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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장열전(3)

鶴山 徐 仁 2006. 5. 28. 17:35
세계 명장열전(3)-아이젠하워
관리자 
사상 최대의 작전 지휘한 名 지휘관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 장군은 2차대전때 노르망디 연합군 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다. 그는 전후 군을 떠나 잠시 컬럼비아대학 총장으로 있다가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1951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령관으로 다시 군에 복귀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1952년 트루만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에 따라 공화, 민주양당의 후보추대 대상에 올랐다가 공화당후보로 출마, 압승을 거두었다. 52년 제34대 미국 대통령 선거전때 내세운 케치프레이스는 "나는 아이크를 사랑해"였다.

<아이크>는 그의 대중적 애칭이다. 그는 공화당 대통령으로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후 다시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을 휴전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가 선거전에서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켰고 일생 동안 두 개의 큰 전쟁을 자기 주도로 지휘하고 끝낸 셈이다.


맥아더 장군과의 인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는 묘한 인연을 맺었다. 1935년 아이젠하워는 맥아더 장군이 육군참모총장 시절 총장실에서 근무했고 필리핀에서 3년간 맥아더 장군의 부관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던 한국전의 휴전을 성사시킨 것이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초대규모 전쟁에서 최대규모의 다국적 군대를 총 지휘했다. 2차대전 노르망디 작전때 그는 육해공 4백만명의 대군을 장악, 연합군의 총공격을 계획 지휘, 독일 이탈리아등 추축국들을 패망시켰다.

여러나라 군대들로 구성된 다국적군과 고집센 예하 지휘관들을 통솔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비범한 능력을 발휘해 연합군을 통솔, 어려운 승리를 일궈냈다.


아이젠 하위의 성장기

그는 1890년 10월 14일 택사스주 데니슨에서 출생, 양친과 함께 칸사스주 아비렌으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성장했다. 집이 넉넉지 않아 대학을 갈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 육군 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를 선택했다.

그는 웨스트 포인트 육사시절 축구선수였으며 1915년 졸업동기생 중에는 50여명의 장군을 배출했다. 164명 졸업생중 61번째 성적을 받은 그는 보병소위로 임관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초임 장교로서 보병과 신설 탱크부대 합동작전 훈련계획을 개발해서 이 름을 얻었다. 맥아더와는 달리 1차대전에 참가하지 못하고 본국근무를 하면서 1920년 고속승진, 소령계급장을 달았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였다.

그는 20년간 소령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는 바람에 적은 군대월급으로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무척 고생을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는 앞날에 인생의 거대한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예감했다. 그때 만약 참지못하고 화풀이로 군대를 떠났더라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대성공도, 2대에 걸친 8년간의 미국 대통령의 찬란한 영광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칸사스 포트 레벤워스에서 군사참모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1929년 존 조제프 퍼싱장군 밑에서 1차대전에 대한 안내서를 저술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여러분야에서 완벽한 참모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계속 좋은 평가를 받았다. 미국이 2차대전전 대외 확장정책을 쓸 시기 그는 마침내 중령으로 승진했다.

그후 2차대전때 3년간의 짧은 기간, 그가 5성장군으로 도약,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책을 맡을줄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멀티플레이어 선수처럼 다재다능한 그의 우수한 능력을 인정한 사람들도 똑 같은 생각을 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퍼싱, 맥아더에게 우수한 업무추진 능력과 적극적이며 호감어린 인상을 주었다. 그 덕택으로 마샬 참모총장은 일본의 진주만기습 직후 그를 육군 작전사단장에 임명했다.

그는 태평양 전장에서 일본군을 견제하면서 유럽에서는 나치군을 섬멸하는 연합군 종 합작전전략을 수립했다. 마샬은 그를 직접 소장으로 발탁했고 1942년 7월 중장진급과 동시 북아프리카 침공작전인 ‘휏불작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초기 케서린 통로작전에서 독일의 에르윈 롬멜 아프리카 군단에게 밀리자 그는 예하부 대장들을 자신이 직접 선택한 부대장들로 전면 교체했다. 아이크의 부대장 교체와 지도력은 롬멜장군 부대에 대한 열세를 압도적 우세로 역전시켜 결국 나치와 이탈리아 군의 대규모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북아프리카 침공작전에서 대승한 그는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 조지 S. 패튼 장군 같 은 고집세고 거만한 휘하 부대장들을 철저하게 장악하는 능력을 인정 받았다. 4성장군으로 진급한 아이크는 1943년 7월 시시리 상륙상륙을 지휘한데 이어 이탈리아 반도에 입성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지휘

아이젠하워는 43년‘유럽정벌 연합군’최고사령관으로서‘오버로드 작전’(과부하 작전)아래 노르망디 상륙작전 수립과 집행을 총지휘했다. 그의 직접 작전지휘와 행정능력 덕분으로 연합군은 유사이래 최대의 상륙군사력을 한곳에 집결시켰고 기습시간과 장소를 작전순간까지 독일군조차 소름끼칠만큼 극비에 부쳐 철벽보안에 성공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북부해안 노르망디에 상륙한후 수백만 연합군을 이끌고 독일로 진격해 들어갔다. 노르망디에는 미국 제1군, 영국 제2군, 캐나다 제1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상륙했다. 영국 몽고메리 장군이 상륙군의 실전지휘를 맡았다.

이 날 수송기 2,316대와 수많은 글라이더로 공수부대를 독일군 배후에 투하시켜 프랑스 내륙에 거점을 확보한 연합군은, 그와 거의 동시 항공기 총 13,000대와 함선 6,000척을 동원, 노르망디 해안을 초토화하면서 7개 사단을 상륙시켰다.

‘사상 최대의 작전’이었다. 이 날부터 7월2일까지 연합국측은 인원 약 100만명, 물자 약 57만톤, 각종차량 17만량을 프랑스에 상륙시켰다.

상륙 후 첫 3주동안 연합군의 손실은 공식적으로 사망자 8,975명, 부상자 51,796명에 달했고 작전 과정에서 독일군 41,000 명을 포로로 잡았다. 전쟁 초기 서부 전선에서 순식간에 패배해 유럽 대륙으로부터 퇴각한 연합국측은 이 작전을 통해 비로소 독일 본토로 진격하기 위한 확실한 발판을 마련했다.

프랑스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노르망디 해안은 험한 절벽이었고 상륙작전 전날 밤은 폭우 안개 등으로 도저히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극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고민하던 연합군 지도자들은 이 결정적인 작전의 성공을 위해 각각 기도했다.

루스벨트 대통령, 처칠 수상도, 아이젠하워 사령관도 모두 전쟁의 승리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기도했다.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17시간이나 기도 했다는 에피소드도 남겼다. 아이젠하워는 오랫동안 전략을 수립했고 가장 치열한 전투가 전개된 이 작전은 결정적 타격을 나치 독일군에게 안겨주었다. 이 작전은 90일간의 전투라고 일컬어 진다. 그만큼 집중적인 전투가 전개돼 피아간 희생자도 많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배경은 연합군이 물샐틈 없는 전략전술을 잘 구사한 탓도 있지만 독일 롬멜 사령관이 남부 독일 우름시에 있는 아내 생일선물을 전달하느라 프랑스 기습현장을 비웠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또 연합군은 44년 봄부터 영국 남부 해안 지대 각항구에 수백만명의 미군들이 북적거리게 하고 보급품과 무기탄약들을 실어날아 프랑스 북부 칼레지방이 상륙지점인 것 처럼 독일군을 속였다.

연합군 양동작전팀이 이따금 칼레지방에 출격, 노르망디로 부터 나치군의 주의를 분산 시켰고 고무로 만든 가짜 탱크들을 수없이 배치해 칼레지방 침공이 임박한 듯 속임수 심리전을 썼다.

노르망디상륙 전쟁영웅으로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나선 아이크는 민주당 아들라이 스티븐슨 후보의 풍부한 행정력과 지식, 재치, 세련된 언변, 화려한 공약등을 두차례나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대통령 아이젠 하워와 한국전쟁

그는 39세의 젊은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 리처드 닉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선택함으로써 62세로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자신에 대한 국민들 우려를 불식시켰다. 압도적 다수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긴급과제는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질질 끌어온 한국전쟁의 종결이었다. 이것은 선거공약이기도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52년 11월 29일 극비리에 뉴욕을 출발, 한국으로 향했다. ‘명예로운’휴전타결을 위한 직접 한국전선 현장 시찰여행이었다. 찰스 윌슨등 예비국방장관과 제임스 헤거티 공보비서, 허버트 브라우넬 범무장관 지명자들과 비밀선서를 한 기자들 일행만이 동행했다.

그는 72시간 한국에 머무는동안 대부분 시간을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밴 프리트 8군사령관등 주요 일선 군지휘관들과 만나 현황파악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크가 1주일간 머물면서 국회연설과 대규모 군대사열을 하고 자신과 장시간 한국전 수행에 관해 협의하기를 바랐지만 그런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이크는 사흘간의 한국체제기간 이(李) 대통령과 두차례 만났지만 시간은 한시간 뿐이었다.

이(李) 대통령의 생각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쳐올라가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고 한국을 민주국가로 통일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한전을 하면서 공산측과 적당한 선에서 휴전으로 전쟁을 끝내려는 아아크의 계획에는 처음부터 절대 반대였다.

이 대통령은 북한측 도발로 시작된 한국전이 막대한 피만 흘리고 원래 분단선인 38선과 대차없는 전선에서 휴전한다는 발상에 비통함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크는 53년 7월 27일 한국전을 휴전으로 끝냄으로써 그의 선거공약을 지킨 셈이다.

맥아더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의 실전업적으로 성공한 장군이라면 아이젠하워는 행정력과 기획력, 참모역할로 성장한 군인으로 좋은 대조를 이룬다.

아이크는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펜실베이니아 게티스버그 농장에서 은퇴생활을 하다가 1969년 3월 26 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군인출신 대통령인데도 재임중 국제평화의 전도사로서 냉전해소와 세계평화 달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기사 제공 : 뉴스앤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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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05-08,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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