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회화 운동이 일어난다. 인상주의는 단일한 이념이나 명백한 원리를 갖는 유파라기 보다는 거의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었다. 최초의 중심 인물은 모네, 르노아르, 시슬리, 바질 등으로 이들은 마르크 글레이르의 제자들이었으나 1863년 마네의 전시회 이후 아카데믹한 교습에 불만을 갖고, 피사로, 세잔느, 모리조, 기요맹과 친교를 맺고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이후 드가와 마네, 테오도르 뒤레 및 조르주 리비에르도 합세하고, 화상 뒤랑 뤼엘의 후원을 받게 된다. 1873년 살롱이 피사로, 모네, 르노아르, 세잔느, 그리고 시슬리의 그림을 거부하자 이것을 계기로 이듬해 1874년에 자신들의 앵데팡당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출품작중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인용하여 루이 르로이가 이들 모두를 '인상주의자'라고 명명한 것이 받아들여져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인상주의'라는 단어는 루이 르르와(Louis Leroy)라는 한 신문기자가 만들어낸 이름이다. 그는 1874년 4월 25일 '르 샤리바리'지에 동년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카퓌신 거리의 35번지 사진사 나다르(Nadar)의 사진관에서 열린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의 협회의 작품 발표회에 대해 '인상주의자 전시회'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다.그가 그렇게 부른 이유는 거기에 전시된 모네의 작품 제목이 이었기 때문이다.그가 이 표현을 쓴것은 시각적 인상을 위해서 전통을 무시한 이들에 대한 그의 경멸감을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아카데미의 전통 교육과 낭만주의의 기본 이념에 반대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예술가의 정서상태보다도 오히려 자연 혹은 삶의 편린들을 가능한한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정신에 의해 기록함을 예술의 제일의 목적으로 삼는 사실주의의 태도에 동조했다. 그들의 주제는 매우 다양했는데, 마네는 18세기 전통적 주제들을 사실적으로 변형시켰고, 르노아르는 귀여운 여인이나 아이들, 아름다운 풍경들을, 드가는 경마, 무희, 세탁부, 재봉사들을 주로 그렸고, 모네, 시슬리, 피사로는 주로 풍경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형태 구성을 피하고 마치 카메라가 우연히 한 장면을 찍은 것처럼 즉각적인 시각적 인상의 효과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우연성의 인상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으로서 드가는 현장에서의 스케치를 자신의 작업실에 와서야 비로소 그림으로 구성했다. 르노아르는 검은 음영과 윤곽선을 배제하고 색채 분할 기법, 점묘법을 도입하여 풍경화를 재창조하는 행위를 했다.
따라서 인상주의 회화는 빛과 대기의 회화, 지시색과 반사색의 유희로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법은 바르비종파의 디아스 데 라 페냐의 영향 아래 1860년대 말 르노아르에 의해 도입되어 모네, 시슬리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다갈색 대신 흰색이 초벌칠된 캔버스 위에 혼합되지 않은 그림 물감을 사용하는 필법, 검정색의 배제등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인상주의에 의해 제가된 과학적 리얼리즘은 그 이후 미술운동 흐름에서 퇴조했지만, 근대 예술 이론을 전개하는 출발점으로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인상주의의 탄생 배경을 알려면 무엇보다도 '아카데미'에 대해 알아야 한다.인상주의가 아카데미의 인습에 반대하여 나온 풍조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떤 화가를 보고 '아카데믹'하다라고 하는 것은 최대의 모독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관학 우파들에게 있어서는 스스로를 아카데미의 후계자로 생각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아카데미'란 말은 1585년 카라치 유파가 회화를 가르치기 위해 창설한 볼로냐 아카데미 이래로, 또한 그림이란 것이 작업장에서 도제들이 보수를 내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료를 내면서 배우는 것으로 되어 버린 이후로 훌륭한 화가는 아카데미 회원이었다. 예를 들어 르 스외르와 샤르댕이 미술 아카데미에,레이널즈와 터너가 왕립 아카데미에 속해 있었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동료 화가들과의 사교에서 오는 이득과 즐거움 때문에, 또 자신들의 작품을 회원전에 전시할 수 있다는 특전 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의 회화 교사로서 일 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런 식으로 저명한 화가들은 학생들에게 가장 훌륭한 미술의 전형, 즉 아카데믹한 전통을 전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의 특징은 계획된 그림에 있다.아카데미가 고안한 모든 것, 즉 밑그림, 색체론, 구성, 해부학, 누드 모델의 드로잉과 이들의 채색 의상에 관한 역사적 연구 및 고전에 대한 탐구 등 주제를 지닌 계획된 그림의 제작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정형성은 작품이 제작될 수 있는 화가 개인의 세계관이나 화가 자신의 마음을 철저히 배재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이 살롱전에서 입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형성(획일성)은 인상주의 탄생의 첫번째 원인이다.모네나 피사로 등의 20대 화가들이 그에 반발하여 아카데미를 뛰쳐 나온 것이다. 이들은 20대 초반에 아카데미를 그만 둔 이래 명성을 얻기까지 수십년 간을 고생해야 했다. 또한 1840-60년 사이,아카데미 살롱은 우파와 좌파를 막론하고 퇴폐적이고도 상업적인 미술을 하고 있었다. 그 시대는 경제를 잡고 있던 왕족이나 귀족,승려 계층이 사라져가고 부르조아라는 신흥 계층이 나타난 시기였다. 이들은 곧 그림의 수요자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왕족이나 귀족들과 같은 고상하고도 고전적인 그림을 선호하지 않았다. 갑자기 돈줄을 쥐게 된 이들은 왕족이나 귀족의 권력을 지니긴 했지만 그들의 취미를 닮지는 못했다. 그들의 취미는 조잡하고 퇴폐스러웠다.
결국 누드화의 공식적 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퇴폐스러운 그림이 만연했다. 또한 이들 부르조아지는 왕족들을 흉내내서 큰 저택들을 짓게 되고, 저택이 커짐에 따라 거기에 걸 그림의 크기도 커져야했다. 아카데미의 화가들은 그러한 큰 그림들을 단시간에 그리기 위하여 엉성하고도 거칠은 붓질을 쓰게 되었다. 또한 이들 부르조아는 왕족,귀족들을 흉내내서 자신의 초상화를 많이 제작하게 하였다. 그러나 초상화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의 삶에 대한 연륜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배경을 이길 만한 주인공의 기운이 전혀 없던 것이다. 따라서 초상화 부분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졸부들의 얼굴만이 늘어갔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가 20여 년 이상이나 흘러갔다. 인상주의자들은 이 퇴폐적이고도 재물에 영합하는 분위기를 떠나 퐁텐느불로 숲으로 나갔다. 그리고 자연을 묘사하기 시작했다.이것이 인상주의 탄생의 두번째 이유이다.
1. 에드가 드가 ( Edgar Degas : 1834.7.19~1917.9.17 )
본명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 파리 출생.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1855년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J.A.D.앵그르의 제자 L.라모트에게 사사(師事)했고, 앵그르로부터도 직접 가르침을 받아, 평생토록 이 고전파의 거장에 대한 경의를 품게 되었다. 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심취하였다. 이 무렵부터 거의 10년간은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기로 오로지 고전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65년 살롱에 《오를레앙시(市)의 불행》을 출품하였다. 그 후 자연주의 문학이나 E.마네의 작품에 이끌려, 근대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74년부터 86년까지 인상파전에 7회나 출품·협력하였으나 그 후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주제를 찾게 되자 더욱 재능을 발휘하여 정확한 소묘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하였다. 인물동작을 잡아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해왔다. 경마나 무희, 욕탕에 들어가거나 나오려는 여성의 한 순간의 동작을 즐겨 그렸다. 이러한 그의 눈과 기량은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선천적으로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성격 때문에 독신으로 보냈고, 그의 인간혐오증은 늙어갈수록 더하여 고독한 가운데 파리에서 83년의 생애를 마쳤다. 파리 인상파미술관에 소장된 대표작 《압생트》(1876) 《대야》(86)를 비롯한 많은 작품를 남겼다. 인상주의 그룹운동에는 참가했으나 회화 탐구의 기법에 있어서는 비판적이었고 다분히 반 인상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회화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드가를 인상파 그룹에 접근시키는 요인은 근대생활, 즉 일상 주변의 현실에 눈을 돌렸다는 점과 비록 인공적이기는 하나 광선의 효과와 순간적인 일상의 정착과 움직임의 동작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을 들수 있다. 하지만 드가가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다른 점이라면 의도적으로 야외 광선이 아닌 실내의 인공적인 광선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2. 끌로드 모네 ( Claude Monet : 1840.11.14~1926.12.5 )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파리 출생. 소년시절 르 아브르에서 보냈으며, 18세 때 그곳에서 화가 로댕을 만나, 외광(外光)묘사에 대한 초보적인 화법을 배웠다. 19세 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 들어가, 피사로와 사귀었다. 2년간 병역을 치르고 1862년 파리로 귀환, 글레르 밑에서 A.르누아르, A.시슬레, F.바질 등과 사귀며 공부하였다. 초기에는 G.쿠르베나, E.마네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으나 점차 밝은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 런던으로 피신, 이때 J.터너, J.콘스터블 등의 영국 풍경화파의 작품들에 접했다. 이것은 명쾌한 색채표현이란 점에서 커다란 기술적 향상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72년 귀국,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살면서 센 강변의 밝은 풍경을 그려, 인상파양식을 개척하였다. 74년 파리에서 ‘화가·조각가·판화가·무명예술가 협회전’을 개최하고 여기에 12점의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출품된 작품 《인상·일출(日出)》이란 작품 제명에서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집단에 붙여졌다. 이후 86년까지 8회 계속된 인상파전에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한편 78년에는 센 강변의 베퇴유, 83년에는 지베르니로 주거를 옮겨 작품을 제작하였고, 만년에는 저택 내 넓은 연못에 떠 있는 연꽃을 그리는 데 몰두하였다. 작품은 외광(外光)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병치(倂置)’를 이행하는 등,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자연 속에서 광선의 변화를 정확하게 포착하려고 시신경을 집중시키면 시킬수록 태양의 광선은 다채로운 신기루처럼 가일층 찰나적인 변화를 거듭한다. 따라서 모네는 그러한 순간적인 변화를 순식간에 그리고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는 예리한 눈과 그것을 재빨리 정착시키는 수법이 필요로 했다. 모네의 인상주의는 그렇게 눈에 비쳐지는 '순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였던 것이다. 따라서 순간에 거는 그의 창조적 에너지는 생생하면서도 베일 속에 잠긴듯한 색채진동 그 자체가 순간을 사는 듯한 필치의 날쌤 속에서 약동한다. 그 결과 모네의 자연은 우리의 눈에 익혀온 자연이 아니라 둔감해진 우리의 망막에 강렬하고 생신한 햇살을 던져 주는 생동감 그 자체인 것이다. 1874년을 전후한 인상파 그룹의 동향은 그대로 모네의 예술적 전개 과정과 병행한다. 인상파 동료들이 채택한 순색과, 그 순색을 분할된 필촉으로 병치함으로써 광선을 하늘거림을 나타내는 기법, 즉 색채분할에 의한 색조의 시각혼합이 사용된다.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려는 그의 작화(作畵)의도는 《루앙대성당》 《수련(睡蓮)》 등에서 보듯이 동일주제를 아침·낮·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밖에 《소풍:The Picnic》 《강:The River》 등의 작품도 유명하며 만년에는 눈병을 앓다가 86세에 세상을 떠났다.
모네의 대표작
a. 아르쟝퇴이유 시대(1872-78)- 아르쟝퇴이유는 인상주의의 가장 활발한 활동 무대가 됨.
<아르쟝퇴이유의 범선>(1872), <아르쟝퇴이유의 다리>(1874)등 - 참신한 시각, 미묘한 분위기의 묘사, 강렬한 빛, 물 위에 어른거리는 햇빛과 반사광선의 사실적이면서도 시적인 묘사, 순수한 색채의 하모니라는 점에 있어서 특징지어진다. 터치는 점차 세분화되어 시각적 색채 혼합의 원리에 따라서 덧포개어진 작은 작은 쉼표부호들과 비슷한 것으로 되면서 인상주의 기법이 가장 완벽히 구사된다.
<생 라자르 역>(1876-77)-첫번째 연작이며 도시의 생활에서 주제를 빌어 왔다는 데에 또 다른 의의가 있다 할 것이며 동시에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끊임없이 다시 새로 생겨나는, 가장 미묘한 뉘앙스로 물들여졌다가는 이내 대기 속에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기차 연기 테마는 그 후 낟가리, 포플라길, 루앙 대성당, 수련 등의 연작에서도 추구된다. 즉 변모하는 순간의 모습을 동일 모티프를 통해 정착시키려는 시도와 직접 연계되는 것이다.
b. 베떼이유 시대(1878-81)
<베떼이유 풍경>-나란히 포갠 잘게 분할된 작은 터치로써 풀밭을 물결치게 하고, 나뭇잎을 뒤흔들며 물 표면에 주름을 일게 하는 바 람의 감각을 전하려 함.
<베떼이유 세느 강의 해빙>(1880)-사실주의적 인상으로써 그의 예민한 시 각은 이 움직이는 미묘한 순간들을 즉각 포착하며 동시에 그대로 화면에 정착시키는데 성공함.
c. 지베르니 시대(1883-1926)
<루앙 대성당>(1892-94)-모네의 눈에 비쳐지는 이 대성당은 새벽 햇빛에 장미빛과 진주빛 그리고 우유빛으로 반짝이고 또 대낮에는 백열하는 듯한 열기를 뿜어대는가 하면 해질 무렵에는 자색이 낀 푸르른 회색 속에 잠겨 든다. 이처럼 하루의 시간과 햇살에 따라 육중한 석조 건물은 거의 꿈결 같은 광선을 크고 작은, 분할되고 나란히 포개지고, 뒤엉클어지고, 두텁게 처리된, 또는 여기저기 응어리진, 얼룩진, 재료 그 자체를 암시하는 터치와 반점으로 뒤범벅된 일종의 암장과 같은 매개체에 의해 표현한다.
<수련>(1899-1926)-모네는 못의 수면과 그 위에 잠자듯 떠 있는 수련으로 광선과 색채를 전개시킨다. 못가의 버드나무의 그림자와 함께 하늘과 구름이 못 위에 내려 앉고 그것이 수면의 잎과 꽃과 어울려 허상과 실상이 혼연한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 하나의 상징적인 세계를 형성하며 번져 나간다. 그리하여 눈앞에 벌어진 대상은 차츰 그 구상적인 양상을 잃어 가며 마침내 풍성하고도 세련된 색채의 진동으로 빚어지는 광채로 물들여진 추상의 세계로 이행해 간다.
4. 까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 1830.7.10~1903.11.13 )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토마스섬[島] 출생. 1855년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로 나왔으며, 같은 해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받아 그로부터 풍경화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몇 차례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번번이 낙선하고 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는 런던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모네와 함께 터너 등의 영국 풍경화를 연구하였다. 전후에는 파리 북서쪽 교외에 정주하면서 다시 질박(質朴)한 전원풍경을 연작, 74년에 시작된 인상파그룹전(展)에 참가한 이래 매회 계속하여 출품함으로써 인상파의 최연장자가 되었다. 그의 작풍은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바탕으로 수수하면서도 견실성을 보여 모네와 시슬레보다 한층 구성적인 면에 특색을 보였으나, 50년대 중반경 한때 G.슬러의 점묘법(點描法)에 끌려 밝고 섬세한 규칙적인 필법에 의한 작품도 남겼다. 만년에는 시력이 약화되었으나 최후까지 제작활동을 계속하여 인상주의 운동과 운명을 함께 하려는 성실성을 보였다. 인상주의자 그룹의 모든 전시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유일한 사람. 초기에 꼬로와 쿠르베에게 큰 영향을 받음. 피사로는 대지에 뿌리를 두고 그것을 굳건히 딛고 선 화가이며 자연은 곧 대지였으며 그 대지에서 자라는 나무며 꽃이며 언덕이며 논밭이었다. 자연의 변화, 즉 계절의 변화는 피사로에게도 대지를 풍요하게 만드는 신의 섭리로 받아들여졌고 그것은 대지의 생명력과 거기에 의존하는 생성과 긴밀히 연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피사로에게 자연의 태양은 자연에 생기와 열을 주는 것이어야 하고 대지와 대지의 결실을 비옥한 것으로 하는 것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피사로가 그리는 언덕이며 들판 등은 밀도 있는 질감과 흙의 짙은 내음을 지니고 있으며 나무들과 초목도 또한 그 땅 속에 깊이 뿌리 박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피사로의 시각은 대상의 형태를 존중하고 거기에 다시 건축적인 구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것이 세잔느의 예술로 넘어가는 교량적 역할을 하게했다. 1884년 이후에 앙데팡당 전시회에서 쇠라의 <아니에르에서 목욕하는 여자>에 감명받아 신인상주의로 전향하나 신인상주의의 한계(제작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리며 자신의 감각을 추구하기 어려우며 또한 운동적이거나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자연의 아름다운 양상을 추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를 느끼고 1888년부터 1890년경 신인상주의 기법을 버린다. 그 후 연작을 제작하며 인상주의 운동과 운명을 함께 한다.
5. 알프레드 시슬레( Alfred Sisley : 1839.10.31~1899.1.29 )
프랑스에서 활약한 영국의 화가. 파리 출생. 모네, 피사로와 비견되는 대표적인 인상파화가로 평생을 프랑스에서 살아 국적은 영국이지만 프랑스 화가로 통한다. 한때 부친의 권유로 영국으로 건너가 상업에도 종사했지만, 그림을 좋아하여 1862년 파리에 있는 C.글레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거기서 C.모네, 르누아르 등과 친숙하게 지냈다. 66년 살롱에 첫 입선하고,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갔다. 이때부터 점차 초기의 G.쿠르베나 J.B.코로풍(風)의 작풍을 청산하고, 자연을 외광(外光) 아래서 포착하는 밝은 화풍을 확립하였으며, 1874년 이후는 인상파그룹전 등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인상파 중에서도 특출하게 순수한 풍경화가로서 일 드 프랑스지방(파리를 중심으로 한 주변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을 대상으로 물과 숲의 반짝임을 묘사한 많은 수작을 남겼다. 시종일관 풍경화로서 생애를 다했으며 자연에 대한 정감에 있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프랑스 태생이나 영국 혈통을 이어받아 감정표현에 있어서 오히려 억제한 필치와 색채를 구사했다. 그는 대담하다기 보다는 균형을 존중하는 감각을 기조로하여 온건하고 섬세한 색의 뉘앙스를 통해 대상을 부드럽고 안정된 분위기 속에 젖게 했다. 특히 그의 설경에 나타나는 투명하고 신선한 공간 표현과 그 공간에 넘치는 빛의 세계는 시슬레 특유의 것이라 할 것이다. <밤나무숲의 오솔길>(1867), <아르장튀유의 길>(1872), <마를리항구의 만조>(1876), <루브시엔, 겨울>(1874), <홍수 속의 보트>(1876) <세브르 골목에서 본 큰 길>(1873), <쌩 마메 풍경>(1885), <로앙 운하>(1892)등의 작품이 있다.
6. 오귀스트 르느와르 ( Auguste Renoir : 1841.2.25~1919.12.3 )
프랑스 중부 리모주 출생. 4세 때 파리로 이사하였다. 집안이 가난한 양복점이어서 13세부터 도자기공장에 들어가 도자기에 그림그리는 일을 하였다. 이곳에서 색채를 익힌 것이 뒤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점심시간에는 루브르미술관에서 J.A.와토나 B. 부셰 등의 작품에 이끌려 화가가 될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4년 후 기계화의 물결에 밀려 실직, 겨우 부채그림이나 점포장식 등을 하였다. 1862년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C.모네, A.시슬레, 바지위 등을 알게 되고 또 C.피사로, P.세잔, J.B.A.기요맹과도 사귀어, 훗날 인상파운동을 지향한 젊은 혁신화가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초기에는 코모, 들라크루아, 크루베 등의 영향을 받았고, 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종군한 후에는 작풍도 점차 밝아졌다. 그리하여 인상파의 기치를 든 1874년 제1회 전람회에는 《판자 관람석》(1874)을 출품하였고, 계속하여 제2회와 제3회에도 참가하여, 한동안 인상파 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더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표현을 전개하였다. 대작(大作) 《물랭 드 라 갈레트 Le Moulin de la Galette》(1876)와 《샤토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1879)은 인상파시대의 대표작이다.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 라파엘로나 폼페이의 벽화에서 감동을 받고부터는 그의 화풍도 마침내 한 전기(轉機)를 맞이하였다. 귀국 후 얼마 동안의 작품은 색감과 묘법(描法)이 크게 바뀌었다. 즉 담백한 색조로써 선과 포름을 명확하게 그려서 화면구성에 깊은 의미를 쏟은 고전적인 경향을 띤 작품들로 《목욕하는 여인들》(1884~87) 등을 그렸다. 그 후는 완전히 인상파에서 이탈하여 재차 독자적인 풍부한 색채표현을 되찾아 원색대비에 의한 원숙한 작풍을 확립하였다. 더욱이 1890년대부터는 꽃·어린이·여성상, 특히 《나부(裸婦)》(1888) 등은 강한 의욕으로 빨강이나 주황색과 황색을 초록이나 청색 따위의 엷은 색채로 떠올리면서 부드럽고 미묘한 대상의 뉘앙스를 관능적으로 묘사하였다. 프랑스 미술의 우아한 전통을 근대에 계승한 뛰어난 색채가로서, 190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만년에는 지병인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에 연필을 매고 그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제작하는 기쁨을 잃지 않았다. 최후 10년 간은 조수를 써서 조각에도 손대어 《모자(母子)》(1816)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과 화풍의 변화
a. 형성기(1854-1870)
디아즈 끌로드에게 어두운 색을 지양하고 밝은 색깔을 쓰라는 충고를 받음. 이 시기에 드라크르와와 크르베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이 무렵의 작품에는 사실주의적 기법이 나타난다. <사냥하는 디아나 여신>(1867). <양산을 든 리즈>(1868), <시슬레 부부>(1868).
b. 인상주의 기(1870-1883)
끌로드 모네의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 기법을 채택하게 됨으로써 밝고 빛나는 풍부한 색채의 그림들을 그림. 주제에 따라 터치는 두껍게도 되고 묽게 흐르느 것처럼 되기도 하고, 매끈매끈할 때도 있고 덕지덕지 응어리 질 때도 있으며 뒤엉키기도 하고 분할되기도하며, 병치되기도 하고 엷게 덧붙여지기도 한다. 색채 역시 어떤때는 밝고, 그림자도 짙게 채색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때는 강한 명암의 대조가 있으며 그림자는 투명하지만 단일한 색으로 되어 있을 경우도 있다. 택한 주제 역시 풍경, 나상, 일상 모습, 정물 등등 다양하다. <퐁 뇌프>(1872), <그랑 불르바르>(1875), <높은 초원길로 올라가는 길>(1874-78)등.
c. 날카로운 시기 또는 앵그르적인 시기(1883-1890)
이탈리아에서 피렌체의 거장들과 라파엘로를 발견하게 된 것이 영향을 끼쳐 인상주의를 이탈한다. 무형태 속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데생의 가치와 형태를 규정하는 선의 중요한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옛날 거장들 앵그르의 탐구로 되돌아감. 다채로웠던 색깔이 오커계통의 색깔로 바뀌고 색깔 상호간의 조화가 조화를 잃거나 날카롭게 부딪침. 그리고 기법은 메마르고 도자기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진 것이었다. <우산들>(1883)은 인상주의로부터 새로운 탐구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줌.
d. 진주모빛 시기(1890-1897)
다시 인상주의로 되돌아옴. 화풍은 부드럽게 되고 색채도 진주모빛 광채를 띤 풍부한 뉘앙스를 지니게 된다. 현대성에서 빌어온 주제를 멀리하고 시골 처녀들의 누드와 초상화들을 그린다. <물랭 드 라 걀렛트>(1896)에는 인간적인 훈훈한 체온과 함께 삶에 대한 따사로운 정감이 감돔. <목욕하다 잠든 여인>(1897).
e. 마지막 시기-에쓰와 꺄뉴기(1898-1911)
1897년이래 ~ 1900년경까지 그의 둘째 아들 쟝과 하녀 가브리엘의 자태를 그린다. <가브리엘 과 쟝>(1896), <보석을 단 가브리엘>(1910), <장미꽃을 단 가브리엘>(1911) 1903년부터 1919년까지 범신론으로 발전함. 루벤스, 프라고나르, 앵그르의 영향이 친구이자 조각가 마이욜의 영향과 결합되어 폭넓은 조각적인 방식이 보여진다. <파리스의 심판>(1908).
활짝 피어난 부드럽고 육감적인 나체는 루벤스가 생명감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사용한 빨강색과 주홍색을 주조로 그려져 있다. <목욕하는 여인들>, <님프들>(1918년경)은 서정적이고 찬란한 색채의 효과는 아주 실감나는 관능성과 결합되어 있다.
출처 : 작은畵室
글쓴이 : 독일병정 원글보기
메모 :
'人物情報 參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자연주의 ( 自然主義 : Naturalism ) (0) | 2006.06.29 |
---|---|
[스크랩] 사실주의 ( Realism ) (0) | 2006.06.29 |
확고한 도전 의지로 성공한 여성 CEO (0) | 2006.06.24 |
피카소 (0) | 2006.06.24 |
[스크랩] 칼 융의 `동시성의 원리` (0) | 2006.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