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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장열전(1)

鶴山 徐 仁 2006. 5. 28. 17:15
세계 명장열전(1) 걸프전 영웅 노만 스워츠코프 장군
관리자 
국가는 국민, 영역, 주권등 3 요소로 구성돼 있다. 이가운데 어느것 하나가 없어도 독립국가로서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없다. 주권은 외침을 막아 국민생명과 재산, 영역과 독립을 지키고 대내적으로는 최고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권력을 뜻한다.

아무리 국가가 커도 군이 외부 침략을 물리칠수 없다면 주권과 함께 국가는 존립할 수 없다. 지난 6월 서해교전때도 만약 우리해군 장병들이 목숨 바쳐 북한 함선들의 무력도 발을 즉각 격퇴하지 않았다면 서해수역은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해군이 영역을 지킴으로써 독립과 주권이 보장될 수 있고 후방 국민들도 안심하고 일상생활에 전념할 수 있다. 6월 한달동안 국민들이 월드컵을 무사히 치르고 연인원 2 천만의 ‘붉은 악마들’이 열광적 응원을 할 수 있었던것도 국군장병들이 24시간 땅과 바다, 공중에서 우리영역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마다 오랜 전투경험과 지도력, 애국심을 갖춘 지휘관들이 군대를 지휘, 국가 영역과 주권을 수호하고 있다. 국가 존립은 각급 군지휘관들이 얼마나 투철한 애국심과 강철같은 군인정신, 적을 능가하는 최첨단 전략전술로 무장돼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런점에서 H. 노만 스워츠코프 미 육군대장의 걸프전 무용담과 전략전술은 세계전사 에 기록될만 하다. 그는 전사상 최초로 전자전을 성공적으로 지휘, 42일이란 최단기간내 전쟁목적을 100% 달성한 명장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시원하게 벗겨진 넓은 이마와 날카로운 눈매, 발달한 광대뼈, 굳게 다문 한일자 입, 큼직한 두귀가 용맹한 무인다운 풍모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사막의 폭풍’작전으로 명명된 걸프전은 90년 8월 2일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이 이웃 쿠웨이트를 기습, 점령 흡수한데 대한 반격전이었다. 유엔결의에 따라 91년 1월 17일 미군과 영국군 프랑스군등 다국적군등이 참전, 개전 42일만에 이라크군을 궤멸하고 쿠 웨이트 독립을 원상회복 해주었다. 짓밟힌 정의를 국제적 양심이 되찾아 준 것이다.

걸프전 목적은 뚜렷했다. 당시 미군 최고통수권자인 조지 부시 대통령(41대)은 스워츠 코프 장군에게 분명한 네가지 전쟁지침을 내렸다. 스워츠코프 장군은 이 전쟁지침을 한치 오차없이 실현, 전쟁목적을 달성함으로써 미국의 국민영웅이 되었다.

그 전쟁지침은 ①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축출하고 ② 쿠웨이트를 완전 해방, 주권회복을 도울 것 ③인명피해를 최소화 할 것 ④ 이라크군의 재침 전쟁수행능력을 궤멸 시킬것등이다. 스워츠코프 장군은 부시 대통령의 전쟁지침을 탁월한 지도력과 곰 같은 인내력, 과학적이고 단계적이며 체계적 작전수행으로 털끝만큼의 흔들림 없이 일사불란 하게 야전에서 실현했다.

걸프전은 종전 전쟁과 몇가지 다른 특징을 나타냈다. 첫째 상상을 초월한 최첨단 정보기술이 총동원된 전자전이었다. 미래 전자전의 예고편이었다. 둘째 철저한 과학전이었다. 셋째 매스 미디어 통제속에서 심리전을 구사한 미디어전이었다. 넷째 침공국가 이라크측은 8만5천명의 포로와 15만명의 대규모 전사자를 낸 반면 다국적군 사상자는 불과 4백명이었다. 스워츠코프 장군이 사우디 리아드에서 다국적군 연합작전을 매끄럽게 지휘, 일방적 승리로 이끈 덕택이었다.

전세계 사람들은 이런 전쟁상황을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철군으로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안방에서 TV화면으로 영화 감상하듯 볼수 있다.

걸프전은 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인구 60만의 작은 이웃나라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라크를 자신들 영토라고 주장해온 사담 후세인은 8년을 끈 이란-이라크전후의 민심수습을 위해 쿠웨이트 침공이라는 비상카드를 빼들었다.

그러나 이라크군은 격분하는 국제여론을 업은 미국등 다국적군에 의해 단기간내 궤멸되었다. 걸프전은 부시 대통령의 5개월여에 걸친 반격명분 쌓기 외교전및 심리전과 함께 치밀하게 준비해온 미국의 정보기술전, 과학전, 전자전, 미디어전의 승리로 끝났다. 42일 전쟁기간중 39일간이 전자전을 동반한 미사일과 전폭기의 항공전역(戰役)전이었고 이라크군을 몰아내는 지상전은 3일간에 불과했다.

스워츠코프 장군은 연합 야전군 사령관으로서 이런 작전개념을 오케스트라 지휘자 처럼 절묘하게 실현했다.

미국등 다국적군은 먼저 토마호크 미사일과 RC130기 공격편대로 이라크 방공망을 무력화시키고 이어 전폭기 편대들이 떼로 몰려가 이라크 지도부, 군지휘부, 지휘통제시설, 스커드 기지, 생화학무기 시설들을 집중 타격, 전쟁 지휘능력을 궤멸시켰다.

본국으로부터 보급이 끊기고 작전 지휘조차 받을 수 없었던 쿠웨이트 점령 이라크 군은 파죽지세로 치닿는 다국적군에게 저항능력을 상실하고 항복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베트남전과는 달리 ‘사막의 폭풍작전’중 전세계 매스 미디어를 교묘하게 다뤄 전쟁수행중 반전여론을 봉쇄, 승리로 이끈 야전군 사령관으로서 2차대전후 가장 인기높고 사랑받는 장군이 되었다. 그는 또 지루하고 인기없는 베트남전 참전 미군장교들을 시대적으로 대표하는 군인이기도 하다. 그는 베트남전 후 군에 남아 작전능력향상과 미군장교들의 군복무 성실성 보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스워츠코프 장군은 1934년 8월 22일 뉴저지주 트렌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도 웨스트포인트를 나와 2차대전에 참전한 군인가족 출신이다. 스워츠코프 장군은 청년시절 아버지가 전후 이란 샤왕 군사고문으로 있을 때 중동을 처음 방문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는 벨리 포즈 군사학교와 웨스트 포인트를 나와 보병장교로 미국과 독일에서 근무했다. 남 칼리포니아 대학에서 2년간 수학, 유도미사일 분야 석사학위를 받은후 웨스터 포인트 교수진에 합류했다. 1년간의 교수생활후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 베트남 공수사단 고문으로 활동했다.

스워츠코프 장군은 다시 2년간의 웨스트 포인트 교수직과 육군참모대학을 거쳐 중령으로 조기 진급한후 베트남전으로 복귀했다. 1969-70년 그는 제23 보병사단의 제1대대 지휘를 맡았고 여러차례 무공훈장을 탔다. 그후 12년간 앨라스카와 하와이, 독일, 미국등지에서 다양한 분야 지휘관으로 활동,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1983년 6월 조지아주 포트 스튜아트에서 제24기계화 보병사단장으로 부임했고 그해 10월 그레나다 공격때 ‘긴급분노작전’ 부사령관겸 수석 작전지휘관으로서 ‘사막의 폭중작전’ 처럼 완벽하진 않았어도 작전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88년 4성장군때 그는 중동의 긴급사태 담당 군사령부인 중부군 사령관에 기용되었다. 걸프전에서 그는 베트남의 제한전 교훈을 인식, 공중, 해상, 지상군의 거대한 연합군을 일시에 집중투입, 42일간의 항공전과 100시간의 지상공격을 퍼부었다.

스워츠코프 장군은 걸프전에서 베트남전실패 교훈을 되새겨 올바른 전쟁에서 알맞은때 적임 장군임을 입증함으로써 세계전사에 깊은 자죽을 남겼다. 그는 걸프전 승리후 워싱턴에서 열광적 환영을 받은후 고향에서 조용한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기사 제공 : 뉴스앤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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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04-28, 1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