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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3)

鶴山 徐 仁 2005. 11. 18. 18:37
金庾信과 그의 시대(3)
金春秋-金庾信 血盟, 新羅 정권의 實勢로 떠오르다
정순태   
 
 고구려의 위기 해소한 楊玄感의 반란
 
 金庾信(김유신)이 화랑 최고의 리더 國仙(국선=풍월주)의 지위에 올라 一統三韓(일통삼한)의 야망을 키우고 있던 무렵, 東(동)아시아의 정치 지형은 다시 한번 지각 변동을 일으킨다. 隋 양제는 그의 제1차 고구려 원정(612)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제2차 원정을 기도한다. 613년 2월에 양제는 조서를 내려 전국의 군사들을 郡(탁군·지금의 北京)에 집결시키고, 동북 국경 일대에 군량을 저장토록 했다. 煬帝(양제)는 측근들에게 호언한다.
 『오늘날 우리의 국력이 바닷물과 산을 뽑을 수 있거늘 하물며 저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613년 4월에 煬帝는 친히 遼河(요하)를 건넜다. 제2차 원정의 결전장은 遼東城(요동성)이었다. 제1차 원정 때 隋軍(수군)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 외곽까지 깊숙이 진출했다가 兵站線(병참선)이 너무 길어 참패했던 만큼 이번에는 고구려의 만주 영토부터 먹어들어가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軍은 만주 영토의 핵심 요동성을 20여일간 밤낮에 걸친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선방했다. 드디어 隋軍은 1백만개의 흙 포대를 만들어 요동성보다 더 높게 쌓았다. 그 위에서 성 안을 내려다보고 공격하려는 물량 작전이었다.
 요동성이 낙성의 위기에 빠졌다. 바로 이때 隋의 본국에서 楊玄感(양현감)의 반란이 일어났다. 양현감은 황하와 대운하 永濟渠(영제거)의 교차지점인 黎陽(여양)에서 漕運(조운)을 총지휘하며 남방의 전쟁물자를 전선으로 보내던 군수사령관이었다.
 
 양제의 凡庸함
 
 전황이 좀처럼 호전되지 않자, 양현감은 불안했다. 양제의 1차 원정이 야전 지휘관들의 과욕에 따른 패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참 책임자가 업무 태만이란 죄목을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한 전례가 있었다. 더욱이 양현감은 양제의 숙청 대상 리스트에 올랐던 원로 대신 楊素(양소)의 아들이었다. 楊素가 처형을 면한 것은 양제의 예상보다 빨리 병사했기 때문이었다.
 楊素라면 南朝(남조) 최후의 왕조 陳(진)을 멸망시킬 때 水軍을 이끌고 陳軍의 집결을 저지한 大功(대공)을 세웠으며, 황태자 楊勇(양용)을 제거하고 제2 황자였던 楊廣(양광=양제)을 文帝의 후계자로 만드는 음모에도 깊숙이 가담했다. 그런데 양제 역시 父皇(부황)인 文帝를 닮아, 공신으로서 벼슬이 높으면 온갖 수단을 다해 때려잡는 비정한 군주였다. 그것이 隋 왕조를 길이 보존하는 계책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숙청당할 차례」라는 위기감에 빠진 양현감은 서둘러 반기를 들고, 隋의 副都(부도)로서 주변에 洛口倉(낙구창) 등 거대한 곡물 저장소가 집중되어 있던 洛陽(낙양)을 공략하여 반란군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양현감의 반란군은 기병 부대를 갖지 못해 원거리 기동에 차질을 빚고 있던 가운데 급히 회군한 양제의 정예 기병 군단에 의해 궤멸당했다.
 양현감의 반란은 가볍게 진압되었지만, 그 여파는 컸다. 농민, 비적, 야심가들이 잇달아 봉기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양제는 제3차 고구려 원정을 강행한다.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만회하려고 애태우는 것이 양제의 凡庸(범용)한 점이었다.
 614년 7월, 양제는 넌덜머리도 내지 않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요하 서쪽 懷遠鎭(회원진)으로 진출했다. 來護兒(내호아)가 지휘한 水軍은 요동반도 남단의 요충 卑奢城(비사성:오늘의 大連)을 함락시키고, 水路(수로)로 평양을 향해 진발하려던 참이었다.
 이때 고구려의 영양왕이 항복을 청하는 글을 올리고, 양현감의 반란 때 麗-隋 전선에서 고구려로 도망쳐 온 隋의 병부시랑(국방차관) 斛斯政(곡사정)을 묶어 보냈다. 곡사정은 양현감과 가까운 인물로서 양제의 처벌이 두려워 망명했던 것이다.
 이 무렵에 이르면 천하의 야심가 양제로서도 고구려 원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의 불길이 중원 곳곳으로 번지고 있었는데다 군사들이 厭戰(염전) 기분에 휩싸여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양왕이 보낸 국서는 전쟁을 포기할 명분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양제는 영양왕의 詐降計(사항계·거짓 항복의 계책)를 뻔히 알면서도 長安으로 돌아가 太廟(태묘)에 참배하고 『고구려가 항복했다』고 고함으로써 체면치레를 했다. 그 직후 양제가 영양왕의 入朝(입조)를 요구했지만, 영양왕이 불응했음은 물론이다.
 
 『누가 내 가느다란 목을 베러 올 것인가』
 
 수 양제는 노이로제에 걸려 점차 증세가 심해졌다. 돌궐도 공순하던 啓民可汗(계민가한)이 죽고 그 아들 始畢可汗(시필가한)이 즉위하자마자, 반기를 들고 순행중의 수 양제를 기습하여 山西省(산서성)의 雁門城(안문성)에 밀어 넣고 맹공을 가했다. 돌궐군은 隋의 원군이 당도하자 공수의 처지가 뒤바뀔 것을 우려하여 바람처럼 회군했으나, 수 양제에게 가한 심리적 타격은 컸다.
 의욕을 잃은 양제는 近衛軍團(근위군단)인 驍果衛(효과위)를 거느리고 대운하를 통해 멀리 江都(강도·지금의 揚州)로 南行해버렸다. 여차하면 江南 정권이라도 존속시켜 보겠다는 현실 도피였다.
 이때(617) 山西省에서 북방 돌궐족의 남진을 막고 있던 양제의 이종사촌이며 太原 留守(태원 유수)였던 李淵(이연)이 봉기하여 長安(장안)으로 진격했다. 李淵은 수도방위군을 제압하고 長安에 입성한 다음, 양제의 손자 楊侑(양유)를 허수아비 황제로 앉히고, 江都에 머물고 있던 양제에게는 太上皇帝(태상황제)의 칭호를 올리면서 실권을 장악했다. 물론 양제가 인정하지 않았던 쿠데타 정권이었다.
 그럼에도 양제는 풍광 좋은 江都에서 미녀 1천명과 호유하는 거대한 할렘을 만들어 놓고 3년 넘게 그 속에서 종일 취해 장안으로 돌아가 사태를 수습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위군단 효과위의 장병들은 대부분 長安 부근 출신들로서 귀향 가능성이 사라지자 불온한 움직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양제는 어느 날,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고 있다가 문득 옆에 있던 蕭(소)황후에게 『이 내 가느다란 목을 누가 자르러 올 것인가?』고 한탄했다. 형언할 수 없는 공허감이 마음속에 밀려들었던 듯하다.
 과연 大業(대업·양제의 연호) 14년 3월15일 兵亂(병란)이 일어났다. 경호부대 효과위의 대장 宇文化及(우문화급)-智及(지급) 형제가 쿠데타의 주모자였다. 이들 형제의 막내동생이 바로 수양제의 사위인 宇文士及(우문사급)이다. 쿠데타 軍이 궁 안에 들이닥쳐 양제를 죽이려 하자, 그래도 그는 『천자에게는 천자의 죽는 방법이 있다』면서 『毒酒(독주)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수 양제의 자살용 독약을 관리하던 宮人(궁인)이 제일 먼저 도망쳐버린 바람에 그는 결국 자신의 손수건으로 목이 매여 죽임을 당했다. 양제를 따라 江都에 와 있던 근친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양제를 시해한 쿠데타 軍은 장안으로 귀향하기 위해 북상했으나 도중에 군벌들의 요격을 받고 궤멸했다.
 양제의 시해 소식이 전해진 618년 5월, 李淵은 이제 이용가치가 사라진 허수아비 황제 恭帝(공제=楊侑)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천자가 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3백년 가까이 계속된 唐(당) 왕조의 창업자 高祖(고조)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군벌들의 난립으로 中原(중원)의 覇者(패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후 李淵은 李密(이밀), 竇建德(두건덕), 王世充(왕세충) 등 군벌들과 어지러운 쟁패전을 벌인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중원의 사슴을 쫓는다』고 표현한다.
 
 한국사의 그리스, 伽倻의 맨파워
 
 중국 대륙에서 군웅들이 「사슴」(中原의 패권)을 쫓느라고 동쪽을 넘볼 틈이 없었던 가운데 동방 삼국의 쟁패전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고구려는 對隋戰(대수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엄청난 피해를 입어 국가 재정비 기간이 필요했던 만큼 한동안 군사 활동을 자제했다. 먼저 공세로 나온 것은 백제였다.
 백제 무왕 17년(616) 10월, 달솔(제2위의 관등) 奇(백기)가 지휘하는 백제군 8천은 신라의 母山城(모산성·전북 남원시 운봉읍)을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신라 진평왕 40년(618), 漢山州 軍主(한산주 군주) 邊品(변품)은 6년 전 백제에게 빼앗겼던 假岑城(가잠성·충북 괴산)을 탈환했다.
 이같은 백제-신라의 공방전 속에서도 김서현-유신 부자가 출전한 역사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이들 부자가 아직 주요 지휘관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진골 귀족만 오를 수 있던 신라의 將軍은 관구사령관 격인 軍主를 제외하면 평소 王京(왕경)에서 머물고 있다가 유사시 왕명에 의거하여 私兵 혹은 屬官(속관)을 거느리고 전장에 출전하게 되어 있었는데, 김유신 家는 아직 私兵을 양성할 만한 충분한 경제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관가야 멸망(532) 직후 그 마지막 왕이며 김유신의 증조부인 仇衡(구형)이 金海(김해)를 食邑(식읍)으로 받긴 했지만, 신라의 식읍은 당대에 한정되어 상속되지 않았다.
 서현은 화랑 조직 내부에서 가야파의 존재를 처음으로 부각시킨 인물이었고, 金庾信은 가야파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출전하지 못하면 전공을 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리품도 획득할 수 없다. 그러면 권력 내부에서 발언권도 갖기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가야파는 신라 귀족 사회에서 원천적으로 견제를 당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 가야파가 과연 신라 귀족사회로부터 견제당할 만한 존재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야가 신라에게 멸망당했다고 해서 군사적 약체였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가야는 뛰어난 철기 문화를 보유한 국가였다. 부산 福泉洞(복천동)과 金海에 있는 가야 박물관에 가 보면 가야의 힘을 대번에 느낄 수 있다.
 가야의 고분에서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그것에서보다 철제 갑옷과 철제 무기가 유별나게 많이 출토되었다. 부산 복천동, 김해, 함안, 고령 등지의 4~5세기 가야 古墳(고분)에서는 철제 갑옷과 투구뿐만 아니라 철제 말 얼굴 가리개까지 발굴되었는데, 이런 가야의 전쟁 도구는 같은 시기의 신라나 백제의 것보다 선진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코벨(1910-1996)은 그녀의 저서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서」(김유경 편역)에서 한국의 철기시대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5백년간 번영했던 가야를 포함한 4국시대로 고쳐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50여년간 일본 고대 미술을 연구했던 코벨 박사는 「쇠의 바다」, 즉 金海에서 건너간 기마민족의 일본 정벌을 고고학적 관점으로 강하게 주장했다. 역사책에는 왜곡이 있지만,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거짓이 없다. 그녀가 보는 가야는 당시 東아시아 세계에서 쇠의 생산과 유통 부문을 지배한 선진 해상 무역 국가였다.
 
 量的 열세로 신라에 병합돼
 
 「가야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던 철로 만든 전쟁 도구는 가야와 낙랑 간의 무역에서 주요 품목으로 거래되었다. 가야의 배는 철의 원료인 鐵(철정)을 싣고 對馬(쓰시마) 해협을 건너 일본으로까지 다녔다. 가야연맹체는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 혹은 르네상스 시대의 제노바처럼 해운 연맹을 맺고 있었다」
 철제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데다 말에다 철제 갑옷까지 입힌 가야의 鎧馬武士(개마무사)는 당시 무서운 전사들이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개리 레저드 교수의 학설에 따르면, 가야는 바다를 건너 일본을 정벌하고 369년부터 505년까지의 기간에 1백년 이상 일본의 왕위를 계승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소위 「神功皇后(신공황후)의 三韓 정복설」은 가야 출신 神功의 近畿(긴키)지방 정벌을 정반대로 왜곡했다는 얘기다.
 철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잡는다. 전성기 가야연맹의 판도는 오늘날 한국 제2의 도시 부산과 제3의 도시 대구를 아우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는 왜 신라에 병합당했던 것일까?
 가야의 城邑國家(성읍국가)들은 해양 무역 국가가 지닌 개방성으로 인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나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처럼 영토국가를 이룩하지 못했다. 가야연맹국은 초기엔 금관가야(김해)가, 후기엔 대가야(고령)가 맹주의 위치에 있었지만, 모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었다. 연맹을 구성하는 도시국가들의 국력이 서로 비슷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가야연맹의 本家(본가)인 금관가야의 지배 세력 중 상당수가 왜국의 발상지 九州(규슈)로 집단 이주했던 것이 강력한 영토국가를 이룰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강력한 영토국가를 형성한 백제와 신라에게 협공을 당하다가, 결국엔 백제를 제압한 진흥왕 대의 신라에게 가야의 諸國(제국)이 하나하나 각개격파를 당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야는 군대의 質的(질적) 열세가 아니라 量的(양적) 열세에 의해 신라에 병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 武人(무인)의 질적 우수성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聖王(성왕)을 전사시킨 김유신의 조부이며 금관가야 마지막 임금 仇衡(구형)의 아들인 武力(무력)에 의해 이미 입증된 바 있다. 신라는 가야를 병합함으로써 삼국 통일에 다가갈 수 있었다.
 가야의 병합은 남한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낙동강의 경제력을 장악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가야계 인재의 흡수였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서 文武(문무) 양면에 걸친 가야계 인재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김유신이 신라 사회의 소수파인 가야계를 主流(주류)의 위치로 끌어올려 가는 과정은 앞으로 다시 거론될 것이다.
 
 백제 武王의 대공세
 
 삼국 항쟁기를 통해 가장 많은 횟수의 공격전을 감행했던 군주는 백제 武王(무왕)이며, 그의 맞수는 신라 眞平王(진평왕)이었다. 무왕 24년(623)에 백제군은 신라의 勒弩縣(늑노현·전북 여산)에 침공했다. 바로 다음해인 624년, 백제군은 신라의 速含(속함·경남 함양), 영잠, 岐岑(기잠), 烽岑(봉잠), 旗縣(기현), 穴柵(혈책) 등 6개 성을 빼앗았다. 오늘날의 雲峰(운봉)~함양 일대의 군사 거점들로 추정되고 있다.
 이어 626년 백제군은 신라의 主在城(주재성)을 공격하여 성주 東所(동소)를 전사시켰다. 627년 7월에는 백제 장군 沙乞(사걸)이 신라 서쪽 변경 2개 성을 함락시키고, 3백여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무왕은 다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국중의 병력을 熊津城(웅진성)에 집결시켰다. 신라 진평왕이 唐에게 急使(급사)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무왕은 이런 사실을 알고 일단 兵을 거둔 다음, 조카 夫餘福信(부여복신)을 당에 보내 조공했다. 이때 당 태종은 일방적으로 신라 편을 드는 조서를 무왕에게 보냈다.
 「신라왕 金眞平은 나의 藩臣(번신)이요, 왕의 이웃인데 매번 군사를 보내 征討(정토)를 그치지 않는다고 들었다. 군대의 힘만 믿고 잔인한 행위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나의 기대와 어긋난다. 내가 이미 왕의 조카 福信과 고구려, 신라 사신들에게 서로 화친하도록 타이르고 모두 화목하게 지내게 했다. 왕은 반드시 전날의 원한을 잊고 나의 본뜻을 헤아려 모두 이웃의 정을 두터이 하여 전쟁을 중지하라」
 무왕은 곧 표문을 바쳐 사죄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속셈은 달랐다. 628년(무왕 29년) 백제군은 또다시 신라의 가잠성을 포위 공략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대결에선 대체로 신라 쪽의 守勢(수세) 또는 고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기 동원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제력의 뒷받침이 필수적인데, 신라에는 대단한 흉년까지 들이닥쳤다. 「삼국사기」 진평왕 50년(628) 條(조)에는 「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중략) 가을과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자녀들을 파는 일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신라의 위기 상황 속에서 김서현-유신 부자에게 일생 일대의 기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龍樹(용수)-龍春(용춘) 형제의 浮上(부상)이었다.
 
 龍春과 舒玄의 同病相憐
 
 진평왕 44년(622)에 이찬(제2위의 관등) 龍樹가 內城 私臣(내성 사신)으로 임명되었다. 내성 사신이라면 왕실에 대한 제반 업무를 관장하는 궁내부 대신과 같은 지위다. 진평왕 7년(585) 이래 신라 왕실에선 大宮(대궁), 梁宮(양궁), 沙梁宮(사량궁)의 3궁에 각각 私臣 1인씩을 두었는데, 이때 龍樹는 혼자서 3궁의 업무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았던 것이다.
 龍樹라면 國人(국인=귀족)들에 의해 재위 4년 만인 579년에 「정사가 어지럽고 음란하다」(政亂荒淫)는 이유로 폐위당한 眞智王(진지왕)의 장남이다. 그런 용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신라 왕실의 핵심 요직에 오를 수 있었는지, 또한 그것이 김서현-유신 부자의 향후 행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차남인 舍輪(사륜=金輪)이다. 그는 태자였던 銅輪(동륜)이 요절했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했다. 신라 中古期의 왕위 계승은 장자 상속 원리에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진흥왕 이후의 왕위는 당연히 동륜의 嫡子(적자)인 白淨(백정=진평왕)에 의해 계승되어야 했다.
 그런데도 왕위는 백정을 배제하고 사륜에게 넘어갔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백정의 나이가 어렸던데다 당시 정계의 실력자 居柒夫(거칠부)가 사륜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진지왕 대를 전후한 시기에 신라의 귀족 사회는 대략 양대 세력으로 나눠져 대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하나는 법흥왕(514~540) 이후의 왕권 중심 중앙집권체제를 깅화하려던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증왕(500~514) 이전의 귀족 중심 연합정치체제로 복귀하려는 세력이었다.
 진지왕을 즉위시킨 세력은 후자이며 그 대표적 인물이 거칠부였다. 거칠부는 진지왕을 옹립함으로써 행정권은 물론 군사권을 장악하는 등 軍國事務(군국사무)를 自任(자임)하는 上大等(상대등·귀족회의 의장)의 지위에 올랐다.
 진지왕은 왕위 계승 원칙에서 벗어나 즉위했던 만큼 정통성이 취약했다. 따라서 진지왕은 왕권 강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기 어려웠던데다 주색에 빠져 왕실 내부에서 신망을 잃었다.
 이에 思道太后(사도태후·진지왕의 모후)는 美室(미실)과 함께 진지왕의 폐위를 모의했다.
 폐위를 단행한 궁중 쿠데타의 중심 인물은 사도태후의 오빠 弩里夫(노리부)와 美室의 남편 世宗이었다. 노리부는 진평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의 지위에 올랐다. 궁중 쿠데타를 만나 실각한 거칠부는 정치권에서 추방되어 집에서 칩거하며 일생을 마쳤다. 이런 정황에서 진지왕과 그 아들들인 용수-용춘의 행로가 주목된다. 다음은 필사본 「화랑세기」의 관련 기록이다.
 「진지왕은 폐위되어 幽宮(유궁)에 유폐된 지 3년 만에 죽었다. 이때 용춘은 아직 어려서 父王(부왕·진지왕)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용춘의 어머니인 知道太后(지도태후)가 太上太后(태상태후·思道)의 명령으로 다시 새 임금(眞平王)을 모시니 용춘공이 새 임금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임금이 불쌍히 여겨 사랑과 대우가 특별했다」
 
 가야 金씨, 진지왕系에 접근
 
 「三國遺事」에는 진지왕이 폐위 후 곧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필사본 「화랑세기」는 유폐된 지 3년 만에 죽었던 것으로 명기되어 있다. 자신의 차남을 폐하고 장손을 세운 태상태후 思道가 둘째 며느리 知道태후에게 「새 임금을 모시라」고 명한 대목에서는 신라 왕실 및 귀족 사회의 性 풍습이 어떠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장성함에 이르러 용춘공은 文弩(문노)의 문하로 들어가 秘寶郞(비보랑)을 섬겨 형으로 삼았고, 서동생인 鼻荊郞(비형랑)과 함께 낭도들에게 희사하기를 힘쓰니, 이 때문에 대중들이 귀의하여 3파가 추대하기를 원했다. 이런 연유로 舒玄郞(서현랑)이 자리를 양보하여 풍월주가 되었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용춘이 성장한 후 부왕의 폐위 사실을 알고 크게 분발했음을 알 수 있다. 비형랑은 사량부의 미녀 과부 桃花女(도화녀)가 폐위당해 유폐중이던 진지왕과의 사통 관계로 낳은 아들이라는 사실은 拙稿(졸고) 「화랑세기의 정체」에서 이미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이 용춘에게 13세 풍월주의 자리를 양보했다는 대목이다. 이는 신라 귀족 사회에서 소외당했던 가야 김씨가 왕권 계승에서 배제된 진지왕 系에 접근했음을 의미한다. 서현은 이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풍월주 경쟁에 나선 용춘을 적극 지원한 바 있었다.
 9세 풍월주 비보랑이 그의 후임 풍월주로 용춘을 천거했으나, 당시 궁중의 어른이었던 만호태후(진평왕의 모후)가 적극 반대하던 무렵이었다. 이때 가야파의 대표로서 그 자신도 경쟁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서현은 『용춘은 돌아가신 대왕의 아들이니 내가 어찌 그와 대적하리오?』라며 경쟁을 포기했다. 서현과 용춘은 망국의 王孫(왕손)과 廢王(폐왕)의 아들로서 同病相憐(동병상련)의 관계였던 것 같다.
 용춘은 결국 10세 풍월주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후 낭도들, 특히 가야파로부터 큰 인망을 모았다. 그리고 그는 11세 夏宗(하종)과 12세 菩里(보리)에 이어 기어이 13세 풍월주의 지위에 오르는 저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에 용춘공은 낭도들의 묵은 습성을 혁파하여 한결같이 인재로서 발탁하고 골품에 구애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골품이라는 것은 왕위와 臣位(신위)의 구별이니 어찌 골품으로 쓰겠는가?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은 떳떳한 법인데, 어찌 파벌로써 하겠는가』라고 했다. 무리들이 말하기를 『文弩(문노)의 다스림이 다시 밝아질 수 있겠다』고 했다」
 
 진평왕의 사위가 된 廢王의 아들들
 
 폐왕의 아들 용수-용춘 형제는 그 골품이 聖骨(성골)에서 大元神通(대원신통)으로 격하되었던 처지였다. 용수-용춘 형제의 어머니 지도태후의 골품이 원래 대원신통인데, 신라의 골품은 母系(모계)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처지의 용수-용춘 형제에게 유리한 정세가 도래한다.
 「그때 대왕(진평왕)이 嫡子(적자)가 없어 公(용춘)의 형 용수 殿君(전군)을 사위로 삼아 位(위)를 전하려고 하므로 전군이 公에게 물으니 公이 말하기를, 『대왕의 춘추가 바야흐로 젊으신데, 혹시 후사가 생기면 아마 불행해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殿君(전군·용수)이 사양했으나, 摩耶王后(마야왕후·진평왕비)가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전군을 사위로 삼으니 곧 天明公主(천명공주)의 남편이다. 이후 용춘공은 풍월주의 지위를 虎林公(호림공)에게 물려 주고 조정의 요직을 맡게 되니 낭도 가운데 등용되는 사람이 많았다.」
 진평왕이 폐왕 진지왕의 장남 용수를 맏사위로 맞았던 것은 진흥왕 系의 단결을 겨냥했다는 얘기다. 그것은 汎(범)내물왕계의 귀족 중심의 연합정치 체제를 피하고,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포석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움직임은 진평왕 代에 官制(관제) 정비를 적극 추진했던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귀족 세력의 권력을 재분산시키는 관제 정비야말로 국왕에게 충성하게 마련인 관료 집단을 키우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진평왕은 즉위 초부터 인사권을 관장하는 位和府(위화부)를 설치하고 국왕 경호의 강화를 위해 侍衛府(시위부)의 大監(대감) 6인을 임명하는 등의 조치로 귀족회의 의장인 상대등, 국방부 장관 격인 兵部令(병부령) 등의 권한을 계속 삭감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진평왕 44년(622)에 용수를 內省(내성) 私臣(사신)으로 기용했다는 것은 진흥왕계의 家系內的(가계내적) 통합을 이룸으로써 왕실을 보호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진평왕의 후계 구도는 다시 한번 변덕을 부린다. 다음은 필사본 「화랑세기」의 관련 기록이다.
 「선덕공주가 점차 장성하매 龍鳳(용봉)같은 자질과 天日之表(천일지표·제왕의 相)가 가히 왕위를 이을 만하여 대왕이 뜻을 두었고, 천명공주도 효성과 순종으로 사양하니 대왕이 용춘공에게 명하여 선덕공주를 모시게 하였다. 公이 굳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 선덕공주를 받들었다. 그러나 後嗣(후사)가 없어 물러나기를 청하니 대왕이 이내 용수 전군에게 명하여 선덕공주를 받들게 하였지만 역시 後嗣가 없었다」
 
 金春秋-文姬의 정략 결혼
 
 이런 정황 속에서 김유신은 그의 누이동생 文姬(문희)를 용수의 아들인 김춘추와 결혼시키기 위해 실로 치밀한 계획을 추진한다. 다음은 「삼국사기」 김유신 傳에 기록된 이 정략 결혼의 진행 상황을 요약한 것이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더불어 자기 집 앞에서 축구를 하다 일부러 김춘추의 옷자락을 밟아 찢어 놓은 뒤 이를 꿰매어 준다는 구실로 자기 집으로 끌어들인 뒤에 문희와 은밀히 만나도록 했다. 그로 인해 문희가 임신을 하자, 김유신은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자기 집 마당에 장작을 쌓아 놓고 불을 지르고, 이것이 남산에 놀러간 선덕여왕의 눈에 뜨이도록 하여 왕명으로 김춘추와 문희가 결혼을 하게 했다」
 위의 기사에 따르면 정략 결혼을 추진했던 시기가 선덕여왕(632~647) 때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둘 사이의 첫 소생인 金法敏(김법민·후일의 문무왕)의 출생 연도가 626년(진평왕 48)이어서 상호 모순적이다. 그런데 필사본 「화랑세기」에선 그 시점의 善德의 지위는 여왕에 오르기 전의 공주였음이 명기되어 있다. 그러니까 둘의 결혼 시기는 김춘추가 24세였던 626년(진평왕 48)으로 추산된다.
 김유신이 이런 연극을 벌이면서까지 정략 결혼을 추진했던 이유는 망국의 후예인 가야 김씨의 신분 상승을 겨냥한 것이었다. 김유신은 이미 15세 풍월주 당시부터 8세 연하의 김춘추가 대성할 인물로 내다보고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려고 기도했다. 그러나 당시엔 寶宗(보종·16세 풍월주)과 廉長(염장·17세 풍월주)이 건재했고, 김춘추 역시 12세 연상의 선배이며 美室의 아들인 보종을 따돌리는 일을 꺼려 스스로 사양한 적이 있다.
 이런 사실들에서 알 수 있듯 김유신은 처음부터 김춘추와의 동맹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도 김춘추는 선덕공주의 명을 받은 후에야 문희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까 결혼에 상당히 소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기록된 그 까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춘추가 문희와 1년 남짓 사통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머뭇거린 것은 그에게 寶羅(보라) 宮主(궁주)라는 정식 부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라 궁주는 16세 풍월주 보종의 딸로 미색이었다. 김춘추는 보라를 너무나 총애한 나머지 감히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사실마저 숨기고 말았다. 춘추와 보라 궁주 사이에는 이미 古陀炤(고타소)라는 이름의 딸까지 있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타소는 642년 대야성이 백제 장군 允忠(윤충)에게 함락당할 때 성주인 그녀의 남편 품석과 함께 참살되었다. 필사본 「화랑세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고타소의 존재가 아리송했다. 그녀의 生母가 문희이기에는 연령상으로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필사본 「화랑세기」의 관련 기록을 통해 김춘추와 문희의 결합 과정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좌우 신하들에게 까닭을 알게 된 선덕공주는 춘추를 나무란다.
 『당신이 상관된 일인데, 왜 가서 구하지 않소?』
 춘추공은 곧장 南山에서 내려와 문희를 구해 주고 사당에 고했다. 얼마 뒤 보라 궁주가 해산하다 죽고, 문희가 뒤를 이어 정실 부인이 되었다. 곧 김춘추가 풍월주에 오르자, 문희는 花君(화군=花主·풍월주의 아내)이 되었으며 곧 첫아들(法敏·후일의 문무왕)을 낳았다」
 
 신라 왕가의 풍습 兄死娶嫂
 
 김춘추가 18세 풍월주의 지위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 24세 때인 626년의 일이다. 이렇게 김서현과 김용춘, 그리고 김유신과 김춘추가 대를 이어 동맹 관계를 굳혀가자, 舊귀족세력의 견제 대상이 되고 만다.
 특히 僧滿王后(승만왕후·진평왕의 後妃인 듯함)가 용수-용춘 형제를 시기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이때 승만왕후는 아들을 낳아 선덕공주의 지위를 대신하려고 했으나, 그 소생이 일찍 죽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복잡한 왕실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신명을 보전하기 위해 용춘은 출전을 자원했다.
 「용춘공은 고구려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워 각간으로 승진하였으며, 용수 전군이 임종 때 그 부인 및 아들, 곧 우리의 태종대왕을 부탁했다」
 파진찬(제4위의 관등) 용춘과 소판(제3위의 관등) 서현이 대장군으로 출전했던 이때의 전투가 바로 629년(진평왕 51)의 娘臂城(낭비성) 공격전이다. 낭비성 전투는 이 연재 1회분의 앞머리에서 이미 자세하게 쓴 것처럼 副將軍(부장군)으로 출전한 김유신의 뛰어난 무공으로 신라군이 고구려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야말로 眞智王系와 가야계의 결합에 의한 신흥 귀족세력이 舊귀족세력의 기득권에 대항할 수 있는 轉機(전기)가 되었다.
 이같은 신흥 귀족세력의 대두에 대한 일부 舊귀족세력의 반발이 진평왕 53년(631) 5월에 이찬(제2위의 관등) 柒宿(칠숙)과 아찬(제6위의 관등) 石品(석품)의 모반 사건으로 나타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평왕은 칠숙과 그의 9족을 붙잡아 東市(동시)에서 참수했으며, 일단 달아났다가 자기 집으로 잠입한 석품도 체포하여 처형했다.
 진평왕은 재위 54년 만인 632년에 죽었다. 드디어 선덕공주가 우리 민족사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다음은 선덕여왕 즉위 초에 관한 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록이다.
 「선덕공주가 왕위에 올라 용춘공을 남편으로 삼았으나, 公은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자퇴하니 여러 신하들이 세 번 남편을 맞는 제도를 논의했다. 용춘공은 이에 천명공주를 아내로 맞고, 太宗(김춘추)으로 아들을 삼았다. 이보다 앞서 公은 왕명으로 昊明宮(호명궁)에 거처하면서 다섯 딸만 낳고 적자가 없었으므로 太宗을 아들로 삼았던 것이다」
 선덕여왕의 품성에 대해서는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나 색정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경주 狼山(낭산)에 있는 선덕여왕의 능에 가 보면 새끼 무덤 하나가 곁에 붙어 있는데, 이를 선덕여왕이 생전에 총애하던 신하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다.
 위의 인용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용춘이 형 용수의 유언에 따라 형수 천명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조카 김춘추를 아들로 삼았다는 대목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이었던 兄死娶嫂(형사취수·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취함)의 형태다.
 신라의 김씨 왕가에는 흉노 왕자 金日 (김일제)의 피가 흐르고 있음은 拙稿 「화랑세기의 정체」에서 文武王陵(문무왕릉)의 碑文(비문) 내용을 들어 이미 거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재론을 생략한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용수와 용춘을 동일 인물로 기록한 것(龍樹 一云 龍春)은 저자 김부식의 착각이라기보다는 유교적 관점에 의한 고의적인 왜곡으로 짐작된다. 그러니까 김춘추에게 용수는 生父이고 용춘은 義父인 것이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남녀 관계는 정형이 없으며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티베트에서는 지금도 여러 형제가 한 사람의 아내를 공유하는 풍속이 남아 있다. 티베트라면 중국인들이 말하는 西戎(서융), 즉 서쪽 오랑캐다.
 
 金春秋인가, 金庾信인가
 
 삼국 통일의 원훈을 한 사람만 들라면 김춘추일까, 김유신일까? 그 해답은 매우 어렵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우리 민족사의 비스마르크와 몰트게다. 비스마르크와 몰트게는 1860년대로부터 1870년대에 걸쳐 독일 통일을 완수한 프로이센 왕국의 수상과 軍(군)참모총장이었다.
 각자의 역할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 지위에 있는 자가 충분히 수완을 발휘했던 조직이라면 서양 근대사에선 수상 비스마르크와 참모총장 몰트게가 리더십을 발휘했던 시기의 프로이센 왕국의 지도부가 대표적 존재로 손꼽힌다. 이때의 국왕은 빌헬름 1세였다. 독일 통일을 위해 프로이센이 對(대) 덴마크, 對 오스트리아, 對 프랑스 전쟁을 감행할 당시에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는 전선에서 전개되는 작전에 관한 한 일체 간섭을 하지 않고 몰트게에게 일임했다.
 그 대신에 비스마르크는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하여 미리 전쟁의 판을 짰다. 즉, 오스트리아와 개전할 때는 프랑스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나폴레옹 3세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었고, 프랑스와 싸울 때는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의 승전을 자신하고 먼저 선전포고를 하는 상황을 유도하여 역시 주변 열강의 개입을 원천 봉쇄했다.
 독일군 참모본부의 기능과 지휘관의 능력을 정예화하고 철도 수송에 의한 병력 투입의 스피드화로 근대적 속도전을 감행한 몰트게의 전술은 탁월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軍의 교전 상대를 항상 1개국으로만 한정시켜 놓은 비스마르크의 탁월한 외교력이 없었다면 빛나는 전공은 이뤄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독일 통일에서 비스마르크의 비중은 몰트게보다 컸다고 할 수 있다.
 독일 역사상 최강의 리더십이 비스마르크-몰트게의 콤비라면, 우리 민족 사상의 그것은 김춘추-김유신 동맹으로 형성되었다. 다만 야성적 품성의 비스마르크와 학자형 군인이었던 몰트게의 경우, 서로가 서로의 인간성만은 과소평가하거나 경멸했다.
 반면 김춘추와 김유신은 인간적으로도 서로 믿고 의지하는 문자 그대로 혈맹이었으며, 이것이 삼국 통일을 견인했던 기관차였다. 그렇다면 이 혈맹을 주도한 쪽은 누구인가? 그것은 김춘추라기보다는 김유신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이룬 원훈을 굳이 한 사람만 들라고 한다면 나는 김유신을 지목할 수밖에 없다.
 낭비성 전투(629) 이후 김용춘-김춘추 부자와 김서현-김유신 부자의 신흥 귀족 세력이 크게 대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신라 정계의 주류는 舊귀족세력이었다. 이것은 「삼국사기」 선덕여왕 원년(632) 2월 條에 「大臣 乙祭(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고 기록된 사실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백제 무왕의 신라에 대한 공세가 더욱 활발해진다. 선덕여왕 2년(633)에 백제군은 신라의 西谷城(서곡성·충북 괴산군 청안면)을 공격하여 13일 만에 함락시킨다. 선덕여왕 5년(636)에는 백제의 특공대 5백명이 女根谷(여근곡, 혹은 옥문곡)까지 침입했다. 옥문곡이라면 바로 지금의 경주시 서면 신평2리 玉門谷(옥문곡)이다.
 경부고속도로를 하행하다가 경주터널을 통과하자마자 오른쪽을 바라보면 女根谷 혹은 玉門谷이라는 지명이 꼭 맞아떨어질 만큼 오목 볼록한 모습의 산세가 펼쳐져 있다. 건천읍에서 3㎞ 떨어진 곳이다. 백제군이 여기까지 침투했다는 것은 1968년 청와대 기습을 노린 북한의 124軍부대 소속 김신조 일당이 경복궁 서쪽 자하문까지 침투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善德女王과 義慈王
 
 이때 백제 장군 宇召(우소)가 이끈 특공대 5백명을 포착하여 전멸시킨 신라의 장군이 閼川(알천)이다. 이 사태를 전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매우 노골적이다.
 「한겨울인데 靈廟寺(영묘사) 玉門池(옥문지)의 개구리 떼가 모여 사나흘 동안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여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이 급히 각간(제1위의 관등) 閼川과 弼呑(필탄) 등에게 명했다.
 『정병 2천을 뽑아 빨리 서쪽 교외로 가 보라. 女根谷을 물어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테니, 습격하여 죽이라』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기 1천명씩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었더니, 富山(부산) 밑에 과연 백제 군사 5백명이 와서 숨어 있었기에 모두 잡아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라는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으므로, 또 에워싸고 활로 쏘아 죽였다. 또한 後陣(후진) 1천2백명이 따라오는 것도 역시 쳐서 죽였는데,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위의 인용문까지라면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도 비슷하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백제 특공대의 침투를 어떻게 짐작했는지를 묻는 신하들에 대해 선덕여왕 스스로가 설명하는 대목의 기사가 더 추가되어 있다. 이 대목은 유교적 엄숙주의의 필법으로는 흉내 내기조차 어려운 표현이어서 「삼국유사」를 읽는 맛을 한층 높여 준다.
 「개구리는 (눈이 불거져 나와) 성난 모습을 지녔으니, 이는 병사의 상징이다. 玉門은 女根이며, 여인은 陰(음)이므로 그 빛이 희고, 흰 것은 서쪽 빛이므로 적병이 서쪽에 있는 것을 알았다. 男根(남근)이 女根 속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이로써 쉽게 잡을 것을 알았노라」
 「삼국유사」에는 「이에 신하들이 선덕(여)왕의 성스런 지혜에 감복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나는 섹스와 관련한 담론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여왕의 대담성에 더욱 감탄하고, 이런 전후 사정을 그대로 후세에 전달한 「삼국유사」의 저자 一然(일연)에게 감사한다.
 어떻든 선덕여왕 즉위 초에 행정권을 장악한 인물이 乙祭라면 병권을 장악한 인물은 閼川이었다. 문무 양쪽의 실력자 모두가 舊귀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여근곡에 침투한 백제 특공대를 섬멸한 알천은 그 다음해인 선덕여왕 6년(637)에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알천은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메쳐 죽일 만큼 용력을 지닌 장수였다. 그럼에도 이웃 나라들은 여왕이 다스리는 신라를 얕잡아 본 것은 사실이었다.
 선덕여왕 7년(638)에 고구려 軍은 신라의 북쪽 임진강변의 七重城(칠중성·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을 공격했다. 이때 대장군 알천이 출전하여 고구려 軍을 물리쳤다.
 642년 7월과 8월에 걸친 백제군의 총공세는 신라를 최대의 위기 상황으로 몰아갔다. 신라 선덕여왕 11년, 백제 義慈王(의자왕) 2년의 일이다. 백제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사위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옳다면, 선덕여왕은 의자왕의 姨母(이모)다. 「삼국사기」는 의자왕의 품성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다. 무왕 33년(632)에 태자가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海東曾子(해동증자)라고 불렸다」
 曾子라면 孔子(공자)의 문하에서 孝를 가장 잘 실천한 제자다. 의자왕은 무왕이 재위 42년 만인 641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唐 太宗(당 태종)은 祠部郎中(사부낭중) 鄭文表(정문표)를 보내 의자왕을 柱國帶方郡公百濟王(주국대방군공백제왕)으로 책봉했다. 이에 641년 가을 9월, 의자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쳐 사의를 표했고, 이어 642년 봄 정월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당에 조공했다.
 
 大耶城 함락
 
 의자왕 2년(642) 2월, 왕은 주군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들을 재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방면했다. 이같이 즉위 초의 의자왕은 신라와의 開戰(개전)을 염두에 두고 외정과 내정을 챙긴 이른바 「준비된 집권자」였다.
 드디어 이 해(642) 가을 7월에 의자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충남 금산군 진산면)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의자왕의 대공세는 나-제 간의 세력 균형을 일거에 깨뜨릴 만큼 장쾌한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그 전투 상보는 역사의 기록에서 누락되어 있다.
 의자왕은 숨돌릴 틈도 없이 신라를 몰아붙였다. 이어 642년 8월, 의자왕은 장군 允充(윤충)에게 군사 1만을 주어 신라의 大耶城(대야성·경남 합천)을 공격했다. 대야성이 떨어지면 낙동강 西岸(서안) 영토를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신라의 王都(왕도) 서라벌이 위험하다. 그런데도 대야성은 윤충 軍에게 함락되고 만다. 대야성 전투의 상보는 「삼국사기」 竹竹(죽죽) 傳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선덕여왕 11년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대야성을 공격했다. 이에 앞서 도독 品釋(품석)이 자기의 幕客(막객=裨將)인 舍知(사지· 관등 제13위) 黔日(검일)의 아내가 아름다워 그녀를 빼앗은 일이 있다. 검일은 이를 한스럽게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윤충 軍이 성을 공략하자, 검일은 적과 內應(내응)하여 창고에 불을 질렀다. 성 안의 민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성을 굳게 지킬 수 없었다. 품석의 보좌관인 아찬(관등 제6위) 西川(서천)이 성 위에 올라 윤충에게 말했다.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으면 성을 바치고 항복하겠습니다』
 윤충이 응대한다.
 『만약 그렇게 하고도 公과 내가 함께 만족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때는 밝은 태양이 있으니 태양을 두고 맹세합시다』
 西川이 품석과 여러 장병들에게 권고하여 성 밖으로 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사지 竹竹이 이들을 제지하며 말한다.
 『백제는 말을 번복하는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소.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필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이오. 만약 성 밖으로 나간다면 틀림없이 적의 포로가 될 것이오. 쥐새끼처럼 숨어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편이 더 낫소』
 그러나 품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사졸이 먼저 나가자 백제가 복병을 일으켜 모조리 죽였다. 품석이 나가려다가 장병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자기의 처자를 죽인 다음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했다. 竹竹이 남은 군사를 간신히 수습하여 성문을 닫고 방위하고 있는데, 사지 龍石(용석)이 죽죽에게 말한다.
 『지금 戰勢(전세)가 이러하니 필경 城(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오. 차라리 항복하고 살아서 후일의 공적을 도모하는 것이 낫겠소』
 죽죽이 대답한다.
 『그대의 말도 합당하지만, 나의 아버지가 나를 竹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날씨가 추워도 시들지 말며,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것이니, 어찌 죽기가 두려워서 항복하여 살겠소?』
 죽죽은 힘껏 싸우다가 드디어 城이 함락되자 용석과 함께 전사했다」
 대야성의 패전은 守城將(수성장)의 용렬함이 자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주인 이찬(제2위의 관등) 품석에게 미모의 아내를 뺏긴 검일이 이미 백제군에 투항했던 옛 동료 毛尺(모척)과 짜고 백제군의 공격에 호응하여 군량 창고에 방화를 해버렸던 것이다. 이로써 守城軍(수성군)은 양식이 떨어져 농성을 하지도 못했다.
 오늘날 합천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남에 소속되어 있지만, 생활권상으론 완전히 대구-경북권이다. 예컨대 합천 사람들은 대구에서 전파를 발사하는 방송을 청취하고, 대구 일원의 시장에서 물건(상품)을 떼어간다.
 대야성에 오르면 達句伐(달구벌·대구)을 내려다보면서 공격할 수 있다. 달구벌을 지나 경산과 영천을 거치면 바로 서라벌이다. 대야성이 백제군의 수중에 들어간 이후 신라의 수뇌부는 결코 두 다리를 편히 뻗고 잠들 수 없었다.
 
 二人三脚의 血盟
 
 대야성 함락 후 신라에서는 대번에 두 가지 중요한 흐름이 나타났다. 그것은 백제의 고립을 겨냥한 김춘추가 주변 외교에 身命(신명)을 걸었다는 점이고, 김유신이 대야성까지 점령한 백제군으로부터 신라의 수도권을 방위하는 押梁州(압량주·지금의 경산)의 軍主로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대야성의 성주 품석은 김춘추의 사위였다. 품석의 아내 古陀炤(고타소)가 바로 김춘추와 그의 전처 寶羅(보라) 사이의 소생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선덕여왕 11년 條에선 고타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김춘추의 분노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춘추가 이 소식을 듣자 기둥에 온종일 기대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사람이나 물건이 앞을 지나쳐도 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얼마 후에,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꺾을 수 없으랴』 하고는 왕에게 나아가,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제가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를 원하나이다』 말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고구려로 떠나기 직전, 김춘추와 김유신은 血盟(혈맹)을 맺는다. 다음은 「삼국사기」 김유신 傳의 관련 기록이다.
 「춘추가 유신에게 말한다.
 『나와 公은 일심동체로서 나라의 기둥이오. 이번에 내가 만약 고구려에 들어가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公이 무심할 수 있겠소?』
 유신이 대답한다.
 『公이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 백제의 궁정을 짓밟을 것이오. 만약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백성들을 대하겠소』
 춘추가 감격하여 公과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서로의 피를 나눠 마시며 맹세했다.
 『내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일 이 기한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오』
 둘은 작별했다. 곧 유신은 압량주 軍主가 되었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대야성 함락 전후부터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 조정의 實勢(실세)로 부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춘추의 義父(의부) 용춘과 김유신의 부친 서현은 이 무렵의 역사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이미 일선에서 은퇴했거나 故人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춘추와 김유신의 혈맹이 전개하는 二人三脚(2인3각)의 행보는 갈수록 힘을 발휘한다. 또한 이것은 바로 김유신이 혈통상의 약점을 뚫고 신라의 병권을 장악하는 단초가 되었다. 김유신의 중용은 신라 사회가 이제는 핏줄보다 능력이 중요하다고 느낄 만큼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젠 平壤城(평양성)으로 들어간 김춘추의 활동을 살펴볼 차례다.
 
 평양성에서 淵蓋蘇文과 대면한 金春秋
 
 「김춘추가 고구려 영내로 들어가니 고구려 왕(보장왕)이 객관을 정해 주고 太大對盧(태대대로=수상) 淵蓋蘇文(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연회를 열어 우대했다. 어떤 사람이 고구려 왕에게 진언한다.
 『신라 사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그가 온 것은 우리의 형세를 정탐하려는 것 같으니 왕께서는 잘 처리하시어 후환이 없게 하소서』
 왕은 춘추를 곤혹스럽게 하려고 그가 답변하기 어려운 요구를 제시하면서 위협했다.
 『麻木峴(마목현)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니 만약 이를 우리에게 돌려 주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못하리라』
 춘추가 대답했다.
 『국가의 영토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신이 감히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다가 미처 죽이지 않고 가두어 두고 있었다.」
 김춘추가 고구려로 들어간 시점은 연개소문의 쿠데타 직후인 보장왕 원년(642) 겨울이었다. 당시 고구려의 절대 권력자는 보장왕이 아니라 淵蓋蘇文이었다. 따라서 김춘추의 請兵(청병)에 대해 죽령 이북의 한강 유역을 먼저 반환하라고 요구한 고구려의 강경 방침은 연개소문의 복안이었다고 해도 좋다.
 평양성에 들어간 김춘추가 먼저 협상을 벌인 인물은 그를 맞이하여 연회를 베푼 연개소문이었다. 김춘추는 연개소문과 마주앉아 양국간의 상쟁을 중단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키 위한 협상을 시도했을 것이다.
 金-淵 협상은 민족적 대의를 앞세워 나-려 양국, 나아가 삼국간의 전쟁 상태를 종식시키고 평화를 정착하자거나, 중원의 통일제국 唐이 호시탐탐 동방을 노리고 있는데 동족간에 대동 단결하여 대처하자는 얘기가 주제가 되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때 삼국간에는 언어가 비슷한 데 따른 親緣性(친연성)이야 없지 않았겠지만, 그런 대의를 앞세울 만한 같은 민족이나 동족이라는 의식을 공유했을 리가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의 3국 관계는 서로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상쟁의 관계였다. 자기의 보존을 위해서는 친선과 대립이 교차될 수밖에 없었고, 그 외교적 실행 프로그램은 遠交近攻(원교근공)이거나 셋 중 하나를 술레로 만드는 오드맨 아웃(Odd-man Out) 게임에서의 2대 1 전략이었다.
 김춘추는 백제와의 전쟁을 유리하게 진행시키기 위해 우선 고구려와 휴전을 요청했을 것이다. 둘의 협상이 순조롭게 진전되어 對 백제 戰에 고구려가 참전할 의사가 감지되었을 경우, 김춘추는 백제의 땅을 분할하는 戰後(전후) 처리안을 제시했을 터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신라의 제의를 거부하는 것이 고구려의 국익에 부합되고, 독재자인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음이 분명하다. 결과론이지만, 김춘추의 제의를 거부한 연개소문의 판단은 고구려의 국익에 치명적인 타격을 초래한 오판이었다.
 어떻든 김춘추로서는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든 셈이었다. 위기에 처한 그는 출국 때 미리 준비해 간 靑布(푸른 베) 3백 步(보)를 보장왕의 寵臣(총신) 先道解(선도해)에게 뇌물로 바치고 苟命徒生(구명도생)을 기도했다. 바로 여기서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脫身(탈신)의 妙計(묘계)를 얻게 된다.
 
 金庾信의 결사대 3천
 
 선도해는 별관에 억류중이던 김춘추를 찾아가 오늘날엔 중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유명해진 「토끼와 거북」의 얘기를 함으로써 김춘추의 活路(활로)를 귀띔해 주었던 것이다. 이에 김춘추는 곧 보장왕에게 다음 내용의 글을 보낸다.
 「마목령과 죽령은 본래 大國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여 우리 왕에게 이를 돌려 보내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육지로 도로 데려다 주기만 하면 용왕의 병을 낫게 하는 토끼의 肝(간)을 내놓겠다는 얘기와 다름 아니다. 한편 미리 약정된 60일이 지나도록 김춘추가 귀국하지 않자, 김유신은 신라의 용사 3천명을 모아 놓고 말한다.
 『위기를 당하면 목숨을 내놓고, 어려움을 당하면 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 열사의 뜻이라고 들었다. 한 명이 목숨을 바쳐서 백 명을 대적하고, 백 명이 목숨을 바쳐서 천 명을 대적하고, 천 명이 목숨을 바쳐서 만 명을 대적한다면 천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지금 이 나라의 어진 재상이 타국에 구금되어 있는데, 어찌 두렵다 하여 일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김유신이 김춘추 구출을 위해 동원한 부대의 병력수는 「삼국사기」 김유신 傳에선 「3천명」으로, 「삼국사기」 선덕여왕 11년 條에는 「1만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상호 모순되는 기록이 아니라 列傳(열전)에선 선발 특공대의 병력수를 말하는 것이고, 本紀(본기)에선 후속부대의 병력수를 합친 것으로 짐작된다. 후속 부대가 없는 日帝 가미가제(神風)류의 특공대 투입은 兵法(병법)의 일반 원칙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장의 연설은 용사들의 피를 끓게 만든다. 출정 직전 김유신의 연설도 그러했다. 이에 부하 장병들은 일제히 소리쳐서 답한다.
 『비록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에 나아갈지라도, 어찌 감히 장군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김유신은 여왕에게 출정 날짜를 정해 주기를 청했다. 역사의 행간을 읽으면 군사 기밀인 김유신의 출정 사실이 고구려 쪽에 전해질 수 있도록 신라 쪽에서 은근히 흘린 느낌도 든다. 병력 3천이나 1만쯤으로 평양까지 진격해서 김춘추를 구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고구려의 첩자인 승려 德昌(덕창)이 고구려에 從者(종자)를 급파하여 신라의 동향을 보장왕에게 알렸다.
 마침내 김유신은 특공대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고구려 남쪽 변경으로 진출했다. 보장왕은 전날에 이미 김춘추의 맹세를 들었던데다가 사신을 인질로 붙잡는 행위로 전단이 열리면 명분상으로도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했던 듯 김춘추를 석방하고 다시 두터운 예로 대우한 뒤 귀국케 했다. 고구려 국경을 벗어나자, 김춘추는 전송하러 나온 고구려 관리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내가 백제에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요청했으나, 대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땅을 요구했소. 그러나 이것은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이전에 대왕에게 보낸 글은 죽음을 모면하려는 것이었을 뿐이오』
 아무튼 642년의 김춘추-연개소문의 협상은 연개소문의 강경 방침으로 결렬되었다. 물론 절충의 전망이나 전제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구려行을 감행한 김춘추의 나이브함도 외교관으로서 높은 평점을 받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때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제의를 수락했다면, 그후 우리 민족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전되었을지 모른다. 그야 어떻든 결과론적으로 고구려로선 치명적인 실책이 되고 만 연개소문의 판단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그의 출신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洛陽(낙양) 교외 北邙山(북망산)에서 발견된 男生(남생·연개소문의 장남) 묘지명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집안은 고구려 말기 누대에 걸쳐 유력한 지위를 누린 귀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증조부인 子遊(자유)와 조부 太祚(태조)는 모두 막리지를 역임했고, 아버지 盖金(개금=연개소문)은 태대대로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쇠를 잘 다루고 활을 잘 만들어(良冶良弓), 모두 병권을 잡고, 國權(국권)을 오로지했다」
 
 王을 죽여 시신을 토막내 개천에 버리다
 
 위의 묘지명에서 「良冶良弓」(양야양궁)했다는 표현은 私兵(사병)을 잘 길렀다는 뜻이다. 6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에서는 각기 私兵을 거느린 귀족들이 모여 최고 실력자의 직책인 大對盧(대대로·수상)를 선임했다.
 「대대로의 임기는 3년으로 하되, 직무를 잘 수행하면 연한에 구애되지 않았다. 교체하는 날에 혹 서로 승복하지 않으면, 귀족들간에 휘하의 私兵을 동원한 무력 대결이 벌어져 승자가 대대로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 국왕은 다만 궁문을 닫아 걸고 스스로 지킬 뿐 제어하지 못했다」
 「舊唐書」(구당서) 東夷傳(동이전) 고구려 條의 기록이다. 이런 판이니까 귀족들은 평시에도 私兵 양성에 적극적이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스스로 자신이 「물 속에서 났다」고 신비화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존경을 받으려고 했다. 소싯적부터 그의 야망이 남달랐다는 얘기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그 직을 승계하려 했지만, 다른 귀족들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다.
 귀족들이 『연개소문의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하여 그의 莫離支(막리지=대대로) 계승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은 강력한 그의 집안 세력을 삭감하려고 그랬는지 모른다. 이에 연개소문은 일단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그 직위를 攝職(섭직=서리)할 것을 간청하면서, 『만약 옳지 않은 행위를 하면 폐하여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그럴 듯하게 여겨 막리지의 승계를 허락했다.
 연개소문이 막리지의 지위에 오른 뒤 더욱 독재체제를 강화하자, 국내성파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는 영류왕과 짜고 그를 제거하려 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선수를 썼다.
 영류왕 25년(642) 10월에 그는 部兵(부병)을 소집하여 열병을 하면서 대신들을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연회 도중 대신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사망자가 무려 1백명에 이르렀다. 고구려를 이끌던 정책입안자나 良將(양장)들이 한꺼번에 도륙을 당했던 셈이다.
 내친 김에 그는 궁중으로 달려가 榮留王(영류왕)을 시해하고 그 시신을 토막으로 잘라 개천에 내버렸다. 영류왕(618~642)이라면 영양왕 23년(612) 대동강 하구에 침입한 隋의 水軍 4만을 평양 外城으로 유인하여 끌어들인 뒤 복병으로 대승을 거두었던 영양왕의 이복 동생이며 수도방위사령관이었던 建武(건무)다. 유혈 쿠데타에 성공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를 세웠으니, 이가 곧 보장왕이다.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통사」는 연개소문이라는 이름 앞에 반드시 「애국 명장」이라는 수식어구를 붙이고 있다. 丹齋(단재) 申采浩(신채호)는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보고, 연개소문을 「千古英傑」(천고영걸)이라고 찬양했다. 과연 그러할까?
 연개소문은 일찍이 630년 무렵, 북으로는 부여성에서 남으로는 발해만에 이르는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책임을 맡은 바 있다. 천리장성의 축조는 중원의 통일 제국 唐의 팽창 압력을 저지하려는 고구려의 국가적 대사업이었다. 당시 隋의 천하를 대신한 唐은 몽골 지역의 돌궐을 복속시킨 다음, 지금의 투르판 분지 일대에서 웅거하던 高昌國(고창국) 정벌에 주력하고 있었던 만큼 천리장성 축조에 직접적인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집안은 평양 천도 이후 중앙정계에 두각을 나타낸 신흥 귀족 가문으로서 對唐 강경파였다. 특히 그의 아버지 太祚는 영류왕 14년 당의 요청에 따라 隋軍의 전사자를 한 곳에 묻어 쌓은 고구려의 전승 기념물 京觀(경관)을 헐어버리는 데 분개하여 천리장성의 축성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인물이다.
 여기서 중원의 패권을 겨루던 군웅들 가운데 당의 李淵(이연)이 최종 승자가 되는 과정, 그리고 당과 동방 3국 간의 관계를 짚어둘 필요가 있다.
 
 李淵의 唐 창업
 
 隋 왕조의 말기적 내란이 한창이던 617년, 太原(태원·지금의 晉陽)에서 돌궐을 막고 있던 李淵이 그의 둘째 아들 世民(세민) 등과 더불어 거병하여 長安을 점령하고, 618년 江都(강도)에서 수 양제가 경호부대의 반란으로 시해당하자, 당 제국의 창업을 선언하고 스스로 天子(천자)가 되었음은 앞에서 쓴 바 있다. 당은 건국 초 각지에 할거한 군웅들을 차례로 평정하고 중원 통일을 이룩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공로자는 李世民이었다.
 이세민은 일찍이 태원에서 돌궐과 대치하면서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전술의 묘리를 습득했는데, 이것이 군웅 쟁패전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李淵이 太原에서 기병하여 악전고투를 거듭하면서도 곧장 수도 장안을 진군했던 전략의 발안자도 이세민이었다. 長安의 점령은 중국 남북조 시대 말기 이후 최고 명문의 武家(무가) 집단으로 떠오른 武川鎭(무천진) 군벌 가문들의 지원을 확보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했다. 수와 당의 황실 모두가 그 뿌리는 원래 武川鎭 군벌이었다.
 고구려는 영류왕 2년(619) 2월, 당 고조 李淵에게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백제와 신라가 당에 조공했던 621년보다 2년 앞선 시점이었다. 고구려는 영류왕 4년 이후 매년 당에 조공사를 파견했다. 집권자로서 영류왕은 對唐 온건론을 주장하던 國內城派(국내성파)를 지지했다.
 唐 高祖도 영류왕 5년(622)에 화해의 국서를 보냈다.
 「(전략) 지금은 바야흐로 천지사방이 편안하며 사해가 무사하니, 예물이 내왕하되 길에 막힘이 없으며, 서로 화목하고 우호의 정이 굳건히 하면서 각각 자기의 영역을 보호하고 있으니, 어찌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소?」
 비록 외교적 언사이긴 하지만, 역대 중국 통일 왕조의 군주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정중한 자세였다. 아직 당으로선 해결해야 할 국내외 문제가 산적했던 시기였던 만큼 동북아의 전통적 강자 고구려에게 위세를 뽐낼 형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당 고조로서는 창업 군주로서 국내의 안정을 위해 對隋戰(대수전)의 영웅 영류왕에게 간곡한 청탁을 해야 할 입장이었다.
 「다만 隋 말년에 연이어 전쟁을 하였으니, 전쟁의 땅에는 어디에나 유랑민이 있을 것이오. 이리하여 마침내 골육이 헤어지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갈라져 긴 세월이 지나도록 짝 잃은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는 바이오. 이제 우리 두 나라가 화친을 맺으니 우리의 情義(정의)는 다를 바 없소. 이곳에 있는 고구려인을 이미 전부 조사하여 즉시 돌려 보내기로 하였으니, 그곳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도 돌려 보내어,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정책에 힘을 다하여, 인자하고 너그러운 도리를 서로 넓혀 나가기로 합시다」
 정상적인 외교에는 일방적인 시혜는 없다. 영류왕도 중국인 포로 1만여명을 돌려 보냈다. 이후 麗-唐의 밀월 시대가 잠시 전개된다. 영양왕은 재위 7년(624)엔 당에 사신을 보내 冊曆(책력)을 반포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唐의 책력을 구한다는 것은 당의 朝貢冊封(조공책봉) 체제에 들어가겠다는 의사 표시다.
 唐은 형부상서(법무장관) 沈叔安(심숙안)을 파견하여 영류왕을 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王(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道士에 명하여 天尊(천존=옥황상제)의 화상과 道敎(도교) 경전을 갖고 고구려에 가서 老子(노자·道德經)를 강의하게 했다. 영류왕과 백성들이 도교 강의를 들었다.
 당 고조 李淵은 도교에서 교조로 받드는 李耳(이이·老子)가 同姓(동성)의 성인이라 하여 도교를 크게 우대했다. 그러니까 영류왕은 당 고조의 비위를 맞춰 준 셈이다. 이런 판에 신라와 백제가 끼어들어 고구려를 견제한다.
 626년 신라와 백제는 당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고 예방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자주 침략한다』고 호소했다. 당시 고구려가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전통적 연안 항로인 老鐵山水路(노철산수로)의 장악은 물론 3국 모두가 이용했던 황해 횡단 직선항로(백령도-산동반도)에서까지 고구려의 우위가 확립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드디어 당 고조는 동방 3국의 분쟁 조정자를 자임한다. 그는 散騎侍郞(산기시랑·문하성의 정4품) 朱子奢(주자사)에게 황제의 신임표를 지참시켜 영류왕에게 파견하여 세 나라가 화친하기를 권했다. 이에 영류왕은 당 고조에게 표문을 올려 사죄하고 신라, 백제와 화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李世民의 쿠데타
 
 이럴 무렵인 고조 9년(626) 6월4일, 唐에서는 제2 황자 李世民이 황태자 建成(건성)과 제3 황자 元吉(원길)을 죽이고, 두 형제의 아들 10명까지 도륙해버리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역사에서는 건성과 원길의 피습 장소인 長安城 북문의 이름을 따 玄武門(현무문)의 變(변)이라고 부른다. 이 쿠데타가 일어나자, 당 고조는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차남 世民에게 황제의 위를 넘겨 주고 장안 교외에 있는 泰安宮(태안궁)으로 은거해버렸다.
 이세민이 이해 가을 8월8일에 즉위하니, 그가 바로 唐 太宗(태종)이다. 태종은 唐 창업을 주도했을 만큼 결단력과 야심을 겸비한데다 대단한 음모가인 동시에 전략적 사고를 지닌 인물이었다. 중국에선 「貞觀(정관)의 治(치)」를 이룩한 최고의 명군으로 꼽고 있지만, 지금 북한의 역사책에서는 그를 반드시 「당 태종 놈」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세민은 처음 반란군을 일으켜 장안을 공략할 때, 돌궐에 臣稱(신칭)하고 可汗(가한)으로부터 원병으로 기병 3천기를 얻었다. 당 고조는 長安을 차지하자, 돌궐에 다량의 보물로 조공했다. 돌궐은 이같이 실리를 챙기면서 북방으로 판도를 넓혀 그 세력이 당을 웃돌고 있었다.
 唐軍은 돌궐군과 625년 山西省(산서성) 大谷(대곡)에서 싸우다 대패하여 中書令(중서령) 溫彦博(온언박)이 전사했다. 이때 당 고조는 國都를 江南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차남 世敏(세민·후의 태종)의 강경한 반대로 결심을 번복한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태종은 이런 돌궐을 잔뜩 노리고 대비하고 있다가 조공품의 증액 교섭을 유리하게 진행시키기 위해 북방을 다시 침략한 돌궐을 대파하고 추격전을 전개하여, 그 군주 利可汗(힐리가한)과 돌궐병 5만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당과 돌궐의 위상이 일거에 역전되었다.
 영류왕은 재위 11년(628) 9월에 사신을 보내 힐리가한의 포획을 축하하고, 고구려의 封域圖(봉역도)를 바쳤다. 이것은 고구려가 더 이상 국토를 확장할 의도가 없고 평화 지향적이라는 사실을 당에 알리려는 의도였겠지만, 국가의 1급 비밀을 스스로 공개한 이적행위임엔 틀림없다.
 당 태종은 다시 서역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漢 武帝(한 무제) 때 개척된 서방을 향한 무역로인 실크 로드(Silk Road)의 舊路(구로)를 다시 개통시키려고 했다. 당시 新路(신로)는 서역의 강자 高昌國(고창국)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舊路를 다시 트면 자국의 영역을 비켜가는 만큼 당연히 舊路 재개통을 방해했다. 당 태종은 639년 원정군을 파견하여 高昌國을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남쪽의 閔(민·지금의 복건성 일대) 지역도 일찌감치 복속했다.
 당의 위세가 갈수록 높아가자, 영류왕으로서는 당과의 친선 관계를 더욱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영류왕 23년(640) 2월에 태자 桓權(환권)이 入唐하여 조공했다. 환권을 통해 영류왕은 당에 자제들을 보낼 터이니 國學(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자제들을 당의 국학에 입학시켜 달라고 했던 것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 돌궐, 고창국, 왜국 등 주변국 모두의 요망 사항이었다. 그 결과, 세계 제2차 대전 후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 하에서 미국이 각종 장학제도로 세계의 유학생들을 운집시켰던 사례와 같이 唐 제국도 國學을 운영했다.
 
 利敵행위와 誤判
 
 그러나 당 태종은 고구려만은 어떻게든 정복하겠다는 속셈을 굳히고 있었다. 그것이 영양왕 24년(641)에 고구려를 방문한 사신 陳大德(진대덕)의 행각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선 진대덕의 방문은 고구려 태자(桓權) 入唐에 대한 謝禮使(사례사)란 희한한 형식을 취했다.
 <그는 우리나라(고구려) 경내에 들어오면서 이르는 성읍마다 수비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내가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니, 여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수비하는 자들이 기꺼이 안내하니,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 지리에 대해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진대덕은 영류왕 11년(627), 당에 올린 고구려의 封域圖를 일일이 확인하는 간첩이었다. 동시에 그는 고구려에 정착한 隋軍 출신 포로들의 망향심을 부추기는 아지테이터(선동선전꾼)였다.
 「그는 중국인으로서 隋 말기에 군사를 따라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던 자들을 만나 친척들의 안부를 전해 주니, 모두 눈물을 흘렸다. (중략) 大德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했다」
 진대덕은 본국으로 돌아가 당 태종에게 『고구려는 高昌國이 멸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 사신들의 숙소 접대 범절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때 당 태종은 크게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본래 중국의 4郡이었던 곳이다. 내가 수만의 군사를 움직여 요동을 공격하면, 그들은 반드시 온 국력을 기울여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때 별도로 水軍을 東萊(山東省)에서 출발시켜 바다로 평양을 향하게 하고 水陸軍이 합세하면 고구려를 점령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山東의 州縣에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내가 그들을 수고롭게 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이다」
 이런 당 태종의 속셈을 꿰뚫어 본 사람이 바로 연개소문이었다. 따라서 642년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일면의 정당성도 있었지만, 지도부 1백여명을 학살했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국가적 손실이었다. 유혈 쿠데타 직후, 연개소문의 집권에 반대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특히 安市城(안시성) 성주였던 楊萬春(양만춘)은 연개소문의 독주에 반발했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양자가 타협하여 양만춘은 연개소문을 새로운 집권자로 인정하고, 연개소문은 양만춘을 안시성 성주의 지위를 보장하는 선에서 절충점을 찾았다.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정당성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취한 강경 외교가 국익에 부합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당과의 대결을 무릅쓰고라도 동북아에서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세민 집권 후의 당은 이미 중원 주변의 북방, 서방, 남방을 평정하고 중국 중심의 일원적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려 했다.
 이런 唐의 대외 팽창 정책에 맞서려면 연개소문은 좀더 유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쿠데타 직후, 그를 만나러 온 김춘추의 제의를 거절했던 그의 정책은 졸렬했다. 어쩌면 신라의 국력을 깔본 오만 때문이거나 정권 안보를 최우선에 두고 대외 강경책으로 국내 정치 세력의 반발을 눌러버리려는 독재자의 상용 수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런 품성의 인물이었음은 「舊唐書」(구당서) 東夷傳 고구려 條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수염과 얼굴이 매우 준수하고 걸출하였다. 몸에는 항상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는데, 주위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언제나 그의 官屬(관속)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이를 밟고 말을 탔으며, 말에서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의장대를 앞세우고 선도자가 큰 소리로 행인들을 물리치는데, 백성들이 두려움 때문에 피해 모두 스스로 坑(갱)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런 평가는 敗亡國(패망국)의 집권자에 대한 일방적인 폄하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든 이런 독재자에겐 백성들이 두려워할망정 심복하지는 않는다.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麗-唐 전쟁 시기에 고구려 장병들 중 투항자가 대거 속출하는 상황으로 나타난다. 원래 고구려의 국법은 출정군 장수의 가족들은 반드시 王京에 거주하게 하고 투항자의 가족에 대해선 살갗을 벗겨 처형할 만큼 혹독했는데도 투항자가 유별나게 많았다는 것은 독재 권력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협상 결렬
 
 나는 이런 이유에서 연개소문에 대해 단재 신채호나 북한 이데올로그들이 상용하는 「千古英傑」이나 「애국 명장」이란 찬양 문구에 동의할 수 없다. 일찍이 중국 춘추전국시대 楚(초)의 명장 吳起는 부하들의 몸에 난 종기를 입으로 빨아 주었고, 연개소문의 맞상대 당 태종은 그의 부하가 고구려 군과의 전투중 발에 상처를 입었다고 손수 침을 놓아주기까지 했다.
 당 태종의 쇼맨십은 대단했다. 貞觀(태종의 연호) 초에 메뚜기떼가 창궐하여 내리 흉년이 들자, 그는 들판에 나가 메뚜기를 잡아 얼른 집어 삼키면서 『차라리 나의 창자를 갉아 먹어라』고 부르짖었다. 집권자나 將帥(장수)의 언행이 이 정도라면 백성이나 장졸들은 뻔히 알면서도 속아넘어가 주는 것이 人之常情(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對唐 강경파라고 해서 대결 노선만을 취할 만큼 저돌적인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開戰(개전)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것은 그가 보장왕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한 대목을 보면 확연하다.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는 솥의 다리에 비유되나니, 어느 하나도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흥하고 있으나, 도교가 성하지 않으니 천하의 도술을 전부 갖추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唐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소서』
 허수아비 군주인 보장왕은 곧장 당 태종에게 표문을 올려 이 뜻을 알렸다. 당 태종은 즉각 도사 叔達(숙달) 등 8명을 파견하고, 도교의 경전 道德經(도덕경)을 함께 보내 주었다. 보장왕은 기뻐하며, 사찰에 그들의 숙소를 정해 주었다.
 이같은 연개소문의 화해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당 태종의 속셈은 불변이었다. 그 명분은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政事(정사)를 제 마음대로 하니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 백제가 신라의 40여城을 빼앗고 고구려와 連和(연화=연합)하여 신라의 조공 길을 끊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구원을 요청했다. 644년 당 태종은 고구려에 司農丞(사농승) 相里玄奬(상리현장)을 파견하여 보장왕에게 다음과 같은 문서를 전달했다.
 『신라는 우리를 잘 섬기고 조공도 빠지지 않으니 그대는 백제와 함께 마땅히 군사를 거두라. 만약 다시 공격한다면 명년에 군사를 보내어 그대 나라를 칠 것이다』
 이에 연개소문이 분연히 말한다.
 『지난날 수가 우리 나라를 침략했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서 우리 땅 5백리를 빼앗았소. 우리에게 빼앗은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싸움을 그만둘 수 없소』
 상리현장이 말을 받는다.
 『이미 지난 일을 따져 무엇하겠소? 요동의 여러 성도 본래 중국의 군현인데 중국은 언급하지 않았소. 고구려는 어찌 옛 땅을 꼭 찾으려 하오?』
 이런 설전을 교환한 끝에 麗-唐 양국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상리현장은 다시 백제로 넘어가 신라와의 화평을 종용했다. 이에 의자왕은 사죄하고 화평안을 받아들였다.
 唐 太宗은 다시 고구려에 蔣儼(장엄)을 사신으로 보냈다. 연개소문은 장엄을 간첩으로 지목하여 굴 속에 가둬버렸다. 그러면서도 유화책을 병행시켰다.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 당 태종에게 백금을 바쳤다. 당 태종은 이를 물리쳤다. 또 고구려 사신이 『우리 막리지가 벼슬아치 50명을 보내 황제를 숙위하려 합니다』고 전하자, 태종은 불같이 화를 내고 그를 감옥에 가둬버렸다.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麗-唐 전쟁의 開戰
 
 645년 4월, 당 태종의 고구려 침략이 시작된다. 요동도행군대총관 李世勣(이세적)과 부총관 道宗(도종)은 기병 6만과 降胡(항호)를 거느리고 通定津(통정진)에서 요하를 건넜다. 고구려의 성읍들은 모두 성문을 닫아 걸고 수비 태세에 돌입했다.
 營州(영주) 도독 張儉(장검)은 선봉부대인 胡兵(호병)을 거느리고 建安城(건안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군사 수천명을 전사시켰다. 이세적과 道宗은 蓋牟城(개모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1만명을 생포하였으며, 양곡 10만석을 탈취했다.
 평양도행군대총관 張亮(장량)은 水軍 4만3천을 전함 5백 척에 태우고 산동성의 東萊(동래)로부터 요동반도의 남단 卑沙城(비사성)을 공략했다. 비사성은 5월에 함락되고 남녀 8천명이 죽었다.
 이세적의 주력군이 요동성 아래까지 진출했다. 요동성은 수 양제의 침입 때 難攻不落(난공불락)의 요새이며 결전장이었던 만큼 연개소문은 신성, 국내성의 步騎 4만을 구원병으로 급파했다. 구원병은 처음에 당의 장군애 軍을 격파하여 기세를 올렸으나, 이세적-도종 군에게 무너졌다.
 이세적은 12일간에 걸쳐 주야로 요동성을 공격했다. 당 태종도 정예 부대를 이끌고 와서 요동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당의 특공대는 요동성의 서남루에 불을 질러 성안에 火光(화광)이 충천했다. 드디어 고구려 군사 1만여명이 전사하고, 남녀 주민 4만명이 생포되었으며, 50만석의 양곡을 탈취당했다.
 이세적 軍은 이어 白巖城(백암성)을 공격했다. 백암성 성주 孫大音(손대음)은 수성전을 벌여보지도 않고 항복했다. 드디어 당 태종은 여-당 전쟁 최대의 격전지 안시성의 공격에 나섰다.
 이에 북부 褥薩(욕살) 高延壽(고연수)와 남부 욕살 高惠眞(고혜진)은 고구려-말갈 연합군 15만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러 달려 왔다. 욕살이라면 전국 5部의 장관들 중 1인이다. 이때 나이 많고 경험 풍부한 對盧(대로·제4위의 관등) 高正義(고정의)가 고연수에게 계책을 올린다.
 『秦王(진왕·당 태종)은 안으로는 군웅들을 베고, 밖으로는 戎狄(융적·서방과 북방의 오랑캐)을 굴복시켜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니, 천명을 받은 인재라 할 만하오. 지금 그가 海內의 무리를 이끌고 왔으므로 대적하기 어렵소. 나의 계책은 군사를 정비하되 싸우지 않고, 여러 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면서 奇兵(기병)을 보내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는 것이오. 저들은 군량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갈 길이 없소. 이때 들이치면 戰勝(전승)을 기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고연수는 이 헌책을 듣지 않았다. 그는 대군을 휘몰아 안시성 밖 40리 지점까지 진군하여 영채를 세웠다. 당 태종이 측근 長孫無忌(장손무기·장손황후의 오빠)와 경호 기병 수백기를 데리고 고지에 올라 고구려군의 영채를 관찰했다. 영채의 길이가 40리에 뻗쳐 있는 고구려군의 군세에 두려움을 느낀 당 태종은 고연수의 진영에 軍使(군사)를 보내 짐짓 유화책을 구사한다.
 『나는 그대 나라의 强臣(강신·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한 죄를 물으러 온 것이니, 우리가 서로 싸우는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그대 나라 경내에 들어오니 말먹이와 양식이 충분치 않아 몇 개 성을 빼앗기는 했으나, 그대 나라가 신하의 예를 지킨다면 잃었던 城을 반드시 되돌려 줄 것이다』
 고연수는 이 말에 넘어가 경계 태세를 늦추었다. 당 태종은 이세적에게 보병과 기병 1만5천을 주어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牛進達(우진달)에게 정병 1만1천을 주어 奇兵(기병)으로 삼았다. 당 태종 자신도 직접 보병과 기병 4천을 이끌고 고지에 올랐다.
 
 안시성의 영웅 楊萬春
 
 다음날 아침, 고연수는 이세적 軍의 병력이 적은 것만 보고 군사를 휘몰아 공격하려 했다. 이때 唐軍이 앞 뒤에서 일제히 일어나 고구려군을 협격했다. 고연수는 공격 대형에서 방어 대형으로 전환시켰지만, 고구려 진영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만다. 이 틈에 薛仁貴(설인귀)가 고구려 진영 깊숙이 돌진하여 좌충우돌하며 무용을 뽐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 軍 3만여명이 전사하고 다수 병력이 흩어졌다.
 가까스로 패군을 수습한 고연수는 산을 의지하여 영채를 꾸리고 수비를 강화했다. 당 태종은 휘하 全 부대를 동원하여 고연수 軍을 포위하고, 장손무기에게는 교량을 전부 철거케 하여 귀로를 차단했다.
 이에 고연수와 고혜진은 군사 3만6천8백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唐의 군문에 들어가 목숨을 구걸했다. 唐 太宗은 褥薩(욕살) 이하 官長(관장) 3천5백명을 제외한 나머지 병졸들은 모두 석방했다. 그러나 말갈인 3천3백명은 모두 생매장했다. 麗-唐 양국의 전쟁에서 고구려측에 협조하던 주변 이민족에게는 본때를 보인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唐軍은 안시성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안시성은 요지부동이었다. 부총관 道宗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에 土山을 쌓아 성벽 쪽으로 점점 접근해 왔다. 당군은 衝車(충거)와 포석 등 攻城(공성) 무기로 성루와 성첩을 허물었으나, 守城軍은 그때마다 목책을 세워 부서진 곳을 틀어막았다.
 60일 동안 연인원 50만을 동원하여 쌓은 土山(토산)이 기어이 완성되었다. 토산의 꼭대기가 城보다 두어 길이나 높았기 때문에 당군은 내려다보고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산이 허물어지면서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다. 고구려의 결사대 수백명이 나가 싸워 기어이 토산을 탈취하여 참호를 파고 수비를 굳혔다. 당 태종은 격노하여 토산을 빼앗긴 지휘관 傅伏愛(부복애)의 목을 베고, 장수들의 공성전을 독려했다. 그러나 다시 사흘이 지났지만, 안시성은 떨어지지 않았다.
 요동지방은 일찍 추워져 풀이 마르고 물이 언다. 당 태종은 야전에서 대군을 오래 머물게 할 수 없으며 군량 또한 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하여 철수를 명했다. 당 태종 자신이 눈에 독화살을 맞아 전의를 상실했다는 얘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唐 太宗은 성주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장하게 여겨 겹실로 짠 비단 1백필을 주어 자기 임금을 섬기는 자세를 격려했다. 역시 그다운 쇼맨십이었다. 그러나 그의 회군길은 엄혹했다. 진흙길을 메우는 데 당 태종이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는 일을 거들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해 10월, 당군이 겨우 渤錯水(발착수)를 건너 당의 경내로 회군했는데, 바람과 눈보라가 휘몰아쳐 군사들 중에 동사자가 많이 생겼다.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깊이 후회하며 탄식했다.
 『만일 魏徵(위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했을 것이다』
 위징이라면 생전에 당 태종에게 직언을 잘했던 名臣이다. 당 태종은 645년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고 647년부터 장기전략을 수립한다. 그것은 소수의 병력을 요동에 보내 자주 고구려를 침략케 함으로써 고구려를 피로케 한 다음 일거에 大軍(대군)을 일으켜 멸망시킨다는 전략인데, 唐 太宗은 649년 4월 패전의 회한 속에 병사하고 만다. 그러나 이같은 장기전략은 그의 후계자 唐 高宗(고종)에 의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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