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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名將열전(6)

鶴山 徐 仁 2006. 5. 28. 17:54
세계 名將열전(6) - 조지 C. 마샬
군인으로서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
조지 C. 마샬 장군은 2차대전때 작전후방 미국본토에서 승전 전략을 수립하고 총 지휘한 사령탑 역할을 맡은 또 한사람의 미국 전쟁영웅이며 정치가다. 그는 플랑크린 D. 루스벨트 32대 대통령과 하리 S. 트루만 33대 대통령을 받들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관리자 
유럽 戰後볼구 위한 '마샬 플랜' 입안
마샬 장군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던 시기 육군 참모총장과 국무장관, 국방장관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고 현역때 5성장군으로 승진했다. 그는 특히 2차대전후 폐허가된 유럽 동맹국들과 독일등 적국들이 잿더미의 절망에서 재기할 수 있도록 초대규모 전후복구 부흥원조 사업을 기획, 집행함으로써 전후 유럽경제재건과 부흥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는 그 공로로 마침내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 상했고 군인으로서는 최초의 수상자였다. 그의 유럽부흥 사업이 곧 그 유명한 <마샬계획>이며 이 계획은 그후 모든 전후 복구사업의 모델겸 대명사가 되었다.

마샬 계획 덕택으로 서(西) 유럽지역이 전후 경제뿐 아니라 정치 군사적으로 재기할 수 있었고 미국과 함께 동서냉전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미국과 유럽이 종국적으로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구 공산불럭 국가들과의 냉전 대결에서 마침내 공산 종주국 소련과 동구공산권 붕괴를 촉진하는 결정적 동력과 끈기를 제공해준 것도 바로 마샬계획이었다.

2차대전 기간동안 그의 직속 상관인 헨리 L. 스팀손 전쟁장관(전후 전쟁성이 국방성으로 개편됨)은 "마샬이야 말로 자기가 만난 사람중 가장 자기희생적 공직자였다"고 회고했다.

영국의 전쟁 영웅이며 대 정치가인 윈스턴 처칠경도 유럽 경제재건 마샬 계획을 성공시킨 마샬을 가리켜 "역사상 가장 숭고한 사업을 이룩한 인물"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샬 계획을 통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지역에 수십억달러의 미국 자금이 제공되었다.

그는 2차대전시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미국 군대를 조직, 실전에 투입했고 독일 이탈리아등 추축국들을 패퇴시킨 두 개 전선의 전쟁전략을 세워 집행했다. 마샬은 또 전쟁수행기간 루스벨트와 트루만 등 두사람의 대통령에게 모든 군사문제들에 대해서 조언하는 으뜸가는 자문역이었다.

그는 대전중 연합군 주요 전략회의에 참석하거나 해외 후방지역을 가끔 방문하는 것외 2차대전 전기간중 주로 워싱턴에서만 근무했다. 모든일에는 적절한 인원배치와 각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제작자와 감독이 정확한 배역을 결정하는 이치와도 닮았다.

마샬은 2차대전중 수도 워싱턴에서 전쟁 계획과 전략을 개발하며 이를 총 지휘하는 가장 적절한 역할을 한치 오차 없이 완벽하게 해냈다. 그는 일선작전에 참가한 장병과는 달리 한방의 총성도 듣지 못했지만 그가 이룩한 빛나는 역할 때문에 미국 전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장군의 한사람으로서 우뚝 서 있다.

마샬 장군의 성장기

마샬은 1880년 12월 31일 펜실베니아주 유니온타운에서 석탄 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1년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졸업한후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다. 마샬의 첫 부임지는 필리핀이고 거기서 2년을 보낸후 본토 중서부지역에서 군부대와 재교육 훈련소에서 몇가지 임무를 맡아했다.

마샬은 필리핀에서 자기극복 이론과 연구습관, 그리고 훗날 그를 뛰어나게 만든 지휘관으로서의 특징들을 연마한 것으로 전기작가들은 전하고 있다. 1차대전때인 1916년 대위로 승진한후 이듬해 그는 참모장교로서 프랑스전선에서 제1보병사단에 배속돼 싸웠다.

마샬은 이때 임시 영관급 장교로서 50만 군대와 3천문의 포를 아르곤 전투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작전계획을 수립, 감독하는 임무를 맡아 이를 성공시켰다. 그는 이 역할로 인해 군인으로서의 잠재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마샬은 1차대전 기간 내내 참모장교로서 활동했고 휴전후 다시 원래의 대위 계급장을 달고 존 조제프 퍼싱 장군 부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퍼싱장군이 1924년까지 육군참모총장을 하는동안 그 밑에서 일했다.

이시기 마샬은 중령으로 진급했고 퍼싱 장군으로부터 많은 군사지식을 배웠다. 그에게서 배운 이런 군사지식은 그가 2차대전때 군사문제와 정치문제를 합리적으로 연결, 두부문을 절묘하게 조화할 수 있는 슬기를 발휘하는데 커다한 도움을 주었다. 그가 명장이며 훌륭한 정치가라는 명성을 얻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마샬은 퍼싱의 부관 자리를 떠난후 중국을 수차례 다녀왔고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 부교장으로 승진했다. 거기서 그는 새로운 군사 훈련방법을 개발, 2차대전때 뛰어난 인물이 된 여러명의 장군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사우스 칼로라이나에서 제8 보병연대를 지휘하는등 군 지도자로서의 경력을 착실히 쌓아갔다.

1938년 마셜은 준장으로 진급, 육군의 참모장군 역할을 맡았다. 그의 직책은 전쟁성의 전쟁계획수립 국장이었다. 전쟁성의 핵심 자리였다. 이때 이미 그의 미래 군 지도자적 역할에 자신감을 품고 그는 비망록에다 자기에게 감명을 주고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장교들의 이름을 꾸준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

1939년 9월 프랑크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를 육군참모총장에 발탁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마셜장군 보다 계급과 지위가 더 높은 선임장군 32명을 제치고 그를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 것이다. 유능한 대통령만이 명장을 식별해낼수 있는 발탁 혜안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2002 월드컵때 한국 축구팀감독 히딩크가 대표선수들 선발기준으로 허명 (虛名)과 연륜, 학력 지연보다는 능력위주로 했던 것과 같은 원칙이다.

마셜은 모든 것을 앞서가면서 미리 준비했다. 그는 미국이 미래 유럽에서 2차대전에 참전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이에 철저히 대비했다. 그는 전쟁에 대비해서 전략을 짜는 한편, 병력증강과 군대를 적절히 무장하고 장비를 증강하기 위해 예산편성권을 가진 국회에 대해 직접 적극적 로비를 벌이기도 했다.

마셜은 처음 2개월간 육군참모총장 서리로 일하다가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군의 폴란드침공을 시작으로 2차대전이 발발하자 정식 참모총장으로서 전쟁계획과 작전수행을 100% 장악했다. 그는 자기 지도아래 새로운 사단편성과 군사훈련, 군장비 조달, 고위군지휘관 선정등 모든 것을 직접 꼼꼼히 챙겼다.

군 고위지휘관 선발 때는 미리 메모해 두었던 비망록이 요긴한 도움이 되었다. 그의 이런 군비증강 노력결과 병력은 4년내 20만명에서 무려 830만명으로 4배 이상 대폭 증가했다. 그는 군편제를 3대 사령부 체제로 분류, 지상군 사령부와 육군행정사령부, 육군항공대 사령부등으로 개편했다.

일본이 1941년 12월 7일(일본시간 8일) 새벽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진주만을 기습 폭격하고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자 마셜은 전쟁계획을 긴급히 수정 보완했다. 미국은 당시 번영과 풍요를 구가하면서 전쟁을 잊고 평화에 도취해 있었다.

하와이 미군 장병들은 일본의 선의만 믿고 진주만 기습때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평화에 도취해 있다가 어이 없이 허를 찔린 것이다. "전쟁때는 평화를 생각하고 평화시에는 전쟁을 준비하라"는 격언을 실감케 하는 비극적 광경이 아닐수 없었다.

2차대전 기간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트루만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군사자문 역을 겸했다. 트루만 대통령은 마셜 장군보다 네 살 아래다. 마셜은 워낙 기획력이 뛰어나 군사문제라면 모든 것을 100% 마껴도 안심일 만큼 트루만 대통령을 편하게 해주었다. 트루만 대통령은 59년 마셜이 세상을 뜨자 "저세상에서 나는 마셜의 부관(副官)이 되어 마셜을 모시고 싶다"고 말할만큼 트루만은 마셜을 존경했다.


국가에 봉사하고 대통령에게 충성한 군인

그의 아이디어로 개발한 새로운 무기와 군장비들은 미국 대중들과 산업기지들을 신속히 총동원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마셜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 일선부대를 총 지휘하려는 의사를 여러차례 밝혔지만 매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통령등 그의 상사들은 그가 일선에서 지휘하는 것 보다 본토에서 군참모와 고위 전략가로서 조국을 위해 전쟁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역할이라는 것이 거부 이유였다.

마셜의 가장 중요한 특장들중 하나는 그가 모신 두 대통령들과 인간적으로 언제나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두 대통령들과 원만한 관계를 가질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대권(大權)을 잡으려는 정치적 야망을 품지않고 오직 직업군인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그를 5성장군으로 진급시킨것도 영국군과 대등한 지위를 갖도록 하려는 배려이지 그의 대권야망을 북돋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2차대전후 그는 참모총장직을 물러나면서 아이젠하워 장군을 그 자리에 추천하는 미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셜의 은퇴는 며칠 가지 않았다. 그가 참모총장을 사퇴한지 10일후 트루만 대통령은 그에게 대통령 특사로서 중국으로 가 모택동의 공산군과 장개석 국부군(國府軍)간의 내전을 말리는 중재역을 맡아달라고 설득했다.

그는 이 역할을 성공시키진 못했지만 트루만 대통령은 1947년 1월 그를 국무장관으로 발탁했다. 같은해 6월 5일 그는 유럽경제재건 프로그램인 마셜계획을 작성 발표했다. 미국이 폐허가 된 유럽 동맹국과 독일등 적국들의 경제재건과 부흥을 위해 미국이 천문학적 액수를 퍼붓는 거대한 전후 재건계획이었다.

이 재건계획은 서 유럽지역에 대한 공산세력의 확산을 막는데도 그 목적이 있었다. 그는 과로로 건강이 좋지않아 국무장관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나 트루만 대통령은 1950년 다시 그를 국방장관에 기용했다.

마셜은 이 자리에서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등 유엔군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옹호했다. 그는 1951년 공직에서 완전 은퇴했으며 1959년 10월 16일 워싱턴에서 세상을 떠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2차대전 전략을 수립하고 집행, 전쟁을 승리로 이끈 핵심적 역할을 했음에도 명성면에서 아이젠하워와 맥아더 보다 뒤진 것은 오직 2차대전때 일선부대를 지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적 총명과 순수한 군인정신, 세계적 전략가로서의 풍부한 지성이 오늘날 미군을 세계 최강 군대로 성장시키는데 가장 영향력 있는 역할을 했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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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05-19,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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