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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의 김대중 연구(31) ~ (31)

鶴山 徐 仁 2005. 12. 5. 21:41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31)
趙甲濟   
 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⑧-5;
 
 李哲 자필 진술서: 『金大中은 나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하자고 설득했다』
 黃長燁 미공개 보고서: 『金大中은 金正日과 깊이 결탁한 관계』
 韓哲鏞 소장 비망록: 『햇볕정책을 뒷받침한다고 북한군의 도발징후를 쉬쉬 하다가…』
 검찰은 金大中 정권下에서 벌어졌던 반역적 의혹 사건들을 조사하여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장
 
 
 『악당보다 먼저 총을 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을 둘러싼 韓소장과 당시 국방부 수뇌부 측의 엇갈린 주장을 살펴보면 이런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1. 군대 안에서 金大中의 햇볕정책에 불리한 정보를 축소 또는 왜곡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2. 북한 경비정의 도발을 예측할 수 있는 유력한 정보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예하 부대에 전달되지 못 함으로써 막을 수 있는 기습을 막지 못했다.
 
 3. 韓소장의 폭로에 의해 우리의 對北 감청 능력이 공개됨으로써 북한군이 정보누설을 막기 위한 대책을 세우도록 허용했다.
 
 4. 金大中 정권이 들어선 이후 번진 검찰·관료집단·언론 내부의 갈등이 드디어 군대 내부로까지 비화된 느낌이다. 이 정부가 표적수사·地緣 인사·부정부패로써 한국 사회의 곳곳을 분열시켜 국민국가의 통합성을 약화시킨 책임은 크다.
 
 당시 우리 해군은 金大中 대통령으로부터 「먼저 쏘아선 안 된다」는 지침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NLL 침범을 되풀이 하는 敵船에 대해서는 최소한 경고사격 정도로 대응했어야 하는데도 우리 고속정은 이 지침을 충실하게 수행한다고 경고방송을 하기 위하여 측면을 드러내 놓고 접근했다가 선제 사격을 허용했던 것이다. 이런 지침은 악당하고 결투하러 가는 보안관에게 『꼭 이겨야 한다. 그러나 악당보다 먼저 총을 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는 것과 같은 自害이다.
 
 金大中 대통령의 이런 지침과 햇볕 분위기에 물든 군대의 결정적 도발 정보 축소 평가가 겹쳐서 고속정 피격 침몰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책임은 金大中 정권의 이상한 행동이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들은 敵이 기습할 수 있는 통로를 내주고 事後에는 敵의 의도적 기습을 우발적인 것으로 변호해 주려고 했으며, 敵 괴수가 말단 부하를 내세워 유감을 표명하자 『이것은 사과이다』라고 해석하여 서해 도발에 따른 책임 추궁을 끝내버린 셈이 된다.
 
 이런 행동을 반역적 행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그것이 반역적 행동이라면 정권을 잡은 세력에 의한 것이란 점이다.
 
 국가원수에 의한 반란이 어떻게 저지되고 처벌되느냐 하는 예가 하나 있다.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에는 천년 공화국 베네치아의 정부청사가 있다. 이 어마어마한 건물 안에는 정원이 있고 여기서 2층으로 통하는 넓은 계단이 있다. 1355년 여기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가원수 마리노 파리엘은 금빛 나는 원수모를 벗기우고 백발의 머리를 잘렸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도부인 10인 위원회의 한 사람이 창 끝으로 이 머리를 찍어 이 건물의 발코니로 나가 청중들에게 『나라를 배신한 자에게 정의를 구현했다』고 소리쳤다고 전한다.
 
 원수 이외 11명의 공모자는 참수형보다 한 등급 낮은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파리엘 원수가 민중봉기를 선동하여 공화제를 뒤엎으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된 쿠데타 미수였다.
 
 비록 미수사건이라 해도 베네치아 공화국은 國憲과 國體를 뒤집어엎으려는 도전에 가차 없는 응징을 가했던 것이다. 이런 철저함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 천년 동안 政變 시도는 두 번밖에 없었고 이런 정치 안정이 베네치아의 번영을 뒷받침했다고 한다.
 
 국민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국가를 뒤엎는다든지 국가를 敵에게 내주려고 획책하는 행동이다. 흔히 大逆罪로 불리는 행동이다. 대한민국의 國憲을 문란케 한다는 의미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통국가라는 점을 金正日 정권에게 양보한다는 것도 포함된다. 主敵인 金正日 정권과 손잡고 대한민국과 북한 정권을 연방제로 묶으려는 기도도 우리 헌법상 逆謀에 해당한다. 주적의 침공로를 열어 주는 것은 敵前 반란이다. 全·盧 두 전직 대통령은 12·12, 5·17, 5·18 사건과 관련하여 내란 음모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헌법질서에 대한 반란을 주도했다고 해서였다. 대한민국의 안전·정통성·핵심 가치·국익을 反국가 단체인 金正日 정권에게 넘기는 것은 국가에 대한 반란으로서 全·盧 두 사람의 죄질보다 더 무겁다.
 
 
 검찰이 국가를 지킬 것인가
 
 친북좌익세력 명단 공개 추진본부(본부장/육해공군예비역대령연합회 회장 徐貞甲)는 지난 10월8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이런 주장을 내놓았다.
 
 <4억 달러 對北 지원설과 관련하여 우리 국민들은 다음과 같은 의심을 갖고 있다. 즉, 金大中 정권이 金正日에게 현대를 통하여 거액의 뇌물을 줌으로써 金正日과 현대그룹에 약점을 잡혀버렸고, 그 뒤 金正日이 하자는 대로 對北 퍼주기와 對北 굴욕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부실화된 현대아산의 금강산 사업, 현대건설, 현대하이닉스에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으로 지원을 계속하였다는 의혹이 그것이다. 金大中 정권이 민족반역자 金正日에게 뇌물을 줌으로써 약점을 잡혀버린 뒤, 이 악마적 인간의 인질이 되어 국가의 안보와 이익을 팔아넘겼을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대두된 지금, 현 상황이 국가변란 음모의 의혹을 헌법의 이름으로 규명하여 범법사실이 있다면 누구든지 단죄해야 할 비상사태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폭력이나 선동이 아닌 법의 힘으로써 음모의 실재 여부를 가려냄으로써 국민들의 의혹을 해명하고 국가를 지켜내야 할 것이다>
 
 폭력에 의한 반역기도는 국군이 진압한다. 모략에 의한 교묘한 반역기도를 진압해야 하는 임무는 검찰이 지고 있다. 金大中 정권下에서 제기된 반역 혐의, 또는 逆謀 의혹에 대해서 대한민국 검찰이 수사하여 진실을 규명하고 사법처리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대한민국의 생존과 관련된 중대한 과제이다. 반역을 허용하는 국가, 반역임을 알고도 덮어 주는 국가, 반역의 의심이 있음에도 검찰이 수사조차 하지 않는 국가는 內敵과 外敵의 도전으로부터 국민의 安寧(안녕)을 보장할 수 없다. 金大中 정권下의 반역 의혹을 가려낼 수 없는 대한민국은 이미 대한민국임을 포기했다고 볼 수 있다.●
 
 
 ※ 黃長燁의 미공개 보고서 全文
 
 『金大中은 미국과 운명을 같이하려는 우리 민족의 입장에 선 사람이 아니라 미국을 반대하고 자유민주 체제를 반대하는 金正日과 운명을 같이하려는 입장에 서 있지 않은가 의심을 자아내게 한다』
 
 DJ는 완전 붕괴에 직면한 金正日 정권을 되살리기 위하여 막대한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였으며 미국 측의 지원을 등에 업고 金正日과 그의 독재체제에 대한 최악의 국제적 인상을 바꾸기 위하여 비굴할 정도로 구걸외교를 벌였다. 그 결과 金正日과 깊이 결탁되었으며 金正日 정권을 소생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金正日을 더욱 오만하게 만들고 남북통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남한 인민들을 정신적으로 무장해제시키고 그들 속에서 反美감정을 조장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엄중한 죄과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도 자기가 한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시키고 평화를 가져온 것처럼 세상 사람들을 기만하여 마침내 그가 갈망하던 노벨평화상까지 타게 되었다. 그는 金正日과 같이 평화상을 타지 못 한 것이 아쉽다고 거리낌 없이 선언하였다.
 
 DJ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커다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가 미국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으며 미국에 많은 친지를 가지고 있는 親美 정치지도자라는 간판을 내걸고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등에 업고 다니는 미국의 위력의 간판만 떼어버린다면 그의 정치적 생명은 곧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에 미국을 방문하여 頂上회담에서 냉대를 받은 것은 그의 정치적 생명에 치명적 타격이 되었다. 그러나 성공에 자만하게 된 그는 자기의 잘못을 반성할 대신에 다시금 자기의 탁월한 술책에 의거하여 사태를 역전시켜보려고 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공화당 정부의 對北강경 정책을 반대하는 것은 한국의 국가적 이익에 맞을 뿐 아니라 미국의 이익에도 맞으며 세계 여론에 부합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납득시켜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는 특히 미국에 자기 심복들을 파견하여 미국의 야당계통 언론인들과 한 짝이 되어 부시 행정부의 對北정책을 비판하는 데 합세하게 하고 있다.
 
 DJ는 한·미·일 3국의 공조에 대하여 말로는 찬성한다고 하면서도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이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미국도 인정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사실상 金正日의 자주통일론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측근자들은 미국과의 동맹이 하나의 중요한 축이지만 다른 축도 무시할 수 없다면서 중국, 러시아 등과의 反美공동전선과 협조의 불가피성을 내비치고 있다. 그는 북한과의 물밑 접촉을 통하여 對美전략을 공동으로 조율하는 한편 중국, 러시아 등 국제적 反美 전선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DJ의 반미적 입장은 특히 국가 미사일 방어 체계 문제와 관련하여 뚜렷이 발로되고 있다.
 
 6·25 조선전쟁 때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적 지원을 떠나서는 한국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다. 미국 무력의 강화는 한국의 안전과 번영의 결정적 담보이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NMD(편집자 注-미국의 국가 미사일 방어망 건설 계획) 계획을 반대하는 것은 이 나라들이 미국과 군사적으로 경쟁할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런 나라들의 의견에 구애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미국의 NMD 계획이 실현되어 미국 무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되어야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라들이 감히 미국과 군비경쟁을 할 엄두를 내지 못 하게 될 것이며 세계의 평화와 한반도의 평화가 더욱 확고하게 될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NMD계획이 실현되어 미국의 전쟁억제력이 절대적인 것으로 되어야 군비경쟁도 없어지고 미국을 반대하는 새로운 냉전체계 발생의 위험성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J가 미국의 NMD계획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고 그것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그가 미국과 운명을 같이하려는 우리 민족의 입장에 선 사람이 아니라 미국을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金正日과 운명을 같이하려는 입장에 서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자아내게 한다.
 
 
 이번 개각의 목적은 정권 再창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DJ가 생명을 걸고 추진시키고 있는 對北 햇볕정책을 살펴보면 그가 적과 결탁하고 있다고 의심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가 정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것을 밝힐 방도가 없다. 그러나 만일 그의 정권이 끝나고 對北 햇볕정책을 계승할 민주당 정권이 서지 않고 정권이 야당에 넘어가는 경우에는 그의 음모와 기만술책이 백일하에 드러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부정부패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엄중한 정치적 범죄로 될 것이다. DJ는 바로 이것이 두려워 정권을 再창출하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정권을 再창출하기 위하여서는 對北 햇볕정책을 계속 강하게 추진하는 것과 야당을 파괴하고 약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두 가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親北성향이 강한 임동원을 중심으로 외교안보팀을 구성하였으며 박지원과 같이 DJ를 무조건 따르는 자기 심복들과 3당 연합을 실현하여 야당 파괴에 필요한 인물들을 선발 배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DJ에 대한 타격은 동시에 金正日에 대한 심대한 타격이 된다. 그러므로 북한 통치자들은 反美 악선전을 미친 듯이 벌이는 한편 사태를 수습하도록 DJ에게 강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DJ는 金正日의 이러한 성급한 반응은 오히려 부시 정권의 對北강경 정책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는 역효과를 돌려세우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는 데도 지장이 된다는 것을 자기 변명 겸 북측에 전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金正日 측은 약간 태도를 변경시켜 대화를 희망한다는 뜻을 시사하면서 부시 정권의 강경정책을 비판하는 민주당 계통의 여론에 부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金正日이 아무리 허장성세하며 발악하여도 현 상태에서는 절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제네바 협정을 파기하고 미사일 실험을 재개하겠다느니, 뭐니 하며 위협조로 나오지만 사실은 그렇게 되는 것이 자기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렇게 될까봐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 정부가 북한의 반응을 묵살하고 원칙적 입장을 확고부동하게 견지하게 되면 그들은 스스로 주저앉고 말 것이다. 오히려 金正日에게 많은 점에서 발목을 잡히고 있는 DJ가 안달나 부산을 피우게 될 것이다.
 
 앞으로 金正日은 중국과 미국의 대립에서 어부지리를 취해 보려고 교활하게 책동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부시 정권은 이전 정권과 같이 속이기 쉬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는 더욱 더 중국과 러시아 쪽에 붙어 살 길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金正日은 DJ와의 협조를 강화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고 남한의 親北세력을 고무하여 주기 위하여 서울답방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정세가 변한 조건에서 작년 평양에서 있은 남북 頂上회담 때와 같은 큰 성과를 거두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할 때는 서울답방을 무기한 유보하고 김영남을 보내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의 애국역량들은 金正日 답방을 저지시키는 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소극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金正日이 반드시 서울을 방문하여 6·25 전쟁 문제 등 많은 죄과에 대하여 솔직히 사죄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래야 그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金正日은 사죄하러 서울 방문한다는 여론이 무서워 답방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現 정부의 대북정책 기본 방향은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본다. 다만 평화와 인권을 옹호한다는 도덕적 기치를 좀더 높이 들고 확고부동한 강경정책을 일관성 있게 견지하여 줄 것을 우리는 희망하고 있을 뿐이다.
 
 
 2001년 3월29일
 
 <32편에 계속>
 
 
 
[ 2005-12-05, 17:44 ]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32)
趙甲濟   
 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⑨-1;
 일본인 납치범 신광수를 북송시킨 노벨 수상자의 인간관;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장
 
 
 ■ 人間觀의 대결
 
 安保라는 낱말만큼 아무런 感興을 일으키지 않는 것도 드물다. 누구를 安全하게 保護하겠다는 것인가. 국가인가, 대통령인가, 집권층인가.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한다면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는가. 安保는 중요하지만 사람들을 잠들게 하는 단어이다.
 
 安保의 핵심적 의미는 무엇인가. 안보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것이 아닌가. 국가가 유지되어야 사회와 가정이 온전하고 국민 개개인의 생명이 안전한 것이다. 인간은 한 번뿐인 인생과 하나뿐인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 가는 범위 안에서 후손을 생산하여 생명의 代를 잇고 생활을 통해서 예술과 문화를 만들어내고 또한 그 生을 즐긴다.
 
 安保의 바탕은 생명관·인간관이다. 기독교적 인간관을 가진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인간의 생명을 지구보다도 더 무겁게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유물론에 입각한 金正日 체제下의 人間觀은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인간을 물질로 본다. 그들은 또 계급투쟁설에 근거하여 계급의 의미를 절대화함으로써 계급의 이름으로 국가와 인간을 파괴한다. 국제적인 계급투쟁을 위해서는 조국을 반역하고, 계급해방을 위해서는 인간말살을 美化한다.
 
 인간이 미꾸라지의 정신을 무시하기 때문에 추어탕을 양심의 가책 없이 먹을 수 있듯이 金正日 세력은 계급의 원수들이 가진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함으로써 살육을 거리낌 없이 일삼는다.
 
 북한의 金正日 세력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이런 인간관에 기초하여 북한판 유대인 수용소를 만들어 수십만 명을 가두어 놓고 도륙하고 있으며 수백만 명을 사실상 굶겨 죽이면서도 호화의 극치를 달리는 생활을 즐기고 있다. 남한의 金正日(추종·굴종) 세력은 권력을 잡지 못했거나 잡아도 헌법의 제약으로 해서 그런 살육을 못 하는 대신에 기만, 선동, 위선, 사기술을 동원하고 있다. 이들이 金正日처럼 폭력수단을 쥐게 된다면 金正日과 같은 살육자가 될 것이다.
 
 金大中 정권下에서 남한의 金正日 추종·굴종 세력이 보여준 기만, 선동, 위선, 억지, 사기적 행태는 공산주의적 인간관의 한 표현이다. 다른 계급을 말살하고 특정계급의 인권만 존중하겠다는 것은 사기이다. 한 개인의 인권을 예사로 무시하는 인간이 외치는 계급적 正義나 민족의 평화라는 말은 위선일 뿐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金大中 대통령이 그 受賞의 해에 보여준 한 행태는 그가 말하는 평화와 민족과 통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가늠하게 해줄 것이다.
 
 
 ■ 金賢姬와 이은혜
 
 이은혜. 일본명은 다구치야에코(田口八重子)로서 대한항공 858편 폭파공범 金賢姬가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 일본어 선생이었다. 1989년 봄 기자는 서울 강남의 안기부 시설에서 金賢姬를 내리 5일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기자는 이 인터뷰를 중심으로 하여 金賢姬의 증언과 대한항공 폭파 과정을 그해 月刊朝鮮에 석 달간 연재했다.
 
 金賢姬는 나에게 이은혜와 관련된 이야기를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의 기억력이 상당히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 3월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金賢姬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사부 공작원으로 소환된다.
 
 그녀는 묘향산 골짜기 2지구 2호 초대소에 밀봉수용되어 교육을 받게 되었다. 金賢姬는 1981년 7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는 평양시 용성구역內 동북리 2층 3호 초대소에서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여기서 그녀는 이은혜라고 불리는 일본인 여자와 2년간 기거하면서 일본어 및 풍습 등을 익히는 일본인化 교육을 받았다. 金賢姬는 이은혜로부터 일본 노래도 배우고 일본식 손님대접법과 예절을 익힌다. 金賢姬는 자신이 교육을 받을 당시 이은혜가 25세 가량이었다고 말했다.
 
 1991년에 이은혜의 정체가 일본인 다구치야에코로 밝혀졌을 때 그녀가 1955년 8월생임이 확인됨으로써 金賢姬 기억의 정확성이 입증되었다.
 
 金賢姬가 2년간 함께 생활하면서 지켜본 이은혜는 이런 모습이었다.
 
 <키 165cm에 몸무게는 56kg 정도. 이은혜는 이혼녀인데 해변을 산책하다가 납치되어 끌려와서 공작원 교육기관에서 일본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음. 그녀는 술을 자주 마시고 술을 따르는 데 익숙하여 일본에서 그런 업소에 종사하지 않았나 추정. 밥은 공기를 들고 젓가락만을 사용하여 먹었다. 그녀는 『조선사람은 食後에 입가심을 한 물을 마신다』고 흉을 보기도 했다. 1982년 2월 어느 날 이은혜는 이런 푸념도 했다.
 
 『金正日 동지의 생일 만찬에 일본인 여자로서 특별히 초대되어 갔었다. 나처럼 납치돼 온 것 같은 일본인 부부를 만났는데 이 사실을 절대로 알려선 안 된다』
 
 이은혜는 술에 취하면 멍하니 앉아서 끌려온 신세타령을 하며 자식들이 보고 싶고 일본에 가고 싶다면서 울기를 잘 했다>
 
 
 ■ 다구치야에코와 하라타다아키의 죽음
 
 일본 경찰은 金賢姬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이은혜로 돌변한 피랍 일본 여성을 찾기 위해 몽타주를 만들어 전국에 돌렸다. 몇몇 유력한 실종자의 사진을 가져와 金賢姬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金賢姬가 『바로 이 여자이다』라고 찍어 준 사람이 다구치였다.
 
 도쿄 가까이에 있는 사이타마縣 출신인 다구치는 金賢姬의 추측대로 음식점에 종사한 적이 있는 여성이었다. 북한 측이 최근 일본 정부 조사단에 밝힌 바에 따르면 다구치는 후쿠오카 미야자키의 아오지마 해안에서 1978년 6월29일에 납치되었다고 한다.
 
 북한 측은 「본인이 공화국에 3일 정도 관광을 갔다 오고 싶다고 말하여 특수공작원이 신분을 위장하는 데 이용할 목적으로 그녀를 데리고 왔다」고 일본 측에 알렸다.
 
 다구치는 1978년 6월부터 1984년 10월까지 초대소(공작원 교육시설)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현실체험을 했다는 것이 북한 측의 설명이다. 金賢姬가 이은혜를 만났다는 장소와 시점이 일치한다.
 
 다구치는 납치될 때가 23세였다. 그녀는 6남매 중 막내딸이었고 납치될 때 도쿄 이케부쿠로 지역 음식점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이혼한 상태였다. 세 살배기 사내아이와 한 살짜리 딸을 두었다.
 
 이번에 金正日 정권이 訪北한 고이즈미 수상 측에게 다구치야에코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사실상 金賢姬의 존재와 대한항공 폭파를 自認한 셈이다.
 
 북한 정권은 다구치야에코가 이은혜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으나 이것이 거짓말임은 사태전개의 논리상 누구나 알 수 있다.
 
 북한 정권이 일본 측에 통보한 자료에 따르면 다구치는 1984년 10월에 다른 피랍 일본인 하라타다아키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 하라타다아키는 포항 출신 거물간첩 辛光洙가 납치했다. 납치장소도 다구치의 경우와 같은 규슈 미야자키 아오지마 海岸이고 음식점에서 근무한 경력도 같다.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하라타다아키는 1986년 7월19일에 肝硬變으로 죽었고 다구치는 7월30일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북한 측은 그녀가 남편의 사망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뒤 회복단계에 있던 중 황해도 麟山郡의 고갯길에서 타고 있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하여 사망했다는 것이다.
 
 북한 측은 승용차에 타고 있던 세 명이 죽고 트럭에 타고 있던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무덤은 麟山郡에 있었는데, 1995년 7월의 홍수로 上月里 댐이 무너지면서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북한 측이 죽었다고 발표한 여덟 명의 피랍 일본인 가운데 여섯 명의 유골이 1995년 홍수로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언론은 이런 북한 측의 발표를 믿지 않고 있다.
 
 북한 측은 다구치를 납치한 이유를 신분위장용이라 주장했으나 신분위장이 되려면 연고자나 직계가족이 없어야 하는데 다구치는 6남매 중 막내였고 이혼한 상태에서 두 자녀를 두고 있었다.
 
 무덤이 유실되어 유골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북측 주장에 대해서도 일본 언론과 對南 공작원 출신 탈북자 安明進씨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공작기관이 피랍 일본인에 대한 관리를 엄격하게 하는데 그런 식으로 죽도록 방치할 이유가 없다면서 살아 있든지 죽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 정부 측에서는 「다구치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곳은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곳인데 충돌사고라니?」라면서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金正日이 일본인 납치 책임을 물어 처형했다는 장봉림 장군은 李韓永 암살 실패로 숙청되었다」
 
 金正日 정권은 일본인 납치를 지휘한 책임자로서 장봉림(사형)과 김성철(15년형)을 처벌했다고 밝혔는데 이 주장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하라타다아키를 납치해 간 辛光洙는 안기부에 붙들렸을 때 『金正日의 직접 지시를 받아 납치했다』고 자백했다. 일본인 납치 같은 중대사를 결정하고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金正日뿐이란 것은 북한 상식에 속한다. 더구나 지난 9월 초 辛光洙는 판문점 북쪽 지역에 나타나 북한 귀환 2주년 행사에서 金正日에 아부하는 발언을 했었다.
 
 장봉림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정보가 있다. 지난해 초 月刊朝鮮 앞으로 北京에서 팩시밀리 다섯 장이 도착했다. 月刊朝鮮 禹鍾昌 기자는 「탈북한 북한 로열 패밀리의 최측근」이란 사람이 보낸 이 정보를 확인하여 2001년 2월호에 「李韓永(金正日의 처조카) 살해는 김정남(金正日의 장남) 지시를 받은 李昌善(사회문화부장)이 지휘했다」는 題下의 추적 기사를 썼다. 취재과정에서 이 팩시밀리 내용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提報임이 밝혀졌다.
 
 팩스엔 이런 대목이 있었다.
 
 <金正日의 처조카인 李韓永이 手記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을 펴냈을 때 김정남은 자기의 해외 채널을 이용하여 金正日보다 먼저 책을 입수하였다고 한다. 김정남은 그 후 인민무력부 문화연락실(북한군부內의 對南공작 부서) 장봉림 장군을 만나 李韓永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준다. 그 후 장봉림이 김정남의 명령을 집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김정남은 아버지 몰래 같은 지시를 중앙당 사회문화부 李昌善에게 주었으며, 그 결과 사회문화부에서 「새끼 장군님」의 명령을 집행한 것이다. 장봉림은, 김정남이 인민군 보위사령부 김장성 부사령관에게 지시하여 간첩혐의로 체포, 숙청해 버렸다는 說이 있다>
 <33편에 계속>
 
 
 
[ 2005-12-05, 17: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