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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진 스미드(Eugene Smith 1918~1978)

鶴山 徐 仁 2006. 4. 15. 14:34

유진 스미드(Eugene Smith 1918~ 1978)

드라마 같은 사진,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장면, 마치 연출한 것처럼 보여 의심이 나지만, 그래도 보도 사진이라는 이유 때문에 진실로 믿을 수 밖에 없는 감동적인 장면을 잘도 찍는 작가가 있다. 보도사진의 영웅적인 작가들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그 사람은 바로 유진 스미드(Eugene Smith) 이다.

언젠가 좋아 하는 후배 중 한명이 유진 스미드의 사진이 너무 좋아서 그의 딸아이의 이름을 유진이라고 지었다는 어떤 사람의 일화를 내게 전했을 때, 불현듯 나 또한 “그래 마저 나도 예전에는 스미드의 사진을 좋아 했었지” 라고 혼자 말로 되 내었다.

그 당시 내게는 그의 사진 보다는 소위 말하는 전위적인 작가의 작품에 관심이 집중 되어 있었기 때문에 스미드의 사진은 일종의 진부한 모습으로 치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스미드의 사진은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감동적이다. “이런 장면을 찍어낼 수 있는 보도 사진가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면서” 말이다.

아마도 사진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준적인 모델이 될 만도 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한편 그와는 다른 사진을 만들어야 된다는 일종의 시기와 오기를 부리면서 그의 사진들을 폄하하곤 했다.


[시골의사 중에서, 1948]

이제 다시 그의 사진들을 본다. 흔히 말하기를 스미드의 사진을 보고, 그는 휴머니스트이다. 그는 사실을 왜곡 하지 않고 진실을 포착하기 위해서 평생을 보도 사진계에 몸 받쳤다는 등의 수식어는 빼기로 하겠다. 그럼 그의 대표적인 사진들 중 하나인 시골의사의 사진을 분석해 보자.

[시골의사] 이 사진을 보면, 시골의 한 의사가 이제 막 수술을 마치고 심신의 피로를 풀기위해서 차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의 얼굴은 무언가 골 돌이 생각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시골의 가난한 환경에서 충분이 보호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 인가, 의료시설과 제정에 대한 걱정인가 아니면, 고향에 두 고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인가?

이 사진을 다시 한번 보자. ‘수술 복을 체 갈아 입지 않은 상태에서 담배가 다 타도록 차는 아직 한목 음 도 마시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이 의사는 영화 배우처럼 뺨치게 잘 생겼으나 피곤한 기색이 역 역하다. 그의 지친 몸은 부엌의 싱크대에 기대어져 있다.’

이런 장면을 찍기 위해서 스미드는 그에게 어떤 주문을 했을까? 평상시대로 늘 하던 습관을 그에게 요구했을까? 아니면, 시골의사라는 특별한 신분에 맞게 혹은 봉사하는 의사의 모습을 부각 시키기 위해, 그의 표정에서 고뇌에 찬 모습을, 그리고 수술 복을 체 벗지도 않은 체, 낭만적으로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게 하였는가?

만약에 그 시골의사가 잘생기지 못하고 무슨 도둑놈 이나 부랑자처럼 생겼다면 그리고 수술복장을 입지 않고 평상복차림으로 찍혀 있다면, 어떨까?

사진가는 시골의사 중 아무리 헌신적인 봉사를 한다고 해도 그의 차림새나,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담으려 할까

그리고 왜 이 사진에는 담배가 다 타도록 차 한목 음 마시지 않는 긴 시간의 침묵이 흐르는 사적인 공간에 사진가가 쉽게 침투 할 수 있었을까? 어딘가 자꾸 의혹이 생기는 것은 그의 사진이 너무나 잘 찍혀져 있다는 점인데 이것이 대단히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전혀 거짓된 모습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사진이란 기껏해야 하나의 나지막한 목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또는 여러 장의 사진이 이루는 전체적인 조화가 우리의 감각을 유혹하여 지각으로 매개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이 모든 것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어떤 사진들은 그것들이 사색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것은 어느 한 개인이나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성의 소리를 듣게 만들고, 이성을 올바른 길로 이끌며, 때로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찾아내도록 인도해 갈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생활방식이 그들에게 낯설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 많은 이해와 연민을 느낄 것이다. 사진은 하나의 작은 목소리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진은 잘 구성하기만 하면 그 소리를 들려줄 수가 있다.”

“사진은 잘 구성하기만 하면 그 소리를 들려줄 수가 있다.” 는 그의 말처럼 어쩌면, 이 사진은 미리 연출된 사진일거라는 의혹이 더욱 강하게 제기 된다.

또한, “한 장의 사진이, 또는 여러 장의 사진이 이루는 전체적인 조화가 우리의 감각을 유혹하여 지각으로 매개되는 경우가 생겨난다.”라는 표현은 50년대 미국의 그래픽저널리즘이 보여주고자 했던 방식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소이 말하는 엮음사진의 형식을 취한 시각중심의 이들 잡지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도해야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관객의 감동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라면, 얼마든지 사실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편집했다.

그가 사진계에 등장한 것은 1936년 「라이프(Life)」지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보도사진 전성기라 부르던 시절인데, 이는 이제까지 텍스트 저널리즘에서 사진이 차지 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졌을 뿐만 아니라 사진이 엮음사진으로 편집되어 스토리를 형성하는 시각중심의 포토저널리즘을 의미하는 것이다.


[웨일즈 지방의 광부들, 1950.]

라이프(Life)와 유사한 형태의 잡지들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즉, 현대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시간을 들여 글을 읽는 불편함 보다는 편리하게 시각적으로 리얼하게 다가오는 사진을 사용함으로써, 글의 장황한 설명 보다도 효과적으로 단 시간 내에 대량의 정보를 대중이 공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그래픽 저널리즘은 문자로 읽혀 지던 기존의 저널리즘에서 삽화 정도로 취급되던 사진의 편집 방향과는 기본적으로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즉, 문자의 도움 없이도 사진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이야기를 엮어 내야 했다는 뜻이다.

앞서 제기 했던 스미드 사진의 의혹은 바로 이러한 당시의 그래픽 저널리즘의 사진 편집 방향과 무관 하지 않는 것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드는 작가정신이 투철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평생 보도 사진가로서 일하면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라이프지의 전속사진가 일을 몇 번이나 그만둔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들 잡지의 지나친 상업주의 전략의 편집 방향에 스미드의 작가정신이 충돌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라이프」지를 그만두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알베르트 슈바이처 Albert Schwitzer> 라는 작품 때문이었는데 이유인즉 스미드가 슈바이처 박사를 찍을 때의 의도는 대개 성인으로 바라보는 슈바이처 박사라는 입장에서 촬영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우리 주변에서도 흔한 보통 사람으로 표현하되 다만 그의 생명경외 정신,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 것인데 편집자의 입장에서 마음대로 사진을 선별하여 트리밍에서 레이아웃까지 고쳐 작가의 의도를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가 1955년에「라이프」일을 완전히 결별하기 이전에 1942년 그는「라이프」지의 프리렌서 일을 그만 둔적이 있는데 이때에 스미드는 「퍼레이드Parade」라는 주간지의 핵심적인 사진기자가 되어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했다.

이 잡지는 그의 기록 사진 덕에 크게 각광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이미 스미드는 당대의 가장 훌륭한 보도사진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23살에 불과했다.

극적이고 감동적인 힘에 넘치는 그의 스타일은 전전(前戰)의 혼란한 시기의 신문의 요구에 완전히 부응하는 것이었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지프 데이비스(Ziff Davis)가 발행하는 「플라잉Flying」지의 특파원으로 일했다.


[슈바이처 벅사, 1954]

1943년 말에 USS 벙커힐(Bunker Hill)호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해병대의 어벤저(Avenger) 폭격기에 탑승하여 다섯 달 동안에 걸쳐 16회의 출격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는 많은 전투 장면들을 사진에 담았다. 그가 가지고 온 사진들은 태평양에서의 공방전 현장에 직접 있었던 유일한 사진 기자에 의해 포착된 가장 충격적인 기록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44년 5월 USS 벙커힐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온 그는 다시 「라이프」지의 기자가 되어 6월에 다시 태평양으로 떠난다. 전투가 한창 치열하던 그 당시에도 여전히 그는 사이판, 괌, 레이테, 유황도, 오끼나와 전투에서 해병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유진 스미드는 1942년부터 그가 취재한 열세 번째의 작전인 오끼나와 전투의 전선을 취재하다가 포탄에 부상을 당한다.


[유일한 생존자,1944]


[2차 대전,1944]

이후 1955년에 사진 원고 은행격인「매그넘(Magnum)」에 가담하여 작가 의지대로 자신이 찍고 싶은 사진활동을 벌이나, 워낙 한곳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 탓에 1959년에 매그넘 조차도 탈퇴하게 된다.

좀더 자유롭게 자신의 사진을 찍고 싶었던 스미스는 이후 라이프지의 쇄퇴와 TV 시대의 등장으로 말미아마, 1971년에 뉴욕에서 이제까지 자신의 사진활동을 마무리 짓는 회고전을 열고 일본계 미국인 미쇼코와 결혼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이후 3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미나마따(Minamata)병을 심층 취재 하였다.

미나마따(Minamata)는 일본 남부의 미나마타현과 시라누이 해의 연도에 있는 어촌 사람들의 환경문제를 다룬 사진으로서 화학공장에서 배출된 메틸 수은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희생자들의 죽음, 기형아 출생, 신경장애 등의 모습을 영상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도모꼬를 목욕시키는 어머니, 미나마타 병 중에서, 1972]

미나마따(Minamata)사진집을 본 미국의 평론가인 수잔 손탁은 '주민 대부분이 수은 중독으로 신체 장애를 일으켜 서서히 죽어 가는 모습을 기록한 유진 스미스의 이 사진은 우리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고뇌를 기록했으며, 어머니 무릅 위에서 온몸을 비틀며 빈사상태에 있는 딸(도모꼬)은 현대 각본 없는 연출법(Drama trugy)으로 현대사회 페스트의 희생자가 넘치는 세계를 찍은 한 장의 피에타(Pieta : 성모 마리아가 예수의 시체를 무릎에 안고 있는 그림, 상)이다.'라고 말하였다.

손탁의 말은 사실 이렇다. 스미스의 사진은 마치 정교하게 그려진 회화 작품처럼 그러니까 도모꼬의 어머니는 피에타 상의 전형적인 포즈로 연출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진이라는 이유 때문에 각본 없는 연출로 리얼하게 우리의 신금을 울린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출처 : BLU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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