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100년전 한국: 제2부 - 장터와 장인(匠人), 경제생활의 풍경

鶴山 徐 仁 2007. 1. 11. 19:55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제2부에 수록된 사진들은 보통 사람의 경제생활과 관련된 것들이다. 배경이 되는 공간은 대개 도회의 장터다. 익숙한 사진도 더러 눈에 띄지만, 이렇듯 한데 모인 장터 풍경 사진은 당시 민초들의 생활을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장은 5일장이 일반적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지역의 중심이 되는 고을에 닷새마다 장이 돌아가며 열렸다. 장돌뱅이들은 장 서는 고을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고 또 샀다. 서울에는 시전(市廛)이 있어서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고 일반의 생활용품도 공급했지만, 지방에서는 몇몇 지역에야 겨우 상설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진의 배경에 전신주가 서 있고 성벽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사진 속의 장은 서울을 비롯한 큰 도회의 한가로운 장터로 짐작할 수 있다.

목재소·대장간·잡화상·음식점 등은 가게를 갖추고 있었다. 다듬잇방망이나 통·갓·오지확 등을 파는 상인들은 좌판을 벌였다. 엿이나 광주리, 옹기는 행상들이 엿판이나 지게에 지고 팔러 다닌다. 시장에서 좌판이나 행상을 하는 이의 대부분은 자신이 직접 물건을 만들어 팔았다. 다듬잇방망이나 통을 그 자리에서 능숙하게 만드는 광경이 렌즈에 잡혔다. 지게에 밥상을 잔뜩 얹은 모습은 아예 신기(神技)에 가깝다.

운반수단으로 가장 많이 이용된 것은 단연 소였다. 소달구지에 물품을 실어 이동하거나 소 등에 가득 싣기도 했다. 소는 농사를 지을 때 뿐 아니라 장에 나갈 때도 유용했던 것. 특히 장작이나 솔가리를 내다 파는 나무장수들은 대개 장사가 본업이 아닌 농부들이었다.

시장 풍경을 담은 사진에서 발견되는 공통점 중 하나는 단발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장사에 나선 경우가 적지 않은데 모두 머리를 땋았고 어른들은 상투를 했다. 1895년 단발령이 발표되었음에도 1900년대 초반에 촬영한 사진에 나타난 한국인 대부분이 단발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또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시장에 여자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점을 하는 아낙 몇과, 상점 앞을 지나가거나 음식점에서 나오는 여자가 전부이다. 지역적인 차이가 있었겠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장에 여자들이 나가는 일을 꺼렸음을 시사한다.

갓을 쓴 노인도 눈에 띄지만 대부분은 쓰지 않았다. 의관을 갖춘 양반이 시장에 나오는 일은 여전히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양복을 입은 사람은 아예 찾을 수가 없는 것을 보면 양복 입는 ‘개화쟁이’는 다른 형태의 상점을 이용했던 모양이다. 담뱃대를 물고 있는 상인이 여럿 보인다. 궐련을 피우는 이는 배추밭 주인이 유일해 아직 궐련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이 장에서 엿이나 광주리, 짚신, 빗자루 등을 파는 풍경에선 가난한 현실을 엿볼 수 있다. 더벅머리에 짚신도 못 신어 맨발인 아이도 있다. 두루마기에 갓까지 쓴 새신랑 같은 청년이 닭장을 메고 장에 나온 모습은 묘한 부조화를 자아낸다.

흔히 시장에 가면 살아 있음을 새삼 깨달을 만큼 역동성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2부에 담겨있는 사진들에서는 그러한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손님이 적어서일까, 전체적으로 무기력한 분위기다.

100년 전 이 땅에는 근대로 옮겨가는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당시 시장의 풍경에서는 그 같은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사회의 시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삼천리 곳곳 민초들의 삶의 양상이 총체적으로 바뀌는 일은 서울의 조정이 주도하는 외형적인 조건의 변경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개항을 하고 외국 문물이 쏟아져 들어와도 민초들의 생활에는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삶의 변화는 그처럼 더디고, 그만큼 가혹했다.
다듬잇방망이 만드는 노인 다듬이질에 쓰는 방망이를 깎는 노인. 남의 집 앞에 좌판을 벌였다. 연장으로 나무를 깎고 매끄럽게 다듬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에서 장인 정신이 느껴진다.
목재소 긴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광경. 목공 둘이 위아래에서 톱을 마주잡고 끌고 당기며 나무를 켜고 있다. 주위에는 굵기별로 다른 재목이 쌓여 있다. 당시에는 집을 나무로 지었기 때문에 목재의 수요가 많았다.
통 만드는 장인 담장 앞에 좌판을 열고 통을 만들고 있다. 담뱃대를 입에 물고 능숙한 솜씨로 연장을 써서 나무를 만진다. 앞에는 견본품이 놓여 있다.
갓 공장(工 匠) 남자가 성인이 되면 상투 튼 머리에 갓을 썼다. 신분에 따라 갓의 종류도 다르지만, 대부분은 말총이나 대나무를 실처럼 가늘게 쪼갠 죽사(竹絲)로 만들었다. 단발령으로 갓의 수요가 줄었을 텐데도 좌판에서 갓을 고치고 만드는 공장(工匠)의 표정이 진지하기만 하다.
소쿠리ㆍ빗자루 장수 아이 둘이 장사에 나섰다. 한 아이는 소쿠리를, 다른 한 아이는 빗자루와 짚신을 둘러멨다. 집집마다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을 팔러 동네를 한바퀴 도는 중일 것이다.
엿장수 엿판을 멘 엿장수가 가위로 엿을 자르고 있다. 단것이 귀하던 때여서 ‘엿장수 마음대로’ 잘라주는 엿 맛에 홀린 동네 아이들이 이제 곧 모여들 것이다.
물장수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라 집집마다 마실 물을 사먹어야 했다. 하천의 위생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장수들은 이른 새벽부터 단골집에 깨끗하고 맛난 물을 배달했다. 물지게는 등태에 가로로 길게 댄 막대기 양 끝에 양철통이나 나무통을 달아매 사용했다.
나무장수 땔감으로 쓸 솔가리를 황소 등에 싣고 시장에 나온 나무장수. 혹시라도 소가 달아날까 고삐를 꼭 잡고 있는 사내는 농한기에만 땔감을 해서 장에 내다 파는 농부인지도 모르겠다. 뒤로 성벽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성읍 인근이다.
나무장수 연료로 쓸 만한 것이라곤 나무밖에 없던 시절, 많은 이가 산에서 나무를 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삿갓을 쓴 나무장수가 장작바리를 사갈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배추장수 배추를 밭에서 출하하는 광경이다. 밭주인인 듯 보이는 이는 검은 안경에 궐련을 피고 있고, 담뱃대를 문 장정이 지게에 배추를 잔뜩 얹어 일어서려 하고 있다. 김치의 주재료로 사용된 배추는 일찍부터 수요가 많은 채소였다.
소달구지 달구지는 소가 끌기도 하고 말이 끌기도 했는데, 바퀴가 두 개인 것도 있고 네 개인 것도 있었다. 대체로 북한지방에서 바퀴 두 개 달린 달구지를 썼다고 한다. 사진은 손님을 기다리는 소달구지들.
밥상을 멘 장정 네모 반듯한 소반을 지게에 진 장정들이 웃고 있다. 소반이 널리 사용된 것은 독상이 주로 쓰인 데다 이동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손님을 치를 집에 밥상을 빌려주러 가는 길인지 밥상을 팔려고 장에 나온 길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북한의 소달구지 성을 배경으로 소달구지꾼이 포즈를 취했다. 사진 찍는 것을 보고 있는 순검과 아낙들의 신기해하는 표정이 재미있다. 굴건을 쓴 것으로 보아 소달구지꾼은 상중(喪中)이었던 것 같다.
옹기장수 옹기는 독과 황갈색 질그릇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 백성들의 식생활이 장과 김치 등 발효식품 중심이었기 때문에 장독은 필수품이었다. 대개는 옹기점에서 팔았지만 사진처럼 지게에 옹기를 지고 거리나 집집을 돌며 파는 장사꾼도 흔했다.
닭장수 닭 요리는 음식이라기보다는 보신용에 가까웠다. 닭장을 통째로 지고 시장에 나온 청년은 갓까지 쓰고 있다. 아마도 정작 본인은 집에서 기른 닭으로 삼계탕 한번 못 해먹었을 것이다.
잡화상 시장에 늘어선 점포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만물상이라고 불리던 잡화점에 농기구며 가정용품 등이 흩어져 있다. 재봉틀이 보이는 곳에 재봉소라는 간판이 내걸려 있다.
음식점 길거리 쪽으로 음식재료를 펼쳐놓은 음식점. 뚝배기가 포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장국집인 것 같다. 장에 나와 필요한 물건을 찾다가 배가 출출해진 사람들이 국말이로 요기를 하던 곳이다. 서서 음식을 먹던 손님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염색 가게 장터에 판을 세워놓고 옷감에 물을 들이는 모습. 가게는 뒤에 있었을 것이다. 물동이를 인 아낙이 지나가다 멈춰서 구경하고 있고, 사진 찍는 것이 신기했던지 아이 둘이 바라보고 있다. 맞은편에 안경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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