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위원회는 정책 방향에 대한 보고서를 부시 행정부에 제출했고, 이 보고서는 후에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보고서에 담긴 여러 가지 정책제안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선거 때의 공약은 잊어버려라」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미국의 大選은 프라이머리로부터 본선거까지 1년 이상 걸리는데 그동안 후보는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숱한 공약을 쏟아 낸다』면서 『본인이 기억 못 하는 공약들을 다 지키겠다고 하면 미국 경제는 파탄나고 말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정치에 얽매이지 말고 현실에 맞는 정책을 다시 마련해야 한다는 권고였다.
大選을 앞두고 벌써부터 유력 후보들이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정부와 각 정당이 서로 경쟁하듯이 선심성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아파트 반값」과 「軍복무기간 단축」이 대표적인 사례다
「아파트 반값」 정책은 나의 선친(鄭周永 前 현대그룹 창업자. 당시 국민당 대통령 후보)이 1992년 처음 말씀하신 내용이지만 요즘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당시 「아파트 반값」 주장의 근거는 아파트 설계와 건설방식, 자재 등을 표준화해서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軍복무 단축」은 大選 때만 되면 등장하는 이른바 단골메뉴다. 軍복무를 앞두고 있는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고 보고 정치권은 앞다퉈 이 카드를 꺼낸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실제 軍복무 단축과 이에 따른 軍병력 감축이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분석은 차치하고라도 안보와 직결된 문제를 표에 연계해 다루겠다는 정치권의 의식 자체가 심각한 위험요소가 아닐 수 없다.
실패한 자주국방·균형발전
특히 우리의 일방적인 한국軍 감축 계획은 韓美동맹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이라크에 발이 묶인 미국의 경우 요즘 병력이 모자라 군인들이 세 차례나 이라크 근무를 되풀이하거나 州방위군까지 투입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미국의 사정을 배려하지 않고 우리만 일방적으로 軍병력을 줄이면서 주한미군 감축에는 반대한다면 논리에 맞지 않는다. 현재의 지원병 제도에서 다시 징병제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토론이 시작되고 있는 미국으로서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軍복무 감축에 따른 추가 소요예산 11조7000억원의 조달도 작은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직은 건설부 장관이나 병무청장의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은 국민을 통합하고 나라의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런 사명을 무시하고 자신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실현해 보겠다고 독선적으로 나서면 국가는 어려워진다.
現 정권은 집권 초기에 「균형발전」, 「자주국방」 등의 슬로건처럼 나름대로 진보세력으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출발했다. 그러나 지금은 「진보」와 「보수」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10%대의 낮은 지지밖에 얻지 못하고 있다.
의욕은 컸지만 표방했던 여러 정책들이 현실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릇 「정책」이란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현재의 능력을 조화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과정인데 이런 사실을 무시한 채 「정책은 나의 아이디어와 의지, 그리고 나의 도덕성을 증명하기 위한 최종 결과물」이라는 독선에 빠지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다.
요즘 盧武鉉 대통령을 보면 20세기 초 미국의 윌슨 대통령을 연상하게 된다. 원래 고립주의자였던 윌슨 대통령은 U-보트 사건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뒤 전쟁이 끝나자 「국제연맹」의 창설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미국內의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윌슨은 양쪽을 설득하기 위해 기차로 전국을 돌며 유세하다 폐렴에 걸려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고, 국제연맹은 창설되지 못했다. 고립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인 윌슨은 현실 정치의 벽에 부딪혀 양쪽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다.
선거는 국가적 과제에 대한 정치인과 국민 간의 대화와 상호교육의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양 방향 의사소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묘사하는 현실의 한국 모습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 大選에 나선 정치인들은 단순화된 문제에 단순하고 쉬운 해법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우리의 국내 정치·사회·교육·경제·환경의 문제와 국제 문제들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고 해법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국가는 무수한 위험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내일의 일에 대해선 절대 자만할 수 없는 것이 현대 국가의 객관적인 모습이다.
盧武鉉 대통령의 문제 제기 후 추진되고 있는 軍복무기간 단축은 대표적인 포퓰리즘 정책의 하나이다. 사진은 금년 1월29일 軍부대를 방문한 盧武鉉 대통령. |
포퓰리즘의 속성
이런 점에서 선거란 「국가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위험과 문제의 파악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국가적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국민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성실하게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선거가 국민의 문제의식을 일깨우기보다는 오히려 마비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정치인들의 책임은 다양하고 상충되는 현안들의 우선순위를 잘 살펴서 조화로운 정책을 펴 나가는 일이다. 선거를 의식해 국민의 문제의식을 한 방향으로만 몰고 가는 것은 포퓰리즘의 한 유형이다.
국가 경영의 차원에서 보면 독선의 겉모습이 포퓰리즘이다. 지도자가 국민을 바보 취급하여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공부할 필요가 없고 놀기만 하면 된다』며 피노키오를 꼬이는 동화 속 악당들과 같다.
일반 대중은 피곤한 현실 사회에서 손쉬운 해결책은 없는가 하는 마음속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의 현실 정치에서 포퓰리즘은 노래의 후렴처럼 계속 등장하고 있다. 포퓰리즘은 요즘 등장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기원전 63년, 공화정이었던 로마에서 집정관에 출마했던 카틸리나 장군은 평민들의 표를 얻기 위해 「모든 부채를 탕감해 주겠다」는 정책을 공약했다. 결국 원로원의 반대로 집정관에 뽑히지 못한 카틸리나는 쿠데타를 시도하다 목숨을 잃었다.
「올인」이란 말도 포퓰리즘의 한 현상
우리나라에서도 20년 전 농어촌 부채 탕감과 같은 공약이 등장했지만, 이것은 이미 2000년 전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의 발상지였던 로마에서 있었던 일이다.
1830년대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저서를 통해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 프랑스의 토크빌은 『민주정치가 실패로 끝나는 것은 거의 언제나 그 힘과 잠재력을 악용하거나 오용하는 데서 비롯된다』며 『다수의 절대권력이 최대의 위험』이라고 설파했다. 포퓰리즘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
포퓰리즘의 특징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현실 문제가 복잡한 것이 아니고 한두 가지뿐이라고 강조하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해결책이 있다고 선전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문제는 전임자를 포함해서 타인이 만든 문제라고 떠넘기는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남북관계만 잘되면 다른 것은 깽판쳐도 괜찮다』라는 말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現 정권에서 많이 듣게 되는 「올인」이란 말도 포퓰리즘의 한 현상이다.
「경제에 올인한다」, 「개헌에 올인한다」는 식의 표현은 국정을 책임진 사람들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경박한 행태이다. 모든 일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현대 사회에서 어느 한 가지가 해결된다고 해서 만사형통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늘날 우리의 민생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그 원인을 『左派(좌파) 정부 때문』이라고 하면서, 경제만 잘 되면 모든 사회문제나 남북문제도 해결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도 포퓰리즘의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