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곡 선생님의 일화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10만 양병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율곡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와 세가지 준비를 합니다. 먼저 이순신을 찾아가 두보의 시를 가르쳤습니다.
'독을 품은 룡이 숨어있는 곳에 물이 곧 맑네'
이런 내용의 시를 일천번 읽으라고 했는데 어떤 뜻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후일 이순신 장군이 전함들을 제정비하기 위해 섬에 머물러 있으면서 나무를 채집하고 있었습니다. 쿵~ 쿵~ 나무자르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있을 즈음 이순신 장군은 순간 두보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물을 바라보니 매우 맑았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을 시켜서 배 밑을 창끝으로 찌르게 했는데 곧 붉은 피가 바다를 물들였습니다. 왜놈들이 배 밑에 숨어들어서 바닥에 구멍을 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두번째로 이율곡 선생님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을 찾아가서
'서럽지 않은 눈물에는 고춧가루 싼 주머니가 약이니라'
하고 알려줬습니다. 언제 어떻게 쓰일거라는 이야기는 전혀 안하고 말이죠
훗날,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원군을 왔을때그들은 매우 거만했습니다.그들에게 원군을 청하려고 가게된 사람이 바로 백사 이항복 선생이셨는데 도움을 청하기 위해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문득 율곡 선생님이 전해준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고춧가루 싼 주머니로 눈을 비벼서 슬픈듯 눈물을 흘리면서 이여송 장군에게 나아가 원군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율곡 선생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바로 아래에 나오는 화석정 이야기 입니다.
화석정花石亭
197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61호로 지정된 화석정은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 100-1 임진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수려한 경관에 위치해 있다. 화석정에서 바라본 임진강변
"화석정"은 율곡 선생이 국사의 여가와 퇴관 후에 찾아와서 작시, 연구, 묵상을 하였던 곳이다. 율곡 선생의 5대 조부, 강평공 이명신에 의해 세종 25년(1443년) 창건된 것을 성종 9년(1478년)에 선생의 증조부이신 이의석이 중수하고, 몽암 이숙함이 "화석정"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후에 율곡 선생이 다시 중수하여 사용을 하던 이 정자는 전설이 하나 전한다.
율곡이 자주 이곳 화석정에 들러 묵상을 할 때면 항상 기름걸레로 마루 바닥을 닦도록 시켰다고 한다. 율곡은 난리가 있을 것을 미리 예견하고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10년전 유서를 남긴 율곡은 나라가 어려울 때 열어 보라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개성으로 도피하던 선조가 임진나루에 도착했으나, 칠흙같은 밤이기 때문에 건널 수가 없었다. 이때 율곡이 전한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 라는 유서대로 불을 지펴 임진나루 일대는 환해지고, 임금은 무사히 강을 건너 피신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소실되어 80년간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년)에 선생의 종증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동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하고, 1973년에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화석정이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임진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서 경관도 뛰어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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