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무령왕능 내부 구조와 부장품

鶴山 徐 仁 2007. 2. 20. 21:15
 
 
무령왕능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능 내부>
송산리고분군
1970년 6월 29일 공주의 송산리에 분포한 일단의 고분들에 대한 배수로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무녕왕릉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고, 역사학사상 전례가 없는 대발견이었습니다. 왕릉의 입구를 메우고 있는 밀폐석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놓여있던 묘지석에서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이라는 글귀를 읽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사마왕이란 바로 무녕왕의 릉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일본의 일본서기 혹은 중국의 고대 문헌에 글자 몇 자 씩으로만 모습을 보일 뿐인 무녕왕. 기록 속에서만 희미하게 존재하던 무녕왕이 뚜렷한 모습의 실체가 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그것도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라, 모자를 쓰고 신발을 신고, 칼을 차고, 쓰던 물건을 고스란히 가지고서 1,500여 년 전의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완전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이 무녕왕의 발견은 세기적인 발견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때 발굴된 무녕왕릉을 통하여 서기 500년 경의 백제의 모습을 보고자 합니다.북으로는 고구려의 남하에 대처하고, 동쪽으로는 신라와 다투며 남중국과 왜를 오고가던 국제적인 해상강국 백제. 우리는 그당시의 백제의 모습을 보려하는 것입니다.

무령왕릉의 개요
개로왕 8년(462)에 태어난 백제 25대 무령왕은 40세 되던 해인 501년 왕위에 올라 재위 23년 만인 523년 세상을 떠났다. 무령왕은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활발한 외교정책을 통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한 방어망을 견고히 함으로써 백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무령왕릉은 1971년 공주 송산리 6호분의 습기제거를 위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되었는데, 이 왕릉은 전축분으로 당시 중국과 백제와의 문물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최고의 문화재들은 501년부터 526년이라는 절대년대를 가지고 있어, 백제는 물론 고구려, 신라, 가야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의 유물연구에도 결정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무령왕릉에서는 무덤의 주인공과 장례의식을 알려주는 지석을 비롯하여 왕의 신분을 알 수 있는 금은제의 화려한 장신구들이 많이 출토되어 국내외의 다른지역 유물과의 비교연구에 절대적 위치 를 차지하고 있다.

무령왕릉의 모습

현실의 길이는 4.2m, 너비는 2.7m, 높이는 2.9m이며, 벽체의 경우 4매는 길이모쌓기, 1매는 작은모쌓기를 반복하였다. 벽면은 북벽에 1개, 동서벽에 각 2개씩의 감(龕)을 만들고 이곳에 백자 등잔을 밝혀 놓았다.

무령왕의 지석(국보 제163호)

왕릉 안으로 들어가는 널길 오른쪽에 있던 왕의 지석 표면에는 "무령왕이 62세 되던 523년 5월 7일 붕어(崩御)하여 525년 8월 12일에 대묘[大墓·王陵]에 모시고 지상과 같이 기록하여 둔다." 는 내용이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에는 방위표(方位表) 또는 능(陵)의 위치를 표시하는 묘역도(墓域圖)를 나타내 10간(干) 12지(支)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영동 대장군은 무령왕 21년(510년)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 양 고조(高祖)로부터 받은 작호인데, 당시 양나라의 제2품에 해당하는 벼슬이었다. 사마는 삼국사기의 사마(斯摩)·륭(隆), 일본 서기의 사마와 같은 무령왕의 이름이다. 그런데 무령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천자(天子)나 황제의 죽음에만 사용하는 가장 격이 높은 붕(崩)자를 사용하고 있어 백제 왕으로서의 주체성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한편 무령왕이 붕어한 때(523년 5월)에서부터 장례(525년 8월)를 치르기까지의 27개월 5일 동안 은 빈(殯)의 상태로 있다가 12일을 택해서 왕릉에 장사 지낸 것으로 되어 있어 백제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무령왕능에 사용된 벽돌(←)과 부장품으로 나온 금제관식(↙) 및 석수(↓), 귀걸이 장식 등
 
부장유물
  장신구로서는 왕의 것으로 금제 관장식, 심엽형 귀걸이, 뒤꽂이, 은제 허리띠[ 帶], 금동 신발 등이 있으며 그밖에 각종 금·은제 장식이나 구슬이 발견되었다. 왕비의 것으로는 역시 금제 관장식과 귀걸이, 목걸이, 금·은제의 팔찌 외에도 많은 수의 장식이 발견되었다. 또한 단룡문환두대도(單龍紋環頭大刀)·철모·손칼 등의 무기류, 거울·용기(用器)·숟갈·다리미 등의 청동제품, 청자·백자 등의 자기류, 두침(頭枕)·족좌(足座) 등의 목제품 등 다양한 유물들이 부장되어 있었다.
 
금제관식
  국보 제154호. 1쌍. 높이 각각 30.7㎝, 29.2㎝.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금판 위에 초화형(草花形)의 형태를 그려놓은 뒤에 예리한 조각도로 도려내어 만들었다. 관장식의 전반적인 형태는 비대칭의 인동당초무늬[忍冬唐草紋]이며 군데군데 구멍을 뚫고 얇은 금제 달개[瓔珞]를 금실로 꼬아 매달았다. 이러한 형태의 관장식은 출자형솟은장식[出字形立飾]으로 특징지어지는 신라의 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고구려의 유물인 평양 청암리토성 출토 초화형 금동관과 통하고 있다. 이 관장식이 2점 출토된 것으로 보아 비단으로 된 모자의 앞뒤에 꽂은 장식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자루에는구멍이 뚫려 있어서 모자와 연결시키도록 되어 있다.
 
석수
석조수상(石彫獸像)으로서 백제 무녕왕릉(武寧王陵) 석수와 같은 삼국시대의 것이 있으나 극히 드물며 이후 통일신라시대부터 크게 유행하였으며 고려,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릉 앞에 많은 석수를 배치할 정도로 성행하였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多寶塔) 석사자(石獅子)와 여러 유적의 호석(護石) 또는 장식 등으로, 발해 정효공주묘 앞의 석사자 등과 같이 능묘 장식물로 이용되고 있다. 이렇게 석사자 만이 아니라 석호상(石虎像)도 능묘 앞에서 볼 수 있으며 특히 십이지생초(十二支生肖) 같은 여러 수상(獸像)은 신라·고려를 거쳐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계속 조각되어 각종 유적의 주위를 장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