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은 누구인가?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선생은 수원의 부유한 개명 관료의 딸로 태어나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 서양 화가이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서울에서는 첫 번째로 개인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유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힘썼고 초창기 「이른 아침」(早朝)과 같은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했으며, 1922년부터 1932년까지 해외 여행을 떠났을 때를 빼고는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한 재주 있는 화가였다. 나혜석은 단지 화가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 까지 담은 여러 논설들과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 「경희」를 쓴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였다. 또한 3·1운동 때는 여학생들을 만세운동에 참가시키기 위해 활동을 하다가 다섯달 동안 감옥살이를 겪었으며, 중국 안동현(현재의 중국 단동시) 부영사가 된 남편을 따라 안동현에서 살 때는 국경을 넘어 다니는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독립운동가들의 편의를 보아주기도 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나혜석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글로 썼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을 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해 나간 진보적인 여성 해방의 사상가였다.
일본 유학시절 좋은 혼처가 나섰으니 공부를 그만 두라는 아버지에게 맞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했으며, 결혼식 때는 예술활동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남편에게 받아내었고, 화가로 3남매의 어머니로 거기다가 외교관의 아내로 어느 하나도 소홀함이 없이 잘 해내었던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모든 역할을 잘 해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던 나혜석은 자신의 그림이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과 아내의 예술활동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는 남편이 예술 세계를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가중한 가사노동에 지치기 시작했고 마침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할 기회가 생기자 과감하게 1년 8개월간의 여행길에 올랐다.
나혜석은 서구 여성들의 좀더 인간생활을 위한 노력을 목격하고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새로운 그림의 세계에 눈떠 갔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만난
최린과의 연애 소문으로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고, 인터뷰에서 이혼의 비극을 예방하기 위해 시험 결혼이 필요하며 시험 결혼기간 동안에는
산아제한이 필요하다는 조선의 인습을 뛰어넘는 발언으로 질타를 받는 등의 일을 겪게 된다.
1930년 결국 김우영은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리고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하여,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게 됨으로써 둘의 인연은 끝을 맺는다. 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원>이라는
작품이 특선을 하게 되면서 전업화가로서의 자신감을 얻게 되고 작품에 몰두 하게 된다. 더불어 나혜석은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비난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런 관념은 상대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쳤다.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자기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이혼을 당하고 빈몸으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 넣은 두 남자와 그들 남성이 멀쩡하게 행사하도록 하는 사회 관습에 도전한 나혜석이 연 전람회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응은 차가웠고, 사회의
냉대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화재로 그림을 태워 먹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절집들을 떠돌아 다녔고, 해방 후에는 서울의 한 양로원에 맡겨졌으나
그는 걸핏하면 몰래 빠져 나왔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 오른다고 했던
나혜석은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 에도 남아 있지 않다.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온몸으로 살아간 화가이며 민족주의자이고 여성해방론자였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인간적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어 해체하는 글들을 써서 사회의 비난을 자초하면서도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그녀가 남긴 미술작품
1924년 만주 봉천풍경
1927년 파리풍경
1928년 블란서 마을풍경
1928년 스페인 국경
1933년 선죽교
1933년 인천풍경
1935년 화령전 작약
1935년 별장
1935년 다솔사
이외 다수
1927년 남편을 따라 간 구미여행 길에 파리에서 공부하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이때 비시에르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야수파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27년 전후의 그림을 보면서 달라진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지필활동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조선일보」1926.1.3)-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 생활 개량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음.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 구미 부인의 가정 생활」(「중앙」 1934.5)-수원에서 삼일 여학교를 다니던 시절 삼일학교를 다녔던 남학생에 얽힌 추억담이다.
「이혼 고백장」(「삼천리」1934.8-9)- 김우영을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심경을 솔직하게 쓰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관념을 비판화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신생활에 들면서(「삼천리」1935.2)-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얽혀 있는 조선을
떠나 미래를 향해 다시 파리로 가고 싶다는 희망과 의지를 담은 글이며, 이혼 후 자신이 겪은 조선 사회의 인심을 비판하면서
인습에 얽매인 정조관념의 해체라는 한 시대를 앞선 주장을 했다.
희곡 「파리의 그 여자」(「삼천리」1935.11)- 구미여행 당시 있었던 일과 조선에 와서 다시 최린을 만난
이야기를 쓴 희곡.
「해인사의 풍광」(「삼천리」1938.8)- 해인사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지낸 기록이며 나혜석이 마지막으로 발표한 글이다.
이 외에도 소설, 희곡, 시, 산문 등 많은 분야에서 작품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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