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은 2차대전때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연합군 상륙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가장 영향력있는 영국 육군원수다. 그는 오만할 만큼 자존심이 강하고 병적일 정도로
대미 우월감이 강한 영국 군인이었다. 몽고메리는 독재자 히틀러의 독일군에게 첫 연합군 승리를 안겨준 지휘관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나치즘을
무찌르고 2차대전의 종결을 가져온 대독일 연합군 작전에서 중요한 지휘 역할을 맡았다.
몽고메리는 군인으로서는 누구보다 탁월한
지휘력을 가지고 용맹을 떨쳤지만 세련된 영국 신사형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거만하고 거칠고 허영심이 많고 때로는 기상천외의 일도 저질르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몽고메리는 전투에서는 부하 장병들이 끊힘없이 전진해서 승리를 거머쥐게 하는 마력의
소유자다.
몽고메리의 성장기그는 1887년 11월 17일 영국에서 태어난지 2년후 영국국교의
독실한 주교인 아버지와 함께 타스메니야 지역으로 이주했다. 몽고메리의 청소년시절은 불행했다. 그의 군대생활 시작도 처음에는 이런 불행으로 부터의
탈출구였다.
몽고메리는 성 바우로 고등학교에서 4년을 마치고 1907년 영국 육군사관학교인 샌드허스트에 입학했다. 1908년 여름
그는 다른 사관생도들을 괴롭힌 죄로 거의 퇴학지경까지 갔다가 간신히 용서를 받고 소위로 임관되었다. 역시 그의 괄괄한 성격때문이었다.
몽고메리는 담배를 피거나 술도 마시지 않았지만 늘 설치기 좋아하는 난폭성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첫 근무지인 인도에서 그는
다른 동료장교들과 함께 난투극에 연류돼 봄베이 요트크럽 하우스를 온통 다 부셔놓기도 했다. 그는 술 한모금 않는 절대금주자였다. 그럼에도
몽고메리는 만취상태인 다른 장교들과 달리 맹숭 맹숭한 정신으로 순전히 폭력을 즐기기 위해 그 난투극에 참여하곤 했다.
1차대전에서 발휘한 뛰어난 지휘능력1차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최전선에서의 용맹성과 뛰어난
참모역할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몽고메리는 피비린내 나는 프랑스전선의 참호속에서 그후 다른 전투에서 활용할 수 있는 슬기로운 지휘능력을
배양했다.
1914년 8월 23일은 자기 부대가 프랑스에 도착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바로 그날 작전계획을 세우고 준비할
겨를도 없이 몽고메리의 소대는 르 카토에서 독일군을 맞아 싸웠다. 앞 뒤 조차 가릴수 없는 혼란스런 전투에서 몽고메리는 많은 소대원들을 잃고
자신도 며칠동안 행방불명자로 신고되기도 했다. 참으로 기억하기 싫은 쓰라린 패배 경험이었다.
1914년 10월 13일 26세의
몽고메리는 와이프레스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승리했다. 이때 지휘관으로서 발휘한 무공과 용맹성으로 그는 무공훈장을 받고 대위로 진급했다. 영국으로
후송돼 부상치료를 마친 몽고메리는 제104 여단 참모장교로서 프랑스전선에 다시 복귀했다.
그는 여기서 1915년 6월 24일부터
11월 13일까지 대학살전이 벌어진 솜머지역 전투에 참가했다. 몽고메리는 남은 1차대전 기간 참모장교로서 보다 더 중요한 책임있는 직책을 맡아
처리했다. 1차대전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그는 중령으로 진급, 탁월한 전투지휘관과 참모장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차대전후
몽고메리는 아일랜드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오가면서 보충 재교육을 받거나 일선복무를 번갈아가면서 했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사단을 지휘하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1939년 9월 30일 다시 프랑스에 상륙했다. 이때 자기 사단의 임무는 초기전투에서 연합군이 후퇴하기전 추격하는 독일군에
대항해 벨지엄의 루방지역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몽고메리는 던커크 전투에서 독일군이 연합군 교두보를 측방 공격하지 못하게 방어하면서
후퇴작전중 후방방어를 지휘했다.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대장계급장을 달았다. 몽고메리가 위대한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행운은
1942년 8월에 찾아왔다.
몽고메리의 최대 전성기 북아프리카 전투그때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
사령관으로 선정된 한 장군이 항공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자 몽고메리는 대신 사령관 직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집트에서 그는 제8군 사령관 지휘를
맡았다. 8군은 독일의 에르윈 롬멜장군이 이끄는 아프리카 군에게 전투때 마다 연전연패 함으로써 장병들의 사기가 극단적으로 떨어져 있었다.
몽고메리는 이런 심각한 문제의 해결사로서 8군 지휘봉을 잡게 된 것이다.
그는 즉각 8군의 신뢰와 자신감을 쌓는 작업에 착수,
장병들과 탱크 포들을 대폭 증강했다. 1942년 8월 31부터 9월 2일까지 아람 할파지역 전투에서 몽고메리 부대는 롬멜부대의 전진을 저지했다.
이 전투에서 한달이 지난후 몽고메리는 병력과 무기를 독일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증강, 주도면밀한 반격을 개시했다. 그는 독일군의
숫적열세와 병참 지원의 약점을 이용,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몽고메리는 그해 10월 23일 엘 아라메인 전투에서 롬멜군을
패주케 하고 5만 9천명의 독일군을 사살 또는 포로로 잡고 500대의 독일전차를 파괴했다. 그는 이전투 승리후 몸을 사리면서 소극적 공세를
취해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때 공격을 둔화시켰다는 주위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1943년 5월 12일 서쪽에서
진격해온 미군들과 합류해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추축국 군대의 모든 저항을 송두리채 뿌리뽑는데 성공했다.
북아프리카 전투승리때는
몽고메리 생애에서 최전성기였다. 그 이상의 성공도 가능했지만 그는 장차 부대지휘권이 미국 손아귀에 넘어간다는데 대해 못내 서운했다. 몽고메리는
평소 미국인들이 영국인들 보다 열등한데 어떻게 자기가 미국 지휘를 받아야 하는가 하고 불만을 터트렸다. 그는 이런 불만과 미국인들에 대한
경시태도를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냈다.
미국 작전지휘권에 대한 이런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몽고메리는 1943년 7월 19일
시칠리섬 상륙작전때 자기 부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해 대승을 거두었다. 시칠리섬 상륙 후 자기가 맡은 지역을 확보한다음 그는 다음단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획, 준비하기 위해 다시 영국으로 갔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몽고메리는 처음부터 1백만명으로 구성된 45개사단의 지상군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는 노르망디상륙 교두보 확보작전과 요충지 카엔시 점령때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고 꾸물거렸다. 거기다 연합군 원정대
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과 불화마져 빚게되자 미군 사령관들이 지상군 지휘권을 넘겨받아 직접 행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오마 브래드리 장군과 동열로 격하돼 아이젠하워 휘하에서 작전지휘를 맡게되었다. 그후 몽고메리는 여전히 거칠고 신경질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연합군의 빠리 해방때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는 공적 책임과 개인적 감정을 철저하게 구분할 줄 아는 슬기로운 장군이었다.
아이젠하워와 몽고메리는 마지막 독일 진격때도 의견차를 드러냈다. 아이젠하워는 전선을 폭넓게 확대해서 공격 하기를 원했지만
몽고메리는 거대한 단일 전선으로 돌파해 들어가는 것을 주장했다. 지상군 원수인 몽고메리는 먼저 라인강 교량을 확보하기 위해 네덜란드를 공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야만 뒤따라온 기갑부대들이 독일중심부로 밀고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과의 마찰 속에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2차 대전을 승리로미국측은 그의 그런 작전 동기를 의심했다. 그가 지상군을 이끌고 먼저 독일점령을 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추가로 2개 미군사단을 자기 지휘아래 두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1944년 9월 17일 독일로 쳐들어가기 위해
네덜란드로 수천명을 공수하는 <마케트 가든>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 작전이 계획대로 성공했더라면 2차대전은 44년
크리스마스 전에 끝났을 것이다. 독일군이 연합군 진격로의 목을 지킨다는 정보를 사전 탐지하지 못해 몽고메리군 장병들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44년 12월 독일 아르덴느 지역 공격때 북부지역을 잘 방어함로써 그의 네덜란드 작전실패를 얼마간 보상한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벌즈 전투>때 미군들 전투능력이 보잘 것 없었다고 쓸데없이 깎아내려 공연히 미군 지휘관들의 미움만
사기도했다.
2차대전 최종단계에서 몽고메리는 영국군을 지휘, 주도면밀한 작전계획을 성공시켜 잇따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이
일련의 성공적 전투에서 네덜란드와 덴마크, 북부독일을 점령할 수 있었다. 몽고메리는 1945년 5월 14일 발틱 해안의 뤼벤부르크 헤쓰 지역에서
독일군의 전면적 항복을 받아냈다.
그는 2차대전때 모든 작전계획이 완벽하지 않을 때는 공격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거부했는데 이런
작전태도는 1차대전때 익힌 경험 때문이었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장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부하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은 모든 계급의 부하들로
부터 칭송과 인기를 모았지만 부하들에 대한 과잉 요구와 빈번한 파면조치등은 그가 동료 장군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인들과 여타 연합국가들은 그의 엘리트주의적 태도와 오만한 성격을 싫어했지만 윈스턴 처칠만은 그를 정당하게 평가했다. 처칠은
"몽고메리의 아라메인 작전 승리이전 연합군은 한번도 승리하지 못했고 그 작전후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그의 용맹성을 격찬했다. 결국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 중요 역할을 완수한 그는 미국 전쟁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몽고메리는 전후 영국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독일에 그대로 머물렀고 1951년부터 1958년 은퇴할 때 까지 나토(NATO)군을 지휘했다. 그는 88세를 일기로
1976년 3월 25일 영국 알튼 지방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뉴스앤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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