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55년 쿠르베(Gustave Courbet, 1814~1877)가 당시의 주목받지 못한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개최한 개인전에 ‘레알리슴’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때부터였다. 현실을 주관적으로 변형·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태도를 보였다. 미술에서 사실주의는 미술사의 유파, 그리고 예술철학적 관점에서 특정한 세계관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되는 미술비평 또는 미술사적 용어이다. 미술사조로서의 사실주의는 일반적으로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나타난 유파를 일컫는 것으로서 G.쿠르베와 H.도미에, F.밀레 등의 화가들이 지향했던 태도와 기법을 의미한다.
쿠르베는 그의 그림에 나오는 농부들과 노동자들의 추한 꼴과 중산층 부인들의 뚱뚱하고 저속한 모습으로 기존 사회에 대하여 항의했으며 밀레(Jean-Francois Milet, 1814~75)는 육체노동의 찬양을 그리며 화면에서 귀족을 밀어내고 농부들을 서사시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도미에(Honore* Daumier, 1808~79)는 부르죠아지의 우둔하고 몰인정한 면을 그리며, 부르조아지의 정치와 법률과 오락을 비웃고, 부르조아적 관습과 예절의 뒤에 숨겨진 그 모든 위선을 폭로한다. 여기서 주제의 선택이 예술적인 배려보다 "사회적" 배려에 의해 결정되었음은 사실이다. 이때는 풍경화 조차도 기존 사회의 문화에 대한 반항의 하나가 되었다. 즉 낭만파 풍경화는 아직도 하나의 독립된 세계이었기에 일상생활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고집할 필요가 없는 어떤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대상을 그린 것이다.
쿠르베는 자신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사회주의적이라는 당시 미술계의 비평에 맞서 “나는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공화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리얼리스트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즉 리얼리즘은 이러저런 방식으로 그려야 한다는 기법이나 방식으로부터 세계관으로 표명되었으며, 이런 경향은 예술을 인종· 시대·환경의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 역사가 H.텐과 소설가 졸라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경향이다. 쿠르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리얼리즘 정신이 구현된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소실되었으나 리얼리즘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 《돌깨는 사람들》과 그 이듬해에 그려진 《오르낭의 매장》일 것이다. 특히 《오르낭의 매장》에서 그는 매장의 세속적인 의미를 강조하여 이 풍경을 사회공동체에 내재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부각시켰다. 매장되는 사람은 누구라도 상관없으며 따라서 죽은 자의 영혼이 어떻게 되든, 또 내세와 어떤 관계를 가지든 상관없다. 매장되고 있는 장소, 그리고 매장에 참여하고 있는 공동체의 성격만이 이 그림의 요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회화적 리얼리즘이다. 쿠르베와 더불어 리얼리스트로 분류할 수 있는 동시대의 화가는 도미에와 밀레이며 쿠르베의 회화를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리얼리즘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정직한 기록이자 현실의 규명(糾明)이며 세계관의 반영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사실주의 화가들의 (프랑스 Barbizon파) 풍경은 숲속의 빈터나 수풀 언저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숙하며 너무나 가기 쉽고 갖기 쉽기 때문에 현대의 도시인에게는 하나의 경고와 책망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하잘 것 없는 주제의 선택에서 우리는 쿠르베, 밀레, 도미에 등의 인물 선택에서 본 것과 같은 민주적 정신의 표현을 본다. 그러나 사실주의는 얼마 가지않아 낭만주의의 풍경화 못지않게 인습적이 된다. 그것은 인상주의의 대두와 관련된다. 즉 사실주의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했지만 그리는 방법상, 기교상에 있어서는 고전의 것을 답습했다는 반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 뒤를 이은 인상주의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 보다는 그리는 방법상의 혁신을 이룩하였다. 그것에 몰두하여 후기로 갈수록 방법의 연구에 치중하게 되었다. 이후 정치적, 사회적 현실과의 관계는 자연히 멀어지며 동시에 인간적 관계도 멀어지며 남는 것은 오로지 예술 그 자체인 것이다. 이제 예술가는 감식가를 위한 예술(화랑 미술)을 하며 민중은 더 이상 예술을 이해할 수도 없고 관심도 갖지않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현실을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태도는 19세기 이전에도 있었으며 그 사례를 구석기시대 원시동굴벽화로부터 북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J.반 아이크와 알브레히트 뒤러, 17세기의 카라바조, 베르메르, 렘브란트, D.벨라스케스, 그리고 F.고야 등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미술사적 맥락에서 사실주의는 19세기 언어적 산물로서 1821년에 샹플뢰리에 의해 제안되어 19세기 중엽에 하나의 예술운동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당시 사실주의는 예전의 미메시스(mimesis:모방)이라는 용어를 대체하여 예술의 실재에 대한 의존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으나, 그 후 일반적인 개념으로 정립됨에 따라 미메시스만큼이나 애매한 것이 되었다. 즉 사실주의가 이론적 용어로 분류되는가 하면 마르크스주의에서 보여지듯 실천적 의미로 통용되기도 한다.
20세기에 들어 추상과 다른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재현적인 경향에 대해 ‘사실주의’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경향이 많다. 그런 만큼 사실주의는 해석하기에 따라 매우 다의적이며, 그 극단적 사례를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서로 모순관계에 있는 언어가 결합된 명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이 사실주의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의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요소이다. 그러나 관학주의와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가 지배하던 19세기 프랑스에서 객관적인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란 과제를 수행하고자 한 사실주의는 당시 미술과 비교해볼 때 전위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그들은 그 시대에 적합한 것은 당시대의 현실 속에서 취해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믿음의 이면에는 자연과학 및 기술의 발달에 의한 자연과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의 고조, 계몽주의 사상의 파급, 프랑스 대혁명을 통한 민주주의 사회의 도래와 실증주의 철학의 확산, 산업혁명, 마르크스·엥겔스에 의한 과학적 사회주의로의 발전이란 사회적 배경과 조건이 작용하였다.
이미 1820년대부터 프랑스 예술계에서 언급되던 사실주의를 자신의 회화에 채택한 쿠르베는 J.A.앵그르와의 천사(天使) 논쟁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천명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즉 고상하고 우아하며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지배적인 미적 규범과 상반되는 노동자,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에 대한 앵그르의 불만에 맞서 쿠르베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나는 그것을 그릴 수 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결코 그리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그 밑바탕에는 19세기 프랑스의 ‘과학주의적 태도’가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쿠르베는 ‘미술에 있어서 성 토마스’ 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토마스의 의심과 같은 맥락에서 쿠르베의 태도는 실증주의와 상응할 뿐만 아니라 E.졸라나 콩쿠르 형제의 예술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과학주의’와 연관을 맺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근대정신의 발현이다. 사실주의는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즉 당시의 사회는 1848년의 정치적 상황을 경험한 세대로 이루어졌다. 프랑스 혁명의 실패, 6월 봉기(1848년6월23일~26일까지 파리의 노동자들이 국민 공장 해체 등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건)의 진압, 나폴레옹 3세의 집권 등, 모든 이상과 모든 유토피아가 실패하고 난 이제 사람들은 사실에, 그리고 오직 사실에만 집착하고자 하였다.
사실주의의 이러한 역사적 근원은 反낭만주의적 성격을 띈다. 즉 낭만주의식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거부하고 사실 묘사에 있어서 철저한 정직성을 요구한 점, 개관성과 사회적 단결을 보장하는 길로서 개성의 배제와 무감각성을 추구한 점, 현실을 인식하고 묘사하는데 그치지않고 그것을 개조하려는 자세로서의 행동주의, 그리고 소재의 선택과 감상자 층의 선택에 있어서 대중적인 경향-이러한 특징들이 사실주의의 정치적 근원과 관련된 것이다. 이에 反사실주의적 태도를 취한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편견들을 미학적 논쟁의 전개로써 은폐하고자 했으며 이는 오늘날의 현실과 상응한다. 그들이 주장하기를 사실주의는 모든 이상과 윤리를 배제하고 갖은 추악하고 비천한 것, 병적이고 음란한 것에 탐닉하여 현실을 무분별하고 맹목적인 것으로 모방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꺼린 것은 사실주의가 현실을 얼마나 모방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현실을 모방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그들은 사실주의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이루어 놓은 美의 가치관을 파괴하며, 수많은 혁명과 사회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1850년까지 거의 변함없이 심미적 이상만을 추구하던 작가들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해 투쟁하는 무기로써 사용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주의는 합리적 질서 위에서 대상을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형식화나 데포르마숑을 행하지 않는 예술사조이다. 대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미술사적으로 볼 때, 사실주의는 그 의미가 다양하여 명확하고 일관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19세기의 사실주의가 흔히 낭만주의 및 이상주의와 대립된 개념이었던 데 비해, 20세기의 사실주의는 추상적이란 말과 대립된 개념으로 쓰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실주의는 자연의 존중과 관찰이 그 주요한 과제였으므로 이런 점에서는 자연주의와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주관을 피하고 대상의 엄격한 객관화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작가의 개성이 반영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리얼리스틱한 표현이라 해서 자연이라는 패턴의 단순한 반복만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주의는 각 시대, 각 작가에 따라서 독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를테면 구석기 시대 동굴의 벽화, 헬레니즘의 조각, 반 아이크 형제, 뒤러, 벨라스케스, 고야등의 작품에서 사실주의의 여러 면모를 볼 수 있다. 역사적 유파로서의 사실주의는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낭만주의 및 이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유럽에 확대되었는데 그 발생에는 부르주아의 대두, 과학의 발전, 기독교의 권위 추락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도미에의 시니컬한 사실주의는 쿠르베의 이상화 및 공상화를 배제함으로써 사실주의의 정점을 이루었다. 독일에서는 라이플, 벨기에에서는 뫼니에등의 작품에서 리얼리스틱한 생활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실주의는 변질되어 이념과 기법이라는 양극으로 분열된다. 19세기 후반에 발명된 사진이란 새로운 기술의 급속한 보급으로 사실주의가 추구해 온 대상의 객관적이고 엄밀한 재현은 더 이상 예술가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계속되는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서 화가는 늘 사회와 인간에게 눈을 돌리고 진부한 외관만의 묘사를 초월하여 새로운 현실상을 그림으로써 이념과 기법으로 분극된 사실주의는 서로 교차하면서 유파를 초월한 미술의 저류를 형성해 왔다. 한편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서의 사실주의는 독일, 멕시코, 미국, 소련등지에서 각각 독자적인 전개를 보이고 있다. 독일의 사실주의는 오토 딕스, 게오르게 그로츠, 막스 베크만, 케테 콜비츠 등으로 대표된다. 멕시코에서는 1912년 혁명에 뒤이어 일어난 내전에 참가했던 시케이로스, 리베라, 오로츠코등의 화가들이 식민지 시대의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멕시코적 사실주의인 이른바 '멕시코 르네상스'를 확립했다.
미국에서는 1930년대 뉴딜 정책하에 실업 구제를 위해 민중 생활 묘사나 벽화 제작에 미술가들이 동원되어 미국 풍경화파란 일련의 사실주의 경향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부터 뉴 리얼리즘이란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주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팝 아트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실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사실주의는 반추상적이란 개념은 물론, 전통적인 것, 기존의 예술 사조에 대한 가치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말로 쓰인다.
예술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발생하였으므로 인간을 위하여 수단시 됨은 학문이 수단시 됨과 같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것을 수준의 저하로 보거나 정치, 사회의 예속으로 본다면 예술은 더 이상 인간과의 관계를 끊고 작가 개인의 유희로 그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실주의가 나름대로 인간의 삶에 복무하려 했으나 그 정치적 여건 즉, 민중을 배반한 부르조아지의(민중과 더불어 민주를 위하여 싸웠으나 자신들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했음) 정치적 영향력이 극대화 됨과 동시에 예술은 부르조아지가 편승한 사회질서 체제로 흡수되어 하나의 상품가치로 전락해 버린 것과 같다. 그러나 언제인가 민중의 힘이 강대해진다면 예술은 그 옛날 귀족에, 시민계급(부르조아)에 복무했듯이 민중에 복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혼자만의 상상일 수 있겠으나 오늘날의 미술이 사회 현실과 멀어져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라 여겨진다. 여하튼 그 당시 사실주의가 오늘날에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은 그 형식적 측면보다는 정신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주의는 전 역사의 기간에 끊임없이 민중의 삶에 기반을 두면서 이어져 왔으나 사실주의가 역사의 주인이 된 시기는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의 중간기라 할 수 있다. 결국 사실주의는 이후의 사조인 인상주의에서도 그 명맥이 없어지지않고 그 정신은 살아 계속 이어졌고 오늘날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쿠르베 ( Gustave Courbet : 1819.6.10~1877.12.31 )
프랑스의 화가. 스위스 국경 가까운 프랑슈 콩테의 오르낭 출생. 1840년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연구를 위해 파리로 나왔으나 얼마 후 화가를 지망하여 화숙(畵塾)에 다니며 회화습작에 몰두하는 한편 루브르미술관에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파의 거장들의 작품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1844년 살롱에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하고, 1849년 《오르낭의 매장》에서는 이색적 화재를 인정받았으나 1850년의 《오르낭의 장례식》은 화단의 평론을 양분하는 물의를 일으켰다. 지나치게 실경(實景) 묘사에 치우친 불경스런 희화(戱畵)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돌 깨는 사람》(1849), 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노작 《화가의 작업실》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이 작품의 출품을 거절당하자 몽테뉴가에 손수 가옥(假屋)을 짓고 입구에 ‘사실주의’라는 큰 간판을 걸고서, 이 작품을 비롯한 40여 점의 자작품을 전시하여 자신의 예술상 입장을 도전적으로 표명하였다. 그 후, 《센강변의 처녀들》(1856) 외에 많은 수렵도, 거치른 바다풍경, 나부(裸婦) 등을 제작하였으나 71년 파리코뮌 때, 나폴레옹 1세 동상의 파괴책임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객사하였다. 그의 견고한 마티에르와 스케일이 큰 명쾌한 구성의 사실적 작풍은 19세기 후반의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큰 의의를 남긴 것이다. 대표작에 《나부와 앵무새》(1866) 《사슴의 은신처》(1866) 《샘[泉]》(1868) 《광란의 바다》(1876) 등이 있다.
도미에 ( Daumier, Honore Victorin : 1808.2.20~1879.2.11 )
프랑스의 화가·판화가. 5세 때 유리직공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공증인 사무실의 급사나 서점 점원 일을 하며 고생하였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석판화 기술을 습득하였다. 1830년 《카리카튀르》지 창간에 즈음하여, 이 잡지의 만화기고가로 화단에 데뷔하였고, 1832년 국왕 루이 필립을 공격하는 정치풍자만화를 기고하여 투옥되었다. 1835년 언론탄압에 의한 이 잡지의 발행금지 후에는 사회·풍속 만화로 전환하여, 주로 《샤리바리》 지상에서 활약하였는데,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는 민중의 진정한 모습을 때로는 휴머니스틱하게, 때로는 풍자적인 유머를 담아 그렸다. 그 후 40년간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생태를 풍자하였다. 그의 석판화 제작량은 통산 4,000점에 이르고, 이 밖에 목판화가 있다. 그리고 40세경부터는 서민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한 유화나 수채화 연작을 시도, 날카로운 성격묘사와 명암대조를 교묘히 융합시킨 이색적인 화풍으로 《세탁하는 여인》 《3등열차》 《관극(觀劇)》 《돈키호테》 등 걸작을 남겼다. 석판화의 대표작은 《로베르 마케르》이다. 그의 유화나 수채화는 그가 죽을 때까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죽기 1년 전인 1878년에야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거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게다가 만년에는 거의 실명상태로 친구가 제공한 발몽두아의 조그만 집에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밀레 ( Jean Franiois Millet : 1814.10.4~1875.1.20 )
프랑스의 화가.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 출생. 1833∼36년 셰르부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37년 장학금을 얻어 파리로 진출하여 P.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루브르미술관에서 푸생, 르냉, 샤르댕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48년 살롱에 출품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루브르미술관 소장)은 그 후 농민생활을 그리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49년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지와 맺어져 있는 농민생활의 모습과 주변의 자연풍경을 그렸다. 이 시절에 T.루소, C.코로 등과 친교를 맺고, 빈곤과 싸우면서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詩的)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派)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는 오히려 농민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 그런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상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만년에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아 화가로서의 영광을 누렸으며, 68년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주요작품 중 《씨뿌리는 사람》(50) 《이삭줍기》(57) 《걸음마》(58) 《만종》(59) 등은 발표 당시부터 주목을 끌었으며, 만년의 가작 《봄》에는 빛의 효과에 있어서 인상파를 예고하였다. 그 밖에 《우유 짜는 여인》 《저녁기도》 《실 잣는 여인》 《괭이 가진 남자》 《젊은 어머니와 아기》 등이 있고, 소묘와 판화 등의 작품도 많다.
출처 : 작은畵室
글쓴이 : 독일병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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