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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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모네에 관하여...

鶴山 徐 仁 2005. 11. 20. 16:28
 
1. 소개
2. 연보
3. 모네의 인상주의 전시회
4. 모네에 관한글
 
   소개
끌로드 모네는 파리에서 탄생했으나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르 아브르에서 보냈다. 1858년 부댕을 만나 그로부터 그림을 그리라는 격려를 받았다. 그는 자기 입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자기 자신의 예술에 취해서 마음껏 독립을 누리고 있는 이 한 예술가의 모범을 보고 나는 회화가 어떤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나의 그림 그리는 운명은 그렇게 해서 열린 것이다." 
그러나 끌로드 모네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부댕 혼자만은 아니었다. 이 젊은 화가의 초기 작품들을 보면 꾸르베와 디아즈의 영향도 또한 나타나 있다.

1859년 모네는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간다. 거기서 그는 아카데미 쉬즈에 자주 드나들며 피사로와 만난다. 1862년 여름동안 끌로드 모네는 부댕과 함께 생타드레스에 가서 작업을 한다. 
거기서 용킨트와 관계를 맺는다. 그 해 11월 그는 파리로 다시 돌아가 글레르 화실에 자주 드나들며 바지유, 르느와르 및 시슬리와 사귄다. 1863년 그는 이 세 사람을 이끌고 퐁뗀블로 숲의 샤이이 앙 비에르에 가서 옥외의 밝은 빛 아래서 그림을 그린다. 
2년 후인 1865년 여름 그가 《풀밭 위의 점심 식사》라는 제목의 대작을 제작한 곳은 바로 거기다. 1866년에 모네는 또 하나의 대작 《정원의 여인들》에 달려들었다. 그는 이 작품을 1867년 살롱에 출품했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1869년 그는 르느와르와 함께 부지발에서 《라 그루니에르 수영장》을 그린다. 이는 인상주의의 최고 수준을 예고하는 작품으로서, 옥외의 밝은 빛이 화면 전체에 흘러 넘치고 있으며, 터치도 큼직하게 분할되어 있어서 물 위에 어른거리는 반사광선의 부단한 흔들림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1870년 모네는 런던으로 가서 피사로와 다시 만난다. 그들은 함께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특히 콘스터블과 터너의 작품들을 연구한다. 


1. 아르장뙤이유 기(1872-1878)

1871년 모네는 네덜란드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와서는 1872년 초부터 아르장뙤이유에 정착해서 1878년까지 거기 머물러, 우리들 생각으로는 그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것들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제작한다. 
이 시기를 소위 아르장뙤이유 기(1872-1878)라고 부르는데, 참신한 시각, 미묘한 분위기의 묘사, 강렬한 빛, 물 위에 어른거리는 햇빛과 반사광선의 사실적이면서도 시적인 묘사(모네는 배를 한 척 건조하게 해서 그 배를 타고 세느 강을 따라 빛의 효과를 연구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순수한 색채의 하모니라는 점에서 특징지어진다. 
이 점에 있어서 그 이후의 시기에도 이 경지에 이른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여기서 인상주의 기법은 가장 완벽하게 구사되고 있다. 
즉 터치는 점차 세분되어 나중에는 시각적 색채 혼합의 원리에 따라서 덧 포개어진 작은 쉼표 부호들과 비슷한 것으로 된다. 

이제 아르장뙤이유는 인상주의의 본거지가 된다. 르느와르, 까이유보뜨 및 일시적으로 옥외의 밝은 빛 아래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찬동한 에두아르 마네 등이 끌로드 모네 옆에서 제작하기 위해 여기로 모여든다. 
1877년 그의 첫 번째 연작이라 할 수 있는 <생 라자르 정거장>풍경들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모네가 이 테마에 이끌린 것은 바로 그 정거장에서 볼 수 있는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끊임없이 다시 새로 생겨나는, 가장 미묘한 뉘앙스로 물들여졌다가 이내 대기 속에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연무 때문이었다. 
훨씬 나중에 수련 연작들과 물과 그 신기루 속의 반사광들을 그린 거의 추상적인 작품들로 귀착되는 덧없는 양상들에 대한 탐구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2. 베떼이유 기(1878-1881)

1878년 초부터 끌로드 모네는 베떼이유에 정착해서 1881년 10월까지 거기서 거주한다. 파리와 파리 근교의 여러 풍경들을 그리고 난 후 이 예술가는 이때부터 시골 풍경에 대한 해설자가 되기를 원한다. 베떼이유의 야생적 자연은 그로 하여금 다시금 새로운 시각적 관찰을 하도록 자극한다. 물의 요소는 분명히 그가 즐겨 추구하는 것이었으며, 그 외에도 들판, 나무 마을 역시 그의 마음을 끌었다. 

그는 나란히 포갠 잘게 분할된 작은 터치로 풀밭을 물결치게 하고, 나뭇잎을 뒤흔들며, 물 표면에 주름을 일게 하는 바람의 감각을 전하려 했다. 1880년의 혹독한 겨울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연작을 제작하도록 자극했으니, <베떼이유의 세느 강의 해빙>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1893년 경까지 이 주제에 사로잡혔다. 그 자신의 '사실주의적 인상'으로써 자연이 제시하는 현실과 대결하는 이 예술가의 이와같은 정열적 탐구들을 살펴보면 그의 시각이 유례를 보기 힘들 만큼 날카롭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즉 그의 예민한 시각은 이 움직이는 미묘한 순간들을 즉각 포착하는 동시에 그의 붓은 이를 그 순간 그대로 화면 위에 정착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와같이 도저히 전달 불가능한 것을 전달하는 작업이 끌로드 모네의 주된 목표였으니, 그는 죽을 때까지 이에 집념을 가지고 달려들어 마지막에는 <수련>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든 것이 녹아서 혼동된 것처럼 보이고 거의 추상적인 듯한 세계에로 귀착했던 것이다. 


3.지베르니 기(1883-1926)
1883년 초 끌로드 모네는 에트르타에 갔다가 그해 3월 뒤랑 뤼엘 화랑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4월 그는 1881년 10월부터 머물렀던 쁘와씨를 떠나 뢰르의 엡뜨 강변의 지베르니에 정착해서 죽을 때까지 거기에 거주한다.
같은 해인 1883년 12월에는 르느와르와 함께 지중해 연안으로 여행하는 도중 레스따끄에 들러 세잔느를 방문하고 이듬해 모네는 혼자서 다시 지중해 연안을 여행한다. 이 시절의 그의 작품은 때때로 아주 격렬한 색채로 그려져 있다.
한편 이제까지 그토록 야유와 경멸만 받아오던 그도 점차 이해받기 시작하고 높이 평가되기 시작한다. 1889년 6월 그는 친구 로댕과 함께 조르쥬 쁘띠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짐으로써 크게 성공을 거둔다. 돈도 벌게 되어 1890년 그는 지베르니에 집을 사서 이를 가꿀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된다. 1890년과 1891년 그는 동시에 두 가지 연작을 시도하는데 그 하나는 <짚더미>의 연작이고 다른 하나는 <엡뜨 강변의 포플러 나무들>의 연작이다.
끌로드 모네는 그가 이제 인상주의의 가능성의 극한에까지 와 있음을 완벽하게 알려주고, 그 유례를 보기 드물게 날카로운 시각을 쇄신하고 더 발전시킬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한다. 그래서 그는 동일한 타입의 주제-즉 <짚더미>를 택한다. 그러나 이 주제란 단지 보다 진정한 주제인 '빛'에 의해서 그 존재 이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빛이 그 주제를 형성하고 그 강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로 채색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모네는 모든 형태란 임의작이며,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이며, 형태의 정확성이란 것도 시간에 따라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연역한다.
채색 역시 여러 가지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며, 확고부동한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빛과 그 반사광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방법적'이고 거의 과학적으로 끊임없는 빛의 변화를 관찰하려는 시도 속에서 끌로드 모네는 필연적으로 그의 예술을 체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그가 순수하게 인상주의자였던 시기(1870년부터 1881년경까지)에 지녔던 자연스러움이나 지나치다 할 정도로 날카로운 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연 발생적이고 참신한 기분으로 묘사했던 초기 시절의 인상들에 대해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1892년부터는 그 정의상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건축에 대결하려는 보다 대담한 시도를 하기에 이른다. 겉보기에 단단해 보이는 건축의 형태는 빛의 용해작용으로 해체된 후, 크고 작은, 분할되고 나란히 포개어지고 응어리진, 재료 그 자체를 암시하는 터치와 반점으로 뒤범벅 된 일종의 암장과 같은 매개체에 의해 다시 조립된다. 그는 그의 연작 중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인 <성당>의 연작을 시도하여 시시각각의 루앙 성당의 정면의 모습을 따라 약 마흔 점 정도의 작품을 제작한다.
1892년과 1893년 겨울, 모네는 성당을 마주보는 한 건물의 창 앞에 자리잡은 후 실물을 직접 대하고 작업했다. 그리고 지베르니로 돌아가 기억에 비추어서 그 연작에 다시 손을 댔다. 1895년 5월 10일부터 31일까지 그는 뒤랑 뤼엘 화랑에서 스무 점의 <성당>을 포함한 쉰여 점을 또다시 전시한다.
노쇠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명석하게 판단하고 있는 이 화가는 1926년 12월 26일 지베르니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조금 전 6월 21일에 샤르뜨리에게 한 편지에서 그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나를 분명하게 지적하려고 한다. "나는 언제나 이론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네..... 내가 세운 공적이라고는 가장 순간적인 상태들에 대한 내 인상을 전달하려고 탐구하며 자연을 직접 대하고 그렸다는 것뿐일세. 그리고 나는 내가 대부분이 '전혀' 인상주의자들이 아닌 한 그룹에 부여된 명칭에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슬퍼하고 있네."

 
 연보 
1840년 11.14 파리 라피트 가에서 태어나다. 아버지는 식료품상.
1845년 (5세) 르 아브르로 이사. 바닷가에서 노는 행복한 어린 시절.
1855년 (15세) 풍자화가로 유명해져서 그림 1매에 10프랑에 팔리다.
1858년 (18세) 모네의 재능을 간파할 부댕을 만난 것을 계기로 참다운 화가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옥외에서 그린다는 결정적인 선택으로 이끌렸다.
1862년 (22세) 병으로 제대, 르 아브르에 돌아오다. 여름, 부댕과 함께 생타드레스에서 그리다. 용킨트를 만나다. 11월 파리에 돌아와 글레르의 아뜰리에에서 르느와르, 시슬리, 바질레 등을 만나다.
1863년 (23세) 봄, 바지유와 함께 퐁텐블로우의 숲에서 옥외 제작을 하다. 12월, 글레르의 아뜰리에 폐쇄되다.
1864년 (24세) 봄, 샤이이에서 그리다. 파리에서 꾸르베를 만나다. 여름과 가을, 바질레와 함께 옹플뢰에르에 체재. 아버지와 불화, 송금이 정지되다.
1865년 (25세) 파리에 있는 바지유의 아뜰리에에서 동거. 살롱에 풍경화 2점 출품. 여름 샤이 이에서 제작. 가을, 트루빌에서 드비니 등과 같이 지내다.
1866년 (26세) <까미유,녹색 의상>을 살롱에 출품. E.졸라의 예찬을 받다. 빌 다블레에서 <정원의 여인들>제작에 착수.
1867년 (27세) <정원의 여인들>살롱에 낙선. 무일푼의 신세가 되자 여름, 생타드레스에 사는 숙모 루카돌 부인 댁에 머무르다. 8월, 까미유가 파리에서 맏아들 장을 낳다.
1868년 (28세) 채권자들을 피하여 페캉, 에트르타 지방을 전전하다. 가난에 시달려 자살을 생각했으나 고디벨의 도움으로 다시 분발하다.
1869년 (29세) 6월, 생 미셸에서 안정을 얻어 르느와르와 함께 제작.
1870년 (30세) 까미유 동시에와 정식으로 결혼, 뜨루빌에서 여름을 보내다. 가을, 전쟁을 피하여 런던에 가서 드비니를 재회, 그의 소개로 폴 뒤랑 뤼엘을 만나다.
1872년 (32세) 르 아브르에서 <인상, 해돋이>를 제작. 여름, 네덜란드에 가다.
1874년 (34세) 제 1회 인상파전에 <인상, 해돋이>외 12점을 출품. 마네, 르느와르와 함께 아르장뙤이유에서 제작. 마네의 경제적 원조를 받다.
1875년 (35세) 오텔 도르오에서 작품을 경매. 경제적으로 곤궁에 빠지고 아내가 병석에 눕다.
1876년 (36세) 인상파에 대한 훌륭한 이해자인 쇼케를 만나다. 제 2회 인상파전에 18점 출품. 실업가이며 수집가인 오쉬데를 알게 되다.
1877년 (37세) 제 3회전에 30점 출품. 여름, 몽쥐롱에 있는 오쉬데의 집에 머무르다.
1878년 (38세) 3월, 둘째 아들 미셸 출생. 베뙤이유로 이사. 오쉬데의 파산으로 그의 가족(부인 알리스와 6남매)을 맡아 보호하다.
1879년 (39세) 제 4회 인상파전에 29점 출품. 9월, 아내 까미유 사망.
1880년 (40세) 드가와 의견이 맞지 않아 제 5회 인상파전에 불참. 6월, <현대 생활>지 오피스에서 개전.
1882년 (42세) 디에프와 그 근교에서 제작. 제 7회 인상파전에 35점 출품.
1886년 (46세) 4월, 네덜란드를 여행. 제 8회 인상파전에 불참. 국제전과 레 방 전에 출품. 9월, 벨 섬에 체재, 제프르와를 만나다.
1888년 (48세) 겨울 앙티브, 여름 런던, 가을 에트르타에서 체재. 말라르메가 모네의 그림 예찬.
1889년 (49세) 6월, 쁘띠 화랑에서 모네, 로뎅 2인전.
1890년 (50세) <포플라><짚가리> 연작에 착수.
1891년 (51세) 5월, 뒤랑 뤼엘 화랑에서 개인전. 12월 런던에 여행.
1892년 (52세) 2~4월, 르왕에서 <대성당>을 그리다. 여름, 알리스와 재혼.
1893년 (53세) 2, 3월, 르왕. 지베르니에서 <대성당>제작에 몰두.
1894년 (54세) 까이유보뜨의 죽음을 슬퍼하다. 11월, 세잔이 지베르니에 와서 모네를 방문, 세잔을 클레망소, 제프르와에게 소개하다.
1895년 (55세) 7월, 노르웨이에 여행. 5월, 개인전. 6월, 피레네에서 요양.
1896년 (56세) 2, 3월, 발랑쥐빌 및 트루빌에서 <절벽>을 그리다.
1898년 (58세) 6월, 쁘띠 화랑에서 개인전, 61점을 전시.
1899년 (59세) <수련> 연작 시작.
1900년 (60세) 런던에서 제작. 뒤랑 뤼엘 화랑에서 개인전.
1902년 (62세) 2, 3월, 부르타뉴에 머무르다.
1904년 (64세) 5월, 뒤랑 뤼엘 화랑에서 <템즈강 풍경> 37점으로 개인전. 여름, 지베르니에서 수련을 그리다. 10월, 부인과 함께 마드리드를 여행, 프라도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관람.
1906년 (66세) 전년부터 계속해서 수련을 그리다.
1908년 (68세) 시력을 상하여 9~12월, 베네치아에 머물러 회복되다.
1909년 (69세) 5월, 뒤랑 뤼엘 화랑에서 <수련> 42점을 전시, 성공하다.
1911년 (71세) 5월, 부인 알리스 사망. 시력의 쇠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수련을 그리다.
1912년 (72세) 베르넴 죈 화랑에서 <베네치아 풍경> 연작을 전시.
1914년 (74세) 2월, 맏아들 장 사망, 이후 아들의 미망인 블랑쉬 오쉬데가 모네의 시중을 들다.
1916년 (76세) 클레망소의 위촉을 받아 오랑즈리에 전시될 <수련>의 대 패널 연작에 착수하다 .
1921년 (81세) 1월, 뒤랑 뤼엘 화랑에서 회고전. <수련>을 국가에 기증.
1922년 (82세) 두 눈의 백내장으로 시달리면서 그림을 계속했으나, 9월 의사에 의해서 제작을 금지 당하다.
1923년 (83세) 수술을 받고 다시 시력이 회복되자 <수련>의 대 패널에 가필하다.
1926년 (86세) 12월 6일, 지베르니에서 사망.

 
 모네의 인상주의 전시회
제 1회 전시회(1874년) 
몇몇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이 살롱에서 계속 낙선하자 1874년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등의 예술가들의 익명적인 협동단체를 구성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도누 가 모퉁이에 있는 카퓌신 대로 35번지, 사진사 나다르의 아뜰리에에서 작품 전시회를 조직했다. 이 발표회에는 서른 명의 예술가들이 참가하여 일백예순다섯 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비평가들은 이 전시회를 지독하게 빈정거리면서 맞이했다. 단지 필립 뷔르띠만이 이 전시회에 출품한 작가들을 옹호하는 두 편의 글을 썼을 뿐이다. 재정적으로도 실패하여 그들 중 몇몇은 1875년 3월 24일 '로뗄 드로우'(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품 경매장-역주)에서 그들 작품을 공매해야 했다. 그러나 이득은 별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스캔들만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제 2회 전시회(1876년) 
그들은 다시 한번 기회를 잡으려고 1876년 4월 르 쁠르띠에 가 11번지 뒤랑 뤼엘 화랑에서 두 번째 전시회를 조직했다. 단지 스무 명의 화가들이 일련번호도 매기지 않고 이백쉰 점의 유화, 파스텔화, 수채화, 데생 및 동판화들을 출품했다. 이 두 번째 전시회 역시 먼저와 마찬가지로 몰이해와 심한 야유만을 샀을 뿐이다. 
그 사정이 어떠했는가는 알베르 볼프가 그해 3월 3일 <르 피가로>지에 기고한 글에서 간단하게 알 수 있다. 

"르 쁠르띠에 가에 재앙이 닥쳐 왔다. 오페라 좌에서 화재가 난 뒤 이 거리에 또 새로운 일대 참사가 벌어졌으니, 뒤랑 뤼엘 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소위 회화 전시회가 바로 그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지나가던 행인이 그 건물을 장식한 깃발들을 보고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참혹한 광경이 그의 놀란 눈앞에 전개된다. 야심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힌, 여자까지 하나 낀 대여섯 명의 미치광이 집단이 그들 작품을 전시한답시고 모였다. 이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자칭 예술가라는 것들이 스스로를 강경파니 인상주의자니 하고 떠들어댄다. 그들은 화폭 위에 물감과 붓을 들고 아무 색깔이나 되는대로 마구 처바르고는 거기에 자기 이름을 사인한다. ...." 

그러나 몇몇 옹호자도 없지 않았다. 아르망 실베트르와 까스따냐리는 1876년의 <살롱 평>에서 관전에 이 젊은 화가들의 그룹이 빠진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의 작품은 자연을 직면하고 오로지 눈에 들어오는 대로 정직하게 묘사하려는 생각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사람들은 소위 그들이 말하는 멋부린 그림들, 말하자면 모델의 도움을 빌지 않고 아뜰리에에서 제멋대로 구상해서 그려진 그림들을 찾는다. 하지만, 인상주의자들은 분명히 새로운 예술 운동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
이 화가들에게 있어서 옥외의 밝은 빛이란 일종의 환희요, 밝은 색조를 추구하고 시꺼먼 역청색을 멀리하는 것은 일종의 확고한 신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미술의 발전에 있어서 그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그 중요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들 작품이 살롱에 전시되었어야 했다. ....." 


제 3회 전시회(1877년) 
1877년 4월, 인상주의자들은 세 번째 전시회를 갖는다. 이번에는 뒤랑 뤼엘 화랑이 그들을 받아 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로 그 옆 르 쁠르띠에 가 6번지에서 작품들을 전시했다. 열여덟 명의 참가자가 이 전시회에 이백서른 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발표도 역시 관중과 대부분의 비평가들로부터 냉대받았고, 5월 28일에 열린 작품 공매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베르뜨 모리조와 끌로드 모네는 작품을 공매에 붙이지 않았다. 

새로이 고갱과 매리 카새트가 이 그룹에 참가했고, 이들은 이제 게르브와 까페에서가 아니라 삐갈 광장에 있는 라 누벨 아뗀느 까페에서 계속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졋다. 1878년 봄, <인상주의 화가들>이라는 제목의 이 새로운 회화를 찬양하는 진짜로 분석적인 첫 번째 연구 서적이 등장했다. 
저자인 테오도르 뒤레는 이 책에서 프랑스 미술 발전에 있어서 그들 예술의 의의를 분명히 밝히고 그 중 그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다섯 화가, 끌로드 모네, 시슬리, 피사로, 르느와르 그리고 베르뜨 모리조에 대해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설명했다. 


제 4회 전시회(1879년) 
거듭된 실패에도 낙심하지 않고 1879년 4월 10일부터 5월 11일까지 오빼라 로 28번지에서 이들은 네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그들은 이 전시회에서 그들 자신을 더 이상 '인상주의자'라고 부르지 않고 '앙데팡당(독립 예술가)'이라 불렀다. 

같은 해인 1879년 여배우 <잔느 사마리의 초상>과 <샤르팡티에 부인과 그녀의 아이들>을 출품해서 어느 정도 성공한 르느와르의 본을 따서, 끌로드 모네는 드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1880년 살롱에 출품하기로 결심한다. 두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입선된다. 이때부터 인상주의자 그룹은 와해되기 시작하고, 그 이후로는 인상주의자 전시회도 그전과 같은 중요성을 지니지 않게 된다. 


제 5회 전시회(1880년) 
1880년 4월 1일부터 30일까지, 피라미드 가 10번지에서 열 여덟 명의 예술가가 다시 그들 작품을 모아 전시한다. 세잔느, 끌로드 모네, 르느와르 및 시슬리는 떨어져 나갔다. 끌로드 모네는 바로 그 해 6월 <현대 생활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했다. 

이렇게 인상주의자 그룹이 와해되는 것과 동시에 1880년은 인상주의 회화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전기를 맞이한다. 이제까지는 순수하게 본능적이었던 이 운동은 보다 체계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화가들은 이제 인상을 있는 그대로 소박하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인상주의를 실행하려 한다." 즉 순수한 인상보다는 기법이나 이론에 보다 크게 비중을 둔다. 

제 6회 전시회(1881년) 
몇몇은 파리를 떠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이 그룹에 충실한 드가와 피사로는 1881년 4월 2일부터 5월 1일까지 나다르의 아뜰리에의 부속 건물, 카퓌신 대로 35번지에서 또다시 여섯 번째 전시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한다. 이번에도 그 이전의 전시홀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경향이 병존한다. 
그러나 이 두 경향은 서로를 강조해 준다. 그 하나는 끌로드 모네가 빠졌기 때문에 그 대신 피사로가 우두머리가 되어 이끄는 인상주의 경향이요, 다른 하나는 드가가 이끄는 보다 전통주의적인 경향이다. 그 전해와 마찬가지로 세잔느, 끌로드 모네, 르느와르 및 시슬리는 여기에 참가하기를 거절하고 살롱에 출품한다. 

제 7회 전시회(1882년) 
1882년에는 세잔느와 드가 및 인상주의 경향에 속하지 않는 몇몇 예술가를 제외하고는 출발 당시의 그룹 거의 전부가 다시 모였다.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비평가 측으로부터나 금전적인 면에 있어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1883년에는 단체전은 없었으나 마들렌느 가 9번지 뒤랑 뤼엘 화랑에서 1월부터 6월까지 부댕, 모네, 르느와르, 피사로 및 시슬리의 개인전이 잇달아 열렸다. 
1885년 모네는 세즈 가 8번지 조르쥬 쁘띠 화랑에서 열린 제 4회 <국제 회화전>에 참가했다. 

제 8회 전시회(1886년) 
1886년은 라피뜨 가 1번지에서 인상주의 그룹의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에도 여러 다양한 경향이 두루 공존하고 있다. 기요맹과 베르뜨 모리조의 인상주의, 쇠라와 시냑 및 일시적으로 이 새로운 유파에 가담한 까미유 피사로의 신인상주의, 고갱과 오딜롱 르동에게서 탄생하고자 하는 상징주의 등등 여러 가지가 나타났으므로 관중과 비평가들은 당연히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회는 성공을 거두었다. 끌로드 모네, 피사로 및 르느와르는 옥타브 모스가 이 해 브뤼셀에 설립한 제 1회 <20인회>전시회에 초대를 받았고, 1887년 조르쥬 쁘띠에서 열린 제 6회 <국제전>의 위원이 된 끌로드 모네는 그 전시회에 베르뜨 모리조, 피사로, 라파엘리, 르느와르, 로댕, 시슬리, 및 휘슬러를 참가시켰다. 
그러나 관료들은 여전히 인상주의를 적대시했다. 특히 그들은 1890년 에두아르 마네가 신청한 <올랭피아>를 루브르에 전시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으며, 이 작품을 뤽상부르 미술관에 전시했다. 1894년에는 까이유보트의 유증 문제로 스캔들이 벌어졌다.
까이유보트는 죽을 때 그의 동료들 작품 예순 일곱 점과 밀레의 수채화 두 점의 개인 소장품을 뤽상부르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런데 담당 행정관은 '미술 아카데미'의 몇몇 회원들의 반대에 부딪쳐서 이 유증품 중 일부, 즉 예순 아홉 점 중 마흔 점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모네에 관한 글
모네와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의 편지는 모네의 그림을 자주 언급한다. 그는 동생 테오가 보낸 카탈로그를 받고 모네-로댕 공동전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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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볼 게 많습니다. ....... 앤트워프에 있을 때는 인상파가 뭔지 몰랐습니다. 이제 그들의 그림을 보니 나 자신 비록 그 그룹의 일원은 아니지만 몇몇 그림들에 찬탄을 금할 수 없군요. ...... 특히 끌로드 모네의 풍경화가 그렇습니다.
- 1886년 여름 혹은 가을, 
   파리에서 반 고흐가 H.M.르방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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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동생이 끌로드 모네전을 열고 있습니다. 나도 그 전시회를 얼마나 보고 싶은지 모릅니다. 모파상까지 그곳에 갔답니다.
- 1888년 6월
  아를에서 반 고흐가 에밀 베르나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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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뒤랑 뤼엘처럼 뭔가 하게 될 거야. 그는 남보다 앞서 끌로드 모네의 개성을 알아보고 그의 그림들을 구입했지.
- 1888년 9월 10일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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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끌로드 모네가 풍경화를 그리듯 내가 인물화를 그릴 수만 있다면!
- 1889년 5월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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