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패턴 장군은 미국군대에서 기갑전의
길을 최초로 열어준 인물이다. 그는 그후 군 생활에서 2차대전중 가장 뛰어난 야전사령관으로도 이름이 높다. 패턴은 군대내에서 늘 특유한 행동으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오만하고 거칠며 허영심 많고 별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의 이런 특별한 군대생활을
다룬 영화조차 인기였고 아카데미상 최우수작품상과 최우수 남우주연상, 최우수 감독상까지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패턴은 야전군
지휘관으로서 2차대전중 전쟁만은 똑똑히 치러서 큰전투에서 한번도 지는때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의 존경을 한몸에 모으고 미국내
민간인들로부터도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
패턴은 어릴 때 가난했던 아이젠하워, 퍼싱장군과는 달리 버지니아에서 오랜 군인가족 전통을
지닌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역시 군인가문에서 태어난 더글러스 맥아더와 일면 닮은성격을 가진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운동실력이 뛰어났던 패턴패턴은 1885년 11월 11일 캘리포니아주 산 가브리엘에서 고고의
소리를 울렸다. 패턴은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에 입학하기전 가장 우수한 초중고등 학교들을 마쳤다.
그는 자라면서
무인답게 기골이 장대하고 용감했으나 육사생활중 독서장애증과 수학실력이 모자라 쩔쩔 매기도 했다. 그의 학과실력은 별로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반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오히려 한해를 유급해서 1909년도에 졸업, 기병부대 소위로 임관되었다. 패턴은 학교실력이 뛰어나지 못한
대신 그 부족분을 그의 엄청난 에너지로 충분히 보완했다.
패턴은 최상급 기병장교(기갑장교)로서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대회
최초의 근대5종 경기에 미국군과 미국의 국가대표 선수로 참가, 5위를 차지했다. 5종경기는 4km 크로스 칸트리 달리기, 말타기, 총쏘기,
펜싱, 300m거리 수영등 다기능 종목이었으니까 여간한 운동실력으로는 엄두도 못내는 복합경기였다.
1년후 그는 프랑스 기갑학교에
유학했고 미국으로 귀국한후에는 기갑부대 교본을 펴내기도 했다.1916년 패턴은 존 조지프 퍼싱 장군이 인솔하는 멕시코 원정부대에서 멕시코
반군지도 자 판초 빌라 추적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퍼싱장군의 부관으로서 그의 용맹성과 군지휘관으로서의 창조력과 개척정신을 이어받았다. 이때는
아직도 인디안 토벌작전의 서부개척시대였다.
이 작전기간중 그는 자동차등 기계화 군장비를 사용하는 첫 경험을 했고 자동차를 탄 채
말을 타고 덤벼드는 판초 빌라 반군들을 권총으로 사살하기도 했다. 이런 대담성으로 인해 그는 용감한 군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후
그는 1917년 프랑스에 진주한 유럽원정 미군과 함께 퍼싱 장군 부관으로 참전했다. 피성 장군이 이때 지루한 참호전의 교착상태를 깨기 위해서는
장갑차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917년 11월 패턴에게 미국 최초의 공식기갑부대와 랭그래 장갑차 운전병 훈련학교 지휘를 맡겼다.
미국 제1탱크여단은 1918년 9월 쌍 미이엘 지역에서 첫 기갑전투를 치르게 된다. 패턴은 그후 잇따른 뫼즈-아르곤느 공세기간
동안 가벼운 부상을 입고 그의 뛰어난 용맹성을 거듭 높이 평가 받아 십자훈장을 받게 된다.
기갑전의 중요성을
주장...기갑부대 지휘1차대전이 끝난다음 그는 신생 미국 기갑부대를 이끌고 미국으로 귀국, 이번에는 새이름으로 개편된
314탱크여단을 지휘하게 된다. 패턴은 그후 20년동안 기갑부대를 지휘하고 기갑교육을 맡았기 때문에 기갑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열열히 주장하고
다녔다. 그러나 1차대전후 평화시기 군사예산의 제한과 대공황시기 경제적 곤경 때문에 탱크무기개발연구와 생산증가의 길도 막혀있었다.
미국은 유럽에서 2차대전이 발발하고 독일 탱크부대의 전격전이 대승(大勝)을 거둔후에야 황급히 기갑전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패턴은
1940년 제1기갑여단 지휘를 맡았고 이부대는 다음해 4월 곧 제1기갑사단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는 1942년 3월부터 7월까지
소장 계급장을 달고 캘리포니아와 아리조나주 경계선상선에서 <사막탱크훈련소> 교장으로서 탱크전 훈련 임무를 맡았다. 여기서 그는 미국
기갑전 이론을 확립하고 본격적으로 기갑부대를 양성했다.
패턴은 2차대전때 북아프리카에서 미국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서부전선 기동부대를
지휘했다. 1943년 3월 미국이 케서린 통로에서 크게 패한다음 패턴은 미국 제2군단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대장 임명을 받자말자 재빨리
부하장교들을 교체하고 기강을 세움으로써 극도로 떨어진 군사기를 북돋우고 동기부여가 안된 부대에 전투의욕을 불어넣었다.
효율적인
부대로 전환하기 위한 긴급 조치였다. 그는 비로서 북아프리카에서 공세태세를 갖추고 추축국군대를 격퇴하는 것을 측면지원할 수
있었다.
패턴의 어린시절패턴의 어린시절 꿈은 영웅이 되는 것이었다. 그의 조상들은 모두
미국독립전쟁과 멕시코전쟁, 남북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의 군인생활과 영웅관도 이런 군인가문과 전통이 성장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어릴 때 조상들의 용맹성과 성공적 인 무용담을 들으며 성장했다. 패턴은 사관학교시절 만나 데이트를 해왔던 베아트리스 아아어
여사와 1910년 결혼,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1943년 7월 패턴은 중장으로서 시칠리아 공격작전에서 미국 제7군을
지휘했다. 대담한 패턴은 메시나 공격때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 휘하 장병들을 앞질렀기 때문에 본국에서는 명성을 얻었으나 연합군으로 부터는
악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얄궂은 경쟁심이 여기서 드러난 것이다. 그는 시칠리아를 점령한다음 부상 장병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위문했다. 그때 패턴 은 부상하지도 않고 단순히 전투피로증에 걸린 2명이 꽤병 치료를 받고 있는 겁쟁이들 이라면서 때려주었다.
이
하사관 구타 소문은 패턴이 악명을 떨친 사건으로서 그후 군 내외에 널리 퍼졌다. 이 사병구타 사건 때문에 그는 시칠리아 점령때 사소한 임무만을
맡았고 그후 뒤따른 이탈리아 반도 상륙전때도 참가하지 못했다.
2차 대전 중 패턴의
활약들..1944년 1월 패턴은 영국에 파견돼 노르망디 상륙작전 계획수립을 도왔다. 이때 그는 사병구타사건에 대한 처벌로
여전히 근신중에 있었다. 그는 서류상에서만 존재하는 유령부대를 지휘했다.
이 부대의 임무는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작전지점은
노르망디가 아니라 파드 칼레 지역이 될것이라는 위장작전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패턴이 지휘하는 서류상의 군대는 파드 칼레 지역을 연속 위장
폭격하기도 했다. 패턴 장군은 노르망디 상륙이 성공한후부터 제3군 사령관으로서 야전군 지휘를 다시 맡았다.
패턴은 이때 2차대전중
가장 혁혁한 전공을 세운 야전사령관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44년 8월 1일 그는 아브랑쉐에서 교두보를 돌파, 2주간내 팔레즈-아르장탕 갭지역에서
10 만명의 독일군을 포위했다.
그리고 동쪽으로 진군해서 8월말까지 사르 강에 도달했다. 패턴의 전술은 자기부대 장갑차의 기동력과
충격적 기습공격전에 초점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의 탱크들은 독일군이 새로운 방위선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가능한한 재빨리 공격을 퍼부었다.
탱크들의 전진은 때때로 독일군의 보급선이 새로 형성된 전선에 적응 하는 것 보다 더 빨랐다.
그는 필요하다고 느끼면 다른 부대로
부터라도 긴급 보급과 탄약 지원을 서슴없이 요청하곤 했다. 패턴 장군은 때때로 상부 명령을 무시하고 많은 예비군 병력지원 없이도 공격을
밀어부쳤고 그가 가진 모든 자원을 전투에 쏟아부었다.
패턴은 그해 12월까지 3군을 메츠지역으로 진군토록 명령했다. 독일군이
아르덴느 지역을 기습공격 하면서 벌즈전투를 선도하고 연합군 후방을 위협하자 패턴은 부대 공격 선두를 90도로 대전환했다. 그래서 그는 바스토뉴
지역을 구출하고 독일군 전진을 저지 하기 위해 동부방향으로 진격했다.
그는 1945년 3월 22일 아르덴느에서 부터 독일쪽으로
전진, 오펜하임에서 라인강을 건넜다. 3군은 번개처럼 전진을 계속, 항복을 거부하는 시와 요새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이로 인한 독일군의
사상자들은 무려 150만에 달했다.
패턴은 루르 지대에서 또 다른 독일주력군을 포위, 전승을 거두고 이어 바바리아를 질풍노도처럼
휩쓸고 첵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로 뚫고 들어갔다.
1945년 종전후 아무도 자기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 패턴은 소련에 대한
우려를 털어놓았다. 그는 미국은 나중에 강제로 떠밀려 어쩔수 없이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것보다 지금 당장 소련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태도는 나치들에 대한 관용적 처리와 함께 또 다시 그의 지휘권을 박탈당 하는 곤경을 불러왔다.
그는 전후 독일을 재건하는데
나치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런 소리를 한 것이다. 패턴의 최후 임무는 바바리아주 점령군 주지사로서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이었다. 1945년
12월 9일 60세 되던해 그는 맨하임 부근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치료중 그해 12월 21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병발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럽대륙을 가로질러 질주하다 떨어진 전우들을 따라 룩셈부르크 미군 전몰장병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메달과 리본을 단
정장 군복차림에 상아 손잡이 45구경 권총을 허리춤에 찬 당당한 모습을 자주 보곤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부하들에게 사기를 불어넣어
더 용감하게 싸우도록 독려 하고 대중들은 자기를 더욱 존경하도록 만드는 쇼맨쉽의 인물이었다. 패턴은 미군역사상 기갑전을 창안한 선구자며 늘
절제되지 않은 거침없는 언동과 정치적 발언 때문에 자주 신문 제목을 장식함으로써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그는 큰 전투에서 항상
승리자가 되는 능력만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타고난 야전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44년 3월 31일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미국인들은 승리자를 사랑하며 패배자는 용납치 않는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전쟁에서 한번도 진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전쟁에서 패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미국인들은 전쟁에 진다는 생각자체를 극도로 미워하기 때문이다" 요즘사담 후세인의 무장해제를 호언하고
있는 부시 대통령의 태도도 바로 이런 발상에서 비릇된 것이 아닐까 한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뉴스앤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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