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族史의 제1인물」
金庾信과 그의 시대 ⑤ (월간조선 1999년10월호) 세계제국 唐과 決戰, 民族의 보금자리를 세운 「民族史의
제1 人物」 재조명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st-jung@chosun.com)
「물과 고기」처럼 성공한 君臣관계 661년 6월 태종무열왕이 59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그의 맏아들 金法敏(김법민:문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조선조의 경우 임금의 평균 수명이 44세였던 점과 비교해 보면 결코 단명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유별나게 강건했던 무열왕이 재위 8년 만에 급사한 것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推動(추동)하는 데 일신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소진했던 탓이라고
해도 좋다. 이때 문무왕의 나이가 36세였고, 김유신은 67세였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선왕의
重臣(중신)은 후계왕으로부터 경원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러나 문무왕과 김유신은 우리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君臣(군신) 관계를 이루었다. 둘의 관계에 대해 문무왕은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물고기에 물이 있음과 같소』라고 했고, 김유신은
『왕께서 의심 없이 등용하여 의심 없이 임무를 맡겼기에 어리석은 소신이지만, 약간의 공을 이뤘습니다』고 화답했다. 바로 673년 6월 임종
직전의 김유신과 병문안을 하러 간 문무왕이 나눴던 대화 중 일부다. 태종무열왕이 병사한 뒤에 만약
김유신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면 가야 金(김)씨의 새로운 왕조가 성립되지 않았겠느냐. 이런 의문을 가진 호사가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김유신은 제2인자의 한계를 엄격히 지켰던 名臣(명신)이었고, 문무왕은 帝王學(제왕학)에 밝은 군주였다.
문무왕 김법민은 과보호되게 마련인 왕자로 태어나 구중궁궐에서 고이 길러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25세 때 이미 請兵(청병) 외교의 최일선에
나서 唐 高宗(당 고종)을 만났고, 아버지(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태자가 된 후에도 野戰(야전)에서 말을 달린 野性의 남자였다. 그의 시호가
문무왕이었다는 것은 그가 文武 兼全(문무겸전)의 임금이라는 얘기다. 만약 무열왕의 사후에 김법민이라는 결단의 군주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당시
한반도는 당의 식민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흔히 君臣水魚之交(군신수어지교)라 하면 蜀漢(촉한)의
창업 군주 劉備(유비)와 그의 명신 諸葛亮(제갈량)을 연상한다. 유비의 사후에 제갈량이 後主(후주) 劉禪(유선)에게 올린 出師表(출사표)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名文(명문)으로 손꼽히고 있지만, 유선과 제갈량은 실패한 군신 관계가 되고 말았다. 제갈량은 魏(위) 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長安(장안:지금의 西安) 서쪽 渭水(위수) 방면으로 7년 동안에 무려 다섯 번이나 出師(출사)했지만, 寸土(촌토)도 얻지 못했다. 반면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원훈이 되었다. 문무왕과 김유신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군신 관계였다. 김법민이 왕위에
오른 661년 7월 신라는 위기와 기회의 갈림길에 처해 있었다. 신라까지 먹으려는 당의 속셈이 이미 드러났고, 백제 부흥군의 저항 그리고
고구려와 왜국의 동향도 심상치 않았다. 이해 9월 왜국에 체류하던 의자왕의 아들 夫餘豊(부여풍)이
福信(복신) 등의 요청에 의해 귀국하여 백제 부흥군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때 왜왕 天智(천지)는 장군
사이노 무라지(狹井連)와 에치노 다쿠츠(朴市田內津)에게 병력 5천을 주어 부여풍을 호위하도록 했다. 이어 화살 10만 개, 실 5백 근, 피륙
1천 端(단), 가죽 1천 장, 벼 3천 섬 등의 물자를 지원했다. 부여풍은 周留城(주류성)을 백제
부흥군의 지휘 본부로 삼고, 福信과 왜장들로서 항전 태세를 굳혔다. 백제 유민들은 부여풍을 왕으로 받들었고, 부흥군은 한때 2백 성을 회복할
만큼 맹위를 떨쳤다. 이것은 당의 웅진도독부가 웅진·부여 일원만 장악하고, 나머지 백제의 故土(고토) 모두를 부흥군이 탈환했다는 얘기다.
백제 부흥군의 본거지 주류성의 위치는 연구자들에 따라 구구각색이다. 일본인 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주류성을 충남 서천군 한산면으로 比定(비정)한 이래, 이것이 학계의 통설이 되어 우리 국정 교과서에도 그렇게 실렸다.
그러나 한산 說(설)은 관련 史書(사서)의 지형 설명 등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후 전북 부안 說 등이 대두되어 오다가 수년 전에 83세의 향토사학가 朴性興(박성흥)옹이 충남 홍성 說을 발표했다. 홍성군 장곡면의
石城(석성)과 鶴城(학성) 일대를 답사해 보면 「日本書紀」에 기록된 주류성의 위치나 모습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1백30여년 전의 지도지리학자
金正浩(김정호)도 그의 「大東地志」(대동지지) 홍주목 條(조)에서 「홍주는 본래 백제의 주류성이다」(洪州牧本百濟周留城)라고 명기했는데, 홍성
說이 나오기 전까지 국내외 학자들은 「大東地志」의 이 기록을 주목하지 못했다. 홍주목이라면 바로 오늘날의 洪城(홍성)이다.
『죽더라도 국가 대사는 사양할 수 없다』 백제
부흥군의 勢(세)가 흥기하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唐 고종은 고구려 공략전에 신라의 참전을 요구했다. 661년 6월 蘇烈(소열)은 수륙 35軍을
거느리고 평양성으로 진발했다. 8월 문무왕은 상중인데도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친정의 길에 올랐다. 이때 백제 부흥군이 甕山城(옹산성; 大田市
대덕)에 웅거해 있으면서 앞길을 차단했다. 김유신이 옹산성을 포위하고 軍使(군사)를 성 아래로 가까이 보내 적장을 회유했다.
『백제는 공손치 않았기 때문에 토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내 명령에 따르는 자는 상을 받을 것이며,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제 너희들이 홀로 고립된 성을 지켜서 무엇을 하겠는가? 결국 비참하게 궤멸될 것이니 나와서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면 목숨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부귀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 부흥군의 장수가
맞받았다. 『비록 하찮은 작은 성이지만, 병기와 식량이 충족하며, 병사들이 의롭고 용감하니 차라리 싸워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하지는 않겠다』 백제 부흥군은 이렇게 비장했다. 김유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쫓기던 새나 짐승도 궁지에 몰리면 되레 달려든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라고 했다. 김유신은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리게 하여
싸움을 돋우었다. 음력 9월27일 성이 함락되자, 김유신은 적장만 붙잡아 참수하고, 백성들은 모두 놓아 주었다.
신라군은 옹산성의 백제 부흥군을 격파했으나 당군과 합류하기 위한 북진에는 차질을 빚고 있었다. 여기서 신라 수뇌부는 일단
평양성 전투의 전황을 살폈다. 蘇烈(소열)의 당군은 貝江(패강:대동강)에서 평양 서남쪽 馬邑山(마읍산)을 점거한 뒤 한 달 넘도록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평양성은 견고했다. 兵站線(병참선)이 막힌 데다 겨울의 한파가 다가오고 있었던 만큼 蘇烈은
매우 불안했다. 신라의 입장에서도 겨울 작전을 각오하고 動兵(동병)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때 蘇烈의 급보가 문무왕에게 당도했다.
『내가 황제의 명을 받아 만리 밖에서 창해를 건너 적을 토벌하러 와서 해안에 배를 댄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대왕의 군사가 오지 않고 군량도 떨어져 심히 위태로우니, 왕께서는 대책을 세워 주소서』
문무왕이 군신들을 모아 놓고 당군에 대한 군량 지원의 방책을 물었다. 신하들이 난색을 표명한다.
『賊地(적지) 깊이 군량을 나른다는 것은 지금 형세로 보아 불가합니다』 문무왕이 계책을 정하지 못하고
한탄만 거듭하자, 김유신이 나아가 말한다. 『臣(신)이 과분한 은총을 받아 외람스럽게 중책을 맡고
있사온데, 국가 대사에 당하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늙은 몸이 충성을 다할 때이오니, 신이 적국으로 들어가 蘇
장군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문무왕이 앞으로 나와 김유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
『公 같은 어진 신하를 얻었으니 걱정할 일이 무엇이겠소』 왕명을
받은 김유신은 목욕재계하고 사찰의 靈室(영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홀로 향을 피우고 앉아 며칠 밤을 지낸 뒤에 나와서, 그 스스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번 행군에서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유신이 길을 떠날 때 문무왕은 친서를 주어, 『국경을 넘어서서는 상벌을 마음대로
행하여도 좋다』라고 했다. 便宜從事(편의종사)의 권한을 부여했던 것이다. 12월10일, 김유신은
仁問(인문), 良圖(양도) 등 9將(장)을 부장으로 삼아 치중부대와 호위부대를 이끌고 고구려 경내로 들어갔다. 이때 평양성을 공략중이던 당군에게
운송했던 곡식은 쌀 4천 섬(石)과 벼 2만2천 섬이었다. 무게로 환산하면 대략 3천t에 달한다. 수송에 동원된 수레가 2천 대였다니까 수레
하나 당 1.5t을 적재했던 셈이다. 병사 1인에 대한 하루 곡물 보급량은 최소 5백g이다. 20만
병력이라면 하루 곡물 소요량이 1백t에 달한다. 그러니까 김유신은 20만 병력의 1개월치 군량을 수송했던 것이다. 牛馬車(우마차)를 사용했던
당시의 수송 능력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량이었다. 68세 老將의 솔선수범
해가 바뀌어 문무왕 2년(662) 1월23일 김유신 軍은 七重河(칠중하=임진강)에
이르렀다. 이때 한 달 이상 계속 내리던 궂은 비가 눈보라로 변하면서 기온이 급강하했기 때문에 동상자가 속출했다. 장졸들 모두가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강을 건너려는 사람이 없었다. 김유신은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왜 여기까지 왔는가?』라며
먼저 배에 올라 강을 건넜다. 모든 장졸들이 뒤따라 고구려의 지경으로 들어갔다. 신라군은 고구려군의
요격을 피해 평탄한 대로를 버리고 험한 소로를 따라 행군했다. 임진강과 개성 사이에 있는 蒜壤(산양)에 이르러 김유신 軍은 고구려의
一枝軍(일지군)과 조우하여 패퇴시켰다. 그는 다시 장졸들을 격려했다.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우리
강토를 침노하여 우리 백성들을 해쳤다. 더러는 장정들을 포로로 데려가 죽이기도 했으며, 더러는 아이들을 사로잡아 노비로 부리기도 했다. 이런
일이 오래 계속되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은가? 내가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운 일을 하려는 것은,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맹세하고 하늘에 고하여 조국 영령의 가호를 기대하는데, 이제 여러 장졸의 심경이 어떠한가를 알 수 없기에 다짐해 두는 것이다.
만약 적을 두려워하면 사로잡힘을 면할 수 없다. 마땅히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누구나 일당백의 용기를 내기 바란다』
모든 장졸들이 외친다. 『대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구차하게 살아갈 마음을 먹지
않겠습니다』 이윽고 험준한 獐塞(장새; 황해도 수안)에 이르렀다. 날씨는 얼어붙고 人馬(인마)는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자꾸 쓰러졌다. 김유신은 팔을 걷어 어깨를 드러내고 말에 채찍을 가하며 앞에서 달려갔다. 예순여덟 살의 노장이 앞장서자, 뭇
장졸들이 힘을 다해 뒤따르며 감히 춥고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드디어 평양성과 3만6천步(보) 상거한 지점에 당도했다.
이제는 고구려군의 縱深(종심) 깊은 방어 진지를 뚫고 나가 당군 진영에 신라군의 도착을 알리는 일이
제일의 난제였다. 당군은 군량이 떨어져 궤멸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김유신이 步騎監(보기감)의 지위에 있는 裂起(열기)를 불러 말한다.
『나는 젊어서부터 그대와 교유하여 그대의 지조와 절개를 안다. 이제 蘇장군에게 우리의 뜻을 전하고자 하나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그대가 갈 수 있겠는가?』 裂起가 엎드려 말했다.
『제가 불초하나 외람되이 中軍職(중군직)에 있는데, 항차 장군의 명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제가 죽는 날이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裂起는 장사 仇近(구근) 등 15명의 용사들과 함께 혹한 속에서 적진을 뚫고 나갔다.
그는 蘇烈을 만나 김유신이 군량을 운반하여 대동강 어귀에 진출한 사실을 통고했다. 蘇烈은 크게 기뻐하며 裂起의 귀로 편에 사례의 글을 김유신에게
보냈다. 김유신은 이틀 만에 귀환한 열기와 구근에게 제9위 沙(사찬)의 관등을 주었다. 김유신은
양오(대동강 어귀)에 진을 치고 중국어에 능통한 仁問과 良圖, 그리고 그의 서자 軍勝(군승)에게 唐營(당영)으로 치중대를 호송하도록 명했다.
이로써 蘇烈의 당군은 아사를 모면하고 폭설 속에서 서둘러 철수했다. 蘇烈 軍이 철수하기 직전에 唐의
옥저도총관 龐孝泰(방효태) 軍이 蛇水(사수; 대동강 지류) 언덕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軍과 싸우다가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포함한
장졸 모두가 전사했다. 고립된 김유신 軍도 회군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淵蓋蘇文(연개소문)은 추격군을 일으키고 복병을 깔아 귀로의 김유신 軍을
섬멸하려 했다. 그러나 김유신은 고구려軍 수뇌부를 철저히 기만했다. 철수 직전, 북과 북채를 소 여러
마리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서 소가 꼬리를 칠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나게 하고, 섶과 나무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빛이 끊이지 않게 했다. 그런
다음 가만히 영채를 버리고 야음을 틈타 퇴군했다. 추격당할 때 탈출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全軍이
심리적으로 당황하기 때문이다. 원래 軍 교육 과정에서 공격 훈련은 하지만 철퇴 훈련을 하는 경우는 없다.
그럼에도 김유신 軍은 추격군을 교묘하게 따돌리고 임진강의 지류를 건넜다. 도하 작전 후에도 김유신은 병졸들을 휴식시키면서 추격군에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것이 將으로서 김유신이 뛰어난 점이었다. 원래 경계에 실패한 장수는 명장이 될 수 없다.
뒤늦게 신라군의 텅 빈 營寨(영채)를 짓밟은 고구려軍은 서둘러 추격에 나섰다. 고구려軍은 철수하는 신라軍의 꼬리를 물고
신라의 영토 안으로 밀고 들어올 기세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적이 멀리까지 따라올까 염려하여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가서 접전을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兵站의 중요성을 이해했던 장수
이것은 김유신이 부상병 등을 후방에 남기고 정예병으로 퇴각 엄호의 부대를 재편성하여
다시 對岸(대안)으로 도하를 감행한 뒤 유리한 지형의 지점에서 고구려軍을 迎擊(영격)했다는 얘기다. 이때 신라軍은 몰려오는 고구려軍을 향해
다연발 강궁인 萬弩(만노)를 일제히 발사했다. 고구려軍은 갑작스런 반격에 놀라 혼란에 빠져 퇴각했다. 김유신 軍은 고구려軍을 급히 추격하여 장수
阿達兮(아달혜) 등을 사로잡고, 1만명의 머리를 베었다. 김유신 軍이 돌아오자, 문무왕은 김유신과 동생
인문에게 本彼宮(본피궁)의 재화, 전장, 노비를 절반씩 나누어 주고, 장병들에 대해서도 상을 내렸다. 그런데도 김유신은 그가 이미 현지에서
관등을 한 단계 올린 裂起와 仇近의 관등을 제8위인 급찬으로 다시 한 계단 더 올려 달라고 문무왕에게 요청했다.
신라의 官等(관등)제도의 운영에 있어 전사자가 아닌 경우 한꺼번에 관등을 2단계 올린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문무왕은 김유신의 요청임에도 『사찬의 벼슬은 너무 과하지 않소?』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김유신은 재배하고 다시 요청하기를, 『爵祿(작록)은
公器(공기)로서 공로에 대한 보수로 주는 것이온데, 어찌 과분하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했다. 문무왕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김유신은
정치 감각도 지닌 군인이었다. 김유신은 恩賞(은상)으로 인너 그룹, 즉 자기 사람을 만드는 데 철저한 장수라고 할 수 있다. 상벌을 뚜렷하게
시행하지 않는 장수는 용사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將으로서 김유신이 탁월했던 것은 단지 위에 열거한
충성심이나 행동력, 그리고 위기상황에서 용사를 부리는 용인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탁월성은 보급로야말로 야전군의 生命線(생명선)임을 정확하게
인식했다는 점 때문이다. 김유신이 수레 2천 대 분량의 군량을 적진을 돌파하며 1천 리 밖으로 운송하는
데는 적어도 2만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였을 것이다. 이같은 병력 규모는 적의 관측을 회피하며 행군하기에는 너무 많고, 고구려軍의 주력과
교전하기에는 너무 적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치중대를 거느린 부대는 행동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다.
신라軍 최고위 장수인 그가, 적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치중부대를 이끌고 적지를 종단했던 것은 이 임무야말로 對(대) 고구려戰의 향방을 가늠하는
제1의 요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제껏 수·당의 침략군이 고구려와 싸워 참패했던 가장 큰 이유는 병참의 실패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김유신의 병참선 개척은 향후 나·당 양군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淸野(청야), 즉 성 밖에는 곡식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불태워버려 적의 인마를 굶주리게 하는 전술을 극복하게 함으로써 겨울 작전까지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唐將 유인궤의 反間之計 김유신이 평양성 외곽에 진출하여 蘇烈의
당군을 구원하고 개선했던 662년 봄 2월 耽羅國主(탐라국주) 徒冬音律(도동음률)이 신라에 항복했다. 백제의 속국이었던 탐라국(제주도)은
이때부터 신라를 종주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이것은 신라의 국가 위신이 남해상의 海島(해도)에까지 뻗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백제 부흥군의 대오는 증강되고 있었다. 663년 여름 달솔 福信과 승려 道琛(도침)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이
웅진성의 劉仁願(유인원) 軍을 포위했다. 唐 高宗은 劉仁軌(유인궤)에게 구원군을 주어 웅진성으로 급파했다.
이때 福信 등은 웅진강 어귀 두 곳에 목책을 세워 椅角之勢(의각지세), 즉 앞뒤가 서로 호응하는 형세를 이루면서 나·당의
구원군과 웅진도독부의 합류를 저지하려 했다. 이 전투에서 부흥군은 전사자 1만여명을 남기고 패퇴하여 任存城(임존성)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웅진성의 포위는 풀렸지만, 나·당군이 부흥군에 대해 완승을 거둔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웅진강 전투 직후에 신라軍은 군량이 떨어져 곧 회군했으며, 임존성의 백제 부흥군의 세력은 더욱 증강되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복신과 도침은 각각 霜岑將軍(상잠장군)과 領軍將軍(영군장군)으로서
역할을 분담하고 있었다. 복신은 軍使를 보내 유인궤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당이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고,
그후에는 우리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모여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복신은 당군의 허실을 탐색하기 위해 軍使를 파견했을 것이다. 이에 유인궤 역시 軍使를 파견하여 부흥군의
지도부를 분열시키려는 反間之計(반간지계)를 구사했다. 유인궤는 원래 모략전에 정통한 장수였다. 유인궤가
보낸 使者를 대하는 태도로 미루어보아 도침이 제1의 對唐(대당) 강경파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도침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인궤의 使者를 外館(외관:바깥 숙소)에 재우고 비웃으며 말하기를,
『使者의 벼슬이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므로 함께 말할 수 없다』면서 답장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
이때 복신의 태도는 기록의 누락으로 알 수 없지만, 도침에 비해서는 융통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복신과 도침
사이에 노선과 전략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 내분 때문에 부흥군은 곤경에 빠진 유인궤·유인원 軍에 대해
결정타를 가할 기회를 놓친 것 같다. 웅진성의 위기를 풀기 위해 문무왕은 金欽(김흠)을 장수로 삼아
구원군을 급파했다. 그러나 김흠의 부대는 古四(고사; 전북 고부)에서 백제 부흥군에 대패하여 葛嶺道(갈령도)로 도주했다. 그럼에도 신라는 즉각
증원군을 보내지 못할 만큼 부흥군은 위력적이었다. 그러나 부흥군의 수뇌부 안에서 암투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도침의 장졸을 자기 휘하에 넣어버렸다. 부흥군의 왕으로 옹립된 부여풍은 이런 분열 사태를 제어하지 못하고 제사만
주관했다. 복신은 고립된 웅진성의 유인원에게 使者를 보내 농락한다. 『大使(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오? 그때 사람을 보내 전송하여 주겠소』 백제 부흥군의 敵前分裂
결정적 시기의 적전 분열로 백제 부흥군의 기세가 점차 꺾이기 시작했다. 663년
7월에 유인원·유인궤 軍은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부흥군을 공격하여 지라성 및 윤성 등의 목책 등을 함락시켰다. 부흥군은 眞峴城(진현성)에 들어가
병력을 증강시켰으나, 나·당군의 협격을 받고 8백명의 전사자를 내고 다시 도주했다. 이로써 신라·웅진 간의 군량 수송로가 트이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부여풍과 복신은 서로가 서로를 제거하려고 한다고 믿고 암투를 벌였다. 복신은 병을 칭하고
굴방에 누워 있으면서 부여풍이 문병을 오면 처치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를 탐지한 부여풍은 먼저 심복들을 풀어 기습적으로 복신을 체포하고,
그의 손바닥을 뚫어 가죽으로 묶었다. 복신은 참수를 당하면서 부여풍의 심복들에게 『썩은 개, 얼빠진
종놈』이라고 외쳤다. 복신의 머리는 소금물에 절여져 젓갈이 되었다. 부여풍은 왜국에 사자를 급파하여
구원병을 요청했다. 당시의 왜왕은 天智(천지)였다. 그가 바로 大化改新(대화개신)을 주도한 中大兄(나카노 오에) 황자로서 661년 7월 즉위
이후 백제 부흥군에 대한 지원태세를 강화해 왔다. 왜군 2만7천명이 속속 내도하여 백제 부흥군의 진영에 가세했다.
나·당군과 부흥군·왜국 연합군은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大兵(대병)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무왕은 대장군 김유신을 비롯하여
인문, 천존, 죽지 등의 28將을 거느리고 친정의 길에 올랐다. 당 고종은 좌위위장군 孫仁師(손인사)에게 山東兵(산동병) 7천을 주어
웅진도독부를 응원토록 했다. 문무왕의 신라군은 7월17일 웅진으로 들어가 손인사·유인원의 당군과 합세하여
8월13일 두솔성(충남 청양군 칠갑산)을 쳐서 함락시켰다. 문무왕은 포로가 된 왜병들을 풀어주며 말했다.
『우리나라는 너희 나라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나누고 있고, 서로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교류해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늘날 백제와 함께
악행을 하며 우리나라를 침해하려고 하느냐? 지금 너희 군사가 모두 내 掌中(장중)에 있으나 죽이지 않고 돌려 보내니, 돌아가서 너희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라』 왜병을 통해 왜왕에게 훈계의 메시지를 보내는 문무왕의 솜씨가 이렇게 비범했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후 전개될 동아시아 세계의 역학 관계까지 고려하여 미리 왜국에 대해 선심을 써둔 것 같다.
白江口 전투에서 궤멸당한 왜병 2만7천명 한편
4백 척 규모에 달한 왜의 수군은 주류성의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白江口(백강구)로 접근하고 있었다. 주류성의 부여풍은 이를 접응하기 위해
騎兵(기병)을 거느리고 백강구 언덕으로 달려가 군진을 세웠다. 이에 유인궤, 杜爽(두상), 부여융(의자왕의 왕자)은 당의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에서 백강구로 진발했다. 663년 9월에 전개된 백강구 전투는 육전과 수전이 배합된 입체적 국제전이었다.
해안 언덕에는 부흥군의 기병이 포진하여 왜국의 전선을 보호했다. 신라의 기병이 부흥군의 기병에 대해 먼저 일격을 가해 기선을
제압함으로써 전단이 열리게 되었다. 이에 倭船(왜선) 4백 척은 唐船(당선) 1백70척에 대해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왜선은 唐船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맞바람을 맞으며 돌진했던 왜선은 바람을 등진 唐船의 火攻(화공)에 걸려들어 불타기 시작했다.
왜선은 척수에 있어 唐船보다 훨씬 많았지만, 크기가 작은 데다 조선술의 낙후 때문에 배가 견고하지도
못했다. 唐船은 득의의 撞破戰法(당파전법)으로 왜선을 들이받았다. 왜선 4백 척을 불사르니, 화염이 하늘을 찌르고 바닷물도 붉게 물들었다.
백강구 전투에서 참패한 부흥군·왜군 병사들이 울부짖었다. 『백제라는 이름은 이제 끝났다. 앞으로 누가
조상의 묘소를 돌볼 것인가』 부여풍은 종자 몇을 데리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부여풍과 부여융은
형제간이면서도 각각 다른 진영에 붙어 싸웠으니 기구한 운명의 인물들이었다. 당 고종은 부여융을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삼았는데, 실권은 유인원이
장악했다. 웅진도독부는 신라가 점령했던 옛 백제 영토의 일부까지 도로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런 요구를 신라가 들어줄 리 없었다. 나·당
사이에는 이미 깊은 불신의 냉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문무왕 4년(664) 봄 정월 김유신은 늙음을 이유로
은퇴를 청했다. 그의 나이 70이었다. 그러나 문무왕은 김유신의 은퇴를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했다.
이 해에 唐將(당장) 유인원의 억지 주선으로 신라 王弟(왕제) 김인문과 웅진도독 부여융의 會盟(회맹)이 강행되었다.
신라로서는 괴뢰 부여융과의 회맹이 달갑지 않았지만, 勅命(칙명)을 빙자한 유인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런데 665년 당 고종은 한 술
더 떠 문무왕과 부여융의 회맹을 명했다. 665년 8월 양측은 웅진강 북쪽 就利山(취리산)에 제단을
쌓고, 문무왕과 부여융이 나란히 서서 회맹 의식을 거행했다. 의식은 먼저 천지와 산천에 致祭(치제)한 뒤 백마의 피를 나눠 마시는 절차를
밟았다. 패망한 백제가 신라와 대등한 집단으로서 회맹했다는 것은 모순일 뿐만 아니라 唐이 패권적 우위에
있는 한 웅진도독부가 곧 신라보다 우월한 위치로 변화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일찍이 부여융을 자기 말 앞에 꿇어앉혀 호령했던 문무왕으로선
치욕적이었지만,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淵蓋蘇文의 세 아들이 벌인 권력 다툼
666년 여름 5월, 고구려의 독재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이 병사했다. 연개소문은 임종
때 세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희 형제들은 고기와 물처럼 화목하여 절대로 벼슬을 다투지 말라』고 했다. 장남 淵男生(연남생)은 삼군대장군과
태막리지의 벼슬을 계승했고, 차남 男建(남건)과 삼남 男産(남산)도 권력을 나눠 가졌다. 남생은 나름대로
중앙 권력을 다진 데 이어 지방 순시에 나섰다. 남생은 그의 부재 중 조정의 일을 남건과 남산이 대행하도록 했다. 이때 어떤 자가 남건과 남산에
접근하여 이간질을 했다. 「어떤 사람」을 唐에 포섭된 첩자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남생은 두 아우가
자기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처치하려 하니, 먼저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남건과 남산은 처음엔
「어떤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접근하여 두 아우를 모략했다.
『두 아우가 형이 돌아오면 자기들의 권세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형에 대항하여 조정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남생은 심복을 가만히 평양으로 보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일이 꼬이느라고 남생의 심복은
붙잡히고 말았다. 남건과 남산은 드디어 「어떤 사람」의 이간질에 넘어가고 말았다. 둘은 왕명을 빙자하여 남생을 소환했다.
남생은 겁을 먹고 入京(입경)하지 못했다. 이에 남건은 남생의 어린 아들 獻忠(헌충)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에 올라 남생을
토벌하려 했다. 곤경에 빠진 남생은 國內城(국내성)으로 달아나 그곳에 웅거하면서 15세의 아들 獻誠(헌성)을 당에 보내 구원을 청했다.
문무왕도 연개소문의 사망에 따른 정세 변화를 읽고 이미(666년 5월) 당 고종에게 청병을 요청한 바
있었다. 당 고종은 헌성을 향도로 삼아 龐同善(방동선) 부대 등을 요동으로 급파했는데, 요동의 고구려軍은 쉽게 무너졌다. 당군은 남생과
합류했다. 당 고종은 남생에게 요동도독 겸 平壤道 安撫大使(평양도 안무대사)로 임명하고, 현도군공으로 책봉했다.
666년 겨울 12월, 당 고종은 다시 李勣(이적)을 대총관으로 하는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다. 이 무렵 연개소문의 동생
淵靜土(연정토)가 조카들의 내분에 실망하여 벼슬아치 24명, 백성 3천5백명 그리고 성 12개를 들어 신라에 투항했다. 고구려 지도부 스스로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667년 9월, 당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침공했다. 대총관 이적은 고구려의 서변
요충 新城(신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그 일대 16개 성도 싸우지 않고 모두 이적 軍에 항복했다. 고구려軍은 한때 총관 高侃(고간)
부대에 급공을 가해 승세를 타고 추격하다가 좌무위장군 薛仁貴(설인귀) 부대의 측면 공격을 받아 5만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때 신라軍은 평양으로 가는 길을 뚫기 위해 임진강의 요새 七重城(칠중성: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을 공파하고 獐塞(장새:황해도
수안)까지 북진했다. 여기서 김유신은 첩자를 보내 당군의 상황을 살폈다. 나·당 양군은 평양성을 남북에서 협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적은
겨울 작전에 따른 병력 손실을 염려하여 당군을 철수시켰다. 신라軍도 회군했다. 이 시기에 김유신은 제1위의 관등인 角干(각간)도 부족하다 하여
대각간의 지위에 올랐다. 『우리의 올바름으로 적의 그릇됨을 친다』
668년 봄 정월부터 이적의 唐軍은 부여성을 공략했다. 남건은 군사 5만명을 보내 부여성을 구원하려
했지만, 장졸 5천명을 잃고 패퇴했다. 부여성 주변 고구려의 40여성도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다. 이해
여름 6월, 유인궤와 당에 宿衛(숙위)로 가 있던 金三光(김유신의 장남)이 고구려 출병을 명하는 당 고종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로 들어와
軍機(군기)와 전략을 논의하고 唐京(당경)으로 돌아갔다. 문무왕은 20만 대군을 일으켜 평양성으로 진발했다. 대총관(대장군) 김유신 이하 총관
38명이 참전하는 傾國之兵(경국지병)이었다. 이때 동원된 신라의 병력수가 20만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해 「과장된 것」이라고 판단하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고, 심지어 4만 정도라고 추측하는 분도 있다. 원래 농경사회의 병력동원에서는 7호
당 兵(병) 1명을 징발해야 농업 생산에 큰 지장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일반 원칙에서 볼 때 신라의 동원 능력은 10만명에 미달될
정도였다고 할 수 있는데, 20만명이라면 適定(적정) 능력의 2배를 웃도는 숫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20만명이란 숫자를 뒤집을 만한 새로운 증거가 없는 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문무왕은 신라까지 먹으려는 당의 팽창 정책을
눈치채고 있었던 만큼 고구려 정벌을 앞두고 신라의 可用(가용) 병력에 대해 총동원령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동원 병력 중 일부만
평양성 攻圍戰(공위전)에 투입되고, 나머지 병력은 당군의 남하에 대비해 국경지대에 포진시켰다는 얘기다.
20만 대군을 호령하는 일대 캠페인의 將이라면 백전노장 김유신일지라도 남에게 양보할 수 없는 지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은 불운했다. 때마침
風(풍)을 앓아 일생 일대의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風이라면 요즘 사람들은 중풍을 연상하지만, 실은 오늘날의 感氣(감기)에 해당하는 증세로
보아야 한다. 옛 醫書(의서)에는 感氣에 해당되는 병명이 風으로 적혀 있다. 당시 김유신의 나이 74세였다. 강체질의 김유신이었지만, 그런
증세를 가지고 야전에 나서기에는 너무 고령이었다. 문무왕은 王弟(왕제) 인문과 김유신의 동생
欽純(흠순)에게 야전군의 지휘권을 주었다. 인문과 흠순은 인간적인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일단 완곡하게 사양했다. 둘은 『만일 유신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라고 문무왕에게 진언했다. 문무왕이 답한다. 『공들 세 신하는
국가의 보배이니, 만약 한꺼번에 敵地(적지)로 갔다가 불의의 일이 있어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라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유신공이 여기에 남아 있게
하면 은연중 나라의 長城(장성)과 같아 종내 근심이 없으리라』 인문과 흠순은 김유신을 찾아가 말한다.
『자질이 부족한 저희들이 왕명에 따라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 김유신이 대답한다. 『무릇 장수란 나라의
干城(간성)과 임금의 손발이 되어 矢石(시석)의 사이에서 승패를 결하는 것이다. 반드시 위로는 天道(천도)를 얻고 아래로는 地利(지리)를 얻으며
중간으로는 人心(인심)을 얻은 뒤에야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나라는 忠信(충신)으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었고, 백제는 오만으로 인하여
멸망했으며, 고구려는 교만으로 인해 위태롭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올바름으로 저편의 그릇됨을 친다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
고구려의 멸망 김유신은
「諸葛亮心書」(제갈량심서)에 정통했음에 틀림없다. 「제갈량심서」는 『무릇 대세를 아는 데는 세 가지 요체가 있으니, 첫째가 天(하늘)이요,
둘째가 地(땅)요, 셋째는 人(사람)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김유신과 제갈량의 공통점은 둘 다 至誠(지성)의 장수였다는 것이다.
7월16일 漢城州(한성주)를 출발한 신라군은 평양성의 외곽 蛇水(사수:대동강 지류)에서 당군과 합류했다.
男建(남건)도 결전을 결심하고 출병했다. 사수 會戰(회전)에서 최고의 무훈을 세운 인물은 신라 장군 金文潁(김문영)이었다. 김문영이라면 8년 전
백제 공략 때의 統帥權(통수권) 다툼에서 김유신이 蘇烈을 제압하지 못했다면 蘇烈에게 참수될 뻔한 당시의 督軍(독군:군기장교)이다. 훗날의
얘기지만, 그는 上大等(상대등)으로 크게 출세한다. 김문영은 선봉장으로 나서 고구려軍의 본진을 대파했다.
고구려軍은 패주하여 평양성으로 퇴각했는데, 이로써 평양 성중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드디어 고구려
보장왕은 男産(남산)으로 하여금 首領(수령) 98명과 함께 백기를 들고 항복하게 했다. 고구려 시대의 首領이라면 오늘날의 북한에서와는 달리 군의
장교였다. 그러나 막리지 남건은 성문을 닫고 수성전을 벌였다. 전세가 극히 불리한 가운데 남건은 승려 信誠(신성)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信誠은 이적에게 密使(밀사)를 보내 內應(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5일 후 가만히 성의 북문을
열었다. 선발된 용사 5백명으로 구성된 신라軍 특전대가 제일 먼저 북문으로 뛰어들어 성루에 불을 질렀다. 남건은 칼로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군은 보장왕과 남건 등을 붙잡았다. 이로써 고구려는 28왕 7백5년 만에 멸망했다.
唐의 동방 정책 견제한 김유신의 對倭 외교 李勣(이적)의 당군이
평양성 공위전의 주력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신라軍은 사수 전투, 평양성의 大門(대문) 전투, 평양 軍營(군영)의 전투,
평양 城內(성내) 전투, 평양 南橋(남교) 전투에서 모두 승전함으로써 고구려 평정에 결정적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당군은 승전의 果實(과실)을
거의 독식했다. 이적은 668년 10월 보장왕을 비롯하여 왕자, 대신, 백성 등 20만여명을 포로로 삼아
개선장군으로 귀국했다. 문무왕도 고구려인 7천여명을 포로로 데리고 귀환했다. 문무왕은 남한주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에게 김유신의 공적에 대해
말하기를, 『그가 나가면 장수의 일을 하였고, 들어서는 재상의 일을 하였으니 그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공의 한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었다』라고 했다. 이해 겨울 10월22일의 논공행상에서 김유신에게는 태대각간의 직위와 식읍 5백 호가 내려졌다. 문무왕은
또 그에게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殿上(전상)에 오를 때 허리를 굽힌 채 빠르게 걷는 신하의 예법을 따르지 않게 했으며, 그의
屬官(속관)들에 대해서도 각각 관등을 한 급씩 올려 주었다. 그러면 고구려를 멸망시킨 평양성 공위전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던 김유신이 논공행상에서 제1위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그의 前功(전공) 때문이 아니었다. 「日本書紀」
天智(천지) 7년(688) 條의 기사는 주목할 수밖에 없는 김유신의 행적을 전하고 있다. 이해 9월12일
신라는 급찬 金東嚴(김동엄)을 파견하여 일본에 調物(조물)을 보냈다. 9월12일이라면 평양성이 함락되기 직전이니까 문무왕은 親征(친정)중이었다.
국왕 부재중의 王京(왕경)에서 김동엄의 왜국 파견을 주도한 인물은 김유신이었다고 해도 좋다. 왜냐하면
9월26일 일본의 內大臣(내대신) 中臣鎌足(나카도미노 가마다리)이 중(僧) 法弁(호오벤)과 秦筆(신히쓰)를 시켜서 김유신에게 배 한 척분의
回謝品(회사품)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어 29일에는 일왕 天智가 문무왕에게 進調船(진조선) 한 척을 보냈다.
天智·中臣의 관계는 일본판 김춘추·김유신 동맹이었다. 642년 황자 中大兄(중대형)이 大化改新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을 때 中臣은 中大兄의 오른팔이었는데, 中大兄이 661년 즉위하여 천지천황이 된 것이다. 이후 中臣은 일본 최고의 문벌인 藤原(후지와라)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김유신이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구사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신라와 왜국은 仇敵(구적)
관계였다. 신라는 고구려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하기 위해 병력을 대거 북상시키면서 배후 왜국의 동향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왜국은 663년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2만7천명의 大兵을 파견했다가 백강구 전투에서 패배한 후 九州(규슈) 일대에 산성을 쌓고, 나·당
양군이 자기들을 치러 오지 않을까,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김유신의 메시지는 그런 왜국의 위기 의식을
해소시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신라가 주도적으로 왜와 국교를 재개한 것은 對 고구려 전쟁 기간중의 배후 위협을 제거하려는 의도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라의 수뇌부는 이미 對唐 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유신의 對日 외교는 향후 對唐 전쟁에 대비한 주변
외교였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은 이해 11월 초순에도 문무왕에게 비단 50필, 풀솜(綿) 5백 근, 가죽
1백 장을 보냈다. 이런 교류는 나·왜 양국이 왕은 왕끼리, 重臣(중신)은 중신끼리 격에 맞는 인사를 차리면서 무역을 했다는 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당의 팽창 정책을 견제하는 나·왜 간의 관계 개선이었다. 김유신은
동아시아 세계를 움직이는 핵심 인물이었다. 당 고종도 김유신 앞으로 조서를 보내 그의 전공을 표창하고, 입조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김유신은
입당하지 않았다. 고구려 멸망 후에 곧 나·당 간에 힘겨루기가 표면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입당할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 唐과 대결 당은
668년 12월 고구려 고토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안동도호에는 薛仁貴(설인귀)가
임명되었다. 설인귀는 군사 2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에 진주했다. 669년부터 신라는 唐에 대한 적대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보장왕의 서자 安勝(안승)이 669년 2월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다. 이 무렵 고구려 부흥운동의 핵심적 인물은 대형
劒牟岑(검모잠)이었다. 670년 그는 水臨城(수림성)에서 궐기했는데, 한때 평양성을 점령했던 듯하다. 그러나 차츰 당군에 밀려 그 유민들을
거느리고 대동강을 건너 漢城(황해도 재령)으로 남하했다. 그는 서해상의 史冶島(사야도)에서 安勝을 만나 새 임금으로 받들고 문무왕에게 사자를
보내 아뢰었다. 『우리의 먼젓번 임금(보장왕)은 잘못이 많아서 멸망했으므로 이제 저희들은 고구려의 귀족
안승을 새 임금으로 삼았으니, 원컨대 大國(신라)의 藩屛(번병:울타리)이 되어 길이 충성을 다하게 해 주십시오』
문무왕은 안승과 검모잠 등을 金馬渚(금마저:전북 익산)로 옮기게 한 뒤 報德國(보덕국)이란 국호를 내렸다. 보덕국은 백제의
고토를 차지한 웅진도독부를 견제할 목적에서 급조된 신라의 부용국이었다. 그러면서도 신라는 평화 공세를
병행했다. 669년 문무왕은 欽純(흠순)과 良圖를 사신으로 보내 당 고종에게 사죄했다. 사죄사 파견의 이유는 문무왕이 백제의 토지와 유민을 취해
당 고종이 격노했기 때문이었다. 당 고종은 陳謝使節(진사사절)인 흠순과 양도를 감옥에 감금했다. 그러나
당초의 영토분할 약정에 의거하면 신라가 백제 고토의 전부를 차지하도록 되어 있었던 만큼 잘못은 당측에 있었다. 그럼에도 일단 굽히고 들어온
신라측의 평화 공세에 당 고종은 감금 중이던 김흠순을 석방했다. 그러나 김양도는 계속 억류되어 결국 옥사하고 말았다.
문무왕 10년(670) 長安(장안) 남쪽 終南山 至相寺(종남산 지상사)에서 10년 수도중이던 승려 義相(의상)이 김흠순의
傳言(전언)을 갖고 급거 귀국했다. 전언의 내용은 당군의 신라 원정이 임박했다는 정보였다. 이런 義相에 대해 국내 연구자들 중에는 전제왕권 혹은
전체주의에 복무한 어용 승려로 평가절하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일본 京都(교토)의 불교 성지
梅尾山(매미산)에 있는 명찰 高山寺(고산사)를 한번 찾아가 스스로 시각 교정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고산사에는 승려로서 의상의 모범적 행적을
묘사한 두루마리 그림 華嚴緣起繪卷(화엄연기회권)을 일본의 국보로 소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선 義相과 元曉(원효)의 영정을 모셔 놓고
名神(명신), 즉 석가모니에 버금가는 신으로 받들어 왔다. 의상 대사는 海東華嚴(해동화엄)의
初祖(초조), 중국 화엄의 3祖, 일본 화엄의 淵源(연원)으로 추앙되는 우리 민족사상 최초의 세계적 사상가이며 가장 모범적인
實踐行者(실천행자)였다. 이런 義相까지도 종교의 본원적 求道(구도)보다 국난 극복을 위한 제1선에서 복무했다는 점에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 국가체제의 秀越性(수월성)을 느끼게 한다. 良圖의 옥사 후 신라는 對唐 전쟁 노선을 더욱 강화한다.
670년 3~4월에 신라의 사찬 薛烏儒(설오유)와 고구려의 태대형 高延武(고연무)는 각각 精兵(정병) 1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皆敦壤(개돈양:지금의 遼寧省 鳳凰城 방면)에서 당의 부용집단 말갈군을 대파했다. 그러나 唐兵이 공격해오자 나·려 연합군은 작전상 슬그머니 물러나
근거지를 지켰다.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요동에는 안시성을 비롯한 11개 성이 항복하지 않고 계속
저항했다. 문무왕은 이런 고구려 부흥군을 도와 신라군을 압록강 너머 깊숙이 투입하여 당병과 싸우게 하는 한편 백제의 고토를 노리는 일대 캠페인을
걸기 시작했다. 670년 겨울 10월 문무왕은 장군 品日(품일)과 文忠(문충)에게 군사를 주어 백제
고토로 진격시켰다. 백제의 잔당이 명을 거역하고 반란을 일으킬 기회만 엿보고 있다는 이유를 내걸었다. 품일·문충 부대는 단번에 63개 성을
빼앗고, 여기서 살던 백제 유민들을 신라땅으로 이주시켰다. 또한 신라의 천존·죽지 부대는 7개 성을, 군관·문영 부대는 12개 성을 각각
빼앗았다. 한 달간에 전남·전북 일대의 82개 성을 전격적으로 석권한 눈부신 전과였다. 671년 여름
신라의 장군 竹旨(죽지)가 군사를 이끌고 부여 서쪽 加林城(가림성)의 벼를 짓밟았다. 이것은 웅진도독부의 병참원인 屯田(둔전)을 폐허화한
것이다. 이에 당군과 백제군이 연합하여 신라군을 반격했다. 드디어 부여 동쪽 石城(석성)에서 전투가 벌어져 竹旨 부대가 적 지휘관 6명을
사로잡고 5천3백명의 머리를 벴다. 신라군은 웅진성을 압박하면서 백제의 古都 사비성 일대에 蘇夫里州(소부리주)를 설치했다.
문무왕의 「答薛仁貴書」 당 고종은
薛仁貴(설인귀)에게 신라 정벌의 책임을 맡겼다. 671년 가을 7월26일 설인귀는 문무왕에게 反唐(반당)행위를 힐책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
내용은 신라가 軍備(군비)를 강화하고 安勝을 보호하는 데 불만을 표하면서 은혜를 저버리고 배신하려 한다는 비난과 당군의 압도적 軍勢를 들먹이며
신라의 복종을 요구하는 협박이었다. 이에 대해 문무왕은 즉각 당의 과욕을 비판하고 신라의 정당성을
천명하는 답장을 보냈다. 이것이 역사적 문건으로 회자되는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로서 이미 앞의 여러 곳에서 부분적으로 인용했지만, 그 골격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시의 나·당 분쟁의 핵심을 집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여·제를 멸망시킨 다음에 시행키로 했던 영토분할 약정, 즉 당 태종이 648년 입조한
父王(김춘추)에게 평양 이남의 고구려 토지와 백제 전역을 신라에게 주기로 한 약속을 당측이 지키지 않았다.
2)660년 백제 평정 때 당의 水軍이 겨우 백강 어귀에 들어올 즈음 신라의 김유신 軍은 이미 백제의 대부대를 격파했다.
3)사비성의 당군이 백제부흥군에게 포위당하여 위급한 상황에 빠졌을 때 문무왕 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사면의 적을 한꺼번에 격파하고 군량을 수송해 주었다. 웅진도호 劉仁願(유인원) 이하 1만의 당병이 4년 동안 신라의 것으로
衣食(의식)하였으니, 가죽과 살은 비록 중국에서 났지만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다. 4)662년 정월
兩河道(양하도) 총관 김유신이 평양성을 공략하던 唐軍에 군량을 공급하여 궤멸의 위기에서 구원해 주었다.
5)663년 왜선 1천 척이 백강구에 머물러 있었으며, 백제 부흥군의 기병이 강가에서 倭船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신라의 정예 기병부대가 선봉이
되어 먼저 강가의 진지를 격파하니, 주류성은 힘을 잃고 마침내 항복했다. 6)668년 평양성 공위전에서
신라의 김문영 부대가 선봉이 되어 淵男建(연남건)의 大陣(대진)을 격파하니, 평양 성중의 기세가 꺾였다. 이어 평양성 공격 때 신라의 정예 기병
5백이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격파하는 大功(대공)을 세웠다. 그런데도 이적은 『신라엔 아무런 공이 없다』고 했다.
7)卑列城(비열성:함남 안변)은 본래(진흥왕 이후) 신라의 땅이었는데, 당은 이 땅을 다시 고구려(안동도호부)에 돌려
주었다. 8)668년 백제(웅진도독부)는 앞서 모여 맹약한 곳(취리산)에서 경계를 옮기고, 경계 표시를
바꾸어 田地(전지)를 침탈했으며, 우리의 노비를 달래고 백성들을 유혹하여 데려가 숨겨 놓고는 우리가 여러 번 찾아도 끝까지 돌려 보내지 않았다.
9)『당나라가 배를 수리하면서 밖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들려오니, 백성들은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불안하게 지냈다. 10)웅진도독부가 백제 여자를
漢城(한성)도독 朴都儒(박도유)에게 시집 보내고, 그와 음모하여 신라의 兵器(병기)를 훔쳐서 한 州(주)의 땅을 습격하려 했으나, 다행히
발각되어 즉시 박도유를 참수하였기에 음모가 성공하지 못했다. 11)670년 7월에 당에 갔던 使臣
김흠순이 귀국하여 말하기를, 『장차 경계를 확정할 것인데, 지도에 의해 백제의 옛 땅을 조사하여, 웅진도독부에 돌려 줄 것』이라고 전했다.
黃河(황하)가 마르지 않았고, 泰山(태산)이 아직 닳지 않았거늘 3, 4년 사이에 주었다가 다시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이 『지금 백제의 정황을
보면 스스로 별도의 한 국가를 세우고 있는 것이니, 백년 후에는 우리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 의해 멸망될 것』이라고 실망하고 있다.
12)백제(웅진도독부)는 거짓으로 『신라가 반역한다』고 상주했다. 신라는 당 조정의 후원을 잃고 백제의
참소를 당해 질책만 당했으므로 황제에게 충성을 보일 기회가 없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당은 사신을 보내어 근본적인 사유를 물은 적이 없다.
13)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기 전에는 사냥개처럼 부리더니, 野獸(야수)가 사라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삶겨 먹히는 박해를 당하고 있다. 잔악한 백제는 雍齒(옹치)의 상을 받고, 당에 희생당한 신라는 丁公(정공)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옹치는
한고조 劉邦으로부터 가장 미움을 받은 신하였으나, 천하 통일 후의 논공행상 때, 群臣에 대한 불만의 무마책으로 중용되었으며, 공을 세운 정공은
오히려 처형당함).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폄하는 植民史觀
「答설인귀書」는 開戰(개전) 외교문서의 白眉(백미)다. 여기서 신라는 당군을 공격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문무왕은 설인귀에게 백제와 고구려의 평정에서 신라가 首功(수공)을 세운 구체적 사례까지 들이댔는데, 이는
공정한 전후처리(점령지 분할)를 이행하지 않겠다면 전쟁뿐이라는 입장을 대내외에 선언한 것이었다.
설인귀라면 고구려 정벌전에 계속 참전했던 장수였던 만큼 그를 상대로 문무왕이 사실과 다른 말은 할 수 없었을 터이다. 그렇다면 이 문서는
삼국통일 전쟁에서 신라의 실질적인 역할을 가감 없이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문건이다. 나는 신라가 외세에
기대어 삼국통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나·당 7년전쟁의 개전 원인을 신라의 배신적 행위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일본인 학자들에게
「답설인귀서」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신라는 영토 분쟁과 자주권의 침해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對唐전쟁을 결단했던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는 것은 또 하나의 植民史觀(식민사관)이다. 아니면 식민사관의 음흉한
毒手(독수)에 넘어간 바보 짓이다. 「답설인귀서」는 당시의 슈퍼파워를 상대로 한 문서였던 만큼 그 언사가
부드럽기는 하지만, 事實 규명과 국가이익에 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방대한 이 문서의 全文(전문)을 「삼국사기」에 전재한
것에 관한 한 金富軾(김부식)의 안목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 문서가 失傳(실전)되었다면 통일신라의 역사적 평가는 크게 훼손당할
뻔했다. 「舊唐書」(구당서), 「新唐書」(신당서), 資治通鑑(자치통감) 등 중국측의 史書는 삼국통일에 있어 신라의 역할을 무시하는 中華(중화)
이데올로그들(理論陣)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强首는 21세기에 내놓아도 초일류 인물
「답설인귀서」는 통일신라의 존재 가치를 후세에 명백하게 증명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 기초자는 우리 민족사에서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인물이다. 다만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시적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 열전을
보면 그가 바로 强首(강수)란 이름의 대문장가임을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문무왕이 말하기를 『강수가
문장 짓는 일을 스스로 맡아서, 편지로써 중국 및 고구려, 백제에 의사를 잘 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功業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
선왕(무열왕)이 당에 청병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이 비록 武功(무공)이기는 하지만, 문장의 도움이 있었으니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라 하고, 그에게 沙(사찬)의 작위를 주고, 해마다 租(조) 3백 석의 봉록을 주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외교문서 작성에 관한 한 강수는 무열왕·문무왕 양대에 걸쳐 독보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그의 공로에 비해 그의 관등이
제9위인 사찬에 머물렀다는 점이 다소 의외지만, 당시의 신라가 武人(무인) 귀족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될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강수는 그 출신 성분이 김유신처럼 신라에게 멸망당한 가야의 후예다. 그렇다면 삼국통일기의 신라에
있어 최고의 공훈을 세운 文臣도 武臣의 경우처럼 가야 출신이었다는 얘기다. 이것은 신라가 비록 엄격한 골품제 사회이긴 했으나,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서는 인재를 널리 구해 국가 목적에 활용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신라 사회의 인재 등용의 모습과 지식인의 행태를 엿보기 위해서라도
强首의 인생 행로는 거론할 가치가 있다. 강수는 中原京(중원경:충주)에서 奈麻(나마:관등 제11위)
昔諦(석체)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원경은 가야의 망국민을 대거 이주시킨 고을로 신라 5小京(소경) 중 하나였다. 강수의 아버지가 나마의 관등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가계가 옛 가야의 지식층이었음을 의미한다. 강수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 뒷부분의 뼈가
크게 불거진 모습이었다니까, 시쳇말로 심한 짱구였다. 그런데 그는 성장하면서 스스로 글을 깨치고 문장에 통달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그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너는 불도를 배우겠느냐, 儒道(유도)를 배우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강수가 대답했다.
『불교는 세상 밖의 종교라고 합니다. 저는 세속에 사는 사람인데, 불도를 배워서 무엇 하겠습니까? 儒家(유가)의 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강수는 스승에게 나아가 「孝經」(효경), 「曲禮」(곡례), 「爾雅」(이아), 「文選」(문선)을
읽었다. 배운 것이 비록 적었으나 깨달은 바는 高遠(고원)했다.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가 당대의 걸출한 인재가 되었다. 강수는 21세기에 내놓아도
초일류 인물이다. 列傳(열전)의 다음 기록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강수가 일찍이 釜谷(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野合(야합)했다. 나이 20세가 되자 부모가 고을의 처녀들 가운데 예쁘고 행실 바른 규수를 중매하여 그의 아내로 맺어 주려고 했다. 그러나
강수는 딱 부러지게 사양했다. 아버지가 질책하기를, 『너는 세상에 이름이 나서 나라 사람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여자를 배필로
삼는다면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냐?』라고 했다. 강수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古人(고인)이 이르기를 『糟糠之妻(조강지처)는 쫓아내지 아니하고, 빈천할 때의 친구는
잊어서는 안된다고 했으니, 천한 아내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무열왕의 즉위 초에
당의 사신이 와서 詔書(조서)를 전달했는데,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조정 전체가 난감해 했다. 한문 문장은 원래 典故(전고)에 해박하지 않으면
해독이 불가능한 것인데, 중국의 군주들은 흔히 난해한 글을 보내 주변국에게 골탕을 먹였다. 드디어 무열왕이 강수를 불러 물었는데, 그는 한 번
보고 물 흐르듯 풀이했다. 强首, 역사상 가장 청렴한 道 세운 인물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서로 만남이 늦은 것을 한탄하고 그의 성명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任那加良(임나가량:김해) 사람이며, 이름은 字頭(자두)입니다』고 했다. 왕이 말하기를 『경의 頭骨(두골)을 보니 强首
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라고 했다. 무열왕이 당 고종의 조서에 답하는 表(표)를 짓게 했는데, 그 문장이
세련되고 뜻이 깊었다. 이후 왕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任生(임생)이라고 존중했다. 강수는 진정한
선비였다. 그가 일찍이 생계를 도모하지 않아 가난했지만, 태연했다. 문무왕이 有司(유사:관계기관)에 명하여 新城(신성)의 租 1백 섬씩을 매년
지급하도록 했다. 신성에는 관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창고가 있었다. 신문왕 즉위 초에 강수가 죽어
장사를 지낼 때 관청에서 크게 부의를 했는데, 강수의 아내는 모두 佛事(불사)에 쓰도록 헌납했다. 강수의 아내가 낙향하려 하므로 신문왕이 租
1백 석을 하사했다. 그녀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첩은 천한 몸으로 衣食(의식)을 남편에게 의지하여 國恩(국은)을 이미 많이 입었습니다. 지금은
홀몸이 되었는데, 어찌 감히 더 이상 나라의 후한 하사를 받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녀는 끝내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신라의 통일 대업이 외교의 승리에서 상당 부분 힘입었던 만큼 强首의 공로는 矢石(시석)을 무릅쓰고 전장을 달린 무장들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 더욱이 그는 우리 역사상 가장 청렴한 吏道(이도)를 세운 인물이었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룩하는 데 있어 김유신과 강수를
필두로 한 가야계 인물의 공헌도는 절대적이었다. 그런 인물로는 가야금의 명인 于勒(우륵)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于勒도 강수처럼 가야 출신이며 역시 중원경에서 살았다. 우륵은 진흥왕 때 신라에 귀순하여 제자들에게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쳐 신라의 예술 수준을 한 단계 올렸다. 고대사회의 전투 준비 행위에 있어서 가무음곡의 거행은 병사들의 충성심과 용기 북돋우는 데 필수적인
의식(Ritual)이었다. 『守成 또한 어렵다고 생각하소서』
문무왕 12년(672) 8월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은 합세하여 韓始城(한시성)과 馬邑城(마읍성)에서
대승하고 白水城(백수성)까지 진격했다. 이때 평양에는 唐將 高侃(고간)의 당병 1만, 李謹行(이근행)의 말갈병 3만이 8개 영채에 둔을 치고
있다가 나·려 연합군을 역공하기 위해 남하했다. 양군이 격돌한 백수성 전투의 서전에서 신라군은 급공을
가해 당군 수천명의 목을 벴다. 당군이 퇴각하자 승세를 탄 신라군이 추격했다. 그러나 신라의 추격군은 石門(석문)에서 복병에 걸려들어 대아찬
曉川(효천) 등 장수 7인이 전사했다. 대패한 신라군은 물러나 한산주에 晝長城(주장성:지금의 남한산성)을 쌓았다.
石門의 패전엔 김유신의 차남 元述(원술)이 裨將(비장)으로 참전했다. 敗軍(패군)의 와중에서 원술이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려
하자, 그의 보좌 淡凌(담릉)이 막아서며 말하기를, 『대장부는 죽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경우를 택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오. 죽어서 성과를
얻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살아서 뒷날의 공적을 도모하느니만 못하오』라고 했다. 원술은 『남아는 구차하게
살지 않는 법이거늘 장차 무슨 면목으로 우리 아버지를 뵙겠느냐?』고 하며 말을 채찍질하여 돌격하려 했다. 그러나 담릉이 말고삐를 붙잡고 놓지
않는 바람에 원술은 전사하지 못했다. 문무왕이 敗報(패보)를 듣고 김유신에게 先後策(선후책)을 물었다.
유신이 아뢰기를, 『唐人들의 모략은 예측할 수 없으니 장졸들로 하여금 제각기 요충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家訓(가훈)을 저버렸으니 목을 베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숱한 남의 자제들을 死地(사지)에 뛰어들게 했던 김유신에겐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무왕은 『하급 장교(비장) 원술에게만 중형을 처할 수 없다』며 원술의 죄를 용서했다. 원술은 부끄럽고 두려워서 감히 김유신을
만나지 못하고 시골로 몸을 숨겨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못했다. 당군이 총공세로 나와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문무왕은 『저는 죽을 죄를 지어 삼가 말씀드립니다』로 시작되는 表文(표문)을 지어 올리며 몸을 잔뜩 낮추었다. 그리고 그동안
억류중이던 병선낭장 鉗耳大侯(겸이대후) 등 포로 1백70명을 당나라에 돌려보냈다. 뿐만 아니라 은 3만3천5백 푼, 구리쇠 3만3천 푼, 바늘
4백 개, 우황 1백20푼, 금 1백20푼 등을 진상했다. 이런 저자세 외교로써 나·당 관계는 일단
소강상태를 이루었다. 신라 외교는 이렇듯 能小能大(능소능대)했다. 「비가 오려고 하면 우산을 준비해야 한다」는 속담은 이럴 때 써먹어야
제격이다. 이후 唐이 土蕃(토번:티베트)의 공세와 거란, 말갈 등의 반란으로 곤경에 빠짐으로써 신라에게 유리한 국제정세가 조정된다.
신라가 전략적 우위에 있던 673년 7월1일 삼국통일의 원훈 김유신은 79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임종
직전의 김유신이 병문안하러 온 문무왕에게 당부하는 유언의 마지막 부분은 음미하면 할수록 老臣(노신)의 충정이 느껴진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며, 守成(수성)하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소인배를
멀리하며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기틀이 무궁하게 된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문무왕은 김유신의 부음을 듣고 매우 애통해 하며 채색 비단 2천 필과 벼 2천
섬을 부의로 보내 喪事(상사)에 쓰게 하고, 군악대 1백명을 보내 장례를 엄숙히 거행토록 했다. 김유신의 시신은 金山原(금산원)에 묻혔으며,
왕명으로 비를 세워 그의 功名(공명)을 기록하고, 民戶(민호)를 정하여 그 무덤을 지키게 했다. 금산원은 경주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西川橋(서천교)를 넘어 오른쪽 포장도로로 1km 정도 가면 만날 수 있는 야산이다. 바로 이곳에 정교한 12支像(지상)의 護石(호석)으로
둘러쳐진 김유신의 무덤이 있다. 김유신 家門의 法度와 蓄財
김유신의 부인은 무열왕의 3녀인 智炤(지소)이며, 嫡出(적출) 자녀로는 5남4녀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남은 숙위로서 對唐 외교의 일선에서 활약했고, 평양성 공위전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움으로써 후일 이찬(관등 제2위)의 지위에 오른
三光(삼광)이다. 2남은 소판(관등 제3위)의 지위에까지 오른 元述(원술)이다. 원술은 672년의
석문전투 때 臨戰無退(임전무퇴)를 실행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 때문에 아버지 김유신에게 용납되지 못하고 벽지에서 1년간 숨어 지내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야 어머니를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지소 부인도 『원술은 이미 先君(선군:김유신)에게 자식 노릇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미
노릇을 하겠는가』라고 말하며 끝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원술은 통곡을 하며 태백산으로 들어가
그로부터 세상을 등졌다. 김유신 집안의 法度(법도)는 이렇게 엄정했다. 원술의 밑으로는 3남 해간(관등 제4위) 元貞(원정), 4남
대아찬(제5위) 長耳(장이), 5남 대아찬 元望(원망)이 있었다. 軍勝(군승)이란 이름의 서자까지 관등 제6위인 아찬의 지위에 올랐다.
이렇듯 부귀의 절정에 이른 김유신 家에도 다소 묘한 일이 일어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지소 부인은
김유신의 별세 후 머리를 깎고 베옷을 입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때 문무왕은 지소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위로한다.
『지금 나라 안팎이 편안하고 근심이 없는 것은 바로 태대각간의 선물이니,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려 태대각간을 성심으로 내조한
공로가 많았소. 과인은 이런 덕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소. 南城(남성)에서 받은 租를 매년 1천 석씩 주겠소』
확실하지는 않지만, 김유신의 별세 당시 지소 부인의 나이는 40세 안팎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녀가 왜
비구니가 되었는지 그 이유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신라에선 법흥왕과 진흥왕이 袈裟(가사)를 입고 승려가 된 이래 불법에 귀의했던
귀족들이 적지 않았던 만큼 지소 부인이 갑자기 비구니가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人生無常(인생무상)을 느꼈다거나 厭世(염세)의 사상을 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어쩌면 지소 부인은 당시 신라 귀족사회의 관습처럼 되어버린 재혼을 피해 비구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신라에선 후궁은 물론 왕비까지도 왕의 사망 후 재혼했던 사례가 수두룩했다. 예컨대 진지왕의 왕비는 그녀의 장조카인 진평왕을
섬겼고, 진흥왕의 모후는 계부와 정부들과의 사이에 많은 자녀를 두었다. 이런 풍조는 성의 문란이란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인적
자원을 양산해야 한다는 戰國(전국)시대의 국가 목적에 부응한 것으로 풀이된다. 신라시대엔 美의 기준도
오늘날과는 전혀 달랐다. 실제로 삼국시대 무덤 벽화에 발견되는 귀족 여성의 모습은 비쩍 마른 날씬한 몸매가 아니라 이중턱을 가진 중년의 풍성한
몸매다. 어떻든 나이 40 전후에 과부가 된 지소 부인이 지아비 김유신의 명복을 빌기 위해, 비구니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純愛譜(순애보)라고
할 수 있다. 생전의 김유신은 財富(재부)를 쌓는 일에도 남달랐던 것 같다. 필사본 「화랑세기」 제17세
풍월주 廉長(염장) 條에는 세인들이 잠저시의 김춘추와 더불어 김유신의 집을 가리켜 水望宅(수망택)이라 했고, 『그 집으로 금화가 들어가는 것이
마치 홍수처럼 보였음을 이르는 말이다』고 쓰여 있다. 「삼국유사」에도 김유신의 집이 신라 35개
「金入宅」(금입택)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수망택이나 금입택 모두가 김유신 家의 엄청난 財富를 전해주는 표현이다. 그러면 김유신 家의
財富는 어떻게 축적된 것일까?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유신공이 은밀히
선덕공주를 도와서 오랜 환란을 평정한 공으로 인해 발탁되었다. 선덕공주는 제왕의 자리에 오르자, 유신공과 춘추공에게 많은 곡물을 주었다. 그리고
(유신공과 춘추공은) 사사로이 재물을 취하기도 하여…」 삼국을 주도하던 귀족층의 전투 행위 자체가 전쟁을
통한 財富의 확대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전쟁을 통해 획득되는 포로와 토지가 귀족들에게 분배되고, 그것이 귀족층의 물적 토대가 되었다.
武人사회에서 세력 기반 확대의 전제조건은 私兵(사병)의 확보였다. 「삼국사기」 문무왕 9년(669) 조에 따르면 김유신은 말을 기르는 목장을
6개소나 소유했다. 신라 최대의 군단을 거느렸던 김유신에게는 막대한 재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唐 高宗의 毒手 휴전 기간중에도 신라는 당에 반기를 든 고구려
백성을 받아들이고, 또한 점거한 백제의 옛 땅에 관리를 파견하여 수비를 굳혀갔다. 드디어 674년 당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당에 가
있던 문무왕의 동생 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면서,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 李弼(이필)과 이근행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당 고종은 신라 왕실의 골육상잔을 유도하는 毒手(독수)를 휘두른 것이었다. 문무왕도 당과의 결전을
결심했다. 신라는 서형산 영묘사 앞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六陣兵法(6진병법)에 따른 진법 훈련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육진병법은 당 태종 때의
병법가 李靖(이정)이 제갈량의 八陣法(8진법)을 개선시킨 진법을 말한다. 그러던 675년 2월 유인궤는 칠중성을 공격했지만,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렇게 신라는 고슴도치 전략을 구사하면서도 또다시 당에 대한 평화 공세를 병행했다.
문무왕은 사신을 당에 파견하여 조공하고, 請罪(청죄)했다. 이에 당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면서 김인문에 대해선 종전의 관작인
臨海郡公(임해군공)으로 다시 봉했다. 문무왕의 세 살 아래 동생인 김인문은 고구려 평정 때 야전군의
지휘를 맡아 대각간의 지위에 올랐으며, 전후 7차례에 걸쳐 20여년간 入唐宿衛(입당숙위)를 전개한 관계로 당 조정에서 절대적으로 선호한
인물이었다. 이런 김인문을 당 고종이 억지로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김인문은 그런 이간책에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兄王의 지위를 끝내 넘보지 않았다. 그 인물됨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유가, 장자, 노자, 불교 서적을 섭렵하고 활쏘기,
말타기에 능숙하면서 식견과 도량이 넓어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사후에 김인문의 시신은
신라로 옮겨져 父王 태종무열왕의 발치에 묻혔다. 그 무덤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데 이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형제간의 우의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친 공덕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오늘날 태종무열왕의 능비는 碑身(비신)이 망실된 채 이수(용머리 돌)와 귀부(거북 모양의 받침돌)만
남아 있는데, 이수에 쓰여진 「太宗武烈王陵碑」라는 篆書體(전서체)의 여섯 글자가 김인문의 글씨다. 대단한 명필이다.
신라는 백제 지역과 고구려 남경 지역에 州郡(주군)을 설치함으로써 영토 지배권을 당당히 행사했다. 이해 9월 설인귀가
당경에서 숙위로 있던 風訓(풍훈)을 향도로 삼아 말갈병과 함께 泉城(천성)을 공격했다. 풍훈은 大幢(대당) 총관을 재임하던 661년에
親唐派(친당파)로 몰려 주살된 金眞珠(김진주)의 아들이다. 천성은 지금의 인천 방면으로 추정된다. 천성 전투에서 신라의 文訓(문훈)이 당병
1천여병을 베고 唐船 40척과 전마 1천 필을 노획했다. 동아시아의 제해권 장악한
기벌포 水戰 675년 9월29일 李謹行(이근행)은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買肖城(매소성)에 진을 쳤다. 다수의 학자들은 이근행 軍의 규모가 20만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과장되었다면서 4만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매소성은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대전1리 한탄강 주변 일대로 비정되는데, 현장을 답사해 보면 20만 대군이 留陣(유진)하기엔 협소하다는
느낌을 준다. 어떻든 신라의 9軍은 미리 매소성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가 이근행 軍을 불리한 지형으로 몰아 넣은 다음 겹겹이 포위하여 대파했다.
「삼국사기」 문무왕 15년 조에 따르면 신라군은 매소성 전투에서 3만3백80필의 말 이외에도 병기를 대량
노획했다. 이런 정도의 戰馬(전마)와 병기를 노획했다면 당군의 사상자는 엄청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당과의 관계를 의식한 때문인지, 당군의
사상자수에 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매소성 전투에서 김유신의 차남 元述이 3년 전의 치욕을 씻고자
힘껏 싸워 대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세상에서 얼굴을 감추었다.
매소성 전투는 당군을 한반도에서 패퇴시킨 육상의 결전이었다. 이 전투 후 신라군은 임진강-한탄강 계선에서
차츰 북상하여 대동강 계선에 이르게 된다. 육상의 결전이 매소성 전투라면 해상의 결전은 기벌포 전투였다.
676년 설인귀의 수군은 금강 하구로 침입하여 사찬 施得(시득)이 지휘하는 신라의 수군과 격돌했다. 신라의 수군은 첫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이후
대소 스물두 번의 전투에서 연승하여 당군 4천명의 머리를 베었다. 육전과는 달리 수전에서는 참수하기가 어려운 만큼 당군의 사망자는 수급의
숫자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기벌포 전투의 승전으로 신라는 동아시아의 制海權(제해권)을 장악했다.
제해권을 상실한 당은 兵站線(병참선)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병참선을 유지하지 못하면 대규모 원정군도 파견할 수 없다. 드디어 당은 원정군의
파견을 포기했다. 기벌포 전승 2년 후인 678년 문무왕은 그때까지 兵部(병부:국방부)에 예속되어 있던
해군·해운 부문을 독립시켜 병부와 동격인 船部(선부)를 창설했다. 이것은 바로 해상세력의 優位(우위)를 통해 나라의 안보와 발전을 누리겠다는
문무왕의 대구상이었다. 훗날 흥덕왕 때 동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한 張保皐(장보고)의 활약은 어느 날 갑자기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문무왕의
해양정책에 의해 그 기반이 조성된 것이라고 해도 좋다.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패배한 당군은
한반도에서 전면 퇴각했다. 676년 안동도호부가 요동성으로 쫓겨갔다. 당 고종은 677년 前 고구려 왕 高藏(고장:보장왕)을 요동군왕으로
봉하고, 웅진도독부를 요하 방면의 건안성에 다시 설치하여, 이곳에다 부여융을 보내 대방군왕으로 삼았다. 중국의 전통적 夷以制夷(이이제이)
정책이었지만, 패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나·당 7년 전쟁 전후의 국제정세
중국 陝西省(섬서성)의 省都(성도) 西安(서안) 서북쪽 2백km 지점에
乾縣(건현)이라는 곳에 진시황의 礪山陵(여산릉)보다 규모가 더 큰 乾陵(건릉)이란 이름의 무덤이 있다. 건릉에는 당 고종과 그의 妃(비)
武則天(무측천)이 합장되어 있다. 무덤의 들머리길 좌우에는 수십 구의 문신석상과 무인석상, 그리고 50여 구에 달하는 조공국의 使臣 石像(사신
석상)이 세워져 있다. 대평야지대에 人工山(인공산)처럼 축조한 건릉은 그 위에 오르면 오를수록 그 엄청난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더욱 기묘한 것은 무덤을 도굴하지 못하도록 집채 만한 바윗덩이로 건릉의 지표면을 모두 싸발랐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건릉은 1천3백여년의 세월 동안 그 누구에게도 도굴을 당하지 않았다. 무측천은 이렇게 용의주도한 파워우먼이었지만, 원래 백성들을 마구
동원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와 善政(선정)은 거리가 멀다.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당시,
唐의 군주는 고종이었으나, 실권자는 무측천이었다. 당 고종 李治(이치)는 황자 시절부터 자기 발로는 걷지 못할 만큼 비대했고, 즉위 후에는
간질병까지 앓아 정사를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였다. 무측천은 원래 당 태종의 후궁이었으나, 태종의 사망 후 우여곡절을 넘어 그 아들 고종의 품에
안겼다. 이런 무측천이 674년 天后(천후=측천무후)가 되어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내정이 어지러워졌다.
이런 가운데 당 고종은 678년 또다시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을 기도했지만, 측천무후와 신하들이 이를 반대했다. 당시의 상황은
「舊唐書」(구당서) 張文瓘(장문관) 전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신라가 배반하므로 고종이 군사를
발하여 토벌하려 했다. 그때 文瓘(문관)은 병으로 누었다가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고종을 뵙고 『근래 土蕃(토번=티베트)이 변경을 자주 침략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노략질을 합니다. 신라는 비록 순종치 않지만, 군대가 중국을 침범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동서를 함께 정벌한다면, 신은 백성들이
그 폐를 견디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用兵(용병)을 멈추고 修德(수덕)하여 백성들을 안도시키도록 청합니다』라고 말했다. 고종이 이에 따랐다〉
토번은 나·당 전쟁의 틈을 이용하여 대군을 일으켜 670년 安西都護府(안서도호부)의 4鎭(진)을
함락시키는 등 西域(서역) 지방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당 고종은 對 신라전에 출정한 契苾何力(설필하력) 등의 장수를 실크로드 쪽으로 돌려 토번의
침입을 방어케 했다. 문무왕은 이런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당의 동방정책을 봉쇄했던 것이다.
전제왕권 확립 과정에서 가야인맥 숙청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문무왕은 681년 56세의 나이로 병몰하고 神文王(신문왕)이 즉위했다. 「삼국사기」 원년 8월8일 條를 보면 「소판 欽突(흠돌), 파진찬
興元(흥원), 대아찬 眞功(진공)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흠돌의 딸은 신문왕의 왕비였다. 흠돌의 난이 진압된 후
왕비 김씨는 폐출되고, 병부령(국방장관)이었던 金軍官(김군관)은 不告知罪(불고지죄)로 왕명에 따라 자결해야 했다.
이때 숙청된 흠돌, 흥원, 진공 등은 가야 인맥이었다. 특히 흠돌은 김유신의 딸인 晉光(진광)의 남편이었다. 흠돌의 난에
관해서는 이미 졸고 「화랑세기의 정체」에서 자세히 거론한 바 있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흠돌 등 가야파가 신라 전제왕권의 확립 과정에서
장애물로 지목되어 피의 숙청을 당했던 측면이 없지 않다는 점은 밝혀둘 필요가 있겠다. 이로써 가야파가 주도하던 화랑제도도 한동안 폐지되었다.
김유신의 막내 여동생인 문명태후(무열왕의 왕비)와 김유신의 동생 각간 欽純(흠순)이 차례로 병사한 후에는
신라 왕실 내부에 伽倻派(가야파)를 보호해 줄 만한 실력자가 없었다. 김흠돌의 반란에 대한 처리 과정에서 김유신의 직계가 처벌을 받은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때 이후 가야파의 세가 꺾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정변 속에서도 김유신에 대한 평가는
불변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신문왕이 感恩寺(감은사) 앞바다에서 만난 용으로부터 「왕의 아버지(문무왕)께서는 바다의 큰 용이 되시고, 김유신이
다시 천신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해 이같은 큰 보물을 저로 하여금 바치게 했습니다」라는 얘기를 들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용이 전한 보물은 천하를 화평하게 하는 萬波息笛(만파식적)이란 이름의 피리였다고 한다. 이 설화의 진위야
어떻든 가야파를 대거 숙청한 신문왕 대에도 김유신이 天神(천신)과 聖人(성인)으로 추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유신의 직계 자손은 차츰 신라 귀족사회에서 소외되어 간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김유신의 직손
允中(윤중:김삼광의 장남)은 성덕왕 때 관등이 대아찬(제5위)에 이르렀는데, 왕의 측근들로부터 심한 견제와 질시를 당했다.
「성덕왕이 8월 보름날에 月城(월성) 꼭대기에 올라 시종관들과 주연을 베풀면서 允中(윤중)을 불러오라고 하니 어떤 자가
간언하기를, 『지금 종실과 戚里(척리:외척)들 중에 좋은 사람이 없지 않는데 어찌하여 유독 먼 신하를 부르십니까?』라고 했다. 이에 왕은 『지금
과인이 경들과 함께 평안무사하게 지내는 것은 允中의 조부의 덕인데, 만일 공의 말대로 그를 잊어버린다면 선한 이를 선하게 대우하여 그의
자손에게도 미쳐야 한다는 도리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왕은 마침내 윤중에게 가까운 자리를 주어 앉게 하고 그 조부의 평생에 대해 담론했다」
김유신의 직계 자손이 신라 귀족사회에서 다시 각광을 받을 뻔한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성덕왕
32년(733)에 발해가 산동반도를 공격하자 당 현종은 신라에 청병을 하면서 사신을 통해 다음과 같은 칙지를 보내 왔다.
『말갈과 발해는 겉으로는 藩臣(번신)이라 일컬으면서도 속으로는 교활한 음모를 품고 있으므로, 이제 출병시켜 문죄하려 하니
경(성덕왕)도 發兵(발병)하여 앞뒤의 勢를 이루도록 하라. 듣건대 옛 장수 김유신의 손자 允中이 있다 하니 반드시 이 사람으로 장수를 삼으라』
성덕왕은 곧 윤중과 그의 아우 允文 등 네 장수에게 군사를 주어 당군과 합세하여 발해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발해의 남쪽 국경으로 진군한 신라군은 폭설을 만나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회군했다. 발해의 존재는
통일신라의 위상과 관련하여 논란의 대상임은 앞에서 거론했다.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들은 당에 끌려가기도 하고, 일본에 망명하기도 했다. 신라에
귀순한 고구려 유민은 668년 이후 10년간 10만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발해는 당의 동쪽 변경 군사거점 營州(영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이 거란족의 반란 시기에 고구려의 만주 고토로 동진하여 세운 나라인 만큼 우리 민족 국가임에 틀림없다.
발해의 건국 시기는 고구려 멸망 후 30년 만인 698년이었다. 당은 이 무렵 고종의 사망(683년) 후 則天武后가 그녀의
소생인 睿宗(예종)과 中宗(중종)을 차례로 퇴위시키고 중국 초유의 女帝(여제)가 되었으나, 그 정치는 어지러웠다. 이런 유리한 국제정세 속에서도
신라는 북진 정책을 구사하지 못했다. 신라가 실현하지 못한 고구려의 만주 고토의 회복을 발해가 이뤄냈다는 점에서 발해 건국의 민족사적 의의는
크다. 발해는 2백년간 번영하다가 926년 거란족이 세운 遼(요)에 정복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
멸망 당시 발해로부터 원군 파견의 요청을 받고도 불응했다. 건국 초기의 고려로서는 그럴 만한 힘이 없었을 것이다. 연구자들은 발해 멸망 후 약
1세기의 세월에 걸쳐 발해 유민 10만명이 고려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신라는 나·당 7년
전쟁의 승전 이후 현실에 안주했기 때문에 불완전한 통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고 발해를 통일신라와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는 것은
민족사의 主流(주류)를 훼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김유신이 남긴 국가 경영 매뉴얼
김유신의 직계는 그의 4대손 長淸(장청:윤중의 손자)이 執事省(집사성)의 집사랑이란
미관 말직으로 전락한 사실을 끝으로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지고 만다. 집사성은 왕정의 기밀사무를 담당하는 왕의 직속 기관으로 집사중시를 우두머리로
하여 시랑 2인, 대사 2인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집사랑은 집사성의 下官(하관)이며 그 인원이 20명에 달했다.
김유신의 직계가 몰락한 배경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혜공왕 6년(770=경술년) 가을 8월 조를 보면 「대아찬 金隆(김융)이
반역을 하다가 伏誅(복주)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金隆이 곧 允中의 아들일 것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윤중의 아들(성명미상)이 김융의 반역에
연루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분명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다만 김유신의 묘와 미추왕의 능을 현장으로 하는
기괴한 회오리바람 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김유신의 후손들이 혜공왕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36대 혜공왕 14년(779) 어느 날 갑자기 유신공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그 바람 속에서 준마를 탄 장군이 출현하여 竹現陵(죽현릉: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에 호소하는 말소리가 능 밖으로 새어나왔다.
『신이 평생토록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功이 있었으며, 이제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鎭護(진호)하려는 마음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君臣들이 저의 功烈(공렬)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옮겨가 편히 쉬고자 하오니, 원컨대 대왕께서 윤허해 주소서』
그러자 미추왕이 대답하기를,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을 어찌하겠소. 공은 지난 날과 다름없이 힘써
주시오』라고 했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金敬信(김경신)을 金公의 능에 보내어 사과했다」
위의 기록은 설화인 만큼 文面(문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신라인들은 김유신이 죽어서도 나라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다는 얘기다. 또한 그 후손들이 죄없이 주살당한 데 대해 민심 이반의 사태가 일어났던 것 같다. 죽현릉이라면 신라 김씨
왕들이 그 서열을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묻힌 五陵(오릉) 위에다 놓아 大廟(대묘)라 일컫던 미추왕의 능이다. 미추왕은 신라 김씨 최초의
왕이었다. 김유신은 죽은 지 1백62년 만인 흥덕왕 10년(835)에 興武大王(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人臣(인신)으로서 대왕의 위에 오른 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경주시 황성공원의 獨山(독산)에
오르면 1977년 9월1일에 준공된 김유신 장군의 騎馬像과 만날 수 있다. 동상의 비명에는 「신라는 역사적 숙제였던 삼국통일의 대사업을 성취시켜
단일 민족으로서 북방 민족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거니와 이 거대한 사업들이 모두 다 장군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씌어
있다. 국가 경영에는 내셔널 매뉴얼(National Manual:국가 교범)이 필요하다. 일개 사기업체의
업무 매뉴얼일지라도 그것이 잘못 만들어지면 회사를 망치고 만다. 김유신은 일찍이 우리 민족에게 不敗全勝(불패전승)의 매뉴얼을 남겼다. 황성공원에
있는 김유신 騎馬像(기마상)의 칼 끝은 건립 당시 대통령 朴正熙의 뜻에 따라 正北向(정북향)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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