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스크랩] <아 목동아>

鶴山 徐 仁 2006. 12. 19. 11:04
우리가 일요일을 보내는 방법은 각각이다.
그러나 큰 원칙은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보내어야 한다는 불문율같은 것이 서 있는 듯하다.그래서 일요일에는 친구들 서로간에 전화도 자제한다.
나는 여느 서울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족과 함께 서울 인근의 산을 찾는 것이 주된 일이다. 북한산, 도봉산, 청계산, 관악산, 대모산, 우면산, 남산, 강화도, 팔당댐 등을 차례로 찾아가 본다.
휴일 온종일 등산에만 바치기가 아까와 아침나절에 11시까지 조금 독서를 한다.
이들 산과 유원지들은 각각 특징이 있어서, 철 따라 형편따라 골라서 찾아가게 된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골프장을 찾거나 카지노를 찾지만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삶이다. 나와는 완전히 무관한 것들이다.
골프를 하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사실 비용이 부담이 되고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다.
내가 강북에 사는 탓일까, 아니면 집 앞에 있는 옥수 전철역 탓일까, 나는 특히 도봉산을 자주 찾는 편이다.
전철을 타면 한 20분이면 도봉산 입구역에 닿는다.
가을 기운이 안개처럼 퍼지는 오늘 아침, 아침 나절에 약간의 독서를 하고 점심 때를 맞아 도봉산 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점심은 좀 야외에 나가서 사먹고 싶었다.
도봉산 입구에 숱하게 늘려 있는 순두부 집에 들러, 동동주 한잔을 반주로 하여 두부를 먹었다. 가을이 오는 소리가 개울물소리처럼 계곡마다 가득하였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한없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성 동기들과 졸업한 대학의 동기들이 있어서 가끔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내 삶의 축복이다.
그것은 망각으로 사라진 내 젊었던 시절에의 그리움과 회한일 수도 있고, 아니면 황혼이 비껴든 들녘에 선 초로의 사내가 가지는 인생에의 따뜻하고도 진실된 작은 한 소망일 수도 있다.
도봉산 입구 매표구를 지나, 철종과 고종을 세운 조대비(익종 비)가 주로 기도처로 했다는 광륜사를 지나면 산모퉁이를 돌아가게 된다.
고종은 대원군 이하응의 아들로서 사도세자의 서자의 피를 받은 혈통이다. 그러나 조대비는 고종을 자신의 자식으로 입적시켰고 그에게 제왕으로서의 정통성을 부여하였다.
매표구를 지나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 산모롱이 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섹스폰을 구슬프게 부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약간 불구인 것같았다.
나는 오늘 근 반년만에 도봉산을 찾았고, 무심코 이 산모롱이를 지나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섹스폰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아 그 사람이구나. 그가 아직도 여기서 섹스폰을 불고 있구나, 하는 탄성이 일었다.
그는 음악적 소양이 있는 사람인지,언제나 이름있는 가곡을 불렀다. 유행가같은 것은 결코 들은 적이 없었다. 이 분이 얼마나 열심히 섹스폰을 부는지, 그가 연주를 할 때는 그의 굵은 목에는 퍼런 핏줄이 지렁이처럼 기었다.
나는 그분에게 다가가 약간의 지전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는 <바위고개>를 연주하고 있었다.
가을이 오는 계곡에 이 곡이 울려퍼지니 웬지 조금은 감동적이었다. 걸음을 재촉하던 나는 저쯤 바위 위에 엉덩이를 내렸다. 그분에게서 멀어지니 곡이 가물가물 흐려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불현듯, 내가 약간은 젊었던 시절에, 나의 쌍동이 아들놈들과 함께 여기 도봉산엘 와서 그놈들 손에 각각 지전을 들려보내 이 섹스폰 주자에게 준 기억이 되살아 났다.
그 때도 이 분은 아마도 바위고개를 연주하신 것같았다.쌍동이놈들이 서른고개를 바라보고 있으니, 아마도 이십년은 더 된 것만 같았다.
다듬 순간, 나는 전신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꿈결같이 흘러간 그 세월의 무게에 순간적으로 짓눌린 탓인 듯했다. 나는 얼어붙은 듯 그 바위 위에 앉아서 오래 오래 그분의 연주곡 세곡을 들었다.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분은 가슴을 파고드는 페이소스 깃든 곡만을 연주했다.
나는 가족을 시켜 약간의 지전을 더 주고, <아 목동아>를 신청하였다. 무슨 노래방도 아닌데, 곡을 신청하다니 조금 우스운 일이었으나 나는 어쩐지 이분이 연주하는 이 곡을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즉각 신청곡을 불렀다. 내 가슴과 영혼을 파고드는 그 곡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귀엽던 아기들이던 아들놈들은 다 장성하여 내 곁을 떠나 미국에 가 있다. 나는 환갑 진갑 다 지낸 노인이 되어 있구나 하는 엉뚱한 탄성이 일었다.
흑인 가곡인 <아 목동아>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연주하는 악기에 따라 그 느끼는 정감이 다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특히 2절의 가사는 사실 눈물을 흘리지 않고 부르기가 어렵다는 정평이 나 있다. 악기로는 섹스폰이 제격이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나의 부중시절을 회상한다. 음악시간에 이상필 선생님에게 이 곡을 배웠는데 얼마나 어렵던지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이상필 선생님은 돌아가신지 몇년이 되었을까. 우리는 인생의 목장을 거니는 한낱 목동일 뿐이다.
최근에 작고한 윤인우, 백승해, 장용락이 부중 시절의 절친한 친구들이다. 작년 겨울 눈 내리던 날 부중 남 여 친구들이 몇명 모였는데, 나는 대뜸 이분들에게 명복을 비는 기도를 올리자고 제의한 적이 있었다. 다들 어리둥절했으나 금방 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의 창가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가을은 도봉산 뿐만 아니라, 여기 청계천변에도 안개를 피우면서 흐르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겨울이 오는 소리를 들으니 웬지 기쁘기 보다 세상이 많이도 변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일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월따라 변하여 변하여 결국 우리는 흙으로까지 변해가는 것이리라.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재경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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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山 ;

불문학을 전공하고, 작가로서. 교수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동기생인 정박사의 글을 읽고 보니, 새삼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면서, 먼저 간 동기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특히, 인우의 죽음 앞에는 캐나다 김박사와 함께 남다른 감회와 회상에 젖지 않을 수 없었는 데,

이제 연이어 명을 다 하고 떠나는 친구들이 줄을 이어니 삶의 의미를 한층 더 하는 것 같다.

친구들만 떠나는 게 아니라 마지막으로는 자신마져 살아있는 이들의 곁으로 부터 떠나 영원한 여행의 길로 멀어져 갈 터인데 제대로 채비를 갖추고 살고 있는 것인 가를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