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적이고 청신한 전원 풍경을 주로 그렸던 자연주의는 현실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을 거부하고, 현실을 선입견 없이 실험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을 예술에 적용한다. 이것은 이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으며, 낭만주의에 의해 조장된 개인적 감정의 득세에 의해 촉발되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농민화가였던 밀레의 「만종」「이삭줍기」와 고요한 서정이 넘치는 그림을 그렸던 코로의 「진주를 단 여인」「모르트퐁텐의 추억」이 유명하다.
영국에서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물과 안개의 화가라 불리는 터너와 밝고 풍부한 색감으로 전원과 빛, 대기의 풍요함을 표현했던 컨스타블이 있다. 자연주의라는 용어는 1863년 카스타냐리가 미술에서, 1872년 졸라가 문학에서 처음 사용했다. 17세기 벨로리오, 카라밧지오의 후계자가 되는 만프레디, 호세 테 리베라, 루 바란탄, 홀트호스트 등의 작품을 시작으로 19세기 후반 쿠르베 등의 영향하에 나타난 사실주의가 계승되었다. 한편 비평가 카스타냐리는 1860년대부터 70년대의 관전(=살롱)에서 풍속화의 중요성을 주목하여 파스티안 루파주와 베로로 대표되는 도시생활의 새풍속과 정경을 그린 작품이나 마네의 환락과 묘사 등을 자연주의라고 부른다. 자연주의는 현실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을 거부하고, 현실을 선입견없이 실험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을 예술에 적용했다.
인간과 생물학적 상호관계를 미학적인 근거로 삼는 자연주의는 자연환경이나 인간성의 파괴를 주제로 하여 예술과 문화의다방면에서 부각되어 왔다. 자연주의란 자연대상을 양식화하거나 그 관념적 표현을 행하지 않고 보는 그대로를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예술제작태도로 자연의 재현에는 자연미의 탐구와 존중이 들어 있고 자연을 표현하는 뜻에서 사실주의와 대립하게 되었다. 영국의 풍경화나 바르비종의 화풍은 자연을 조금도 미화하거나 이상화하지 않고 자연에 깊은 애정을 갖고 그 속에 젖어들어 미묘한 광, 맑은 공기가 가득찬 정취있는 풍경화로 자연주의를 표현했다. 19세기 초 밀레, 코로, 루소와 같은 프랑스의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표방한 빛과 대기에 대한 예민한 감각에 따른 자연의 재현 또한 자연주의로 볼 수 있다.
바르비종파에서 주도했던 풍경화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자연주의는 어느 시대에서나 조금씩은 잠재해있고 단지 표현하는 구체적인 재현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낭만주의풍의 풍경화 이후 영국풍경화로부터 자극을 받아 프랑스자연주의 화파인 바르비종파의 풍경화가 시작되었고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이 갖는 미묘한 빛, 맑은 공기가 가득찬 정취있는 풍경화를 낳았다.
바르비종파 ( Barbizon, Ecole de )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활동한 풍경화가의 집단. 명칭은 1830년경부터 그들이 살던 파리 교외의 퐁텐블로숲 어귀에 있는 작은 마을, 바르비종에서 유래되었다. 1830년파 또는 퐁텐블로파라고도 한다. 주요한 화가로는, ‘바르비종의 일곱 별’이라 불리는 J.밀레, T.루소, C.코로, J.뒤프레, 디아즈 게 라페냐, C.트루아용, 도비니 등이며 여기에 G.쿠르베, P.유에 등도 가끔 참가하였다. 자연에 대한 로맨틱한 감정과 서정적인 화취(畵趣)가 이 그룹의 특색이었다. 바르비종은 국제적인 센터로서 미국에까지 알려져, 후에 인상파 화가들도 퐁텐블로숲을 근거지로 삼고 제작하였다.
루소 ( Rousseau, Theodore 1812.4.15 ~ 1867.12.22 )
프랑스의 풍경화가. 파리 출생. 양장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풍경화가인 백부와 네오클라식파(派) 선배화가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기 위해 프랑스 전역을 편력하였다. 단순한 풍경을 그리려는 것이 아니라, 숨쉬는 자연의 생명을 표현하려고 시도하였다.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로이스다르나 호이엔의 영향을 받았으며, 퐁텐블로의 숲과 루아르강 유역의 방데지방의 풍경에서는 결정적인 계시를 받아 “나는 수목들의 속삭임을 들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거듭되는 그의 작품에 대한 살롱의 거부로 파리를 떠나 바르비종의 마을로 옮기고, 그곳에서 근대 외광파(外光派)의 기초를 닦았다. 그의 작품은 후기인상파와 비교하면 훨씬 어둡고 네덜란드 풍경화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나, 그를 포함한 바르비종파의 자연에 대한 개방적 태도는 회화사상 빼놓을 수 없다. 대표작으로 [봄의 풍경](1852?) [숲의 태양](65) [퐁텐블로의 숲](67) 등이 있다.
밀레 ( Jean Franiois Millet : 1814.10.4 ~ 1875.1.20 )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 출생. 1833∼36년 셰르부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1837년 장학금을 얻어 파리로 진출하여 P.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루브르미술관에서 푸생, 르냉, 샤르댕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848년 살롱에 출품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루브르미술관 소장)은 그 후 농민생활을 그리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1849년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지와 맺어져 있는 농민생활의 모습과 주변의 자연풍경을 그렸다. 이 시절에 T.루소, C.코로 등과 친교를 맺고, 빈곤과 싸우면서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詩的)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派)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는 오히려 농민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 그런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상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만년에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아 화가로서의 영광을 누렸으며, 1868년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주요작품 중 [씨뿌리는 사람](1850) [이삭줍기](1857) [걸음마](1858) [만종] (1859) 등은 발표 당시부터 주목을 끌었으며, 만년의 가작 [봄]에는 빛의 효과에 있어서 인상파를 예고하였다. 그 밖에 [우유 짜는 여인] [저녁기도] [실 잣는 여인] [괭이 가진 남자] [젊은 어머니와 아기] 등이 있고, 소묘와 판화 등의 작품도 많다.
터너 (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 1775.4.23 ~ 1851.12.19 )
영국의 화가. 런던 출생. 1814세 때부터 로열 아카데미에서 수채화를 배우고, 이듬해 아카데미 연차전(年次展)에 수채화를 출품하였다. 그는 주로 수채화와 판화 제작으로 일생을 보냈는데, 20세 무렵에는 유화를 시작하여 풍경유채화를 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R.윌슨을 비롯하여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국내 여행에서 익힌 각지의 풍경을 소재로 삼았다. 24세 때에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고, 3년 후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02년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풍경화의 소재를 모아 500점이나 되는 스케치를 남겼다. 한편, 이 무렵부터 N.푸생, C.롤랭의 고전주제적 풍경화에 끌려, 특히 구도를 잡는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1820년 전후부터는 그의 양식에 변화가 생겨, 자연주의적인 방향에서 벗어나 낭만적 경향으로 기울어졌다. 19년 T.로렌스의 권유에 따라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건너가 색채에 밝기와 빛을 더하게 되었다.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1838) [수장(水葬):Peace:Burial at Sea](1843) [비·증기·속력](1844) [디에프항] [노럼성과 일출] 등의 대표작은 그의 낭만주의적 완성을 보여준다. J.라스킨의 절찬을 받았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주목받아, 프로이센-프랑스전쟁 중 망명해온 그 후의 인상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코로 ( Jean-Baptiste-Camille Corot : 1796.7.16 ~ 1875.2.22 )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처음에는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1822년부터 미샤롱과 베르탱에게 사사하여 그림을 공부하였다. 1825년부터 2년간 동경하던 이탈리아에 유학, 자연과 고전작품을 스승으로 한 정확한 색가(色價)에 의한 섬세한 화풍을 발전시켜, 1827년 [나르니다리]로서 살롱에 등장하였다. 그 후는 프랑스에 살면서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을 비롯한 여러 곳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뛰어난 풍경화를 남겼다. [샤르트르 대성당] [회상] 등이 유명하며, 풍경화 이외에도 [진주의 여인] [푸른 옷의 여인] [샤르모아 부인상] 등이 있다. 코로의 작품은 은회색의 부드러운 채조(彩調)를 쓰면서 우아한 정경을 드높여 주어, 단순한 풍경에도 시와 음악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 큰 특색이다. 동시에 착실한 관찰자로서 자연을 감싸주는 대기와 광선의 효과에도 민감하여, 빛의 처리면에서 훗날 인상파화가의 선구자적 존재였다.
트루아용 ( Constant Troyon : 1810 ~ 1865 )
프랑스의 화가. 세브르 출생. 그곳 도자기 화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도자기공장에서 일하다가, 1833년 살롱에 첫 출품한 풍경화가 입선되면서 본격적인 유화수업에 들어갔다. 1842년 파리로 이주하여 바르비종파에 가담, N.디아스 드 라베냐, J.뒤프레 등의 영향을 받고 1847∼1848년 네덜란드에 여행, 17세기 네덜란드파 동물화가 A.코아프, P.포테르 등의 작품에 촉발되어, 풍경화 속에 소·양·농부 등의 모습을 넣어 독자적인 화경을 완성하였다. 대표작에 [일하러 나가는 황소 떼](1855, 루브르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뒤프레 ( DuprA, Jules : 1811.4.5 ~ 1889.1.6 )
프랑스의 풍경화가. 낭트 출생. 도자기 제조업자의 아들. 바르비종파(Barbizon 派)에 속하며, 근대 프랑스 풍경화의 창시자이다. 처음에는 가업(家業)에 따라 도자기에 그림 그리기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렇다 할 스승도 없이 자연을 스승으로 독학 정진한 작가로, 1831년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하였다. [자연에 의한 에튀드(etude:習作)] 등 7매의 풍경화를 발표, 1834년 영국에 여행하여 J.콘스터블과 R.보닝턴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만년에는 드라마틱한 풍경화를 창작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서, 작품이 유형화(類型化)하였다. 대표작에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된 [폭풍우 뒤에 지는 태양](1851) [냇물이 있는 풍경] 등이 있다.
도비니 ( Daubigny, Charles Francis : 1817.2.15 ~ 1878.2.19 )
프랑스의 풍경화가. 파리 출생. 화가인 에드몽 프랑수아의 아들로 일찍부터 화가를 지망했다. 1835년 이탈리아·영국·에스파냐 등을 두루 다니면서 여행하였다. 40년 P.들라로슈에게 사사하여, 전통적인 역사화와 살롱의 분위기에 맞는 화풍을 즐겼으나, 바르비종파(派) 화가를 알고 난 후부터 자연주의적인 화풍으로 전환하였다. 풍경화가로서 더욱더 자연관조에 깊이 몰두하여 바깥에서 충실하게 사생하는 외광파적(外光派的)인 제작태도로, 하늘과 물의 묘사에 뛰어났다. 바뀌어가는 자연을 민감하게 포착하여 아름다운 색채로 그리는 그의 화풍은 바르비종파의 화가이면서도 인상주의에 가까워 모네의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대표작에는 [봄](루브르국립미술관 소장)이 있다.
쿠르베 ( Gustave Courbet : 1819.6.10 ~ 1877.12.31 )
프랑스의 화가. 스위스 국경 가까운 프랑슈 콩테의 오르낭 출생. 1840년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연구를 위해 파리로 나왔으나 얼마 후 화가를 지망하여 화숙(畵塾)에 다니며 회화습작에 몰두하는 한편 루브르미술관에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파의 거장들의 작품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1844년 살롱에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하고, 1849년 [오르낭의 매장]에서는 이색적 화재를 인정받았으나 1850년의 [오르낭의 장례식]은 화단의 평론을 양분하는 물의를 일으켰다. 지나치게 실경(實景) 묘사에 치우친 불경스런 희화(戱畵)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돌 깨는 사람](1849),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노작 [화가의 작업실]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이 작품의 출품을 거절당하자 몽테뉴가에 손수 가옥(假屋)을 짓고 입구에 ‘사실주의’ 라는 큰 간판을 걸고서, 이 작품을 비롯한 40여 점의 자작품을 전시하여 자신의 예술상 입장을 도전적으로 표명하였다. 그 후, [센강변의 처녀들](1856) 외에 많은 수렵도, 거치른 바다풍경, 나부(裸婦) 등을 제작하였으나 1871년 파리코뮌 때, 나폴레옹 1세 동상의 파괴책임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객사하였다. 그의 견고한 마티에르와 스케일이 큰 명쾌한 구성의 사실적 작풍은 19세기 후반의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큰 의의를 남긴 것이다. 대표작에 [나부와 앵무새](1866) [사슴의 은신처](1866) [샘[泉]](1868) [광란의 바다](76) 등이 있다.
출처 : 작은畵室
글쓴이 : 독일병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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