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석]스페셜
이름 :
이범석 (李範奭) 소개 :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가 출생 :
1900년 10월 20일 활동 :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1940년 한국광복군 참모장·제2지대장 1923년, 고려혁명군, 기병사령 1920년,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 사망 :
1972년 5월 11일 관련역사 :
주요수상 :
197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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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본문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이 일본군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으로 유인하여 대파한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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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일본군 동지대(東支隊) 부대는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에 있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용정(龍井)·대굴구(大屈溝)·국자가(局子街)·두도구(頭道溝) 지역으로 진군해왔다. 독립군은 처음에는 화력과 병력의 열세를
고려하여 피전책(避戰策)을 택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토벌과정에서 한국인 촌락을 불사르고 동포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 일본군과 대항해 싸우기로
결정했다. 일본군이 북로군정서군을 뒤쫓아 청산리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자,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은 일본군과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부대를 2개 제대로 나누었다. 제1제대는 김좌진이
지휘하는 본대로서 비교적 훈련이 부족한 사병들로 편성하여 사방정자(四方頂子)의 산기슭에 배치했다. 제2제대는 후위대(後衛隊)로서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의 지휘하에 백운평 바로 위쪽 골짜기 길목에 잠복했다. 북로군정서군이 매복한
지역은 지형지물이 잘 발달되어 있어 적을 기습하기에 적당한 지형이었다. 북로군정서군은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해 주변 마을의 노인들에게 "독립군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사기가 떨어져 허둥지둥 도망갔다"는 등의 허위정보를 퍼뜨리게 한 후, 주위의 천연적 엄폐물을 이용해 철저히
위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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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 선발 보병 1개 중대는 매복사실을 모른 채 하루 전에
독립군이 행군한 길을 따라 백운평에 진입했다. 일본군 전위부대의 전병력이 공지 안에 들어서고 선두가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매복지점으로부터
10여 보(步) 앞에 도달했을 때인 오전 9시에 독립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독립군이 은폐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채 응사하던
일본군 전위부대 200명은 교전한 지 20여 분 만에 전멸했다. 뒤이어 도착한 야마다[山田] 토벌연대 본대는 전위부대의 전멸에 당황하여 산포와
기관총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자는 늘어났다. 이에 일본군은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로 1부대를 편성해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측면을 우회공격하려 했으나 절벽 위에서 조준 사격하는 독립군에 의해 막대한 희생을 치른 뒤 패주했다. 일본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해
매복한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정면과 측면을 산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지만 완전히 엄폐되어 있는 독립군의 반격에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일본군
토벌연대 본대는 자기편의 시체를 쌓아 은폐물을 만든 뒤 필사적으로 반격했으나 1,200~1,300명의 전사자만 더 내고 숙영지로 패주했다.
북로군정서군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해서 22일 새벽 2시 30분에 이도구(二道溝)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했다.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독립군 병사들의 영웅적 분전,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지휘관들의 우수한 유격작전,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와 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룩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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