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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욱진의 참회록 <자화상(1951)>

鶴山 徐 仁 2005. 12. 26. 18:30
촌촌 선생님 블로그에서 장욱진 화백의 1951년 그림 <자화상>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장욱진 화백에 대한 흥미가 솟구치더군요.  검색 엔진으로 그분 그림을 찾아보았습니다.  인터넷 세상이 참 좋습니다.  완전 무지했던 주제에 대해 딱 15분만에 이렇게 많은 자료를 갖게 되다니.

 

<자화상(1951)>

10.8(가로) x 14.8(세로)cm, 종이에 유채,

유족 소장

 

장욱진 화백은 이 그림을 끔찍이 아꼈던 것 같습니다.  그림 파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던 그는 <자화상>도 부산 피난 시절 같이 그림 그렸던 화가 한 분에게 그냥 줬다고 합니다.  몇 년 후 이 작품이 화랑에 걸린 것을 발견한 장욱진 화백은 그림을 되사서 죽는 날까지 소장했습니다.  그만큼 애착을 가졌던 작품이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애착을 가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자랑스러웠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남들에게 보이기 창피해서 그랬을까요?  혹시 그 '둘 다 맞아요'는 아니었을까요?

 

<자화상>은 전형적인 장욱진식 그림인 것 같습니다.  그의 그림 요소가 여기 다 들어 있습니다.  노랗다 못해 붉은 빛이 도는 들판 풍경이며, 멀리 보이는 두 그루의 풍성한 나무며, 일렬로 하늘을 날아가는 새며, 길게 세로로 뻗은 황톳길이 모두 장욱진 식입니다. 

 

이 그림을 그렸던 설흔 초반, 장욱진 화백의 화풍은 이미 이때 확립됐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그림의 소재나 그리는 기법의 면에서는 그랬다는 것입니다.

 

<자화상>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평론이나 감상문에서는 들판과 새, 그리고 연미복을 입은 인물에 집중하는 감이 있습니다.  특히 들판과 새에 대한 관심들이 높더군요.

 

우선 들판 이야기.  이 작품은 <보리밭>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아마 1979년 전시회 때 그런 제목이 붙었던 것 같습니다.  1979년 <화랑>지에 기고한 글에서도 장욱진 화백은 "일명 <보리밭>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이 그림은...."이라고 함으로써 그런 사실을 확인해 줬습니다.

 

<여름날(1978)>과 <해돋이(1987)>

 

그러나 이 들판이 '보리밭'일 수 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장욱진 화백이 이 그림을 그린 것은 한국 전쟁을 피해 고향인 충남 연기군 내판으로 은둔했던 시기입니다.  그의 낙향은 1951년 가을입니다.  그러니 그게 벼논일 수는 있어도 보리밭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보리밭이거나 벼논이거나, 누렇게 익어 출렁이는 들판은 상당히 한국적이고 토속적입니다.  게다가 이 누런 들판은 전체 그림의 배경노릇을 하는데, 그게 꼭 고구려 고분벽화의 바탕색과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해방 직후 장욱진 화백은 호구지책으로 국립 박물관 직원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개성 고분 발굴 작업에 참가했었습니다.  아마 이때 그는 한국 고대 고분 벽화를 자세히 관찰할 기회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의 <여름날(1978)>에는 마치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나옴직한 산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요컨대 <자화상>의 배경 역할을 하는 들판의 싯누런 색깔은 한국의 토속적인 색채일 뿐 아니라 고구려 이래로 내려온 전통적인 색채라고 보아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장욱진 화백의 <자화상>에 나오는 새를 두고도 말들이 많습니다.  특히 새를 세 마리도 아니고 다섯 마리도 아니고, 딱 네 마리만 그린 이유가 무엇이겠느냐는 게 의문의 핵심입니다.

 

그런 의문을 가질 만도 합니다.  장욱진 화백의 그림에는 새가 네 마리씩 등장하는 작품이 많기 때문입니다.  <해돋이(1987)>와 <여름날(1978), <새(1983)>와 <강(1968)>, <가족(1973)> 등의 그림에 새가 네 마리씩 등장합니다. 

 

심지어 나무를 그려도 네 그루씩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가로수(1978)>와 <가로수(1983)>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 묻는 사람이 많았는지, 장욱진 화백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가로수(1978)>와 <가로수(1986)>

 

"그것은 지극히 조형적인 이유 때문이다.  적은 숫자 중에서 가장 조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수가 넷이다.  넷은 일정 간격으로 나란히 놓을 수도 있고(쪽쪽쪽쪽), 아니면 하나와 셋(쪽, 쪽쪽쪽), 셋과 하나(쪽쪽쪽, 쪽), 둘둘(쪽쪽, 쪽쪽)로 배열할 수도 있다."  (오광수, "한국적 미의식과 이념적 풍경," 월간미술 1991년 2월호에서 인용.)

 

네 마리의 새가 까치인가 까마귀인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더군요.  얼른 보면 새가 모두 새까맣기 때문에 까마귀라고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게 까치라고 봅니다. 

 

우선 그는 그림 제목에 까치를 쓴 적은 있지만 까마귀를 쓴 적은 없습니다.  <까치와 아이(1983)>에는 검은색에 약간의 흰색 무늬가 더해진 까치가 나옵니다.  하지만 <자화상>에서처럼 하늘을 나는 새를 그릴 때에는 이런 흰색 무늬를 그려 넣지 않았습니다.  특히 <자화상>과 같은 형태로 새 네 마리를 그린 <여름날>이나 <해돋이>의 새들도 까마귀라기 보다는 까치로 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구별이 힘들면 그냥 '새'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까치'가 아니겠느냐고 우기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장욱진 화백은 자기 자신을 '까치를 잘 그리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신 지체를 안고 태어난 막내아들 때문에 근심거리를 얻은 장욱진 화백은 자주 절에 다니곤 했습니다.  언젠가 통도사에 들렀을 때, 불력 높은 경봉 스님과 만났습니다.  경봉 스님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시자 장화백은 "까치를 잘 그리는 사람입니다"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강(1968)>과 <새(1983)>

 

사실 장욱진 화백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맨 처음 소재가 바로 까치였다고 합니다.  일곱 살에 아버님을 여읜 장욱진 화백은 서울로 이주했던 1923년 직후부터 그림 그리기로 마음을 달랬습니다.  이때 그가 즐겨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 바로 까치입니다.

 

어떤 평론가는 장욱진 화백이 까치를 이승의 자신과 저승의 아버지를 맺는 '메신저'라고 여겼던 듯 싶다고 했습니다.  열살 남짓의 소년이 그런 생각까지 할 수 있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겠습니다만, '잠재의식' 속에서나마 그렇게 여겼을 가능성이 충분하겠지요.

 

그림 속의 까치가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메신저'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좀 더 커서는 까치가 장욱진 화백에게 '한국의 얼'이라는 좀 더 큰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자화상>의 또 한가지 중요한 소재가 바로 '길'입니다.  장욱진 화백의 길은 '천편일률'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모든 길은 예외 없이 황토색입니다.  <길(1983)>에서도 그렇고, <밤과 노인(1990)>에서도 그렇습니다. 

 

<길(1983)>과 <밤과 노인(1990)>

 

장욱진 화백 그림에서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길을 걷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밤과 노인>을 보면 길이 두 개입니다.  하나는 소년이 뛰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노인이 걸어간 길입니다.  둘은 서로 정 반대의 방향으로 걷거나 뜁니다.  노인은 이미 자기 길을 다 걸었고, 그 길이 끝나는 지점 어디선가부터는 공중으로 떠올랐습니다.  어떤 이들은 노인이 신선이 되거나 저승으로 떠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일리가 있는 설명이라고 봅니다.

 

<자화상>의 길도 검붉은 황토색입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그 길을 많이도 걸어 왔습니다.  조금만 더 걸으면 그는 화폭 밖으로 벗어나 버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주인공은 발을 멈추었습니다.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입니다.  그는 어째서 발을 멈추고 슬픈 표정을 지은 것일까요?

 

그건 혹시 길의 반대편에 그려져 있는 두 그루의 나무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자화상>의 그림 요소들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끌지 못하는 게 이 나무들입니다. 

 

장화백 그림에는 나무가 무척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장화백 그림의 나무들은 대개 풍성합니다.  줄기가 육중하고 잎사귀가 무성합니다.  <나무(1986)>이나 <노인(1988)>에서는 줄기마저도 초록색으로 그려서 잎사귀로 동화시킨 적도 있습니다.  <수하(1954)>에서는 줄기와 가지가 앙상하더라도 이파리만큼은 무성합니다.

 

<나무(1986)>와 <수하(樹下, 1954)>

 

원래 나무는 생명과 풍요를 가리킵니다.  죽은 것 같은 작은 씨앗이 싹트는 것은 생명의 상징입니다.  여린 싹이 자라서 새가 깃들 만한 나무가 되고, 급기야 열매까지 맺게 되는 것은 거의 기적입니다.  동시에 풍요의 상징입니다.  장욱진 화백도 바로 그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장욱진 화백은 나무를 그릴 때에는 항상 풍성하게 그립니다.

 

게다가 나무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더라도 나무의 뿌리는 대개 땅위로 솟은 높이나 폭만큼 깊고 넓게 뻗어있는 법입니다.  그래야 그 나무는 안전하면서도 풍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생명'과 '풍요'와 '안전'을 모두 상징합니다.

 

그런데 <자화상>의 나무는 아주 멀리 그려져 있습니다.  주인공은 이미 그 나무로부터 걸어나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그 주인공이 몸을 향한 방향으로 보아 그는 시간이 갈수록 나무로부터 점점 멀어질 게 분명합니다.

 

나무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자화상.  자기 뿌리가 주는 풍요로움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주인공.  그게 바로 그림 속의 주인공이 슬픈 표정으로 발을 멈춘 까닭이 아닐까요?

 

<자화상> 속 주인공의 차림새를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머리는 '하이칼라'로 넘겼습니다.  아마 기름도 발랐겠지요.  하얀 셔츠를 단정히 입고 붉은 색의 멋쟁이 넥타이를 맸습니다.  겉옷으로 입은 연미복은 인상적이지만 이 그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입니다. 

 

<자화상 (인물세부, 1951)>

 

어울리지 않기로는 손에 든 물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왼손에는 박쥐 우산을 들었는데, 해가 쨍쨍난 넓은 들판에서 우산을 가졌다는 게 이상합니다.  일년 내내 날씨가 축축한 런던 시내라면 또 모를까.

 

오른 손에 든 실크햇은 더더욱 기괴합니다.  이게 가방이나 바이얼린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확대해서 자세히 보니까 이는 서양식 실크햇입니다.  이렇게 날씨가 쨍쨍한 날에 밀짚모자라면 또 모를까, 19세기 잉국 신사들의 필수품이었던 실크햇이라니.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들판/새/나무/하늘/구름과 나란히 놓기에는 그림 속 주인공의 차림이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는 풍요의 뿌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뒤통수를 잡아끄는 듯한 정신적 메신저(까치)도 등지고 있습니다.  그의 차림새는 토속/전통과는 단절돼 있습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요?

 

이게 바로 장욱진 화백이 <자화상>을 그린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설흔을 막 넘은 젊은 화가가 자기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내 것이 아닌 것'으로 인한 비애를 발견한 것이지요.

 

사실 장욱진 화백은 누구 못지 않은 민족주의자였다고 합니다.  일본 유학 시절에도 일부러 '일본 국사'를 시험 칠 필요가 없는 제국미술대학에 지원했습니다.  대학시절에도 일본화풍이나 일본에 막 유입된 서양화풍을 전혀 흉내내지 않고 조선 그림만 그렸습니다.  덕분에 무수한 적을 만들었고 약간의 친구를 얻었습니다.

 

<자화상> 이전 작품을 보아도 이중섭 화백 못지 않게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장욱진 화백에게 '서양화 흉내자'라는 낙인을 찍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인만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국화를 그리려고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쳐 왔지만, 자기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은 '내 것 아닌 것'의 끈질긴 잔존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어린 시절부터 보고 배우고 모방해 온 '서양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자화상>의 연미복과 실크햇과 박쥐우산은 그래서 등장한 것이겠지요.

 

장욱진 화백이 이 그림을 '자상(自像)'이라고 불렀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지금은 다들 "자화상(自畵像)"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본인은 1979년에 기고한 글에서 "자상(自像)"이라고 불렀더군요.  (장욱진, "자화상의 변," 미술잡지 <화랑> 1979년 여름호).

 

'자상'과 '자화상'은 다른 것일까요?  직역하면 '자기 모습'과 '자기를 그린 모습'이라는 정도의 차이이겠습니다.  하지만 장욱진 화백이 국어사전에도 없는 '자상'이라는 말을 썼을 때에는 뭔가 특별한 의미가 들어 있던 게 아닐까요? 

 

그건 아마도 '슬프지만 이게 지금까지의 내 진짜 모습이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슬프고 회한에 찬 자기 발견입니다.  다른 이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아픈 성찰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이지요.

 

장욱진 화백의 <자화상>에 나타난 성찰은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의 성찰과 비슷합니다.  (두 사람은 동년배입니다.  장욱진 화백은 1918년 생, 윤동주 시인은 1917년 생입니다.) 

 

그 시에서 윤동주 시인은 문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서 "욕"된 "내 얼굴"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운석 밑으로 걸어가" 듯 위태한 상황일지언정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거울을 닦습니다.  그래야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는 참회록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욱진 화백은 다행히도 '또 다른 참회록'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의 <자화상>을 그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그 이후로는 그의 그림에 서양식이든 일본식이든 '내 것 아닌 것'을 그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장욱진 화백의 <자화상>은 뼈아픈 자기 성찰을 고백한 <참회록>입니다.  그 고백을 통해 새롭게 다진 각오를 평생 잊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화상>은 그 이후의 숱한 대표작을 그리기 시작한 첫 대표작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평미레/
조정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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