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광주사태와 김대중의 노벨 평화상 수상 | |
번호 : 31 글쓴이 : 역사학도 |
조회 : 606 스크랩 : 9 날짜 : 2005.02.14 19:34 |
아마 518 광주사태의 영웅들을 꼽으라면 1980년 5월 25일과 26일 양일간 몇명의 시민군이 계엄군과 밀통하여 도청 지하에 폭파 장치된 8t트럭 분량의 다이너마이트 뇌관을 비밀리에 제거하였던 작전이었을 것이다. 폭도들이 도청지하실에 장치한 폭탄은 이리역 폭발사고의 몇 배가 되는 분량의 TNT였다.
광주사태를 흔히 광주시민과 계엄군의 대결 구도로만 잘못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폭도들이 광주 파출서들을 습격함으로 시작된 광주사태의 첫 구도는 광주 경찰과 광주 시민들간의 충돌 구도였으며, 제2단계는 시민군과 계엄군의 충돌 구도였으며, 제3단계는 광주 시민 대 광주 시민간의 대결 구도였다. 항간에 잘못 알려진 것과는 달리 광주사태에 참여한 대학생 수는 극히 적었다. 광주사태는 노동자들과 무직자들에 의해 일어났다.
그리고, 폭도들이 시민군을 결성하여 도청을 점령한 후에 전남대생들은 무기 자진 반납을 호소하는데, 이들을 수습파 혹은 온건파라고 부른다. 변호사, 종교인 등 광주시 지도급 인사들도 강경파(혹은 폭도)들에게 무기 자진 반납을 호소하던 수습파였다.
비록 5월 21일에 20만명의 시민군이 200여명의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내었으나, 5월 22일부터 광주시민들 대다수는 수습파 혹은 온건파 편에 섰다. 여기서 수습파 혹은 온건파는 시민의 무장과 폭력을 강력하게 반대하던 시민들을 말한다. 강경파(혹은 투쟁 지도부)가 계속 유혈 투쟁을 선동하였을 때 광주 시민들은 "저 사람들 빨갱이 아니야?" 하며 이상한 눈초리를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당시 절대 다수였던 온건파의 입장에서도 광주사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전남대 학생들도 온건파였으며, 만일 강경파가 한명 있었다면 김종배인데, 그의 거짓말 어록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 보기로 하자.
수습파 학생대표는 김창길이었다. 25일 오후 5시경 수습위원 김기홍 변호사가 자기를 만나러 도청에 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폭약이 폭발하면 직경 4㎞이내가 잿더미가 되어 버리므로 이를 지키고 있다며, 3일동안 잠을 못 잔데다가 인원이 부족하여 지키기 어려우며, 언제 폭도들이 들어와 폭발시킬지 모르니 어른들이 함께 지켜달라고 울며 호소하였다.
김창길 외에도 폭약을 관리하는 시민군 몇명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광주시를 대폭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결사적으로 폭약 유출을 막았다. 때로는 막무가내로 폭탄을 빼앗아가려던 시민군 동료들과 싸워야 했다. 며칠째 잠을 못 자면서 다이너마이트 유출을 감시하던 이들은 광주시의 안전을 위해서는 다이너마이트 뇌관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방법을 찾지 못하던 중 金基錫 전교사 부사령관이 극비리에 이들과 밀통하고 군인 한명을 보내 25일~26일 양일간 도청 지하실의 TNT 뇌관을 모두 제거하게 하였다. 다른 시민군에 발각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던 상황에서 이것은 광주시를 다이너마이트 폭발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수행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계엄군이 도청 지하실의 다이너마이트 뇌관분리작업에 성공한 날이 광주에서 해방구(공산당 자치행정구)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때는 북한이 남한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면서 남침하려는 한다는 북한의 남침작전 정보를 입수한 한국 정부에 미국이 미 항공모함 급파 소식을 통보하던 때였다. 따라서 북한에 오판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면 광주사태는 조속히 수습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만일 5월 26일까지 도청 다이너마이트 뇌관이 제거되지 않았더라면 계엄군은 도저히 27일 새벽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왜 그러한가. 광주 시민의 생명이 인질로 잡혀있기 때문이다.
폭도들이 "국군이 광주에 들어오면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터뜨려 광주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하였을 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가 아닌가? 북한이 툭 하면 미국에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말하였을 때 누구를 인질로 삼았는가? 바로 대한민국 국민이다. 투쟁 지도부가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겠다고 위협하였을 때 그 인질은 광주 시민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서울에 쏘겠다고 위협하였을 때 그 인질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광주시민의 생명을 인질로 삼은 다이너마이트 폭약--그것은 계엄군의 진압 작전의 무력화를 의미하였다. 광주시민의 생명을 인질로 삼은 다이너마이트 폭약--그리고 그것은 북한이 남침해도 미 항공모함이 우리를 도울 수 없음을 의미하였다. 1975년 월맹이 미국의 참전을 불가능하게 하고 월남을 적화통일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전술 역시 월남 중부 지방의 시민들을 인질로 삼았었다.
그러면, 어째서 이처럼 순식간에 광주 일대를 잿더미로, 광주시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폭약이 도청 지하창고에 설치되었던가? 朴南宣(35·당시「市民軍」상황실장의 증언을 들어보면 언제나 이런 사건 배후에 누군가의(그 자들이 간첩일 가능성을 우리가 열어두어야 하는) 자들의 선동이 있었다. 김종배 등 스스로 광주사태 유공자임을 자처하는 자들은 많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선동에 휩쓸려 엄청난 일들을 저질렀다. 예를 들어, 5월 21일 시민군이 국군을 깔아죽일 때 사용했던 장갑차는 이렇게 탈취된다.
<< 가톨릭센터 앞에 있던 몇 사람의 청년들이 시민들을 향하여 외쳤다. 『아세아자동차공장에 가서 차를 끌고 나옵시다! 우리도 무장이 필요하고 무장을 위해서는 우선 차량이 필요합니다. 같이 갈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시오!』이삼십명의 청년들이 일시에 소리친 청년들 앞에 모여 섰다. 앞으로 나선 나는 모인 사람들과 함께 차창이 모두 깨진 시내버스를 타고 곡괭이자루와 몽둥이를 창밖으로 내 차체를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광천동에 있는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달려갔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羅州에 가면 광산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오자고 하였다. 버스는 미친 듯이 나주를 향하였다. 버스에 타고 있는 모두는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南平을 거쳐 나주 시내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열렬히 환영하며 빵과 음료수들을 실어주었다. 청년 두사람이 버스에 올라타더니 나주경찰서에 무기가 있다고 하면서 경찰서로 안내하였다. 두사람도 광주의 소식을 듣고 우리들이 무기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나주경찰서는 榮山浦쪽으로 가는 도중의 나주소방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버스에 탄 우리들은 나주경찰서로 들어갔다. 경찰서 안에는 경찰관들이 한사람도 보이지 않고 우리들보다 먼저 도착한 시위대들이 무기고를 부스고 무기를 꺼낸 다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우리들은 M1소총 AR소총 카빈소총 실탄 등을 주는 대로 싣고 광주로 달려갔다. 광주로 가는 도로에는 수많은 차량들이 시민들을 가득 실은 채 광주로 광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때 시민군은 8t트럭도 탈취하여 화순광업소에서 약탈한 다이너마이트를 가득 실어 광주에 운반하였다가 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하자마자 도청 지하창고에 폭파장치를 하였다. 그런데, 그 날 나주에서의 약탈에 대해 전혀 다른 두 시각이 있다. 朴南宣(당시 市民軍 상황실장)은 이렇게 말한다:
<< 나주 시내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열렬히 환영하며 빵과 음료수들을 실어주었다. >>
그러나, 익명의 한 시민은 나주 주민의 입장에서 전혀 다른 시각에서 시민군의 약탈을 증언한다:
<<천년 고도며 선비의 고장이요 광주학생운동의 시발점이라며 애향심이 유별나던 나주의 중심가 남고문 로타리에 누가 세운지 모르는 이상한 기념비가 바둑판 크기의 대리석에 우뚝서있다. 이비문에는 24년전 광주항쟁당시 광주로 진입하기위해 서남부 시군에서 무장한 자칭 시민군들에게 읍민들이 김밥을 날라주며 항쟁을 지원하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소요사태이후 맨처음으로 예비군 무기고가 털린 지역에서 시민군을 자처한 무장한 시위대로 인해 19일 오후 3시 이후 인구 3만여명이 살고있는 나주는 주민들이 문을 굳게 닫고 모든상가가 4일동안 철시를 한 마당에 김밥 지원을 했다니? 더구나 지방민도 아닌 외지 난동꾼에의해 지역 예비군 무기고가 피탈 당했는데 이들에게 시위 격려로 음식을 제공했다는 내용의 기념비라니? 사태가 수습되고 이들에게 김밥 3백여명분을 제공했던 당시 나주부군수는 억울하게 파면조치를 당했다.
기념비에 새겨진 김밥의 정체는 다름아닌 이틀전 5.17일 도청앞 시위 진압차 출동한 나주경찰서 소속 전투 경찰을 위문하려고 마련된 김밥이 19일 광주 나주간 교통이 중단되고 전달되지 못했던 3백명분의 김밥이 나주 군청내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사태가 악화되고 멀리 진도 시민군이란 명찰까지 나붙은 시위대 수백여명이 나주에 진을치고 총을 쏘아대며 횡포를 부리자 그들을 달래느라 보관중인 김밥이 전해진 것인데 이무슨 날벼락 같은 내용의 기념비가 항일정신의 고장이란 비단고을 나주에 보란듯이 세워져 있단말인가. 더욱 사유지도 아닌 대로변에 말이다. 하기야 시장 군수가 모르는 일도 아닐텐대. 이해는간다. 허수아비를 세워도 김대중씨 공천장하나면 당선된다는 전남에서 이 괴상한 기념비를 누가 철거 하겠는가? 자식들과 손자녀석들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힘없는 노병을....그러나 역사는 왜곡되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신념만은 아직도 용솟음치고있다.>>
이 두 사람의 증언에서 우리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광주시를 한순간에 불바다와 쑥밭으로 만들 수 있는 그 다이너마이트를 나주에서 약탈해간 시민군에 김밥을 제공한 공로로 김대중이 "24년전 광주항쟁당시 광주로 진입하기위해 서남부 시군에서 무장한 자칭 시민군들에게 읍민들이 김밥을 날라주며 항쟁을 지원하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새겨진 기념비를 나주에 세워주었다.
그 다이너마이트가 무엇이던가? 그것은 1975년에 호지명이 월남에 남침하여 적화통일할 때 사용하였던 시민 인질 전술과 똑같은 전술로 김일성이 남한의 사회주의 혁명을 틈타 남침할 때 광주 시민을 인질로 삼을 수 있었던 다이너마이트이다. 김대중이 전세계가 보는 앞에서 악수하는 사진 모델이 되주는 대가로 국가의 5억(혹은 10억)불의 외화를 밀반출하여 김정일에게 비밀송금하였다. 이런 자작극으로 김대중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김정일은 핵무기 개발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그 핵무기로 대한민국 국민을 핵인질로 삼고 적화통일의 수단으로 미국과 협상하고 있다. 그런데, 다이너마이트도 핵무기도 모두 적화통일을 노리는 북한의 인질극과 관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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