 선언하는 공동코뮈니케를 발표했었다.
이어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이 그해 10월 23∼25일 북측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테러지원국 해제'와 '적성국교역법 면제' 문제를 논의했었다. '미사일 개발·외교관계 개선·한반도 긴장 완화 건(件)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올랐던 것도 이때였다. 6년 여 전의 일이다.
당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방북 추진을 협의하는 단계에까지 진전이 있었지만, 그 해가 클린턴의 임기 마지막 해인데다 2001년 부시 행정부 출범에 이어 9·11사태와 2차 핵위기 사태가 닥치면서 테러지원국 해제 조치는 물거품이 됐었다.
이 두 가지 조치가 해제된다면 북한이 달라질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북한은 '시간 끌기' '분쟁 유도' 등으로 국제사회에서 이미 오명(汚名)이 붙어있는 집단이다. 핵시설 '불능화'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유를 들어 마찰을 빚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그들이 상투적인 술책을 쉽게 포기할 리는 없다. 미국의 한반도문제 전문가 '돈·오버도퍼' 교수(존스홉킨스대) 역시 "BDA 문제가 풀린다 해도 '2·13합의'는 유동적인 부분이 많아 상당한 마찰이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 할지라도 미국이 인권·위폐·돈세탁 등 불법행위를 외면하고서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조기에 해제할 리는 없다는 견해도 여전히 우세하다. 테러지원국 해제는 북한의 희망사항일 뿐, 해법(解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특히 적성교역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하자면 '법 개정'이 필요하며, 의회의 적극적인 동의가 뒤따라야 한다.
테러지원국 지정은 미 국무부가 매년 4월 연례 테러보고해 발표한다. 그런 의미에서 '금년 4월말까지'의 시한(時限)을 지켜보고 있는 국가들이 적지 않다. 이 명단에서 북한이 삭제되기 위해서는 미 행정부가 지난 6개월간 북한이 국제테러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증하고, 북한으로부터 향후 국제테러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아 해제 45일 전에 의회에 보고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미 행정부가 확고한 의지가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적성국교역법상의 '적성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하자면 당해(當該) 법부터 개정해야 한다. 테러지원국 해제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더욱이 법률 수정권한을 갖는 미 의회가 움직이려면 미(美)·북(北) 수교와 같은 확실한 보장책이 뒷받침되어 있어야 한다.
베트남이 1975년 종전하고도 적성국교역법에 따른 규제가 풀렸던 것은 1980년대를 뛰어넘어 1994년 미·베트남 수교와 함께였다. 종전 이후 19년만에 비로소 적성국 명단에서 삭제될 수 있었다. 적성국교역법 문제는 법안 개정 이전에 '상당 기간의 검증'이 필수요소라서 결코 쉽게 풀릴 수 있는 사안(事案)이 아닌 것이다.
이런 정황(情況) 속에서도 이번에 '2·13합의'에 따라 재차 부상한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 건(件)은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미북관계의 해빙무드가 테러지원국 해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근거에서 '선(先) 테러지원국 해제, 후(後) 적성국교역법 개정'의 편법(便法)이 동원될 것이라는 설(說)까지 나돌고 있다.
올 4월의 경우 미·북간 관계정상화를 위한 대화의 진전에 따라 '예상 밖의 정치적인 그림'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분명한 것은 미북(美北)관계의 해빙무드가 테러지원국 해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부시정권이 집권2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처음처럼' 기독교 근본주의자로서 대북(對北)정책을 재단할 것인지, '대(對)이라크 전(戰) 피로'와 '실적주의'에 쫓겨 바람직하든 아니든 새로운 이정표(里程標)를 그릴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의 결단은 더 미룰 수 없는 목전에 와있다.
우리는 이제 부시가 보여줄 서방세계에 '패권국가로서의 의연한 미국의 모습'이 아니면 '정책 결정의 유연성'을 요구하는 미국 내 여론에 승복하는 부시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그것이 북핵폐기와 한반도의 안보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판단이어야 항 것이다. (konas)
정 준 (코나스 객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