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태
兵站의 중요성을 이해했던 장수
이것은 김유신이 부상병 등을 후방에 남기고 정예병으로 퇴각 엄호의 부대를 재편성하여 다시 對岸(대안)으로 도하를 감행한 뒤 유리한 지형의 지점에서 고구려軍을 迎擊(영격)했다는 얘기다. 이때 신라軍은 몰려오는 고구려軍을 향해 다연발 강궁인 萬弩(만노)를 일제히 발사했다. 고구려軍은 갑작스런 반격에 놀라 혼란에 빠져 퇴각했다. 김유신 軍은 고구려軍을 급히 추격하여 장수 阿達兮(아달혜) 등을 사로잡고, 1만명의 머리를 베었다.
김유신 軍이 돌아오자, 문무왕은 김유신과 동생 인문에게 本彼宮(본피궁)의 재화, 전장, 노비를 절반씩 나누어 주고, 장병들에 대해서도 상을 내렸다. 그런데도 김유신은 그가 이미 현지에서 관등을 한 단계 올린 裂起와 仇近의 관등을 제8위인 급찬으로 다시 한 계단 더 올려 달라고 문무왕에게 요청했다.
신라의 官等(관등)제도의 운영에 있어 전사자가 아닌 경우 한꺼번에 관등을 2단계 올린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문무왕은 김유신의 요청임에도 『사찬의 벼슬은 너무 과하지 않소?』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김유신은 재배하고 다시 요청하기를, 『爵祿(작록)은 公器(공기)로서 공로에 대한 보수로 주는 것이온데, 어찌 과분하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했다. 문무왕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김유신은 정치 감각도 지닌 군인이었다. 김유신은 恩賞(은상)으로 인너 그룹, 즉 자기 사람을 만드는 데 철저한 장수라고 할 수 있다. 상벌을 뚜렷하게 시행하지 않는 장수는 용사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將으로서 김유신이 탁월했던 것은 단지 위에 열거한 충성심이나 행동력, 그리고 위기상황에서 용사를 부리는 용인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탁월성은 보급로야말로 야전군의 生命線(생명선)임을 정확하게 인식했다는 점 때문이다.
김유신이 수레 2천 대 분량의 군량을 적진을 돌파하며 1천 리 밖으로 운송하는 데는 적어도 2만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였을 것이다. 이같은 병력 규모는 적의 관측을 회피하며 행군하기에는 너무 많고, 고구려軍의 주력과 교전하기에는 너무 적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치중대를 거느린 부대는 행동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다.
신라軍 최고위 장수인 그가, 적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치중부대를 이끌고 적지를 종단했던 것은 이 임무야말로 對(대) 고구려戰의 향방을 가늠하는 제1의 요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제껏 수·당의 침략군이 고구려와 싸워 참패했던 가장 큰 이유는 병참의 실패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김유신의 병참선 개척은 향후 나·당 양군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淸野(청야), 즉 성 밖에는 곡식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불태워버려 적의 인마를 굶주리게 하는 전술을 극복하게 함으로써 겨울 작전까지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唐將 유인궤의 反間之計
김유신이 평양성 외곽에 진출하여 蘇烈의 당군을 구원하고 개선했던 662년 봄 2월 耽羅國主(탐라국주) 徒冬音律(도동음률)이 신라에 항복했다. 백제의 속국이었던 탐라국(제주도)은 이때부터 신라를 종주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이것은 신라의 국가 위신이 남해상의 海島(해도)에까지 뻗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백제 부흥군의 대오는 증강되고 있었다. 663년 여름 달솔 福信과 승려 道琛(도침)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이 웅진성의 劉仁願(유인원) 軍을 포위했다. 唐 高宗은 劉仁軌(유인궤)에게 구원군을 주어 웅진성으로 급파했다.
이때 福信 등은 웅진강 어귀 두 곳에 목책을 세워 椅角之勢(의각지세), 즉 앞뒤가 서로 호응하는 형세를 이루면서 나·당의 구원군과 웅진도독부의 합류를 저지하려 했다. 이 전투에서 부흥군은 전사자 1만여명을 남기고 패퇴하여 任存城(임존성)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웅진성의 포위는 풀렸지만, 나·당군이 부흥군에 대해 완승을 거둔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웅진강 전투 직후에 신라軍은 군량이 떨어져 곧 회군했으며, 임존성의 백제 부흥군의 세력은 더욱 증강되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복신과 도침은 각각 霜岑將軍(상잠장군)과 領軍將軍(영군장군)으로서 역할을 분담하고 있었다. 복신은 軍使를 보내 유인궤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당이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고, 그후에는 우리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모여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복신은 당군의 허실을 탐색하기 위해 軍使를 파견했을 것이다. 이에 유인궤 역시 軍使를 파견하여 부흥군의 지도부를 분열시키려는 反間之計(반간지계)를 구사했다. 유인궤는 원래 모략전에 정통한 장수였다.
유인궤가 보낸 使者를 대하는 태도로 미루어보아 도침이 제1의 對唐(대당) 강경파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도침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인궤의 使者를 外館(외관:바깥 숙소)에 재우고 비웃으며 말하기를, 『使者의 벼슬이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므로 함께 말할 수 없다』면서 답장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
이때 복신의 태도는 기록의 누락으로 알 수 없지만, 도침에 비해서는 융통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복신과 도침 사이에 노선과 전략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 내분 때문에 부흥군은 곤경에 빠진 유인궤·유인원 軍에 대해 결정타를 가할 기회를 놓친 것 같다.
웅진성의 위기를 풀기 위해 문무왕은 金欽(김흠)을 장수로 삼아 구원군을 급파했다. 그러나 김흠의 부대는 古四(고사; 전북 고부)에서 백제 부흥군에 대패하여 葛嶺道(갈령도)로 도주했다. 그럼에도 신라는 즉각 증원군을 보내지 못할 만큼 부흥군은 위력적이었다.
그러나 부흥군의 수뇌부 안에서 암투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도침의 장졸을 자기 휘하에 넣어버렸다. 부흥군의 왕으로 옹립된 부여풍은 이런 분열 사태를 제어하지 못하고 제사만 주관했다. 복신은 고립된 웅진성의 유인원에게 使者를 보내 농락한다.
『大使(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오? 그때 사람을 보내 전송하여 주겠소』
백제 부흥군의 敵前分裂
결정적 시기의 적전 분열로 백제 부흥군의 기세가 점차 꺾이기 시작했다. 663년 7월에 유인원·유인궤 軍은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부흥군을 공격하여 지라성 및 윤성 등의 목책 등을 함락시켰다. 부흥군은 眞峴城(진현성)에 들어가 병력을 증강시켰으나, 나·당군의 협격을 받고 8백명의 전사자를 내고 다시 도주했다. 이로써 신라·웅진 간의 군량 수송로가 트이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부여풍과 복신은 서로가 서로를 제거하려고 한다고 믿고 암투를 벌였다. 복신은 병을 칭하고 굴방에 누워 있으면서 부여풍이 문병을 오면 처치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를 탐지한 부여풍은 먼저 심복들을 풀어 기습적으로 복신을 체포하고, 그의 손바닥을 뚫어 가죽으로 묶었다.
복신은 참수를 당하면서 부여풍의 심복들에게 『썩은 개, 얼빠진 종놈』이라고 외쳤다. 복신의 머리는 소금물에 절여져 젓갈이 되었다.
부여풍은 왜국에 사자를 급파하여 구원병을 요청했다. 당시의 왜왕은 天智(천지)였다. 그가 바로 大化改新(대화개신)을 주도한 中大兄(나카노 오에) 황자로서 661년 7월 즉위 이후 백제 부흥군에 대한 지원태세를 강화해 왔다. 왜군 2만7천명이 속속 내도하여 백제 부흥군의 진영에 가세했다.
나·당군과 부흥군·왜국 연합군은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大兵(대병)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무왕은 대장군 김유신을 비롯하여 인문, 천존, 죽지 등의 28將을 거느리고 친정의 길에 올랐다. 당 고종은 좌위위장군 孫仁師(손인사)에게 山東兵(산동병) 7천을 주어 웅진도독부를 응원토록 했다.
문무왕의 신라군은 7월17일 웅진으로 들어가 손인사·유인원의 당군과 합세하여 8월13일 두솔성(충남 청양군 칠갑산)을 쳐서 함락시켰다. 문무왕은 포로가 된 왜병들을 풀어주며 말했다.
『우리나라는 너희 나라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나누고 있고, 서로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교류해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늘날 백제와 함께 악행을 하며 우리나라를 침해하려고 하느냐? 지금 너희 군사가 모두 내 掌中(장중)에 있으나 죽이지 않고 돌려 보내니, 돌아가서 너희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라』
왜병을 통해 왜왕에게 훈계의 메시지를 보내는 문무왕의 솜씨가 이렇게 비범했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후 전개될 동아시아 세계의 역학 관계까지 고려하여 미리 왜국에 대해 선심을 써둔 것 같다.
白江口 전투에서 궤멸당한 왜병 2만7천명
한편 4백 척 규모에 달한 왜의 수군은 주류성의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白江口(백강구)로 접근하고 있었다. 주류성의 부여풍은 이를 접응하기 위해 騎兵(기병)을 거느리고 백강구 언덕으로 달려가 군진을 세웠다. 이에 유인궤, 杜爽(두상), 부여융(의자왕의 왕자)은 당의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에서 백강구로 진발했다. 663년 9월에 전개된 백강구 전투는 육전과 수전이 배합된 입체적 국제전이었다.
해안 언덕에는 부흥군의 기병이 포진하여 왜국의 전선을 보호했다. 신라의 기병이 부흥군의 기병에 대해 먼저 일격을 가해 기선을 제압함으로써 전단이 열리게 되었다. 이에 倭船(왜선) 4백 척은 唐船(당선) 1백70척에 대해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왜선은 唐船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맞바람을 맞으며 돌진했던 왜선은 바람을 등진 唐船의 火攻(화공)에 걸려들어 불타기 시작했다.
왜선은 척수에 있어 唐船보다 훨씬 많았지만, 크기가 작은 데다 조선술의 낙후 때문에 배가 견고하지도 못했다. 唐船은 득의의 撞破戰法(당파전법)으로 왜선을 들이받았다. 왜선 4백 척을 불사르니, 화염이 하늘을 찌르고 바닷물도 붉게 물들었다. 백강구 전투에서 참패한 부흥군·왜군 병사들이 울부짖었다.
『백제라는 이름은 이제 끝났다. 앞으로 누가 조상의 묘소를 돌볼 것인가』
부여풍은 종자 몇을 데리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부여풍과 부여융은 형제간이면서도 각각 다른 진영에 붙어 싸웠으니 기구한 운명의 인물들이었다. 당 고종은 부여융을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삼았는데, 실권은 유인원이 장악했다. 웅진도독부는 신라가 점령했던 옛 백제 영토의 일부까지 도로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런 요구를 신라가 들어줄 리 없었다. 나·당 사이에는 이미 깊은 불신의 냉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문무왕 4년(664) 봄 정월 김유신은 늙음을 이유로 은퇴를 청했다. 그의 나이 70이었다. 그러나 문무왕은 김유신의 은퇴를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했다.
이 해에 唐將(당장) 유인원의 억지 주선으로 신라 王弟(왕제) 김인문과 웅진도독 부여융의 會盟(회맹)이 강행되었다. 신라로서는 괴뢰 부여융과의 회맹이 달갑지 않았지만, 勅命(칙명)을 빙자한 유인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런데 665년 당 고종은 한 술 더 떠 문무왕과 부여융의 회맹을 명했다.
665년 8월 양측은 웅진강 북쪽 就利山(취리산)에 제단을 쌓고, 문무왕과 부여융이 나란히 서서 회맹 의식을 거행했다. 의식은 먼저 천지와 산천에 致祭(치제)한 뒤 백마의 피를 나눠 마시는 절차를 밟았다.
패망한 백제가 신라와 대등한 집단으로서 회맹했다는 것은 모순일 뿐만 아니라 唐이 패권적 우위에 있는 한 웅진도독부가 곧 신라보다 우월한 위치로 변화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일찍이 부여융을 자기 말 앞에 꿇어앉혀 호령했던 문무왕으로선 치욕적이었지만,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2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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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태 |
金庾信과 그의 시대(24)
정순태 淵蓋蘇文의 세 아들이 벌인 권력 다툼 666년 여름 5월, 고구려의 독재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이 병사했다. 연개소문은 임종 때 세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희 형제들은 고기와 물처럼 화목하여 절대로 벼슬을 다투지 말라』고 했다. 장남 淵男生(연남생)은 삼군대장군과 태막리지의 벼슬을 계승했고, 차남 男建(남건)과 삼남 男産(남산)도 권력을 나눠 가졌다. 남생은 나름대로 중앙 권력을 다진 데 이어 지방 순시에 나섰다. 남생은 그의 부재 중 조정의 일을 남건과 남산이 대행하도록 했다. 이때 어떤 자가 남건과 남산에 접근하여 이간질을 했다. 「어떤 사람」을 唐에 포섭된 첩자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남생은 두 아우가 자기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처치하려 하니, 먼저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남건과 남산은 처음엔 「어떤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접근하여 두 아우를 모략했다. 『두 아우가 형이 돌아오면 자기들의 권세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형에 대항하여 조정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남생은 심복을 가만히 평양으로 보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일이 꼬이느라고 남생의 심복은 붙잡히고 말았다. 남건과 남산은 드디어 「어떤 사람」의 이간질에 넘어가고 말았다. 둘은 왕명을 빙자하여 남생을 소환했다. 남생은 겁을 먹고 入京(입경)하지 못했다. 이에 남건은 남생의 어린 아들 獻忠(헌충)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에 올라 남생을 토벌하려 했다. 곤경에 빠진 남생은 國內城(국내성)으로 달아나 그곳에 웅거하면서 15세의 아들 獻誠(헌성)을 당에 보내 구원을 청했다. 문무왕도 연개소문의 사망에 따른 정세 변화를 읽고 이미(666년 5월) 당 고종에게 청병을 요청한 바 있었다. 당 고종은 헌성을 향도로 삼아 龐同善(방동선) 부대 등을 요동으로 급파했는데, 요동의 고구려軍은 쉽게 무너졌다. 당군은 남생과 합류했다. 당 고종은 남생에게 요동도독 겸 平壤道 安撫大使(평양도 안무대사)로 임명하고, 현도군공으로 책봉했다. 666년 겨울 12월, 당 고종은 다시 李勣(이적)을 대총관으로 하는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다. 이 무렵 연개소문의 동생 淵靜土(연정토)가 조카들의 내분에 실망하여 벼슬아치 24명, 백성 3천5백명 그리고 성 12개를 들어 신라에 투항했다. 고구려 지도부 스스로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667년 9월, 당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침공했다. 대총관 이적은 고구려의 서변 요충 新城(신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그 일대 16개 성도 싸우지 않고 모두 이적 軍에 항복했다. 고구려軍은 한때 총관 高侃(고간) 부대에 급공을 가해 승세를 타고 추격하다가 좌무위장군 薛仁貴(설인귀) 부대의 측면 공격을 받아 5만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때 신라軍은 평양으로 가는 길을 뚫기 위해 임진강의 요새 七重城(칠중성: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을 공파하고 獐塞(장새:황해도 수안)까지 북진했다. 여기서 김유신은 첩자를 보내 당군의 상황을 살폈다. 나·당 양군은 평양성을 남북에서 협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적은 겨울 작전에 따른 병력 손실을 염려하여 당군을 철수시켰다. 신라軍도 회군했다. 이 시기에 김유신은 제1위의 관등인 角干(각간)도 부족하다 하여 대각간의 지위에 올랐다. 『우리의 올바름으로 적의 그릇됨을 친다』 668년 봄 정월부터 이적의 唐軍은 부여성을 공략했다. 남건은 군사 5만명을 보내 부여성을 구원하려 했지만, 장졸 5천명을 잃고 패퇴했다. 부여성 주변 고구려의 40여성도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다. 이해 여름 6월, 유인궤와 당에 宿衛(숙위)로 가 있던 金三光(김유신의 장남)이 고구려 출병을 명하는 당 고종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로 들어와 軍機(군기)와 전략을 논의하고 唐京(당경)으로 돌아갔다. 문무왕은 20만 대군을 일으켜 평양성으로 진발했다. 대총관(대장군) 김유신 이하 총관 38명이 참전하는 傾國之兵(경국지병)이었다. 이때 동원된 신라의 병력수가 20만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해 「과장된 것」이라고 판단하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고, 심지어 4만 정도라고 추측하는 분도 있다. 원래 농경사회의 병력동원에서는 7호 당 兵(병) 1명을 징발해야 농업 생산에 큰 지장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일반 원칙에서 볼 때 신라의 동원 능력은 10만명에 미달될 정도였다고 할 수 있는데, 20만명이라면 適定(적정) 능력의 2배를 웃도는 숫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20만명이란 숫자를 뒤집을 만한 새로운 증거가 없는 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문무왕은 신라까지 먹으려는 당의 팽창 정책을 눈치채고 있었던 만큼 고구려 정벌을 앞두고 신라의 可用(가용) 병력에 대해 총동원령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동원 병력 중 일부만 평양성 攻圍戰(공위전)에 투입되고, 나머지 병력은 당군의 남하에 대비해 국경지대에 포진시켰다는 얘기다. 20만 대군을 호령하는 일대 캠페인의 將이라면 백전노장 김유신일지라도 남에게 양보할 수 없는 지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은 불운했다. 때마침 風(풍)을 앓아 일생 일대의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風이라면 요즘 사람들은 중풍을 연상하지만, 실은 오늘날의 感氣(감기)에 해당하는 증세로 보아야 한다. 옛 醫書(의서)에는 感氣에 해당되는 병명이 風으로 적혀 있다. 당시 김유신의 나이 74세였다. 강체질의 김유신이었지만, 그런 증세를 가지고 야전에 나서기에는 너무 고령이었다. 문무왕은 王弟(왕제) 인문과 김유신의 동생 欽純(흠순)에게 야전군의 지휘권을 주었다. 인문과 흠순은 인간적인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일단 완곡하게 사양했다. 둘은 『만일 유신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라고 문무왕에게 진언했다. 문무왕이 답한다. 『공들 세 신하는 국가의 보배이니, 만약 한꺼번에 敵地(적지)로 갔다가 불의의 일이 있어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라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유신공이 여기에 남아 있게 하면 은연중 나라의 長城(장성)과 같아 종내 근심이 없으리라』 인문과 흠순은 김유신을 찾아가 말한다. 『자질이 부족한 저희들이 왕명에 따라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 김유신이 대답한다. 『무릇 장수란 나라의 干城(간성)과 임금의 손발이 되어 矢石(시석)의 사이에서 승패를 결하는 것이다. 반드시 위로는 天道(천도)를 얻고 아래로는 地利(지리)를 얻으며 중간으로는 人心(인심)을 얻은 뒤에야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나라는 忠信(충신)으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었고, 백제는 오만으로 인하여 멸망했으며, 고구려는 교만으로 인해 위태롭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올바름으로 저편의 그릇됨을 친다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 고구려의 멸망 김유신은 「諸葛亮心書」(제갈량심서)에 정통했음에 틀림없다. 「제갈량심서」는 『무릇 대세를 아는 데는 세 가지 요체가 있으니, 첫째가 天(하늘)이요, 둘째가 地(땅)요, 셋째는 人(사람)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김유신과 제갈량의 공통점은 둘 다 至誠(지성)의 장수였다는 것이다. 7월16일 漢城州(한성주)를 출발한 신라군은 평양성의 외곽 蛇水(사수:대동강 지류)에서 당군과 합류했다. 男建(남건)도 결전을 결심하고 출병했다. 사수 會戰(회전)에서 최고의 무훈을 세운 인물은 신라 장군 金文潁(김문영)이었다. 김문영이라면 8년 전 백제 공략 때의 統帥權(통수권) 다툼에서 김유신이 蘇烈을 제압하지 못했다면 蘇烈에게 참수될 뻔한 당시의 督軍(독군:군기장교)이다. 훗날의 얘기지만, 그는 上大等(상대등)으로 크게 출세한다. 김문영은 선봉장으로 나서 고구려軍의 본진을 대파했다. 고구려軍은 패주하여 평양성으로 퇴각했는데, 이로써 평양 성중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드디어 고구려 보장왕은 男産(남산)으로 하여금 首領(수령) 98명과 함께 백기를 들고 항복하게 했다. 고구려 시대의 首領이라면 오늘날의 북한에서와는 달리 군의 장교였다. 그러나 막리지 남건은 성문을 닫고 수성전을 벌였다. 전세가 극히 불리한 가운데 남건은 승려 信誠(신성)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信誠은 이적에게 密使(밀사)를 보내 內應(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5일 후 가만히 성의 북문을 열었다. 선발된 용사 5백명으로 구성된 신라軍 특전대가 제일 먼저 북문으로 뛰어들어 성루에 불을 질렀다. 남건은 칼로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군은 보장왕과 남건 등을 붙잡았다. 이로써 고구려는 28왕 7백5년 만에 멸망했다. 唐의 동방 정책 견제한 김유신의 對倭 외교 李勣(이적)의 당군이 평양성 공위전의 주력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신라軍은 사수 전투, 평양성의 大門(대문) 전투, 평양 軍營(군영)의 전투, 평양 城內(성내) 전투, 평양 南橋(남교) 전투에서 모두 승전함으로써 고구려 평정에 결정적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당군은 승전의 果實(과실)을 거의 독식했다. 이적은 668년 10월 보장왕을 비롯하여 왕자, 대신, 백성 등 20만여명을 포로로 삼아 개선장군으로 귀국했다. 문무왕도 고구려인 7천여명을 포로로 데리고 귀환했다. 문무왕은 남한주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에게 김유신의 공적에 대해 말하기를, 『그가 나가면 장수의 일을 하였고, 들어서는 재상의 일을 하였으니 그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공의 한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었다』라고 했다. 이해 겨울 10월22일의 논공행상에서 김유신에게는 태대각간의 직위와 식읍 5백 호가 내려졌다. 문무왕은 또 그에게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殿上(전상)에 오를 때 허리를 굽힌 채 빠르게 걷는 신하의 예법을 따르지 않게 했으며, 그의 屬官(속관)들에 대해서도 각각 관등을 한 급씩 올려 주었다. 그러면 고구려를 멸망시킨 평양성 공위전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던 김유신이 논공행상에서 제1위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그의 前功(전공) 때문이 아니었다. 「日本書紀」 天智(천지) 7년(688) 條의 기사는 주목할 수밖에 없는 김유신의 행적을 전하고 있다. 이해 9월12일 신라는 급찬 金東嚴(김동엄)을 파견하여 일본에 調物(조물)을 보냈다. 9월12일이라면 평양성이 함락되기 직전이니까 문무왕은 親征(친정)중이었다. 국왕 부재중의 王京(왕경)에서 김동엄의 왜국 파견을 주도한 인물은 김유신이었다고 해도 좋다. 왜냐하면 9월26일 일본의 內大臣(내대신) 中臣鎌足(나카도미노 가마다리)이 중(僧) 法弁(호오벤)과 秦筆(신히쓰)를 시켜서 김유신에게 배 한 척분의 回謝品(회사품)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어 29일에는 일왕 天智가 문무왕에게 進調船(진조선) 한 척을 보냈다. 天智·中臣의 관계는 일본판 김춘추·김유신 동맹이었다. 642년 황자 中大兄(중대형)이 大化改新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을 때 中臣은 中大兄의 오른팔이었는데, 中大兄이 661년 즉위하여 천지천황이 된 것이다. 이후 中臣은 일본 최고의 문벌인 藤原(후지와라)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김유신이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구사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신라와 왜국은 仇敵(구적) 관계였다. 신라는 고구려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하기 위해 병력을 대거 북상시키면서 배후 왜국의 동향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왜국은 663년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2만7천명의 大兵을 파견했다가 백강구 전투에서 패배한 후 九州(규슈) 일대에 산성을 쌓고, 나·당 양군이 자기들을 치러 오지 않을까,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김유신의 메시지는 그런 왜국의 위기 의식을 해소시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신라가 주도적으로 왜와 국교를 재개한 것은 對 고구려 전쟁 기간중의 배후 위협을 제거하려는 의도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라의 수뇌부는 이미 對唐 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유신의 對日 외교는 향후 對唐 전쟁에 대비한 주변 외교였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은 이해 11월 초순에도 문무왕에게 비단 50필, 풀솜(綿) 5백 근, 가죽 1백 장을 보냈다. 이런 교류는 나·왜 양국이 왕은 왕끼리, 重臣(중신)은 중신끼리 격에 맞는 인사를 차리면서 무역을 했다는 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당의 팽창 정책을 견제하는 나·왜 간의 관계 개선이었다. 김유신은 동아시아 세계를 움직이는 핵심 인물이었다. 당 고종도 김유신 앞으로 조서를 보내 그의 전공을 표창하고, 입조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김유신은 입당하지 않았다. 고구려 멸망 후에 곧 나·당 간에 힘겨루기가 표면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입당할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25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