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첨단 항공모함 니미츠 호도 그의
이름에서 따올만큼 미국 해군사상 그의 명성은 가히 전설적이다. 미국의 ‘이순신(李舜臣) 장군’이라고 할 수 있다. 니미츠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 해군을 패배시킨 대규모 작전을 직접 계획, 조정하고 집행했다.
그가 육군이며 고집센 맥아더 원수와 협력해서 태평양
전쟁을 수행해 나가기란 매우 어려운 과업이었다. 니미츠 제독의 친화력과 외교력, 그리고 관용성이 없었더라면 맥아더와의 협력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제한된 물적 인적자원을 가지고 새로운 전술과 책략으로 과감하게 밀어 부침으로써 결정적 승리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의 오랜
해군생활과 해상함대의 실전경험, 그리고 잠수함 근무경력이 육해공군 해병대등 다면적 태평양 총사령부를 효과적으로 지휘, 승리를 움켜잡을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평탄한 성장기니미츠는 1885년 2월 24일 택사스주 프리데릭스버그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래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했으나 당해 연도 빈 자리가 없어서 1905년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퇴역 함장이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고향에서 묘한 모양의 호텔을 지어 여행업을 했으며 그는 부유한 청소년시절을 보냈다.
니미츠의 해군사관학교 성적은
우수했고 특히 수학에서 뛰어났다. 114명 졸업생중 7등의 석차로 학업을 마쳤다. 해군사관학교를 나온후 아시아 해군함대에 배속되었고 진급을
거듭해 데카투르 구축함장이 되었다.
해군생활에 그럭저럭 익숙해질 무렵 그는 큰 사고를 내 자칫 해군을 떠날번 한 적도 있었다.
1908년 7월 7일 구축함 좌초사건이 바로 이런 악운이었다. 그때 직무태만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처벌은 다행히 견책정도로 가벼운
것이었다.
니미츠는 미국본토에 돌아와 5-6차례 번갈아가면서 잠수함 근무를 한후 1913년 독일과 벨기에 디젤엔징 개발연구를 위해
유럽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귀국한후 그는 독일과 벨기에에서 배운 신지식을 제2 마우미호를 디젤엔징으로 업그레이드 하는 선박건조 작업을 감독
지휘하고 1916년 10월 16일 이배를 진수시킨후 행정책임자겸 수석 엔지니어로 복무했다. 마우미호는 해면을 운항하는 미해군 최초의 디젤엔징
선박이었다.
니미츠가 개발한 디젤엔진 마우미호의 1차대전 승리니미츠가 디젤엔진으로 개발한 마우미호는
1차대전 참가이전 미국 동해안과 쿠바연안을 운항했다. 미국이 1917년 4월 6일 개전후 마우미호는 영국으로 파견돼 해상에서 구축함에 재급유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마우미호의 해상급유는 함대가 장기간 모항이나 우호국 항구에 돌아가지 않고도 장기간 해상에서 작전할수 있어서
2차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미국이 1917년 4월 1차대전에 참전하자 말자 니미츠는 마우미 호와 함께
대서양 함대에 합류했다. 그는 그해 8월 해군 소령으로 승진한후 사무엘 S. 로빈손 잠수함전단 사령관 부관이 되었다. 로빈손 사령관은 그후 다음
10여년간 니미츠의 후원자로서 그를 계속 돌봐주었다. 두사람의 경우처럼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존경할 만한 상관 밑에는 언제나 니미츠 같은
훌륭한 인재가 발굴될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1차대전이 끝난후 그는 워싱턴에서 해군사령부 참모장교로 근무했고 1920년
진주만(펄하버)으로 전근, 후일에 대비, 새로운 잠수함기지 건설을 감독 지휘했다. 니미츠는 그후 20여년간 전함과 구축함등 근무는 물론 다양한
잠수함 근무경력을 쌓았다. 그는 여러차례 워싱턴 근무를 했고 미국대학들에서 최초의 해군예비장교훈련 프로그램을 조직, 운영하는 책임도
맡았다.
1938년 해군소장으로 승진한후 산디에고에서 순양함 단대(單隊)와 하와이에서 아리조나 전함을 포함한 전투함 단대를 각각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1939년 워싱턴에 돌아와 해군사령부 항해국장을 맡는다. 이어 1941년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을 때 해군
징모국장으로서 전시 대규모 병력증원 책임을 맡았다.
맥아더와 함께 태평양 전쟁 지휘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 추천으로 니미츠를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한후, 그를 해군대장으로 진급시킨다. 그때
태평양지역에는 육해공군 해병대등 모든 군종을 합친 단일 사령부만 있었기 때문에 각군별 연락과 협력등 운영상 문제가 많았다. 육군과 맥아더 장군은
해군장성 지휘를 받으면서 전쟁수행을 하는 것을 꺼려했다.
결국 타협의 산물로서 니미츠와 맥아더가 각각 태평양 전쟁수행 책임을
공동으로 맡는 두 개 지휘체계를 갖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니미츠의 원만한 성격과 친화력 때문에 두 장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을 맞아
승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긴박감 앞에서 비교적 잘 협력해 나갔다.
2차대전때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지역에서 두 개의 거대한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그런가운데 미국은 대일(對日)태평양전쟁 보다 독일과 이탈리아등 대(對) 추축국(抽軸國) 전쟁에 보다 중점을 두었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니미츠는 시간을 다투어 그의 전략전술을 밀어부쳐 일본의 확전을 저지하고 그들이 빼앗은 영토를 탈환하며
전선을 일본 본토까지 몰고갔다. 그는 일본군에 관한 미국 암호해독자들이 넘겨준 군사정보를 이용해서 1942년 5월 산호섬 전투에서 첫 교착상태를
돌파했다.
니미츠는 다시 군사정보에 의지해서 다음달 6월 미드웨이섬 전투때 야마모토 이소로꾸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 적군의
해역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야마모토 제독(전사후 원수로 승진)은 바로 진주만 기습폭격을 명령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일본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서 미드웨이 전투에서 미해군 함대를 뿌리채 절멸시키려는 필사의 대결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는 니미츠와의 이 전투에서 미국에
일본해군의 우위를 빼앗기고 과다캐널로 후퇴했다가 1943년 4월 18일 북부 솔로몬제도 전선 시찰중 암호를 해독한 미육군 항공전투기에 의해
폭사당했다.
<이소로꾸>는 56 숫자의 일본 발음으로서 그가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 나이가 56세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미국 하버드대학에 유학했고 1925 ~ 28년사이 주워싱턴 일본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경력도 있어 미국의 엄청난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애당초 대미전 을 반대했다는 설도 있다. 니미츠는 이런 야마모토
함대와 미드웨이 전투에서 대결해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의 함대가 일본 항공모함을 공격했을 때 대부분 일본 함재기들은 함상에서
재급유를 하거나 재무장중이었다. 니미츠의 이때 대승은 대일전 첫승리였고 일본해군으로서는 350년 만의 대패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측 손실은 전체
함대에서 9척의 항공모함중 4척의 침몰과 300대 항공기, 많은 최상급 조종사들의 전사였다. 태평양 전쟁중 핵심적 전투인 미드웨이 전투는
미국측에 결정적 우위를 가져다 주는 대신 일본에는 결정타를 안겨주었다.
니미츠와 맥아더 장군은 광할한 태평양상의 일본 점령 섬들을
하나 둘씩 탈환하는 메뚜기 뛰기식 작전에서 긴밀히 협력해 나갔고 이런 협력작전이 일본 본토쪽으로 점점더 가까이 포위해 들어갔다. 니미츠 제독
휘하의 군대는 1943년 11월 길버트를 점령한데 이어 1944년 2월에는 마셜군도를, 그리고 그해 8월에는 다시 마리아나 군도를 점령함으로써
숨돌릴사이 없는 파죽지세로 일본군을 몰아부쳤다. 니미츠는 그해 10월 오스트레일리아 쪽에서 올라온 맥아더 장군휘하 군대와 합동작전을 벌여
필리핀을 완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정부는 대일전에서 연전연승의 전공을 세운 니미츠 제독에게 미국 해군역사상 최초로 만들어낸
별 다섯 개의 계급을 달아주어 그를 5성계급의 함대원수로 승진시켰다. 미국 대통령과 전쟁성이 협의 한 끝에 니미츠 대장의 전공을 만장일치로
인정, 그에게 이런 영광스러운 최상급 계급을 부여한 것이다.
니미츠는 1945년 초 괌과 이오지마, 그리고 오키나와섬에 대한
총공세를 취해 이섬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그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카사키 시에 원자폭탄을 투하, 일본이 항복했을 때 일본본토 공격을
준비중이었다. 1945년 8월 29일 니미츠는 사우스 다코타 기함을 타고 도쿄만에 들어갔다.
'니미츠의 날'을
부여받는 금의환향그는 같은 해 9월 2일 미조리호 함상 항복서명식에서 미국정부 대표로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고
합의문서에 서명했다. 니미츠는 그해 10월 5일 <니미츠의 날>로 지정된 날 워싱턴으로 돌아와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이런 환영축제가
있은 후 그는 해군총사령관 직책을 맡았고 다음 2년간 핵추진 잠수함들을 개발하면서 동시에 병력과 전함들의 전시동원 해제작업을 감독했다.
니미츠는 1947년 12월 15일 퇴역했다. 그는 그후 수년간 해군장관 고문역을 맡았고 2 년간 카슈미르 분쟁지역의 유엔 판문관을
지냈다. 니미츠 해군원수는 만년 불행하게도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면서 고통을 겪었다. 그는 1966년 2월 20일 81세 생일 직전 수술
병발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검소한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샌 프란시스코 금문교 국립묘지 묘비에는 5성계급과 출생및 별세
일자만이 기록돼 있을뿐이다.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출한 계급높은 장성이면서도 생전 그의 겸양지덕이 묘비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는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육해공군 구별없는 전군적 존경과 협력을 얻어낼수 있는 달인으로서 2차대전중 가장 영향력 높은 미해군 지도자로 기록되고 있다.
그의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경력은 그로 하여금 과감한 전투를 벌이게 해, 마침내 일본의 가장 우수한 제독인 야마모토를 미드웨이
전투에서 제압할 수 있게 했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뉴스앤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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