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庾信과 그의 시대(27)
정순태 唐 高宗의 毒手
휴전 기간중에도 신라는 당에 반기를 든 고구려 백성을 받아들이고, 또한 점거한 백제의 옛 땅에 관리를 파견하여 수비를
굳혀갔다. 드디어 674년 당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당에 가 있던 문무왕의 동생 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면서,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 李弼(이필)과 이근행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당 고종은 신라 왕실의 골육상잔을 유도하는 毒手(독수)를 휘두른
것이었다. 문무왕도 당과의 결전을 결심했다. 신라는 서형산 영묘사 앞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六陣兵法(6진병법)에 따른 진법 훈련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육진병법은 당 태종 때의 병법가 李靖(이정)이 제갈량의 八陣法(8진법)을 개선시킨
진법을 말한다. 그러던 675년 2월 유인궤는 칠중성을 공격했지만,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렇게 신라는 고슴도치 전략을 구사하면서도 또다시 당에 대한 평화 공세를 병행했다. 문무왕은 사신을 당에 파견하여 조공하고, 請罪(청죄)했다.
이에 당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면서 김인문에 대해선 종전의 관작인 臨海郡公(임해군공)으로 다시 봉했다.
문무왕의 세 살 아래 동생인 김인문은 고구려 평정 때 야전군의 지휘를 맡아 대각간의 지위에 올랐으며, 전후 7차례에 걸쳐
20여년간 入唐宿衛(입당숙위)를 전개한 관계로 당 조정에서 절대적으로 선호한 인물이었다. 이런 김인문을 당 고종이 억지로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김인문은 그런 이간책에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兄王의 지위를 끝내 넘보지 않았다. 그
인물됨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유가, 장자, 노자, 불교 서적을 섭렵하고 활쏘기, 말타기에 능숙하면서 식견과 도량이 넓어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사후에 김인문의 시신은 신라로 옮겨져 父王 태종무열왕의 발치에 묻혔다. 그 무덤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데 이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형제간의 우의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친 공덕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오늘날 태종무열왕의
능비는 碑身(비신)이 망실된 채 이수(용머리 돌)와 귀부(거북 모양의 받침돌)만 남아 있는데, 이수에 쓰여진 「太宗武烈王陵碑」라는
篆書體(전서체)의 여섯 글자가 김인문의 글씨다. 대단한 명필이다. 신라는 백제 지역과 고구려 남경 지역에
州郡(주군)을 설치함으로써 영토 지배권을 당당히 행사했다. 이해 9월 설인귀가 당경에서 숙위로 있던 風訓(풍훈)을 향도로 삼아 말갈병과 함께
泉城(천성)을 공격했다. 풍훈은 大幢(대당) 총관을 재임하던 661년에 親唐派(친당파)로 몰려 주살된 金眞珠(김진주)의 아들이다. 천성은 지금의
인천 방면으로 추정된다. 천성 전투에서 신라의 文訓(문훈)이 당병 1천여병을 베고 唐船 40척과 전마 1천 필을 노획했다.
동아시아의 제해권 장악한 기벌포 水戰 675년 9월29일
李謹行(이근행)은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買肖城(매소성)에 진을 쳤다. 다수의 학자들은 이근행 軍의 규모가 20만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과장되었다면서 4만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매소성은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대전1리 한탄강 주변 일대로 비정되는데, 현장을 답사해 보면
20만 대군이 留陣(유진)하기엔 협소하다는 느낌을 준다. 어떻든 신라의 9軍은 미리 매소성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가 이근행 軍을 불리한 지형으로
몰아 넣은 다음 겹겹이 포위하여 대파했다. 「삼국사기」 문무왕 15년 조에 따르면 신라군은 매소성
전투에서 3만3백80필의 말 이외에도 병기를 대량 노획했다. 이런 정도의 戰馬(전마)와 병기를 노획했다면 당군의 사상자는 엄청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당과의 관계를 의식한 때문인지, 당군의 사상자수에 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매소성
전투에서 김유신의 차남 元述이 3년 전의 치욕을 씻고자 힘껏 싸워 대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세상에서 얼굴을 감추었다. 매소성 전투는 당군을 한반도에서 패퇴시킨 육상의
결전이었다. 이 전투 후 신라군은 임진강-한탄강 계선에서 차츰 북상하여 대동강 계선에 이르게 된다.
육상의 결전이 매소성 전투라면 해상의 결전은 기벌포 전투였다. 676년 설인귀의 수군은 금강 하구로 침입하여 사찬 施得(시득)이 지휘하는 신라의
수군과 격돌했다. 신라의 수군은 첫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이후 대소 스물두 번의 전투에서 연승하여 당군 4천명의 머리를 베었다. 육전과는 달리
수전에서는 참수하기가 어려운 만큼 당군의 사망자는 수급의 숫자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기벌포 전투의
승전으로 신라는 동아시아의 制海權(제해권)을 장악했다. 제해권을 상실한 당은 兵站線(병참선)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병참선을 유지하지 못하면
대규모 원정군도 파견할 수 없다. 드디어 당은 원정군의 파견을 포기했다. 기벌포 전승 2년 후인 678년
문무왕은 그때까지 兵部(병부:국방부)에 예속되어 있던 해군·해운 부문을 독립시켜 병부와 동격인 船部(선부)를 창설했다. 이것은 바로 해상세력의
優位(우위)를 통해 나라의 안보와 발전을 누리겠다는 문무왕의 대구상이었다. 훗날 흥덕왕 때 동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한 張保皐(장보고)의 활약은
어느 날 갑자기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문무왕의 해양정책에 의해 그 기반이 조성된 것이라고 해도 좋다.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패배한 당군은 한반도에서 전면 퇴각했다. 676년 안동도호부가 요동성으로 쫓겨갔다. 당 고종은 677년 前 고구려
왕 高藏(고장:보장왕)을 요동군왕으로 봉하고, 웅진도독부를 요하 방면의 건안성에 다시 설치하여, 이곳에다 부여융을 보내 대방군왕으로 삼았다.
중국의 전통적 夷以制夷(이이제이) 정책이었지만, 패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나·당
7년 전쟁 전후의 국제정세 중국 陝西省(섬서성)의 省都(성도) 西安(서안) 서북쪽 2백km 지점에
乾縣(건현)이라는 곳에 진시황의 礪山陵(여산릉)보다 규모가 더 큰 乾陵(건릉)이란 이름의 무덤이 있다. 건릉에는 당 고종과 그의 妃(비)
武則天(무측천)이 합장되어 있다. 무덤의 들머리길 좌우에는 수십 구의 문신석상과 무인석상, 그리고 50여 구에 달하는 조공국의 使臣 石像(사신
석상)이 세워져 있다. 대평야지대에 人工山(인공산)처럼 축조한 건릉은 그 위에 오르면 오를수록 그 엄청난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더욱 기묘한 것은 무덤을 도굴하지 못하도록 집채 만한 바윗덩이로 건릉의 지표면을 모두 싸발랐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건릉은 1천3백여년의 세월 동안 그 누구에게도 도굴을 당하지 않았다. 무측천은 이렇게 용의주도한 파워우먼이었지만, 원래 백성들을 마구
동원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와 善政(선정)은 거리가 멀다.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당시,
唐의 군주는 고종이었으나, 실권자는 무측천이었다. 당 고종 李治(이치)는 황자 시절부터 자기 발로는 걷지 못할 만큼 비대했고, 즉위 후에는
간질병까지 앓아 정사를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였다. 무측천은 원래 당 태종의 후궁이었으나, 태종의 사망 후 우여곡절을 넘어 그 아들 고종의 품에
안겼다. 이런 무측천이 674년 天后(천후=측천무후)가 되어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내정이 어지러워졌다.
이런 가운데 당 고종은 678년 또다시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을 기도했지만, 측천무후와 신하들이 이를 반대했다. 당시의 상황은
「舊唐書」(구당서) 張文瓘(장문관) 전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신라가 배반하므로 고종이 군사를
발하여 토벌하려 했다. 그때 文瓘(문관)은 병으로 누었다가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고종을 뵙고 『근래 土蕃(토번=티베트)이 변경을 자주 침략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노략질을 합니다. 신라는 비록 순종치 않지만, 군대가 중국을 침범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동서를 함께 정벌한다면, 신은 백성들이
그 폐를 견디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用兵(용병)을 멈추고 修德(수덕)하여 백성들을 안도시키도록 청합니다』라고 말했다. 고종이 이에 따랐다〉
토번은 나·당 전쟁의 틈을 이용하여 대군을 일으켜 670년 安西都護府(안서도호부)의 4鎭(진)을
함락시키는 등 西域(서역) 지방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당 고종은 對 신라전에 출정한 契苾何力(설필하력) 등의 장수를 실크로드 쪽으로 돌려 토번의
침입을 방어케 했다. 문무왕은 이런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당의 동방정책을 봉쇄했던 것이다.
전제왕권 확립 과정에서 가야인맥 숙청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문무왕은 681년
56세의 나이로 병몰하고 神文王(신문왕)이 즉위했다. 「삼국사기」 원년 8월8일 條를 보면 「소판 欽突(흠돌), 파진찬 興元(흥원), 대아찬
眞功(진공)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흠돌의 딸은 신문왕의 왕비였다. 흠돌의 난이 진압된 후 왕비 김씨는 폐출되고,
병부령(국방장관)이었던 金軍官(김군관)은 不告知罪(불고지죄)로 왕명에 따라 자결해야 했다. 이때 숙청된
흠돌, 흥원, 진공 등은 가야 인맥이었다. 특히 흠돌은 김유신의 딸인 晉光(진광)의 남편이었다. 흠돌의 난에 관해서는 이미 졸고 「화랑세기의
정체」에서 자세히 거론한 바 있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흠돌 등 가야파가 신라 전제왕권의 확립 과정에서 장애물로 지목되어 피의 숙청을 당했던
측면이 없지 않다는 점은 밝혀둘 필요가 있겠다. 이로써 가야파가 주도하던 화랑제도도 한동안 폐지되었다.
김유신의 막내 여동생인 문명태후(무열왕의 왕비)와 김유신의 동생 각간 欽純(흠순)이 차례로 병사한 후에는 신라 왕실 내부에 伽倻派(가야파)를
보호해 줄 만한 실력자가 없었다. 김흠돌의 반란에 대한 처리 과정에서 김유신의 직계가 처벌을 받은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때 이후 가야파의 세가
꺾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정변 속에서도 김유신에 대한 평가는 불변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신문왕이
感恩寺(감은사) 앞바다에서 만난 용으로부터 「왕의 아버지(문무왕)께서는 바다의 큰 용이 되시고, 김유신이 다시 천신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해 이같은 큰 보물을 저로 하여금 바치게 했습니다」라는 얘기를 들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용이 전한 보물은 천하를 화평하게 하는 萬波息笛(만파식적)이란 이름의 피리였다고 한다. 이 설화의 진위야 어떻든 가야파를 대거 숙청한 신문왕
대에도 김유신이 天神(천신)과 聖人(성인)으로 추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유신의 직계 자손은
차츰 신라 귀족사회에서 소외되어 간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김유신의 직손 允中(윤중:김삼광의 장남)은 성덕왕 때 관등이 대아찬(제5위)에
이르렀는데, 왕의 측근들로부터 심한 견제와 질시를 당했다. 「성덕왕이 8월 보름날에 月城(월성) 꼭대기에
올라 시종관들과 주연을 베풀면서 允中(윤중)을 불러오라고 하니 어떤 자가 간언하기를, 『지금 종실과 戚里(척리:외척)들 중에 좋은 사람이 없지
않는데 어찌하여 유독 먼 신하를 부르십니까?』라고 했다. 이에 왕은 『지금 과인이 경들과 함께 평안무사하게 지내는 것은 允中의 조부의 덕인데,
만일 공의 말대로 그를 잊어버린다면 선한 이를 선하게 대우하여 그의 자손에게도 미쳐야 한다는 도리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왕은 마침내 윤중에게
가까운 자리를 주어 앉게 하고 그 조부의 평생에 대해 담론했다」 김유신의 직계 자손이 신라 귀족사회에서
다시 각광을 받을 뻔한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성덕왕 32년(733)에 발해가 산동반도를 공격하자 당 현종은 신라에 청병을 하면서 사신을 통해
다음과 같은 칙지를 보내 왔다. 『말갈과 발해는 겉으로는 藩臣(번신)이라 일컬으면서도 속으로는 교활한
음모를 품고 있으므로, 이제 출병시켜 문죄하려 하니 경(성덕왕)도 發兵(발병)하여 앞뒤의 勢를 이루도록 하라. 듣건대 옛 장수 김유신의 손자
允中이 있다 하니 반드시 이 사람으로 장수를 삼으라』 성덕왕은 곧 윤중과 그의 아우 允文 등 네 장수에게
군사를 주어 당군과 합세하여 발해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발해의 남쪽 국경으로 진군한 신라군은 폭설을 만나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회군했다.
발해의 존재는 통일신라의 위상과 관련하여 논란의 대상임은 앞에서 거론했다.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들은
당에 끌려가기도 하고, 일본에 망명하기도 했다. 신라에 귀순한 고구려 유민은 668년 이후 10년간 10만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발해는 당의
동쪽 변경 군사거점 營州(영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이 거란족의 반란 시기에 고구려의 만주 고토로 동진하여 세운 나라인 만큼 우리
민족 국가임에 틀림없다. 발해의 건국 시기는 고구려 멸망 후 30년 만인 698년이었다. 당은 이 무렵
고종의 사망(683년) 후 則天武后가 그녀의 소생인 睿宗(예종)과 中宗(중종)을 차례로 퇴위시키고 중국 초유의 女帝(여제)가 되었으나, 그
정치는 어지러웠다. 이런 유리한 국제정세 속에서도 신라는 북진 정책을 구사하지 못했다. 신라가 실현하지 못한 고구려의 만주 고토의 회복을 발해가
이뤄냈다는 점에서 발해 건국의 민족사적 의의는 크다. 발해는 2백년간 번영하다가 926년 거란족이 세운
遼(요)에 정복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 멸망 당시 발해로부터 원군 파견의 요청을 받고도 불응했다. 건국 초기의 고려로서는 그럴 만한 힘이
없었을 것이다. 연구자들은 발해 멸망 후 약 1세기의 세월에 걸쳐 발해 유민 10만명이 고려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신라는 나·당 7년 전쟁의 승전 이후 현실에 안주했기 때문에 불완전한 통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고 발해를 통일신라와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는 것은 민족사의 主流(주류)를 훼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김유신이 남긴 국가 경영 매뉴얼 김유신의 직계는 그의 4대손 長淸(장청:윤중의 손자)이 執事省(집사성)의
집사랑이란 미관 말직으로 전락한 사실을 끝으로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지고 만다. 집사성은 왕정의 기밀사무를 담당하는 왕의 직속 기관으로 집사중시를
우두머리로 하여 시랑 2인, 대사 2인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집사랑은 집사성의 下官(하관)이며 그 인원이 20명에 달했다.
김유신의 직계가 몰락한 배경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혜공왕 6년(770=경술년) 가을 8월 조를 보면 「대아찬 金隆(김융)이
반역을 하다가 伏誅(복주)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金隆이 곧 允中의 아들일 것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윤중의 아들(성명미상)이 김융의 반역에
연루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분명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다만 김유신의 묘와 미추왕의 능을 현장으로 하는
기괴한 회오리바람 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김유신의 후손들이 혜공왕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36대 혜공왕 14년(779) 어느 날 갑자기 유신공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그 바람 속에서 준마를 탄 장군이 출현하여 竹現陵(죽현릉: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에 호소하는 말소리가 능 밖으로 새어나왔다.
『신이 평생토록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功이 있었으며, 이제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鎭護(진호)하려는 마음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君臣들이 저의 功烈(공렬)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옮겨가 편히 쉬고자 하오니, 원컨대 대왕께서 윤허해 주소서』
그러자 미추왕이 대답하기를,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을 어찌하겠소. 공은 지난 날과 다름없이 힘써
주시오』라고 했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金敬信(김경신)을 金公의 능에 보내어 사과했다」
위의 기록은 설화인 만큼 文面(문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신라인들은 김유신이 죽어서도 나라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다는 얘기다. 또한 그 후손들이 죄없이 주살당한 데 대해 민심 이반의 사태가 일어났던 것 같다. 죽현릉이라면 신라 김씨
왕들이 그 서열을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묻힌 五陵(오릉) 위에다 놓아 大廟(대묘)라 일컫던 미추왕의 능이다. 미추왕은 신라 김씨 최초의
왕이었다. 김유신은 죽은 지 1백62년 만인 흥덕왕 10년(835)에 興武大王(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人臣(인신)으로서 대왕의 위에 오른 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경주시 황성공원의 獨山(독산)에
오르면 1977년 9월1일에 준공된 김유신 장군의 騎馬像과 만날 수 있다. 동상의 비명에는 「신라는 역사적 숙제였던 삼국통일의 대사업을 성취시켜
단일 민족으로서 북방 민족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거니와 이 거대한 사업들이 모두 다 장군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씌어
있다. 국가 경영에는 내셔널 매뉴얼(National Manual:국가 교범)이 필요하다. 일개 사기업체의
업무 매뉴얼일지라도 그것이 잘못 만들어지면 회사를 망치고 만다. 김유신은 일찍이 우리 민족에게 不敗全勝(불패전승)의 매뉴얼을 남겼다. 황성공원에
있는 김유신 騎馬像(기마상)의 칼끝은 건립 당시 대통령 朴正熙의 뜻에 따라 正北向(정북향)을 가리키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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