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1차 세계 대전 때부터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이 그때부터 세계의 전쟁과 평화문제에 대해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미국에 전쟁영웅들이 유달리 많은 것도 미국의 이런
세계적 중심 역할 때문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한 사람의 전쟁영웅만으로 성공할 수 없는 역사적 대규모 전투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미국의 전쟁영웅 아이젠하워 장군은 물론 오마 넬슨 브래드리 장군과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 등이 긴밀하게 협력해서 이룩한
공동의 승리였다.
오마 브래드리는 1915년 웨스트 포인트 졸업생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과 동기 동창이다. 그때 164명
동기생들 중 50명이 장군으로 진급,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오마 브래드리 장군도 이들 중 한명이다.
브래드리 장군은 2차 대전 중 유럽전투에서 으뜸가는 미국 지상군 사령관으로서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섬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투에서
군단을 지휘했다. 당시 프랑스 해안으로부터 돌파구를 마련한 직후 그는 130만 명으로 구성된 제12군 지휘를 맡아 독일내륙까지 깊숙이 쳐들어가
나치군을 패망시켰다.
이때 130만 명의 대군은 미국 역사상 단일 편성으로서는 최대의 군사력이었다. 미국이 최근 이라크 공격전을
준비하기 위해 20만 명을 투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보도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군대가 아닐 수 없다. 브래드리는 큰 전투에서도
항상 상식에 충실하고 일반병사들에 대한 헌신적 보살핌이 그를 ‘병사 장군’이란 별명으로 불리게 만들었다.
브래드리는 1893년
2월 12일 미조리주 클라크에서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런 곤경에도 불구하고 학교공부와 스포츠 활동에서 모든 열정을 다 바쳐
노력했고 마침내 미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에 합격했다.
브래드리가 2차 대전에서 미국 선두그룹 장군집단의 한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전투경험이 없었다. 그가 1차 대전때 참전하려고 수많은 시도를 했으나 브래드리는 이곳저곳 미국 내 군사보직에 배치되었을 뿐이다.
1차 대전 후 브래드리의 군 생활은 미국 내 다른 장교들의 생활과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이때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겪었던 것처럼
일선 군 지휘를 맡았다가 재교육과정을 거치는 등 승진도 너무 늦을 뿐 아니라 봉급수준도 형편없이 낮았다. 참으로 지루한 나날이었다. 브래드리는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지 9년만에야 겨우 소령계급장을 달수 있었고 그 후 중령 진급 때 까지 12년이란 긴 세월을 또 다시 기다려야 했다.
軍에서 두각을 드러낸 브래드리계급 진급을 떠나서 그는 군 생활 시작 초기 때 부터 미국
육군역사에 뚜렷한 두각을 나타냈다. 예컨데 1920년대 그는 하와이에서 제27 보병연대에서 3년간 근무한 다음 칸사스시 포트 레벤워스 기지
일반참모대학에서 1년간 지휘관 연수를 마쳤다. 그 후 1929년 그는 조지아주 포트 베닝기지로 돌아가 교관으로서 후배장교들을
가르쳤다.
이 기간 브래드리는 미래의 미 육군참모총장이 될 조지 마샬 장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샬 장군은 일찍부터 젊은
브래드리의 조직적이고 지도자적 자질과 능력을 인정하고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20년간 브리드리와 마샬은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식으로 두 사람은 상관과 부하로서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마샬 장군은 부하장교 브래드리의 타고난 재능을 높이 사 미국군 발전과 브래드리의
생애에 도움이 되는 보직을 연속적으로 부여했다.
1941년 2월 마샬장군은 브래드리에게 보병학교 교장자리를 주선했고 이 자리가
마침내 그에게 준장계급으로 진급할 수 있는 행운의 기회가 되었다. 2차 대전 선전 포고 후 전쟁준비를 하는 동안 브래드리 장군은 잠시
제82보병사단장과 제28보병사단장을 각각 맡아 지휘했다.
아이젠 하워 장군의 부관으로..브래드리
장군의 최초 전투임무는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 동기생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의 부관역할이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당시 북 아프리카 주둔
미군사령관이었다. 그의 첫 일선전투 임무는 또 한사람의 2차 대전 영웅인 조지 S. 패튼 장군 밑에서 제2군단 부사령관을 맡아 지휘하는
것이었다.
조지 패튼 장군이 제7군 사령관으로서 진급해 자리를 옮기자 브래드리 장군은 중장 계급장을 달고 제2군단 사령관 직책을
맡았다. 그는 이 직책을 2차 대전 북아프리카 전투 내내 가지고 있었다. 1943년 5월 7일 브래드리 장군의 제2군단은 북아프리카 비제르트
항구를 점령하고 40,000명의 이탈리아와 독일 등 추축국 군인들을 포로로 잡았다.
비제르트 항구는 페니키아 시대 때 부터
항구였고 이곳의 역사는 15, 16세기경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도 이 항구는 2차 대전 때처럼 전쟁에 얽혀들어 이스람교도들은 스페인을
점령한 기독교인들로 부터 도망쳐 나와 이곳에 숨어 피난생활을 했다.
브래드리 장군은 1943년 7월 10일 시칠리 상륙 작전 때
까지 패튼 장군의 제7군 휘하 제2군단 사령관으로서 근무했다. 그는 연합군 총공격작전 최선봉에서 지휘했고 시칠리 상륙 5주만에 이탈리아 본토
남단과 건너편 시칠리섬 사이 메씨나해협을 탈환했다. 그 후 메씨나 해협에는 철로와 도로기능을 합친 길이 3,300m의 아름다운 현수교가
건설되었다.
2차 대전의 제1군 사령관1943년 10월 아이젠하워 장군은 브래드리를 미국 제1군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제1군은 ‘오버로드’(과부하 작전)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준비 중인 여러 지상군부대들로 구성돼있었다. 이때 유명한 조지 패튼
장군은 여러 명의 부하 장병들을 구타한 불미한 사건 때문에 제1군 사령관으로 선정되지 않았다.
그는 거꾸로 지금까지 그의 부하였던
브래드리 사령관의 부하로 강등돼 전투에 참여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서 적군의 방위 벽을 뚫고 프랑스 내륙으로 깊숙이 쳐들어감으로써 브래드리
장군의 책임은 더욱 무거워졌다. 130만 명의 제12군 선봉에서 브래드리 장군은 독일군 공격을 교묘히 치고 빠지곤 했다.
그는 이
작전에서 이미 해방된 파리에서 더 이상 독일군이 저항하지 못하게 눌러놓고 파죽지세로 독일 국내로 밀고 들어갔다. 1944년말 경 아르덴느
산악에서 히틀러군의 최후의 발악적 반격작전에 밀려 잠시 후퇴했지만 브래드리는 1945년 초 시크프리드 전선을 뚫고 레마겐 다리에서 라인강을 건널
수 있었다.
독일군은 시크프리드 언덕에 난공불락의 영구요새를 구축해놓아 연합군이 돌파하는데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레마겐은
독일 본, 동남쪽 라인강 왼쪽에 위치한 언덕의 고장으로서 여기를 가로막고 있는 철로는 돌파하기 어려운 전투 지역이었다. 이곳은 과거 로마
요새로서 로마유적들이 많다.
브래드리의 전광석화 같은 진격작전은 라인강 근처 루르 포케트 지역에서 독일군을 독안에 든 쥐처럼 철통
포위한 후 335,000명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작전 성공 후 브래드리는 1945년 3월 12일 4성장군으로 진급했다. 그 다음 달
그의 군대는 엘베강가에서 소련군과 합세해 마침내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항복을 받았다.
2차 대전 2년 뒤 그는 재향군인행정처장을
잠시 지낸 후 1948년 아이젠하워 장군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에 보임되었다. 1949년 1월 16일 브래드리는 신설된 3군합동 총사령부격인 초대
합창의장직을 맡았다. 그는 여기서 초기 냉전시기와 한국전 기간 내내 합참의장으로 군을 지휘하면서 국가에 봉사했다.
1950년
브래드리는 출중한 극소수 미국장성들에게만 수여되는 특권적 계급인 영광의 5성장군으로 진급했다. 대게 5성장군들은 은퇴 않는게 통례인데도 그는
1953년 8월 15일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1981년 4월 8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뉴욕시에서 군사문제와 민간 기업
자문역으로 활동했다.
브래드리 장군이 2차대전에서 연합군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주요 공로자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사상초유의 초대규모 군병력을 가장 유능하게 지휘해 영국군과 여타 연합군과의 합동작전에서 절묘한 규형을 유지함으로써 마지막 승리를 굳혔다.
그는 잘난체 나서기를 삼가고 과묵하며 침착했기 때문에 유능했지만 성급한 패튼과 같은 장군들을 차례로 제치고 군인으로서 성공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그도 처음에는 상관 눈에 잘 뜨이지 않았던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인물이었다. 그러나 꾸준한 노력과 각고하는 인내로 다져진
철인적 강인함과 온화한 포용력이 침략자로부터 조국을 구원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오직 조국을 지키려는 애국심과 독재자들을 척결해야
하겠다는 굳은 신념이 국가적 개인적 시련을 타넘고 파시즘과 나치즘의 전체주의를 무찌를 수 있었다.
브래드리 장군은 1차대전과
2차대전의 중간시기 태어난 영웅이다. 조지 마샬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조지 패튼 장군들도 모두 이시기 성장한 전쟁영웅들이다. 1920년대 군대
규모도 작고 현대장비도 부족했던 미군은 군인들 교육과 이론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1차대전후 미국군 역사상 비몽사몽 안보의식이
결여되었던 시기 오마 브래드리 같은 장군이 여유있게 홀로 묵묵히 지휘력을 성장시키고 꾸준히 전술을 연마했다. 그의 이런 노력 덕택으로
1940년대와 1950년대 미국은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 군을 전쟁에서 평화로 무사히 구출해 낼수 있었다.
앞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브래드리는 1차대전에 참전하지 못하고 본토에서만 근무했던 점을 늘 안타까워 했다. 그때 프랑스 전투에 참가했던 동료들은 승승장구 진급하는데
자신은 그 대열에서 빠졌기 때문에 한때 직업군인으로서 대 실패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우울한 자체평가는 조급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35년후 그는 5성장군의 영광에다 두 번 임기의 초대 합창의장까지 역임하고 유럽전장에서는 사단과 군단, 군, 그리고
집단군을 차레로 지휘,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래드리는 미국 장성중 가장 사랑받는 전설적 영웅으로 남아있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기사 제공 : 뉴스앤피플
<뉴스앤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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