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의 건축미>
건축가들에게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찰을 말하라면 대개 영주 부석사를 첫 손가락에 꼽는다. 그만큼 부석사는 전통 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멋과 맛을 모두 갖추고 있다. 신라시대 의상 조사가 창건한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법등이 끊기지 않은 오랜 역사성, 이 절만이 갖는 독특한 공간 구조와 장엄한 석축단, 당당하면서도 우아함을 보이는 세련된 건물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단련된 대목을 비롯한 많은 장인들의 체취가 베어날 듯한 디테일은 부석사가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부석사의 우수한 건축미는 서양의 건축과 문화에 식상한 우리들에게 가슴이 확트일 만큼 시원한 청량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앞으로 전통을 계승해 나갈 방향까지도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부석사는 진정한 한국 건축의 고전(古典)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가람의 입지>
사찰을 보려면 먼저 건물들이 놓인 터와 그 주변의 산세를 살펴보는 게 순서이다. 놓일 자리에 따라 건물의 조형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국(局)이 넓은 땅에서는 건물을 비교적 넓게 배치하되 높은 건물을 정점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으며 국이 좁고 가파른 땅에서는 높은 석축과 건물을 잘 이용하여 짜임새 있게 공간 배치를 하였다. 부석사의 경우는 물론 후자에 속한다. 부석사가 위치한 곳은 봉황산 중턱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태백산에서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달려 이룬 것이 소백산맥이다. 태백산에서 뻗은 줄기가 구룡산, 옥석산, 선달산으로 솟구치다가 소백산으로 이어져 형제봉,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을 이루었다. 부석사가 위치한 봉황산은 선달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뻗은 줄기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문수산, 남쪽으로는 학가산의 맥이 휘어들고 서쪽으로 소백산맥이 휘어돌아 거대한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위치하여 뭇 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봉황산을 향하여 읍하고 있는 형상이다. 풍수지리상으로도 뛰어난 길지에 속한다. 부석사가 들어선 터는 그리 넓은 편이 아니다. 그나마도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어 경사가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석사에 들어서면 국이 협소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솔길을 따라 절에 들어서면 높직한 석축단에 의하여 구분된 터에 드문드문 건물이 배치되어 있어 뒤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고 내려가는 길에는 건물 지붕 위로 보이는 전면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석양이 뉘엿거릴 무렵 안양루 쪽에서 멀리 도솔봉 쪽을 바라보면 펼쳐 있는 산맥의 연봉들이 장관을 이룬다. 초점이 되는 도솔봉 오른쪽으로는 아스라이 죽령이 보인다. 가히 대단한 경승지라 할 수 있다.
<가람의 배치와 공간구조>
산지나 구릉에 지어진 우리나라의 사찰은 대부분 길게 늘어진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다. 중심축을 따라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의 높낮이가 높아지도록 배치되어 있다. 소위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성인데 부석사도 예외는 아니다. 사찰 입구에서 천왕문까지의 도입 공간이 기(起)라면 대석단 위 범종각까지가 전개해 나가는 공간인 승(承)에 해당되고 여기서 축이 꺽여 전환점을 맞는 안양문까지가 전(轉)의 공간이다. 안양루와 무량수전은 가람의 종국점이므로 결이라 할 수 있다.
1)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정면5간, 측면3간으로 된 단층건물의 규모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가공된 화강암으로 지대석과 면석,갑석으로 단을 만든 가구식 기단으로 비교적 낮은 편이다. 석질이 화재로 인해 변질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창건당시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동측 면석에 “忠原赤花面 石手金愛先”이라는 명문이 있어 충원군의 석평 김애선이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석은 화재로 변질되고 균열이 심하며 몇 개는 석질로 보아 근래에 대치된듯한 것들도 있다. 모양은 대체로 사각형으로 거칠게 다듬고 원형주좌를 놓아 기둥을 받치도록 하고 있다. 수리시 대치된 초석은 원래의 위치에 대치되어 있으며 같은 형식으로 처리한 것 같다. 초석 상면에서 쇠실이로 시작되어 그위에 다시 얕은 直立의 柱坐를 올려놓았다.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하며 비교적 반듯하게 다듬은 재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의 길이는 정면의 것들을 비교해보면 좌석 우주는 12척, 퇴간 평주는 11.63척, 중앙 어간 평주는 10.72척으로 우주가 어간 평주보다 1.28척 높게 솟아 귀솟음이 뚜렷하다. 전후 외벽에 평주를 세우고 두개의 내진고주를 세위 건물의 단면을 구성하고 있다. 고주의 길이는 15척으로 평주의 2제공 상면에 퇴보를 얹어 연결하고 있으며 고주의 주신에 헛점차를 달아 이 퇴보를 받치고 있다. 중앙 어간의 평주 단면을 보면 기둥 상단은 1.12척, 하단은 1.45척이며 중간부위의 최대 직경은 1.62척으로 상단과 0.5척, 하단과 0.17척의 차이가 나며 하단에서 1/3높이 지점이 최대 직경이 된다. 전면의 평주와 후주의 평주는 전면이 0.06척 더 길게 되어 있으며 고주도 전면의 것이 0.02척 더 길게 되어 있어 전면이 더 높게 되어 있다.
가구는 내진간에 고주 2개를 세우고 외진간에 벽선을 따라 전면과 후면에 평주를 각각 세웠다. 내진고주 사이에 대량을 설치하였고 내진고주와 평주사이에 퇴보를 설치하였다. 대량위에 종량을 설치한 이중량가구로 하여 종량위에 솟을합장을 만들어 구성했으며 중간에 대공을 세워 솟을합장과 함께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11개의 도리로서 지붕의 하중을 받도록한 2고주 9량가구형식이며 연등천장으로 되어있다. 내진우고주와 우주사이에 귓보(이량)을 설치하고 있다. 또한 전후 퇴보위에 계량을 설치하여 보강하고 있다. 대량과 종량사이에 이중으로 대초방을 놓아 첨차와 직교시켜 짜아서 종량을 받치도록 하였다.
공포는 주심포형식으로 기둥 상부에만 구성되어 있다. 주두의 굽은 곡선으로 되어 있고 굽 밑에 굽받침을 노고 있다. 소로도 이와 같은 형상으로 되어 있다. 주두위에 소첨차와 대첨차를 놓아 출목을 만들었으며 이출목의 위에 퇴보 뺄목과 행공첨차를 결구시켰다. 퇴보위에 초방을 놓고 단장혀와 직교로 짜아서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다. 첨차단부의 모양은 수직면보다 약간 경사지게 절단하였고 하단부는 중괄고형으로 초각되어 있다. 퇴보머리는 짤막한 앙설형으로 초각되어 있고 그 위에 초방머리는 단부를 비스듬히 중괄호형으로 초각하고 윗면 끝을 둥글게 공글려서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놓았다.
지붕은 팔작지붕형식으로 되어 있고 용마루와 합각마루에 적당한 곡선이 있으며 처마에 앙곡과 후림이 나타나 있다. 합각부는 가구의 종보위치에서 시작되도록 구성하고 있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내달아 겹처마로 하여 960척정도 주심에서 내밀어 길게 뻗쳐있다. 지붕의 물매는 약 3/5쯤 물래를 이루어 구성.
평면을 보면 중앙에 내진간을 만들고 사면에 외진간을 둘러 놓고 있다. 전면에서 보아 가운데 3간은 13.90척이며 좌우 퇴간은 10.10척으로 가운데 3간이 크게 구성되어 있다. 전후로 보아 가운데 간은 18.00척이며 앞과 뒤의 간은 10.10척으로 역시 내진간을 크게 하고 있다. 내진간 사측에 불단을 설치하여 동향하도록 불상을 안치시켜 놓았다.
2) 부석사 무량수전앞 석등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적 석등이다.
방형< 方形 > 기대석< 基臺石 > 측면에는 안상< 眼象 >이 2개씩 배치되고, 기대석 위의 팔각 하대석< 下臺石 >에는 복련< 覆蓮 >과 귀꽃 장식이 화려하게 조각되었다. 8각의 간주석< 竿柱石 >은 알맞은 높이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간주석 위의 상대석< 上臺石 >에는 부드러운 8엽< 八葉 > 앙련< 仰蓮 >이 조각되었다.
8각의 화사석< 火舍石 > 벽면< 壁面 >에는 네 곳에 화창< 火窓 >이 있고 네 곳에 세련된 보살상< 菩薩像 >이 조각되었다. 옥개석< 屋蓋石 > 위에는 보주< 寶珠 >가 있었는데 보주대< 寶珠臺 >만 남아 있다. 석등의 전체 높이는 2.97m이다.
3) 부석사 조사당
부석사< 浮石寺 >를 창건< 創建 >한 의상대사< 義湘大師 >(625∼702)의 진영< 眞影 >을 봉안< 奉安 >하고 있는 곳으로 고려< 高麗 > 우왕< 禑王 > 3년(1377)에 건립< 建立 >되었고, 조선< 朝鮮 > 성종< 成宗 > 21년(1490)에 중수< 重修 >되었으며 동< 同 > 24년(1493)에 개채< 改彩 >되었다. 이 건물은 주심포양식< 柱心包樣式 >에 맞배집으로 무량수전< 無量壽殿 >에 비해 기둥의 배흘림이 약해졌고, 주두< 柱頭 >와 소로< 小累 >의 굽은 직선< 直線 >이며 굽받침이 없고, 공포< 공包 >와 가구< 架構 >의 수법은 간략하다. 구조양식< 構造樣式 >으로 보아 무량수전보다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 內部 > 입구< 入口 > 좌우< 左右 >에 제석천< 帝釋天 >, 범천< 梵天 >, 사천왕상< 四天王像 >의 벽화< 壁畵 >가 있었는데 이들은 고려시대의 회화사상< 繪畵史上 > 희귀한 것이며, 고분< 古墳 > 벽화< 壁畵 >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彩色 >그림 중 하나로서 지금은 무량수전 내에 보존< 保存 >하고 있다.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국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이 있다.
4) 부석사소조여래좌상
부석사< 浮石寺 > 무량수전< 無量壽殿 > 안에 마련된 동향< 東向 > 불단 위에 안치된 거대한 불상으로, 결가부좌< 結跏趺坐 >하여 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 >을 결< 結 >하고 있다. 이 불상은 소조상< 塑造像 >으로는 최대< 最大 > 최고< 最古 >의 상으로, 나발< 螺髮 > 머리 위에는 육계< 肉계 >가 큼직하고, 얼굴이 풍만하다. 정안정시< 正眼正視 >의 미목< 眉目 >에는 위엄이 있고, 두꺼운 입술에서 고려불< 高麗佛 >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양쪽 귀는 긴 편이며, 잘록한 목에는 과장된 삼도< 三道 >가 보인다. 우견편단< 右肩偏袒 >한 법의< 法衣 >는 앞쪽에서 평판< 平板 >을 겹친 것 같이 평행선을 그리며 흘러내렸고, 두 무릎의 의문< 衣文 >은 평행선으로 각각 밖을 향하여 흘러내렸는데, 이러한 양식은 이미 도피안사주조비로자나불좌상< 到彼岸寺鑄造비盧자那佛坐像 >(국보 제63호)에서 나타나고 있다. 불상 뒤에는 목조< 木造 > 광배가 따로 만들어져 있는데, 신광< 身光 >과 두광< 頭光 >을 원권< 圓圈 >으로 구별하고 각각 우아하고 화려한 보상화문< 寶相華文 >을 조각하였고, 그 안에는 두광에 3체< 體 >, 신광에 4체< 體 >의 심불< 心佛 >을 달았던 흔적이 있으며, 가장자리는 화염문< 火焰文 >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좌< 臺座 >는 앞면 너비 2.37m, 측면 너비 2m, 높이 1.05m의 흙과 돌을 섞은 수미단< 須彌壇 > 원형이 남아 있고, 바닥에는 주위에 신라시대의 녹유전< 綠釉塼 >이 깔려 있으나, 불상 무릎 아래에 후세의 첨가물인 목조불단이 가설되어 있어, 밖에서는 불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불상은 신라< 新羅 >시대 불상의 조형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지만, 도식적이고 상징적인 일면을 감출 수 없어, 시대적인 양식의 차를 보여 주고 있다. 온몸에 금빛이 찬연하고, 고려불< 高麗佛 >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 주는 걸작이다. 특히 소상< 塑像 >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작품이다. 신라< 新羅 >시대의 조상< 造像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高麗 > 초기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5) 부석사조사당벽화
고려시대< 高麗時代 >의 회화< 繪畵 >는 보존된 유적< 遺蹟 >이 매우 희귀해서 그 양상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힘든다. 부석사< 浮石寺 >의 조사당벽화6면< 祖師堂壁畵6面 >은 이 건물< 建物 > 내진< 內陳 > 벽면< 壁面 >에 그렸던 건축당초< 建築當初 >의 작품으로서 확인되어 현재 이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내어 안전장치를 한 후에 부석사무량수전< 浮石寺無量壽殿 > 안에 보관하고 있다. 조사당건물창건연대< 祖師堂建物創建年代 >는 이 건물을 중수< 重修 >할 때 발견한 묵서명문< 墨書銘文 >에 따라서 서기 1377년으로 밝혀졌으므로 이 벽화의 제작연대< 製作年代 >도 이로써 확인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국내에 유존< 遺存 >된 고려시대< 高麗時代 >의 벽화는 이 조사당벽화< 祖師堂壁畵 >를 비롯해서 예산수덕사대웅전벽화< 禮山修德寺大雄殿壁畵 >(1308년 건립< 建立 >) 개성수락암동고분벽화< 開城水落巖洞古墳壁畵 > 장단법당방고분벽화< 長湍法堂坊古墳壁畵 > 개풍군공민왕릉벽화< 開풍郡恭愍王陵壁畵 > 등의 유례< 遺例 >가 있으나 회화적< 繪畵的 >인 격조< 格調 >로 보나 그 보존상태< 保存狀態 >로 보나 유존< 遺存 >된 고려시대의 벽화를 대표하는 것은 이 조사당벽화< 祖師堂壁畵 >이다. 이 조사당벽화< 祖師堂壁畵 >는 천왕상< 天王像 > 각 1면< 面 >과 보살상< 菩薩像 > 2면< 面 >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그 내용을 조사당내진< 祖師堂內陣 > 원위치< 原位置 >의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보살상< 菩薩像 >(불명미상< 佛名未詳 >)(2) 다문천왕상< 多聞天王像 >(3) 황목천왕상< 黃目天王像 >(4) 증장천왕상< 增長天王像 >(5) 보살상< 菩薩像 >(불명미상< 佛名未詳 >)이들 벽화< 壁畵 >는 토벽< 土壁 > 위에 후레스코로 그린 것이며 배경을 심록색계< 深綠色系 >로써 메꾼 뒤 홍< 紅 > 자< 자 > 녹< 綠 > 백< 白 > 다< 茶 > 금채< 金彩 > 등으로 상용< 像容 >을 농채< 濃彩 >한 것이다. 사천왕상< 四天王像 >들의 상용< 像容 >은 특히 힘찬 운동감을 나타낸 동적인 선으로 윤곽< 輪廓 >을 그렸고 그 안에 설채< 設彩 >를 해서 전반적인 인상은 매우 힘있는 율동감이 넘쳐 있다고 할 수 있다. 양보살상< 兩菩薩像 >은 보살상< 菩薩像 >이 지니는 정일감< 靜溢感 >을 잘 살려서 정적< 靜的 >이고도 유려< 流麗 >한 선< 線 >을 잘 구사< 驅使 >해서 고려조< 高麗朝 > 예술< 藝術 >이 지니는 아름다운 선의 성격을 잘 보여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원래의 건축< 建築 >이 황폐< 荒廢 >되었을 당시 우루< 雨漏 >로 오염< 汚染 >된 부분이 남아 있고 또 후세의 묵서< 墨書 > 낙서< 낙서 > 등도 화면을 더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래 그 채색< 彩色 >이 발견 당시보다 약간 퇴색되어 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 우려된다.
6) 부석사원융국사비
이 비는 고려시대< 高麗時代 > 원융국사< 圓融國師 >의 비< 碑 >이다. 원융국사의 속성< 俗姓 >은 김씨< 金氏 >이고 휘< 諱 >는 결응< 決凝 >이며 자< 字 >는 혜일< 慧日 >이다. 12세에 용흥사< 龍興寺 >에 들어가 복흥사에서 구족계< 具足戒 >를 받고, 고려< 高麗 > 성종< 成宗 > 10년(991) 승과< 僧科 >에 급제한 후 대덕< 大德 > 승통< 僧統 > 왕사< 王師 >를 거쳐 문종< 文宗 > 때 국사< 國師 >가 되어 부석사< 浮石寺 >에 있다가 문종< 文宗 > 7년(1053)에 입적< 入寂 >하니 시호< 諡號 >를 원융< 圓融 >이라 하였다. 비신< 碑身 >은 높이 1.73m, 폭 1.1m이며 재료는 수성암질청석< 水成岩質靑石 >으로 양변과 중앙부에 균열과 결손이 있어 비문< 碑文 >의 첫머리와 끝부분이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온전한 편으로 문종 때에 세운 원비< 原碑 >임에 틀림없으며, 비문의 내용은 『조선금석총람< 朝鮮金石總覽 >』에 수록되어 있다. 귀부< 龜跌 >는 비신< 碑身 >과 맞지 않아 원래의 것은 아니지만 각법< 刻法 >이 훌륭하다. 귀부 지대석은 전후면에 각 3구, 측면에 각 4구씩의 안상< 眼象 >을 장식하였는데 꽃무늬를 새겨넣었다. 머리는 용두화< 龍頭化 >하였으나 마치 석사자< 石獅子 >처럼 보인다. 귀갑< 龜甲 >은 6각형으로 선명하게 새겨졌고 음각된 왕자< 王字 >가 보인다.
7) 부석사3층석탑
이 탑은 이중기단< 二重基壇 > 위에 세운 일반형 3층석탑이다. 이 탑은 높이에 비해 폭이 넓어 둔중한 감은 있으나, 한편 건실한 모습을 보여 장중하게 보인다. 1960년 해체수리시 철제탑< 鐵製塔 >, 불상파편< 佛像破片 >,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탑은 원래 법당< 法堂 >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인데, 이 석탑은 법당 동측< 東側 >에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 작품으로 높이 5.26m, 기단폭 3.56m이다.
8) 부석사 당간지주
현재 부석사 경내에 1m 간격을 두고 동서< 東西 >로 상대< 相對 >하여 서 있는 지주로 정상부에는 2단< 二段 >의 유려한 원호< 圓弧 >가 비스듬히 조각되어 있고 옆으로 세 줄의 종선문대< 縱線紋帶 >가 장식되어 있다. 간< 杆 >을 고정시키는 구멍은 윗부분에 장방형< 長方形 >의 간공< 杆孔 >을 하나 마련하였을 뿐이다. 특히 당간지주의 아랫부분인 지면< 地面 >에는 간대석< 竿臺石 >을 마련하고 있는데 이 대석은 원좌< 圓座 >로 되어 있으며 주변을 연화< 蓮華 >의 꽃잎으로 장식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소박 미려한 지주이다. 간결하고 단아한 수법은 통일신라< 統一新羅 > 초기< 初期 >의 작품으로 보게 한다. 부석사 창건과 함께 7세기경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9) 부석사고려각판
이 각판은 부석사에 있는 정원본< 貞元本 >(40권), 진본< 晋本 >(60권), 주본< 周本 >(80권) 등 3종의 한역본< 漢譯本 >의 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 >을 새긴 고려시대< 高麗時代 > 목판< 木板 >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이란 크고 방정< 方正 >하고 넓은 뜻을 가진 법계< 法界 >를 증득< 證得 >하신 부처의 설법을 화려한 꽃으로 장엄한 것과 같은 경전< 經典 >이라는 것이다. 이 화엄경판은 우리나라에 유래가 없는 한 줄에 34자< 字 >씩 배열되어 있는 것으로 고려 희종< 熙宗 >이 아들인 충명국사< 沖明國師 > 때(13세기)나 원응국사< 圓應國師 > 때(14세기) 새긴 것으로 보인다. 이 화엄경의 원융무애< 圓融無碍 >한 사상은 고대< 古代 > 한국문화< 韓國文化 >를 꽃 피우기 위한 기본 이념으로 제시되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다. 부석사의 화엄경판은 우리나라 화엄종< 華嚴宗 >의 초조< 初祖 >인 의상대사< 義湘大師 >가 창건하여 화엄사상< 華嚴思想 >을 발전시켜 나간 부석사에 소장되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
10) 안양루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온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11) 선묘각
선묘각은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의상 조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인물인 선묘를 모신 건물이다. 규모도 작고 기단도 없이 초라하여 마치 작은 사찰의 산신각 같은 느낌을 준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가구 방식이나 부재를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최근세의 건물인 듯하다. 내부에는 1975년에 그린 선묘의 영정이 걸려있다.
12) 취현암옛터
취현암 옛터는 조사당 동쪽 가까이 있는데 일제 때에 큰 인물이 난다 하여 건물을 범종각 위쪽으로 이건하였다. 현재는 그 자리에 '취현암구기비(취현암구기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에도 선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사명 대사의 수도처로 유명하고 부석사 경내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13) 응진전
무량수전 영역의 북편 위쪽에 떨어져 있다. 자인당과 함께 거의 일렬로 남향하여 일곽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1976년에 번와 보수하였다. 이 건물의 공포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한 장식적인 익공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는 내부에 석고로 만든 석가삼존불과 고졸한 십육 나한상이 안치되어 있다.
14) 자인당
자인당은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폐사지에서 옮겨 온 석불을 이곳에 이안하고 당호를 '자인당'이라고 고쳤다. 이는 부처님을 자인(慈忍)대사라고 하는데서 따온 것이라 한다.
자인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공포가 건물 규모에 비하여 너무 크고 측벽에 여러 가지 형태의 옛 부재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경에 해체 부재를 재사용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실내에는 석조 삼존여래 좌상을 모셨는데 가운데는 석가여래이고 좌우는 비로자나불(보물 제220호)이다.
15) 단하각
최근세에 지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남도리 맞배집으로 응진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건물 내부에는 손에 쥐를 들고 있는 작은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정면에 걸린 현판의 '단하'가 무엇을 뜻하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리를 얻기 위하여 목불을 쪼개 땟다는 단하소불의 고사로 유명한 중국 육조시대의 단하 천연 선사를 모신 것이라면 선종과 연관이 있는 전각이다. 그러기에 도량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선방 근처에 지었는지도 모른다
16) 범종각
부석사에는 2개의 누각이 있는데 안양루와 범종각이다. 문의 성격을 겸한 안양루가 석축 위에 작고 날아갈 듯하게 지은 누각이라면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각은 지반에 견고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이다. 특히 이 범종각은 그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있다.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팔작지붕을 한 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을 향하고 있는데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왜 목수가 지붕을 그리했는지를 알수 있으며 그 지혜에 절로 감탄이 난다. 부석사가 소백산맥을 향하여 날아갈 듯이 앉아있는데 범종각이 정면을 향하고 있으면 건물이 전반적으로 무거워보인다. 따라서 범종각을 옆으로 앉혀놓고 뒷쪽을 맞배로 처리하여 건물이 전반적으로 비상하는 느낌을 주고 답답해 보이지 않아 좋다.
17) 취현암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로 범종각과 안양루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스님들의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원래 위치는 조사당 동쪽이었는데 일제 때 현재의 자리로 뜯어 옮겼다. 건물을 헐면서 묵서가 씌어진 부재가 나타났는데 이로 말미암아 원래 건물은 조선 효종 원년(1649)에 수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18) 응향각
취현암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또 하나의 요사체인데 원래 강원 건물이었다.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계단 오른쪽에 있었는데 통로와 너무 인접하여 1980년 철거하고 뒤로 물려서 신축하였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최근에는 전면에 마루를 덧달았다.
19) 신범종각과 보장각
만세루 위쪽 석축단의 좌우에 있는 건물들로 1980년의 보수 정화공사 이후에 신축한 것이다. 신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기둥만 세워 개방하였는데 기둥 사이는 홍살로 막았다. 막돌로 만든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모서리는 원형 주좌를 가진 방형 초석을 사용하여 특이하다. 보장각은 부석사 고려각판(보물 제735호)과 조사당에서 떼어 낸 벽화(국보 제46호)를 보관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 2동을 석축단 위아래에 따로 건립하여 서로 연결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