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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정희에 대한 평가,친일파 주장의 오류

鶴山 徐 仁 2005. 12. 4. 17:05
박정희에 대한 평가,친일파의 오류(이 들은 정치적 편견이 있는 네이버 지식에서 삭제된 글입니다.야후에서는 편견없는 정치색으로 정의를 위하여 네티즌이 접하기를 바랍니다.)

박정희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태두이다.60년대 이전에 보릿고개와 부정부패가 판치던 시대를 접고 경제발전을 행하였다.

1.일본의 배상금

가.배상금이 절실했던 당시 실정

일본에 대한 배상은 원래 이승만 시절에도 요구하였다.이것을 일본 정부가 액수가 많다고 거절하던 것을 박정희 시절에 동북아 정치 안정을 위한 미국의 일본에 대한 협박성 강요로 한국은 배상금 유상,무상 8억 달러를 얻게 되었다.
이돈을 피해자에게 주지 않고 전액 경제 개발에 썼는데 당시 거지 국가였던 한국에 돈을 꿔줄 나라는 하나도 없었으므로 귀중한 경제 개발의 종자돈이었다.이돈은 뭉치돈으로 경제개발에 써야지 만약 피해자에게 나눠줬으면 경제 기본 원리상 경제 개발은 안되고 흐지부지 됐을 것이다.게다가 박정희 정부는 이 돈을 개인 축재에 안쓰고 전액 경제 투자에 썼다는 것이 수많은 군사독재의 부정부패와 확연한 차이를 가져온다.
이 당시 배상금 안받고 70년대까지 질질 협상해서 끌어서 받았다면 중국과 경제개발 시작점이 차이가 없게 된다.그러면 현재의 한국은 없을 것이다.중국보다 기술적인 면에서 전혀 차이가 없게 된다.


나.잘못된 일부 네티즌들의 논란

일부 네티즌들은 일본 기업들이 돈을 주고 한일협상액을 깎으라고 시도한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네티즌들이 말하는 6천6백만달러는 1961년부터 1965까지 한국정부(공화당)이 일본 기업에서 받은 것이지 협상대표단이 받은 것이 아니다.
일본기업들이 한국정부에 돈을 준것은 한국투자에 대한 로비자금으로 준 것이다.그 당시 일본 기업들은 한국에 새나라자동차등 여러투자를 하고 있었다.이과정에서 로비자금으로 준 것이지 한일협상의 대가로 준 것이 아니다.
박통당시의 정치자금은 현재의 추악한 정치자금과 다르다.당시에는 정치자금은 쪼개서 정치인들 야당,여당할 거 없이 나눠 줬다.가령 1000억원이면 10억씩 나눠 줘서 자기 정책을 찬성하게 한것이다.하지만 지금 정치인들은 수백억씩 횡령,뇌물받고하고 부정부패 정책으로 나가는 것이다.박통처럼 국가 운영하기 위해서 올바른 정책세우기 위해서 돈 나눠준거하고 지금처럼 부정부패 연결고리로 정치인들이 개별적으로 착복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네티즌들이 주장하는 cia문서는 <한일관계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이러한 현상을 나열한 것이지 이것이 6600만달러가 직접적으로 한일협상에 영향을 미쳤다고는 절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kbs일요스페셜040815에서 나온바에 의하면,미국무성문서분석에 의하면 무상 3억달러라는 구체적인 액수는 케네디 행정부가 직접적으로 제안한 것이다.
문서작성,금액의 방식은 미국의 완전한 간섭하에 의해 이루어진것이다.당시 동북아정세안정이 절실하였던 미국의 간섭이었다.

게다가 박정희대통령은 개인적인 명목의 비자금은 형성하지 않았다.지금처럼 정치인들이 엄청난 돈을 부정부패 정책을 추진하면서 나라망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스위스계좌의 자금은 정치인과 군부에 정치자금으로 뿌릴 돈이었지 개인적 명목의 돈은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고,,미국 로비한 돈도 당연히 로비목정의 자금이었다.
그나라 현재 박대통령의 자식들은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 각지의 독재자들의 재산축적과 비교하면 너무도 간소한 액수이다.박통이 맘만 먹었으면 수백조 달러는 자식에게 남겼을 것이다.
만약 김대중,노무현이 20년 독재했다면 사리사욕으로 수백조달러는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을 것이다.



2.경제개발

가.박정희의 중공업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그 당시 여건상 누구나 경제 개발을 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하지만 그런식으로 말하면 장개석 정부의 대만이 왜 중공업 발전을 못했는가를 설명못하고 수많은 독재 국가의 경제 파탄을 설명 못한다.
장개석정부는 중국 내륙에서와는 달리 대만으로 이동하자 완벽한 독재정치를 행하면서 청렴하게 경제 개발을 하였다.그러나 중공업 투자는 막대한 투자비대문에 위험성이 커서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그리하여 현재 대만은 한국과 달리 경공업위주이기 때문에 중국에 밀려서 정체,혹은 하강의 시기로 접어 들고 있다.
한국은 70년대 박정희가 중공업 투자를 하려고 할때 많은 학자,정치가 들이 반대를 하였으나 박정희의 영단으로 결정하였다.이것은 박정희만의 능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김대중의 흑자

박정희당시 국가재정 적자였고 김대중정부는 흑자전환을 가져왔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중공업발전의 초기상태에서는 무조건 적자가 난다.최소 10년이상적자가 나는 것을 감수해야한다.만약 단기적 이익만을 노린다면 장개석처럼 경공업에 집중할 수 있지만 국가의 진짜 이익을 위한다면 당장 적자를 보더라도 적자투자를 해야한다.
김대중정부의 흑자는 김대중정부의 능력이 아니라 imf로 환율이 800원에서 1400원으로 바뀌어서 벌어진 현상일 뿐이다.
게다가 김대중정부는 단기적 내수진작을 위해 그 당시에는 인기를 얻었지만 카드를 마구 발행해 지금 현재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3.박정희와 전라도

호남차별이 박통 시절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원래 호남,영남 지역출신은 정계의 핵심 세력이 아니었다.이승만 시절까지볼때 주로 경기,서울,이북 출신들이 많았다.조선시대에도 중부지역사람들이 정치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박통시절 영남 출신이 진출하였던 것이지 전라도 사람들을 박통이 쫓아낸것이 아니다.

박통은 79년 시해 직전에 부산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반란진압을 명령하였다.발포까지도 염두를 두었던 결정이었다.부산은 경상도 지역이다.물론 다른 경상도 지역과 달리 최남단의 해안지역이라는 문화적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그 당시 독재 정권의 특성상 전라도 지역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발포하고 경상도 지역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발포하지 않는 다는 8,90년대 정치가들의 선동은 불식되어야 한다.독재정권은 전국 어느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발포할 자세였다.
특히 80년 광주 지역에서는 무기고 탈취와 시민들의 무장이 되었다.이 경우 발포한 것이다.고의로 광주만 무기고를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너무 소설적인 주장이다.79년 부마 사태에도 차지철은 캄보디아식 학살까지 가능하다고 발언한 것으로 보면 지역차별적인 학살이라는 망상은 이제는 불식되어야한다.이것은 정치인들의 지역표 다지기 술책과 연관이 큰 것이다.
즉 부마사태때도 발포명령이 가능하였다.그러나 부마사태에서는 경찰서가 시민에 의해 점거되었지만 무기는 탈취안당했다.하지만 광주,전남의 80년에는 무기탈취와 무장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발포한 것이지 전두환이 전라도가 꼭 싫어서 발포한 것은 아니다.수원,원주 어디서건 무장사태가 발생하면 발포했을 것이 그 당시 상황이었다.이것은 어느 나라나 똑같은 상식이다.
참고로 나는 경상도와 전혀 관련이 없고 서울출신이고 집안도 경상도,전라도와 상관없다.

4.친일 행적

이문제는 전체적인 역사 통찰이 필요하다.

우선 박정희는 경상도 지역의 초등학교 교사(이 당시 교사는 사회적 위치가 높았고 월급이 매우 좋았다.)였다.
그러다가 만주육사에(만주국의 군대이나 일본육사의 3사라고 보면 될 것이다.일본인과 중국인으로 구성되었다.) 자원입대하였다.성적우수로 일본 육사에 3학년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44년경에는 내몽골에서 육군 장교로 근무하였다.박정희의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였다.

이런 내용으로만 보면 특히 나이가 많아서 만주군 육사 지원할때 혈서로 일본 만세의 내용을 적은 것으로 보면 골수 친일파로 보인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을 단면적으로만 보면 안된다.

가. 박정희가 독립군을 토벌하였다는 주장

30년대말부터독립군이 전멸하기 시작하여 40년대초면 만주에서 독립군은 완전 없어졌다.
원래 만주 산악지역은 지리산과 달리 엄청나게 광대하여 지역주민들이 신고를 하기전에는 게릴라 소탕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농민 지원정책으로 비료도 주고 자금지원도 하므로 민심이 일본으로 넘어가서 게릴라들을 조선농민들이 만주지역에서 신고를 하기 시작했다.그리하여 만주지역에서 게릴라는 소탕이 되고 김일성,김책,최용건같은 게릴라도 러시아로 도망가 러시아 장교가 된 것이다.
이런것은 일본 정부측 자료나 중국 정부의 동북항일연군 자료에 엄청나게 많이 자세히 나온다.

이러한 실정인데 44년에 장교활동을 한 박정희가 그것도 내몽골에서 하였는데 어떻게 독립군을 토벌할 수 있는지 앞뒤가 안맞는다.


나.박정희는 천황폐하만세의 열혈 친일파였는가?

일본군 장교는 지금으로 말하면 판사정도의 위치이다.더구나 일본 육사 출신이면 엄청난 명예였다.(왜냐면 그당시 일본은 군대가 정치를 하였다.).박정희가 혈서를 써서라도 일본군 장교가 된것은 돈보다는(왜냐면 초교 교사도 돈은 많았다.) 이런 명예욕이 분명히 작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술먹을때 일본 군가를 부르거나 일본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가 분명히 자신의 청춘이었던 일본군대 시절에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다면 박통 시절에도 반일교육은 상식이었는데 앞뒤가 안맞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친일파의 심리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가령, 재일교포의 예를 들자.재일교포는 징용으로 강제 연행된 사람은 적고 사실상 일제 시대에 자발적으로 물가가 높고 잘사는 일본으로 이사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재일교포들은 현실에서는 일본이름을 쓰고 일본으로 귀화하는 사람도 많다.또는 일본 공무원이 되려고 소송을 거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고 해서 재일교포들이 일본사람을 좋아하는가?그것은 아니다.아마도 일본인을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재일교포들일 것이다.그것은 차별을 직접 받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천사가 아니다.조선인을 지배하건 고용하건 멸시를 정도의 차는 있어도 다 하였다.
친일파들이 돈이 좋아서, 혹은 박정희처럼 명예욕때문에 좋은 직장 버리고 군대에 입대하였어도 차별은 여러조모로 받았다.
만약에 친일파가 되서 완벽한 일본인이 된다면 일부의 주장처럼 친일파는 일본인을 사랑한다고 논리가 되겠지만,,,일제 시대에 아무리 열성적으로 친일을 해도 죠센징은 죠센징이었다.

일본의 제도와 사무라이 정신은 사랑할 수 있겠지만,,,일본인 그 자체를 사랑하는 친일파는 없다.또한 그런 재일교포도 없다.
같은 논리로 인도인중에서 영국에 친영파도 많았겠지만 식민지 인도인은 100이면 100면 영국인에게 민족적인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가진다.

다.친일파 청산의 의미

국민의 70퍼센트 이상이 자발적인 창씨개명을 하였다.(우리집안이 창씨해서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니다.우리 집안은 일본식으로 개명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김대중은 도요타 다이쥬, 노무현집안은 오카모토라는 식이다.
강제 창씨개명은 완벽한 거짓말이다.
이 당시 일본군에 입대하면 동네에서 잔치를 벌였다.
30년대말에서 40년대의 사회의 분위기는 전국적인 친일의 형태였다.
물론 이것은 일본이 영원히 번성하리라는 판단으로 일본에 협력해서 잘살자라는 의도이다.
물론, 앞에서 얘기했지만 일본인을 사랑하는 죠센징은 없다.아무리 고위관직을 얻어도 그렇다.그러나 일본에 협력하는 죠센징은 많았다.

그래서 친일파를 전부다 청산해야 한다면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걸린다.
이러하기 때문에 해방직후에서도 남로당(박헌영),사회당(여운형),북조선 노동당(김일성)은 친일파 청산을 애국청년,독립운동가를 고문해서 불구자로 만든 악질 친일파(경찰,헌병)에 제한했던 것이다.
북한군 창설때도 많은 일본군 출신을 기용했던 것도 이런 이유이다.
천황폐하만세와 신사참배는 그당시 많은 국민들이 하였다.이것을 이유로 처벌을 할 수는 없다.
자발적 친일만을 청산하자는 논리는 지금에 와서야 사람들이 반강제적 친일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창씨개명의 자발적 추세로 볼때 그 논리도 먹히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정치권에서는 애국청년,독립운동가를 고문해서 불구자로 만든 악질 친일파(경찰,헌병)에 제한하지 말고 군인까지 확대하자고 말한다.
이런 논리는 해방직후에서도 남로당(박헌영),사회당(여운형),북조선 노동당(김일성)에서도 주장하지 않았던 논리로 완전히 정치적인 것이다.
애국청년,독립운동가를 고문해서 불구자로 만든 신기남,김희선,이미경같은 헌병의 무리들만 처단 하면 된다.
일본에 가서 일본어로 한국타도를 외친 김대중(도요타다이쥬)야 말로 진정한 친일 매국의 전형이다.

라.앞으로의 일본에 대한 인식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 배울것이 많으니 친일을 옹호하자는 논리는 아니다.
분명 조선말기의 시스템은 일본보다 열등하여서 망한 것이다.이것은 양반이 상놈보다 열등하다는 논리는 아니다.상놈은 양반보다 못했으면 못했지 잘난것도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2류 선진국이다.미국,유럽의 근대화,과학적인 정신보다는 열등하다.
우리가 배울 것은 서양의 정신이지 일본같은 정신을 배울 필요가 없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모델이 일본식 시스템이면 친일의 미래적 합리성을 생각해도 되겠지만 우리의 모델은 서구적인 시스템이다.친일을 옹호하는 것은 친일파들의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친일을 했다는 것은 그당시 정세로 봐서는 대부분이 하였으므로 큰 죄는 아니지만 죄는 죄이다.
그것을 선행인것처럼 말 돌리는 것은 죄악이다.한승주,지만원의 죄는 크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현재 한승주,지만원 같은 친일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처단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같은 친일파가 원한 것은 친일이 아니고 극일이다.박정희 시대에도 극일교육은 엄청났다고 할 수 있다.박정희 시대 같았으면 한승주가 그런말을 공개적으로 도저히 못했을 것이다.
재일교포들이야 말로 극일을 원한다.일제에 과거에 협력하였던 사람일 수록 대한민국이 빨리 힘을 키워서 일본을 능가하기를 원한다.과거의 자기가 직접 당했던 멸시를 갚아주기를 원한다.

한승주같은 사람은 일본잡지에 푼돈이나 벌려고 글을 쓰는 사람일뿐이다.처단이 필요하다.



우리 조상들의 상당수는 일제 시대에 친일을 하였고 친일을 하였던 사람일 수록 인간적 모욕을 직접 받으면서 살았다.
그것을 잊지 말고 극일을 해야 할 것이다.부국강병을 하여서 극일을 하는 것은 친일파건 아니건 과거의 죠센징으로 불리웠던 대한국민이 모두가 원하는 소망이자 목표인 것이다.



5.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박정희

박정희는 핵개발을 추진하였는데 이것은 미국의 대단한 미움을 받았다.미국은 한국의 야당세력을 지원하였고 한국내에서 쿠데타나 정권교체가 일어날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당시 김재규는 미국의 cia와 매우 친했고 김재규가 미국의 이런 마음을 몰랐을리가 없다.
박정희가 죽는 것을 가장 원했던 세력은 미국과 한국의 야당세력이었던 것이다.
박통이 원했던 것은 미군의 한국 계속 주둔과 한국의 핵보유였지만 미국은 박통에게 미군철수 협박을 하고 한국의 핵개발을 어떻게는 막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당인사들의 부마사태가 발생하였다.동시에 김재규는 박통을 저격하였다.

박통은 미국의 협박이 계속되면 자신이 암살되거나 내부쿠데타가 일어날 것을 알았을 것이다.(이러한 현상은 세계역사상 많다.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은 원래 미국지원세력이었다가 미국이 공격해서 망하거나 이라크의 후세인역시 미국지원세력이다가 망했다.)
그러나 자신의 한목숨 바치더라도 민족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뜻을 굽히지 않으신 박정희 각하의 뜻은 현대 한국의 젊은이들이 언제까지도 명심해야할 것이다.

 
출처 : 블로그 > 낭띠와 함께하는 세상이야기 | 글쓴이 : Nantiy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