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國際.經濟 關係

北과 다른 베트남과 미국의 수교

鶴山 徐 仁 2007. 4. 9. 08:12
베트남, '美國요구 전면수용-유연한 정치권-지도부 교체'
金成昱   
 미국과 북한의 수교 가능성이 언급되면서, 95년 미국과 베트남 수교사례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은 △정치적 유연성이 높았고, △미국의 요구를 전면 수용했으며, △지도부 교체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북한이 베트남 전례를 따르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베트남 77년에 수교 교섭
 
 베트남과 북한의 근본적 차이는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유연성 여부에 있다.
 
 베트남은 1975년 공산통일 이후 2년 후인 1977년부터 미국과 수교 교섭을 시작했다. 이는 1978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결렬됐지만, 1986년 도이모이(Doi Moi, 개혁·개방) 채택이후 재개됐다.
 
 도이모이 이후 베트남의 정치적 유연성은 더욱 커졌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과거는 불문한다」는 원칙 아래 92년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95년 미국과도 수교했다.
 
 국내적으론 프롤레타리아黨이라는 교조적 원칙에서 탈피, 기업인에게 당의 문호를 개방하고, 당원의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허용했다. 베트남 공산당은 최근 복수정당제 도입까지 검토하고 있다. 2011년 개최될 제11차 당 대회에서 공산당 우위를 유지하면서도, 순조롭게 다당제로 이행하는 것을 논의한다는 방침이다.
 
 미국 요구 120% 수용
 
 수교과정에서 미국의 요구를 전면 수용했다는 점에서도 베트남은 북한과 다르다.
 
 미국은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월남전 당시 미군의 유골(遺骨)과 유품(遺品) 회수를 요구했다. 베트남은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며, 미국의 요구를 120% 만족시켰다. 미국이 원하는 데로 가서 땅을 파게 하고, 유골을 찾게 하고, 유품을 수거하도록 도와줬다. 시장경제(市場經濟)로의 복귀가 약속된 상황, 실용주의(實用主義)적 베트남 지도부에게는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다.
 
 지도부, 개혁·개방세력으로 교체
 
 베트남은 최근 지도세력도 전면 교체됐다.
 
 지난 해 4월, 베트남 혁명의 주역이었던 판 반 카이 수상, 쩐 등르엉 국가주석, 응웬 반 안 국회의장 등 베트남 최고 지도자 3인이 『과감한 세대교체를 위해 65세 이상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은퇴한다』며 공식 사임했다, 이들이 떠난 자리는 모두 南베트남 출신 개혁성향 인물들로 채워졌다. 국가 최고기구인 15명의 정치국원 중 8명도 개혁성향 인물들로 대체됐다.
 
 미국과 군사협력 수준 발전
 
 현재 베트남은 외국인 투자법 등 투자환경을 대폭 개선하고, 외국 자본이 물밀 듯 들어오면서 글로벌 기업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경제는 연간 7~8%대의 고속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2006년 11월에는 WTO에 가입했으며, 2008년 10월 UN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공식 선출된다.
 
 16년간 치열한 전쟁을 벌였던 미국과는 군사협력을 다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응우엔 떤중 총리는 지난 해 6월 취임 직후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양국 간 전면적인 협력시대를 열자고 제안했다. 이후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베트남을 방문, 양국은 종전 후 31년 만에 군사협력 파트너 관계를 맺었다. 2006년 연말에는 베트남 장교 수십 명이 미국 군사학교에서 연수를 받았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은 지난 해 4월 베트남을 방문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시아의 기적을 보아왔다. 다음 10년은 베트남이 그 기적을 이룰 것이다』
 
 외교안보연구원 배긍찬 교수는 『미국과 수교당시 베트남은 핵무기가 없었고, 실종자 문제에서 성의만 보이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북한의 경우는 정권의 생존 자체가 결려 있는 상황』이라며 『북한이 예정된 수교 코스로 적절하게 나갈 것이라는 속단은 어렵다』고 말했다.
[ 2007-04-09, 00: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