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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장열전(7)

鶴山 徐 仁 2006. 5. 28. 17:57
세계 명장열전(7) - 존 조제프 퍼싱
서부개척, 스페인전쟁, 1차대전의 영웅
존 조제프 퍼싱은 1차대전때 미국의 유럽원정군대를 지휘한 용맹스러운 장군이다. 그는 당시 말을 이용한 구식군대를 현대적 군대로 발전시키는데 중심역할을 했다. 그의 이런 노력으로 미국군대는 마침내 기계화 차량과 항공기, 기관총등으로 무장한 신식군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관리자 
1차대전 때 미국의 유럽원정군 지휘

퍼싱은 인디안 소탕등 서부개척, 스페인전쟁과 1차대전의 영웅이다. 그는 서부지역 대(對)인디안 전투에 참가한다음 쿠바에서 미국-스페인전쟁(1898년)에서 싸웠고 1916년 멕시코의 전설적 반군지도자 판쵸 빌라 추격전에서 징벌원정부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판초 빌라는 당시 멕시코 내전때 미국 민간 무기밀거래상들과의 갈등 때문에 1916년 뉴멕시코 컬럼비아시를 침공했고 미국은 그에 대한 징벌로서 반격전을 폈다. 이때 퍼싱 장군이 징벌원정군 사령관을 맡았다.

퍼싱 부대는 멕시코에서 판초 빌라를 잡는데 실패했지만 원정군의 징벌전은 미국의 대(對)독일 1차대전을 대비하는 신무기의 실험장이 되었고 조지 S. 패튼 같은 유능한 장군을 비릇한 차세대 군지휘관들을 양성하는 훈련장이 되었다. 퍼싱 장군은 서부지역의 대(對)인디안전과 스페인전, 그리고 판초 빌라 징벌 추격전을 통해 용맹성에 대해 많은 칭찬을 받았다.


교사생활을 하다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

퍼싱은 1860년 9월 13일 미조리주 린 카운티에서 출생, 조그만 시의 상인 아들로 성장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후 가난 때문에 곧장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5, 6년간 교사노릇을 했다. 그후 그는 교사직업을 접고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군인으로서의 뜻을 키워갔다.

퍼싱은 1886년 웨스트 포인트 졸업과 함께 기갑부대 장교로 임관된후 미국 서남부 지역에서 아파치 인디안족 소탕에 나섰다. 그는 1891년 사우스 다코다 운디드니 전투에서 수우족 소탕의 성공적 마무리를 도왔다. 퍼싱은 1891년부터 1895년까지 네브라스카 대학에서 군사학 교수로 근무했고 이때 비번 시간을 활용, 법학학사가 되었다.

미국-스페인전 발발후 그는 대위로서 흑인들로만 구성된 제10중대를 지휘했다. 퍼싱은 이때 맡은 직무와 유모를 모르는 그의 엄격한 성격때문에 ‘블랙 잭’(Black Jack)이란 별명을 얻었고 이별명은 일생동안 그를 따라 다녔다. 퍼싱과 그의 흑인 병사들은 쿠바의 엘케니와 케틀 언덕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고 이때부터 그는 데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임에 의해 고속승진

퍼싱은 쿠바에서 감염된 말라리아병에서 회복한 다음 1899년 필리핀으로
전근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모로 반란군을 평정하는 전투술과 군행정을 쇄신함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후 퍼싱은 필리핀 근무와 주일본 대사관 무관직책을 수행하면서 1905-1906년의 일러전쟁 관찰역을 맡기도 했다.

데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필리핀에서의 퍼싱의 성실한 근무자세와 풍부한 정보보고들을 높이 평가해서 1906년 그를 대위계급에서 바로 준장으로 진급시켰다. 대위가 중간계급을 거치지 않고 바로 준장까지 올라간 예는 전례 없던 일이었다. 이런 유례없는 4계급 뜀뛰기 비약승진은 퍼싱보다 계급이 높은 900명의 선임장교들을 앞질러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그가 대위에서 준장으로 진급했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데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의 높은 신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비범한 재능을 가진 퍼싱은 마침내 정치적 권력을 가진 연방 상원의원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야망을 나타내게 된다.

고속승진을 통해 아침햇살처럼 힘차게 솟아오른 퍼싱의 야망뒤에 숨은뜻이 무엇이든 그의 선택은 일단 슬기로운 것이었다.


뚝심으로 작전을 지휘

그는 극동지역에서 수년간 더 복무 한다음 샌프란시스코 요새의 사령관직을 맡게 된다. 1916년 3월 9일 뉴 멕시코 컬럼비아시에 대한 멕시코 반도들과 반군 게릴라 지도자판초 빌라군의 습격을 받은후 퍼싱은 징벌원정부대를 이끌고 멕시코로 진격해 들어갔다.

퍼싱은 이 원정작전에서 판초 빌라를 사로잡거나 사살하지 못했지만 그는 많은 반군병력들을 살상함으로써 멕시코 반군의 저항력을 크게 위축시켰다. 퍼싱은 동력화 차량과 항공기들을 포함, 새로운 군장비들의 전술적 사용방법을 익히는등 이 전투에서 중요한 경험을 쌓게 되었다. 미군이 말등으로 장비들을 실어나르는 구식 전투방식을 기계화 전투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멕시코 원정전투때 부터였다.

퍼싱이 멕시코 반란군 지도자 판초 빌라를 추격하고 있는동안 샌프란시스코 군숙소에서 일어난 화재로 인해 부인과 두딸이 사망했다. 이 건은 그에게 닥친 끔찍한 불행이었다. 이 처참하게 불행한 비극은 이미 과묵한 퍼싱을 한층 더 차갑고 접근하기 어려운 지휘관으로 만들었다. 그가 더욱 묵묵히 일에만 돌두함으로써 부하들에 대한 요구사항 들도 그만큼 증가했다.

1917년 5월 12일 퍼싱은 유럽원정 미군사령관직을 수락, 그해 6월 23일 프랑스에 도착했다. 그는 프랑스 도착직후 뒤따라 오고있는 미군부대들을 영국과 프랑스군대와 합류시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명령을 받은후 휘하부대를 조각조각으로 나눠 전선에 배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미군 부대들을 영국 독일군 부대와는 독립시켜 독자적 책임전투지역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부에서 어떤 작전지시가 내려오건 언제나 "나는 강요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고 뚝심 센 고집을 부리곤 했다.

그러나 퍼싱도 인간인고로 딱 한번 소신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 그가 아직 백만 휘하 군대를 조직하고 훈련중일 때인 1918년 봄 독일군의 공세가 거세졌다. 이 때 잠시 프랑스 주둔 미군사단들을 증원해주었다. 그후 연합군이 전선을 안정시키자 퍼싱은 다시 증원부대를 자기 휘하로 철수시켰다.


미군의 유럽원정 성공과 군행정 운영의 개편

1918년 여름 퍼싱은 로레인 전투에서 미국의 유럽원정군을 독립된 전투부대로 전환시켰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지루한 참호전을 싫어했기 때문에 정체된 작전을 기동전으로 전환, 즉각적인 공세를 취하곤 했다. 유럽원정 미군은 그해 7월 25일부터 8월 2일까지 아스네 마른 공세와 9월 12일-17일의 세인트 미히엘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퇴했다. 이런 연전연승은 그해 11월 휴전때까지 계속되었다.

세인트 미히엘 지역은 1918년 9월 12일 퍼싱장군의 유럽원정 미군이 처음으로 단독작전을 벌여 승리한 곳이다. 퍼싱장군은 참전 초기 유럽원정 미군부대들을 페르디난드 포크 프랑스군 최고사령관 지휘하로 돌렸다.

유럽원정 미군부대들은 처음 벨로 우두 전투와 아스네 마른 전투때 피곤에 지친 프랑스군과 나란히 같은 참호에서 독일에 대항해 싸웠다. 프랑스군과 미군부대가 아스네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전진을 저지한후 폭스 원수와 퍼싱 장군은 미국 제1군이 세인트미히엘지역에 독립사령부를 설치키로 합의했다.

독일군은 1914년 가을 이곳을 점령해서 베르둔과 세인트 미히엘 돌출부로 알려진 난시지역사이 3각연결 통로를 요새화했다. 그 목적은 빠리와 동부전선 사이 수송로를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1918년 8월 13일 유럽원정 제1군은 메쓰지역을 통과, 라인강을 건너 독일로 진격하기위해 세인트 미히엘 돌출부를 향해 독립전선을 구축했다. 이어서 오랫동안 준비한 공격을 개시했다. 퍼싱은 당초 1차대전을 1919년 말 끝내기로 결심했지만 그해 11월까지 독일군을 패퇴시키지 못할 것으로 예측했었다.

대독일 공격전을 계획하면서 미군은 장갑차등 최신 무기들을 총동원 했다. 퍼싱 장군은 당시 총명하며 공격적인 젊은 조지 S. 패튼 중위 휘하에 보병부대 지원 탱크여단을 창설했다. 패튼은 1918년 여름 내내 이 탱크여단 병력을 훈련시켰다. 유럽원정 미군부대들은 기갑부대 대신 탱크여단으로 무장해 싸움으로써 연전연승 했다.

1918년 9월 12일 탱크들은 보병부대들이 바짝 뒤 따르면서 참호들 위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다음 수일간 닥친 악천후는 독일군 보다 더 무서운 적이라는 것을 실감케 했다. 억수같이 퍼붓는 폭우는 전장을 진흙탕으로 만들었고 모든 참호들을 빗물로 가득한 도랑으로 돌변케 했다. 폭우는 수많은 탱크들을 오도가도 못하게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독일군은 물로 채운 탱크 함정들을 더 많이 파놓음으로써 악천후를 그들에게 최대한 유리 하게 만들어갔다. 퍼싱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부대들은 이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세인트 미히엘 돌출부를 양면 공격, 이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퍼싱장군은 1918년 9월 16일 프랑스령인 이지역을 독일점령에서 마침내 해방시켰다.

이 전투에 이은 모이세 아르곤 전투에서도 탱크전이 주류를 이루었다. 연합군측은 이 전투에서도 독일군을 격퇴함으로써 1918년 11월 11 일 드디어 독일군의 항복을 받고 1차대전을 종결했다.

퍼싱장군과 원정미군부대들은 대독(對獨) 참전이 늦었지만 그들이 전쟁승리에 끼친 공로는 결정적이었다. 유럽 원정미군은 서부전선의 10%를 장악했으나 독일군은 최종 공세때 미군의 전진을 둔화시키기 위해서 전군의 4분지 1까지 여기 투입했다.

퍼싱이 연합국들의 정치적 압력에 맞서면서 한편으로는 백만대군을 조직하는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격찬할 만한 일이다. 그는 또 군을 일반참모 행정편제(G-1)와 정보 (G-2), 작전(G-3), 병참(G-4)등으로 분류함으로써 군행정 운영을 대폭 혁신했다.

이 군 행정제도는 미국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만큼 잘된 제도다. 퍼싱은 유럽원정 미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공로로 1917년 중장으로 진급했고 같은해 말 다시 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그가 미국으로 귀환하자 말자 퍼싱은 영광스런 육군 원수로 진급했다. 이 원수계급은 그때까지 조지 워싱턴만이 가졌던 가장 높은 자리였다.

1921-1924년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퍼싱 육군원수는 20세기초 미국의 가장 위대한 군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가 2차대전기간 미국군 발전과 작전에 끼친 직접적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퍼싱은 2차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이 패망하는것을 지켜 본후 1948년 7월 15일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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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05-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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