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軍事 資料 綜合

明나라의 조선출병과 이여송장군의 전술

鶴山 徐 仁 2006. 11. 25. 13:19
작성자 : 김남훈
明나라의 조선출병과 이여송장군의 전술(지금까지 잘모르던 역사적 사실)
1592년 조선에서는 전대미문의 국제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것이다. 무능한 조선조정은 일본으로 보낸 사신들조차도 출병이 임박했음에도 애써 외면했다. 당시 조선선조는 무능한 대표적인 임금이었고 국제정세를 판단을 능력도 인식도 없었다.

일본열도를 통일한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1590년 조선국왕에서 국서를 보내어 "이제 명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니 조선은 호응해 줄것을 바란다"고 요구했다. 정명가도를 요구했다.
당시 명나라도 일본이 조선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정보를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일본의 국서를 전달하지 않고 적당히 얼버무리기로 정했다.
그런데 조선의 사절이 북경에 들어가자 이미 명나라조정에서는 알고 있었다. 황망해진 조선사절은 있는그대로 보고를 하자 신종황제는 일본에 사절을 보내 내막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안이하게 처신한 조선에 불똥이 튀었다. 조선조정은 당시 국제정세에 전혀 무지하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당파싸움에 열중하고 있었다.

오랜전란으로 인해 많은 병력을 유지했던 일본군이 4월12일부산에 기습상륙하여 총 9만명의 병력이 조선반도의 남부로 쏱아져 5월2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없는 최단진격이였다.
다음달에는 평양까지 함락되었다.

선조는 압록강의 의주에 행궁을 삼고 여차하면 요동으로 피난갈 준비를 했다.
원군을 요청하는 사신들이 조선에서 달려왔다.

명나라 조정은 경악을 했다.조선전체가 함락되면 큰일인것이다.

명나라 조정은 황제가 참석한 회의가 연일 열렸지만 연일 격론이 벌어졌다.

"변방은 중국의 정문이고 사방의 오랑케는 우리의 울타리다 우리가 오랑케를 지켜준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논리가 참전 반대대신들의 논리였다.

"조선과 중국은 입술과 이빨의 관계인데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리고 조선은 다른 오랑케들하고 다르다 조선은 잃으면 안되는 울타리다"
이것이 참전파의 논리였다.

결국 명나라 선종황제는 참전 성지를 내렸다.

10월에 참전준비에 들어가서 대장군 이여송장군이 4만의 병력을 이끌고 12월에 조선에 진입했다.
1593년 정월 평양에서 명나라군대와 일본군이 정면으로 붙었다.

치열한 전투가 밤낮으로 계속된 끝에 평양성을 탈환하고 개성까지 탈환하고 황해, 평안, 경기, 강원도까지 모두 수복했다.

그러나 크게 패하던 일본군도 벽제관에서는 매복공격을 펼쳐 명나라군대가 크게 패했다.

이여송 대장군까지도 포로가 될뻔했다.

일본군도 지치고 노니시 유끼나가장군도 명나라가 참전으로 조선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도 힘들다는것을 알고 일본군 사기가 떨어진것이다.

결국 부대를 남부지방으로 후퇴시켜 축성을 하고 장기전에 돌입하기로 했다.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교섭에 들어간것이다.

그러자 조선조정은 다시 난처한 지경에 빠지고 강화를 결사 반대했다.
선조임금은 "중국은 부모국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서로간에 외국으로 모두 중국에있어 아들과 같은 나라다. 부모에 잘하는 자식은 효자인 조선이고 일본은 도적의 자식이다. 부모는 자식에 재애를 베풀지만 도적아들을 사랑한다고 하면 어찌 효자아들보다 더 사랑하겠는가?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있는 것이였다

강화와 담판이 진행되는 와중에 일본군이 진주을 점령하고 성내 주민 6만명을 살륙했다.
조선조정은 경악하고 명나라 조정에 보고했다.

그러나 명나라도 남부지방의 반란과 만주지역과 몽골지역의 군벌들로 인해 도저히 조선에서 전쟁을 지속할 수없은 상황이 된것이다.

1597년 정유년에 일본군이 더욱 많은 병력을 조선에 상륙시키고 도요도미는 총공격명령을 내렸다.
다시 전쟁이 시작되자 명나라도 병력을 급파하여 일본군과 명나라군대는 총세 14만명에 이르렀다.

8월에 남원에서 명나라장군 양원이 이틀동안 항전하다가 철수하자 함락되어 일본군의 손에 떨어지고 전주의 명나라군대로 퇴각을 했다. 남원과 전주가 일본군 손에 떨어지자 서울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평양에 주둔하던 명나라군대가 대거 남하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여 울산에 주둔하던 가도 기요마사장군부대를
공격하고 고립시켰으니 고니시유키나가장군의 계락에 빠져서 명군은 크게 패했다.

전투의 희생이 극심하였기에 쌍방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가서 서로 대치만 하게 되었다.

명군은 수군없이는 일본군을 막을 수없다고 판단하여 본국에서 수군이 파병되었다.
1598년 봄에 진린, 등자룡이 수군을 이끌고 조선에 도착했다.

울산전투의 패배를 거울삼아 동시에 수군이 여러전선에서 작전을 펼쳐서 일본수군을 물리친다는 전술을 택했다.

명나라 의 마귀장군이 인솔하는 부대는 울산의 가토기요마사부대를 공격하고 명나라유정장군은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부대를 공격하고 명나라 수군은 진린장군이 조선의 명장 이순신을 통솔하기로 했다.

9월말에 3갈래고 진격했으나 동과 서로로 진격은 순조로왔으나 중로로 진격한 명나라육군이 일본군의 포병공격에 패한것이다 그만큼 일본군의 저항도 결사적이었다.
결국 장기간 준비한 전투가 실패로 돌아갔다.

명나라 조정은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없고 국가재정이 파탄날 지경이었다.
농민반란군도 토벌못할 정도였다.
그때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전갈이 들어오고 일본군도 더이상 전투를 할 의욕도 능력도 상실할 정도로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고통스러운것은 조선의 겨울이었다.
추운겨울을 경험하지 못한 일본군은 동상환자가 수천명이 넘었다
조선과 일본은 바다를 두고 있는 전쟁지역이기 때문에 철수도 마음대로 할 수없었다.

결국 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이 만든 거북선때문에 일본군의 피해가 막심했다.
그러나 공을 시기한 간신배들이 모함하여 이순신을 투옥하고 무능한 후임 때문에 조선수군은 전멸당했다.

전쟁영웅인 이순신을 시기하고 모함하여 이순신장군을 투옥하는 당파싸움의 극심함을 보이는 조선조정에 명나라장군들은 아연질색할뿐이었다.

명나라장군들은 무능한 조선조정에 압력을 넣어서 이순신을 석방토록하고 노량해전에서 명나라군과 합동작전으로 고니시부대와 시마츠부대를 쾌멸시켰다.
일본수군 200척을 격침시켰다.
이전투에서 이순신장군은 전사했다.

명나라장군으로 서열 2번째인 명군 수군제독인 부총군 등자룡장군도 이전투에서 전사했다.

바다에서 패전한 일본군은 퇴각할 수도 없이 고립되기 시작했다.

해전의 결정적인 패전으로 고립된 일본군의 마지막 주둔지인 乙山에서 일본군은 다이라노야쓰나리장군과 다이라노야쓰히데장군은 조선에서의 마지막 전투를 명나라군대와 혈전끝에 항복했다. 이로서 조선에서의 전쟁이 끝났다.

명나라군대는 조선을 구해냈지만 조선조정은 여전히 당파싸움중이었다.
군대조차도 제대로 없는 조선을 명나라군대가 커다란 희생을 치르면서 구해내었지만 조선은 강토가 폐허가 되고 일본역시 막부정권이 무너졌다.
그러나 일본역시 인적손실은 어마어마한 정도였다.

1599년 윤4월에 명나라 신종황제는 조선에서의 전쟁이 끝났다는 조서를 발표했다.

명나라의 참전으로 조선을 구해냈지만 명나라는 반세기를 못버티고 멸망으로 향했다.
조선은 그이후도 정신못차리고 당파싸움만 하다가 후금인 청나라군대에서 함락당하고 남한산성에서 항복하게 된다.

조선은 다시 명나라의 은혜만 생각하고 국제정세에 까막눈으로 공자왈 맹자왈을 외치고 다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았겼다. 총한번 못쏘고 한일합방으로 멸망하고 다시 중국은 일본과 전쟁을 벌리고 결국 만신창이가 되었다.
역사의 아리러니다.

한중관계사를 중심으로 사실그대로 서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