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庾信과 그의 시대(1)
정순태 옷깃과 벼리가 되겠다
신라 진평왕 51년(서기 629) 가을 8월. 이찬(신라 17관등 중 제2위) 任永里(임영리), 소판(제3위의 관등) 舒玄(서현),
파진찬(제4위의 관등) 龍春(용춘) 등은 왕명을 받고 고구려의 娘臂城(낭비성:지금의 충북 청주)을 공략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전통의 군사강국.
신라군은 오히려 역공을 받고 全軍(전군) 궤멸의 위기에 몰린다. 전사자가 속출하자 신라군은 戰意(전의)마저 잃고 만다. 이때
金庾信(김유신)은 中幢(중당)의 幢主(당주:지휘관)로 출전하고 있다. 중당은 三國史記 職官志(삼국사기 직관지)에는 나오지 않는 부대명으로 그
편제나 기능은 알 수 없지만, 관련 記事(기사)의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 별동 기동부대로 보인다. 당시 그의 계급은 副將軍(부장군). 그러니까
오늘날의 연대급 부대의 지휘관인 것 같다. 김유신은 그의 부친 서현 장군에게 나아가 말한다. 『옷깃(領)을 들어야 갖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鋼)를 당겨야 그물(網)이 펴진다고 합니다. 제가 옷깃과 벼리가 되겠습니다』 金庾信은 분연히 말에 올라
장검을 뽑아 든다. 그리고는 單騎(단기)로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 돌격을 감행한다. 軍心(군심)에 영향을 주는 勇士(용사)의 좌충우돌은 그가
누구든 절대로 그냥 놔둘 수 없다. 그것이 바로 戰場(전장)의 생리다. 賊將(적장)도 말을 달려 김유신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적장은
김유신의 交鋒(교봉)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적장의 목을 치고 軍旗(군기)를 탈취한 김유신의 분전. 바로 이 순간 신라군의
士氣(사기)가 하늘을 찌른다. 승세를 탄 신라군은 돌격을 감행한다. 이 돌격전에서 신라군은 고구려군 5천여명의 목을 베고 1천명을 사로잡는다.
성 안의 고구려 軍民(군민)들은 엄청난 逆戰(역전)의 사태에 모두 전율한다. 그래서 다투어 성문을 열고 나와 김유신의 말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이것은 三國史記 卷(권) 41 김유신 傳(전)에 기록되어 있는 낭비성 싸움의 전투상보(戰鬪詳報)다. 김유신은 戰場의
심리, 그리고 승패의 갈림길인 戰機(전기)를 꿰뚫어 보는 승부사였다. 스포츠에 비교한다면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한 점씩 득점하다가 시합
종료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승부가 결정되는 축구가 아니라 한순간에 일발 대역전을 연출하는 야구 경기다. 야구는 0대 3으로
뒤지고 있다가도 9회 말 공격에서 만루 홈런 한 방으로 대세를 뒤집는다. 야구 경기로 치자면 김유신은 9회 말에 역전 그랜드 슬럼을 기록한
셈이다. 삼국사기 등 史書(사서)에서 낭비성 전투 이전에 김유신이 전장에 출전했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낭비성 전투 당시에
그의 나이 35세. 名將(명장)의 데뷔戰으로는 상당히 늦은 편이다. 그렇다고 15세에 이미 花郞(화랑)의 반열에 올랐던
김유신이 그후 20년간이나 한번도 전장에 출전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연대장급 고급 장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그는 하급, 중급
지휘관으로 복무하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왔던 것으로 인정된다. 『옷깃과 벼리가 되겠다』는 김유신의 말은 1898년 이집트
원정의 최대 고비였던 피라미드 전투에서 병사들을 격동시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名言(명언)과 좋은 대비가 된다. 나폴레옹은 저
멀리 보이는 기제의 피라미드를 가리키며 『4천년의 역사가 諸君(제군)들을 굽어보고 있다』고 외쳤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명예심을 자극하는 선동
구호 한 마디로 이집트의 6만 대군을 격파했고, 김유신은 자기 한 몸을 死地(사지)로 던지는 언행일치로 절대절명의 敗勢(패세)를 勝勢(승세)로
뒤집어 놓았다. 나폴레옹의 레토릭은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과시라도 하려는 듯 화려하고, 김유신의 그것에는 인간적 고뇌와
성실성이 배어 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영광」 바로 그것이라면 김유신은 우리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한국적 자존심의
상징이다. 1796년 이탈리아 원정중의 아르콜레 會戰(회전)에서 나폴레옹은 奇策(기책)으로 전장의 교착 상태를 일거에 깨뜨려
버린다. 그는 해질 무렵, 오스트리아 軍 후방에 騎兵(기병) 50기(一說은 25기)를 가만히 우회시킨다. 그리고는 적 배후에서 돌격 나팔을
불도록 한다. 뜻밖의 나팔 소리에 오스트리아 軍 장병들은 일대 혼란에 빠져버린다. 그 순간 나폴레옹은 선두에서 말을 달려
정면 돌격을 감행했다. 아르콜레의 船橋(선교)가 오스트리아 軍의 포격에 명중되는 바람에 그는 추락하여 늪 속에 빠지면서 기절을 해버렸다.
그러나 사흘 동안 완강하게 버티던 오스트리아 軍 진지가 騎兵 50기의 배후 출현과 나폴레옹의 선두 돌격에 의한 프랑스 軍의
분발로 맥도 추지 못하고 붕괴했다. 이처럼 전장에서는 이론상 설명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된다. 김유신의 單騎(단기) 돌진도 바로 兵法(병법)에서
말하는 奇兵(기병)에 의한 戰場心理(전장심리)의 장악이었다. 金庾信 등장 직전의 삼국
쟁패전 낭비성 전투는 한반도의 중심부인 한강 유역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격돌한 南進(남진) 세력과 北進
세력의 결전이었다. 또한 그 결과는 고구려군에 대한 신라군의 해묵은 열등감을 일거에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김유신은 역사의 前面(전면)에
부상하게 되지만, 여기서 우리 역사상 최대의 전국시대로 돌입하는 과정을 잠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4세기 말부터 6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東아시아 세계에서 고구려가 군사 1류국이라면 신라는 3류국에 불과했다. 고구려는 심지어 신라의 왕위 계승 문제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정치적, 군사적 우위에 있었다. 예컨대 신라 21대 訥祗王(눌지왕:417~458)은 實聖王(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지원 때문이었다. 그러나 눌지왕 17년(433)에 이르면 신라는 백제와 우호 관계를 맺고, 차츰
고구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475년 고구려 長壽王(장수왕)이 3만 병력을 투입하여 백제의 왕도 漢城(한성:서울 송파구 夢村土城
일대)을 포위했을 때 신라 慈悲王(자비왕)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 1만을 급파했다. 신라의 구원군이 당도하기도 전에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기는 했지만, 이후 羅濟 군사동맹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는 기본 틀이 되었다. 麗-濟 양국에 억눌려 오기만
했던 신라가 처음으로 攻勢(공세)로 전환했던 것은 진흥왕(540~576) 때였다. 진흥왕 11년(550)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일진일퇴의
전투를 벌이던 와중에 고구려의 金峴城(금현성:지금의 충북 진천)과 백제의 道薩城(도살성:지금의 충북 청주)을 탈취했다. 다음은 삼국사기 관련
기록의 요약. 「550년 봄 1월, 백제 聖王(성왕)이 장군 達己(달기)에게 兵 1만을 주어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취했다.
그러자 고구려는 3월에 백제의 금현성을 攻陷(공함)했다. 제-려 양국 병이 사력을 다해 싸우매, 양편이 심히 피로해 있었다. 이를 틈탄 신라의
진흥왕이 장군 異斯夫(이사부)를 보내 도살, 금현 두 성내의 제-려 양군을 다 쫓아내고 성을 증축하여 甲士(갑사) 1천명씩을 배치하여 지키라
했다」 이같은 신라의 책략은 孫子兵法(손자병법)에서 말하는 以逸待勞(이일대로:충분한 휴식을 취한 병력으로써 피로한 적을 침),
바로 그것이다. 서기 208년 赤壁大戰(적벽대전)에서 孫權(손권) 軍이 사력을 다해 曹操(조조) 軍을 패퇴시키는 와중에서 쟁탈의 요충인
荊州(형주)를 劉備(유비) 軍의 모사 諸葛亮(제갈량)이 가로챈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이후 魏(위), 蜀(촉), 吳(오)의 鼎立(정립)이라는
중국 역사상의 삼국시대가 전개되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 적국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맹국 백제의 땅까지 횡탈했다. 그런데도
나-제 동맹 관계가 깨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신라의 외교적 승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다음해인 진흥왕
12년(551)에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10개 郡을 탈취했다. 백제의 聖王도 이때 왕조 발상지인 한강 하류 6개 郡을 탈환하여
蓋鹵王(개로왕)의 敗死(패사, 475년) 이래 처음으로 고구려에 설욕했다. 나-제 양군의 승리는 고구려의 내우외환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결과였다. 551년 가을 7월 고구려는 新城(신성:오늘의 遼寧城 撫順) 쪽으로 침입해온 突厥(돌궐)을 방어하기 위해 한강
이남의 주력군을 남만주 지역으로 빼돌려놓은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陽原王(545~559) 代의 고구려는 왕위 계승 문제 등과 관련, 지배층
내부에 심각한 내분까지 빚어지고 있었다. 어떠한 군사 강국도 국내 정정이 불안한 가운데 二正面(2정면), 혹은 三正面 작전은
무리다. 이때의 고구려도 돌궐의 남침 상황에서 나-제 연합군의 협공을 받고 이렇다 할 방어전 한번 치르지 못하고 長壽王(413~491)代 이래
장악해 온 한반도 중부 지역에 대한 패권을 상실하고 만다. 고구려 勢가 물러난 한강 유역은 백제와 신라가 양분했다. 오늘날의
강원도를 포함한 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하류 지역은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된 것이다. 그러나 강 하나의 유역을 사이좋게 나눠 가진다는
것은 신라나 백제라는 두 고대국가가 지닌 속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었다. 더구나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은 신라가 탈취한 상류
유역보다 전략적, 경제적 가치가 월등한 지역이었다. 원래 古代국가는 처음엔 사방 수십리도 되지 않는 城邑(성읍)국가에서
출발하여 주변의 고만고만한 성읍국가들을 하나하나 제압하면서 영토를 넓혀온 정복국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발전 과정이 모두 그러했다. 따라서
한강 유역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백제-신라의 격돌은 예정된 手順(수순)이었다. 이같은 대결을 예상한 聖王은 倭國(왜국)에 불교를 전하는 등의
외교적 노력으로 백제-왜의 동맹 관계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백제 聖王을 敗死시킨 김유신의
祖父 서기 433년 이래 1백20년간 계속되어 오던 신라-백제의 동맹 관계를 먼저 결정적으로 파기한 쪽은
신라였다. 그 무렵 백제의 성왕은 守勢(수세)에 몰린 고구려에 결정타를 가할 심산으로 지속적인 연합전선 형성에 의한 北侵(북침)을 신라측에
제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생각은 달랐다. 다음은 三國遺事(삼국유사)의 관련 기록. 「백제는 신라와 合兵(합병)하여
고구려 정벌을 도모했다. 그러나 진흥왕이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같은 진흥왕의 발언은 매우 정략적인 레토릭이었다. 쉽게 말하면 고구려 변경의 실속 없는 땅을
얼마 더 탈취하기보다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이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만큼 탐났다는 얘기다.
「국제정치(외교)엔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으며, 오직 국가이익만 있을 따름이다」--전성기 大英(대영)제국의 재상 팔머스톤
卿(경)이 갈파한 명언이다. 진흥왕의 속셈이야 어떠했든 위기에 몰린 고구려로서는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었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진흥왕의 말을 전해 듣고 감동해 화친을 맺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로서는 백제와의 대결에 대비, 고구려로부터 최소한
好意的(호의적) 중립을 확보해 놓은 것이다. 이런 가운데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 신라군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6개 군을 횡탈하여 新州(신주)를 설치했다. 이때 新州의 軍主(군주;管區사령관을 겸한 지방장관)에 武力(무력)이 기용되었다.
여기서 역사 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武力은 532년 신라에 병합된 금관가야(金官伽倻:경남 김해)의 마지막 왕 仇衡(구형)의 아들로서, 바로
김유신의 祖父다. 망국의 왕자 출신이면서도 전략적으로 예민한 새 점령지의 지휘권을 장악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武力은 한강 하류 지역의 공취에
상당한 전공을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힘들게 수복한 故土(고토)를 횡탈당한 백제로선 신라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聖王은 그해 10월 왕자 餘昌(여창)을 장수로 삼아 일단 고구려를 공격한다. 고구려 쪽에 허점이 있었던 듯하다.
이때 전투 규모는 컸지만, 승패는 무승부였다. 聖王이 신라부터 응징하지 않고 고구려 남쪽 변경을 먼저 공격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원래 충분한 대비책을 세우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는 적에 대한 공격은 下之下策(하지하책)이기는 하다. 어떻든 진흥왕 代의 신라군은
백제군 단독으로선 승전을 기약할 수 없을 만한 戰力(전력)을 보유했던 것 같다. 백제 성왕의 책략도 녹록치 않았다. 삼국사기
聖王 31년(553) 10월 條를 보면 백제는 고구려 공격전과 거의 동시에 聖王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소비)로 시집을 보내고 있다. 이같은 정략
결혼은 비수를 감춘 성왕의 위장 평화 공세였다. 이러는 동안 백제를 지원하기 위한 倭國(왜국)의 원병과 전쟁 물자가 속속
내도했다. 신라에게 합병의 압박을 받고 있던 大伽倻(대가야:경북 고령) 중심의 後期(후기) 가야연맹 諸國(제국)도 백제 진영에 가담했다. 성왕은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결성되자 왕자 餘昌을 장수로 삼아 회심의 신라 정벌전을 개시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흥왕
15년(554) 9월 백제군은 신라의 서부 국경에 침입하여 남녀 3만9천명을 포로로 잡고, 말 8천필을 탈취했다. 서전의 승리라 할
만하다. 그러나 백제로서는 불운했다. 원정군 최고 지휘관인 왕자 餘昌이 陣中(진중)에서 병을 얻었던 것이다.
백제의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성왕이 아들의 급작스런 병을 걱정하여 불과 50기만 거느리고 백제군의 전선사령부가
설치된 管山城(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으로 달려가던 중 오늘날의 大田 동쪽 식장산에서 신라의 복병에 걸려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식장산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大田 터널 남쪽으로 빤히 보이는 높이 5백98m짜리 험산이다. 백제 중흥의 英主(영주)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성왕의 목을 벤 인물은 신라의 三年山城(삼년산성:지금의 충북 보은)의 高干(고간:신라 지방관직 10등급 중
제3위)인 都刀(도도)였다. 都刀는 바로 新州 軍主인 武力 휘하의 裨將(비장)이었다. 이때의 상황은 日本書紀(일본서기) 欽明(흠명)
15년(554) 12월 條의 기사가 가장 실감 있다. 「(전략) 얼마 후 都刀가 明王(명왕=성왕)을 사로잡았다.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려 하니 明王이 꾸짖어 가로되 『종놈이 감히 왕의 목을 베려 하느냐』고 했다. 都刀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법은 맹서를 위배하면
왕이라도 종놈의 손에 죽습니다』고 했다. 明王이 탄식하여 가로되, 『과인은 매양 너희 나라의 배신이 골수에 사무쳐 왔다』 하고 마침내 斬(참)을
당했다」 이어 벌어진 管山城 전투에서 金庾信의 조부인 武力의 전공은 발군이었다. 武力 휘하 신주의 州兵을 주력으로 한 신라군은
佐平(좌평:백제의 16관등 중 제1위) 4인을 포함한 백제-가야-왜 연합군 2만9천6백명을 참살했다. 이때 백제군의 최고 지휘관인 왕자 餘昌은
한 가닥 血路(혈로)를 뚫고 겨우 전장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다음은 이어지는 일본서기의 기록. 「餘昌이 포위를 당하여
탈출할 도리가 없었다. 筑紫國造(축자국조)가 활을 쏘아 신라 騎兵 중 최강의 자를 떨어뜨리고, 이어 비오듯 連射(연사)하여 포위군을 물리쳤으매,
여창과 諸將(제장)이 間道(사잇길)로 빠져 도망쳐 나왔다」 筑紫國造는 일본 규슈(九州) 츠쿠시(筑紫) 지방의
「쿠니노미얏고(國造)」, 즉 豪族(호족)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때 참전한 왜병은 1천명 정도였다니까 大勢(대세)에 영향을 줄 만한 규모는
아니었다.<2편에 계속>
|
|
|
金庾信과 그의 시대(2)
정순태 국가적 결단의 중심에 서다
管山城 전투에서 죽을 목숨을 건진 왕자 餘昌이 전사한 聖王을 승계하니 그가 바로 백제 25대 威德王(위덕왕)이다. 관산성
전투는 신라-백제의 國軍(국운)을 판가름한 분수령이었다. 여기서 승세를 탄 신라군은 다시 西進(서진)하여 지금의 금산, 무주, 전주까지 공취하여
完山州(완산주)를 설치했다. 562년(진흥왕 23)에 이르러 드디어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가야연맹의 全 영토를 병합했다.
이같은 진흥왕 代의 잇단 戰勝으로 신라의 국력은 일단 비약적으로 신장된다. 신라는 한강 유역과 낙동강 서쪽 지역(지금의
경남)의 비옥한 토지를 판도에 넣어 경제력이 급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선진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국 대륙과 직접 연결되는 서해 항로의 요충인
黨項城(당항성:지금 경기도 남양)을 장악했다. 이것이 바로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할 수 있었던 도약대가 된다. 그로 인해 신라가
치러야 했던 代價(대가)도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을 만큼 혹독했다. 그 이후 1백년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숙적이 되어 끊임없이 협공을 받아
일방적인 守勢에 몰리고 만다. 한강 유역의 확보로 전선이 확대되었고, 그에 따라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2正面 작전이 불가피해졌던
것이다. 신라의 전통적 외교-안보 정책은 2대 1 전략이었다. 백제가 공세적일 때는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백제에 대항했고,
고구려의 南進(남진)이 강력할 때는 백제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여 죽령과 조령의 국경선을 굳세게 지켰다. 그러니까 삼국간 힘의 균형은 의외로
신라를 중심축으로 하여 움직여 온 셈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신라의 외교는 탁월했다. 그러나 신라의 한강 하류 유역 진출
이래 고구려, 백제는 신라를 「오드 맨 아웃(Odd Man Out:셋 중 하나를 따돌림)게임의 술레로 삼았다. 삼국간의 전선이 개이빨(犬牙)처럼
맞물린 상황 아래 신라가 1(신라)대 2(고구려+백제) 대결이나 2正面 전투를 장기적으로 감당할 만한 국력에 이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런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위기 극복을 위한 내부적 단결과 급변하는 東아시아 정세를 능동적으로
활용한 외교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중국 대륙에서는 3백50년에 걸친 대분열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통일 제국 隋(수)와 唐(당)의
시대가 차례로 전개된다. 중국의 통일 제국들이 구사하는 전통적 對外(대외) 정책은 팽창 전략이다. 신라가 隋-唐의 對外
정책을 어떻게 국가 이익에 활용했는지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상술할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 말기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大戰亂期(대전란기). 먹거나 먹히는 판이니까 외교적 줄타기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던 시대는 결코 아니었다. 이때 신라는 전쟁을 겁내지
않았고, 국가적 위기를 되레 기회로 삼았다. 한번 공격을 당하면 반드시 보복적 공격을 감행하여 失地(실지)를 되찾았다.
불가피한 전쟁은 항상 정당한 것이다. 이런 국가적 결심을 끌어가고, 또 뒷받침했던 인물이 金庾信이었다. 그는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치열한
노력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後世人 감동시킨 자기 희생의 悲壯美
김유신은 押梁州(압량주:경북 경산)의 軍主로 있던 선덕여왕 13년(644)에 蘇判(소판:17관등 중 제3위)에 올랐다. 軍主라면 군관구사령관을
겸한 지방장관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50세였으니까 급행열차를 탄 승진은 아니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해 9월 왕은 그를
上將軍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주어 백제의 加兮城(가혜성), 省熱城(성열성), 同火城(동화성) 등의 일곱 성을 공략토록 했다. 가혜성 등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백제군이 전략적 요충 大耶城(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을 공취하여 신라의 急所(급소)를 누르고 있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낙동강 西岸(서안) 방면의 군사적 거점들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故土(고토) 수복전에서 김유신은 대승을 거두고 가혜에 나루를
개설했다. 신라의 핵심 생산 기반은 낙동강 유역. 낙동강의 水路 개통은 신라 경제를 회생시킨 데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신라가 낙동강
유역의 곡창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이후 장기 동원전에서 군량을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유신은 이듬해(645) 정월에
개선했다. 그러나 미처 여왕을 알현하기도 전에 백제의 대군이 買利浦城(매리포성)을 공략한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낙동강 상류 지역이 위험해진
것이었다. 왕은 다시 김유신에게 上州(상주:경북 尙州) 장군을 제수하고 방어전에 나서도록 했다. 王命(왕명)을 받은 김유신은
처자도 만나지 않고 즉각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매리포 전선에서 백제군을 역습하여 패주시키고, 斬首(참수) 2천급의 전과를
거두었다. 유신은 3월에 개선하여 왕궁에 복명하고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던 참이었다. 백제의 대군이 다시 서부 국경
일대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려 했다. 여왕은 다시 김유신에게 말한다. 『공은 수고를 마다하지 말고, 급히 나아가 적이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대비하오』 이에 김유신은 역시 집에 들르지도 않고, 서부 전선으로 출정한다. 이때 그의 모습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庾信의 가족들은 모두 문 밖에 나와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신은 집 앞을 지나면서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 집에서 50보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러서야 말을 멈추고 자기 집 우물 물을 떠오게 했다. 그는 그 물을 마시면서
말한다. 『우리 집의 물 맛이 아직도 옛 맛 그대로구나』 그때 병사들은 모두 말하기를, 『대장군이 저러한데 우리가 어찌 가족과 헤어지는 것을
한탄할 것이냐』고 했다」 이런 장수의 지휘를 받는 군단은 사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軍 복무규율에서도
「사기는 전투의 승패를 결정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과연 김유신 軍이 국경에 이르자 백제군은 그 위용에 눌려 감히 접전을 벌여보지도 못하고
퇴각했다. 김유신은 자기 자신에게 매우 엄격했던 장수였다. 그렇다고 생사가 걸린 전쟁터로 나가면서 가족들의 마중까지 외면한
그의 태도가 반드시 盡善盡美(진선진미)한 것은 아니다. 김유신의 동생 欽純(흠순) 역시 出將入相(출장입상:나가서도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됨)의 인물이었지만, 세 살 위의 형 유신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다음은 筆寫本(필사본) 花郞世記(화랑세기)의
기록. 「欽純公은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국가에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유신공은 큰일이 있으면 대문 앞을 지나치면서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흠순공은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집에 들러 寶丹娘主(보단낭주:흠순의
부인)와 더불어 얘기를 한 후 다시 나왔다」 흠순은 당대 최고의 애처가였다. 다음은 필사본 화랑세기에 기록된
일화. 「欽純公은 젊어서부터 술을 좋아하여 낭주가 직접 술을 빚어 다락 위에 두고 公이 술을 찾으면 내오곤 했다. 하루는
흠순공이 술을 마시고자 하여 보단낭주가 술을 가지러 다락 위에 올라갔다. 그러나 한참 지나도록 내려오지 않자 흠순공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락
위에 올라가 보니, 큰 뱀이 술 항아리에 들어가 취해 있는 것이었다. 보단낭주는 이를 보고 놀라 쓰러져 일어날 줄 몰랐고, 이에 흠순공이
보단낭주를 업고 내려왔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흠순공이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흠순의 아내 사랑은 현대적 감각으로도
백점 만점을 받을 만하다. 김유신에겐 이런 가정적인 아기자기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김유신의 先公後私(선공후사)가 결코 가볍게 평가될 수는
없다. 김유신은 楚漢戰(초한전)의 영웅 韓信(한신)을 웃도는 戰必勝 功必取(전필승 공필취:한신의 功業에 대한 史記의 표현),
즉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반드시 공을 세우는 常勝將軍(상승장군)이었다. 세계의 戰史上(전사상) 장장 50년간의 세월에 걸쳐 대소 수십 번의
전투를 치르면서 무패를 기록한 장수는 김유신을 제외하면 발견할 수 없다. 김유신의 언행 하나하나를 음미해 보면 자기 희생의
悲壯美(비장미)를 느낄 수 있다. 그는 국가적 위기를 온 몸을 던져 타개했던 인물이다. 우리 민족은 신라 통일 이래 하나로
융합되었다. 삼국 통일 최고의 元勳(원훈)은 김유신이다. 그렇다면 김유신은 우리 민족사에서 최고의 인물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유신에
대한 그 후예들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때로는 모욕적이기까지 하다. 興武大王으로 추존된
까닭 「대개 김유신은 智勇(지용)이 있는 名將(명장)이 아니오, 陰險鷲悍(음험취한:음흉하고 독살스러움)한
정치가이며, 그 평생의 大功(대공)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 隣國(인국:이웃나라)을 亂(난:어지럽힘)한 자이다」 김유신에
대한 丹齋(단재) 신채호(1880~1936)의 평가는 이처럼 혹독하다. 왜일까? 삼국 통일에 대한 단재의 시각에서 그 배경이 드러난다.
「異種(이종:당나라)을 招(초:불러들임)하여 동족(고구려, 백제)을 멸함은 寇賊(구적:도둑)을 引(인:끌어들임)하여 형제를
殺(살)함과 無異(무이:다름없음)하다」 이같은 단재의 인식은 후학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예컨대 사학자
孫晉泰(손진태)는 그의 國史講話(국사강화, 1950)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을 다음과 같이 논죄했다. 「신라로 하여금 외민족의
병력을 빌려서 동족의 국가를 망하게 한 것은 貴族國家(귀족국가)가 가진 본질적 죄악이요, 그로 말미암아 민족의 무대가
좁아졌다」 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에서 편찬한 「고구려 역사」도 다음의 구절로 결론을 삼고 있다. 「만일
삼국시기에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가 단합하여 외래 침략자들과 맞서 싸웠더라면 외래 침략자들은 우리 조국 강토에 한 걸음도 기어들지
못하였을 것이며, 세 나라는 통합되어 우리 조국은 더욱 발전하였을 것이다」 북한은 우리 민족사의 흐름을
단군조선-삼국시대-남북국시대(신라, 발해)-고려-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신라의 삼국 통일을 부인하고 「국토의
남부 통합」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북한의 「조선전사」를 보면 그들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단군조선-고구려-발해에서 찾고
있다. 이 책에선 민족사의 주요 대목 대목마다 김일성 나름의 해석이나 교시를 본문의 書體(서체)보다 크고 굵은 고딕체로 특필하고 있는데, 특히
고구려 중심주의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많다. 「조선전사」에는 辛未洋擾(신미양요) 때 김일성의 조부가 義兵將(의병장)으로
출전, 불배(火船) 공격으로 대동강을 침범한 제너럴 셔먼호를 침몰시켰다는 둥 허구의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북한의 이데올로그(理論家)들은
민족사를 북한 주도의 통일전선에 복무할 수 있도록 변조해 왔다. 따라서 북한의 史觀(사관)은 원천적으로 설득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오늘날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오히려 丹齋의 시각이다. 그것은 一刀兩斷(일도양단)의 裁斷(재단)인 만큼 단순논리의
일반 정서에 영합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오늘의 문제를 풀어가려면 우선은 김유신, 나아가 그가 주도한 삼국 통일에 대한
先人(선인)들의 인식부터 꼼꼼하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 神文王(신문왕) 12년(692) 條 기사는 그와
관련, 우리에게 중대한 시사를 던져 주고 있다. 그 시점의 羅-唐 관계는 국교 단절의 상태였다. 羅-唐 양국은 백제, 고구려의 패망 후 점령지
분할 문제로 충돌, 8년 전쟁을 벌였다. 8년 전쟁에서 신라군에 패한 唐軍은 遼東(요동) 방면으로 물러났으나 대동강 이남의
점령지에 대한 신라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唐의 中宗은 사신을 보내 신라 조정에 시비를 건다.
「우리 太宗 文皇帝(태종 문황제=李世民)는 功德(공덕)이 千古에 뛰어났으니, 붕어하던 날 廟號(묘호)를 太宗이라고 했다.
그런데 신라의 先王(선왕=김춘추)에게도 동일한 廟號를 쓴 것은 매우 참람한 일이니, 조속히 고쳐야 할 것이다」 이에 신문왕이
응수한다. 「생각건대 우리 先王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생전에 良臣(어진 신하) 金庾信을 얻어 同心爲政(동심위정:한
마음으로 정치를 함)으로 一統三韓(일통삼한)을 이루었으니, 그 功業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신라는 끝내 김춘추의 묘호인
太宗을 포기하지 않았다. 신문왕 이후 孝昭王(효소왕) 代에 이르러 羅-唐 관계가 개선되고, 다시 聖德王 대에 이르러 완전한 관계 정상화가
이뤄지지만, 당은 신라에 대해 더 이상 廟號 시비를 걸지 못한다. 묘호란 한 왕조의 시조와 조상을 모시는 祖廟(조묘)의 제사
절차에 맞추어 先代 임금에 대해 그 후계자가 붙여 주는 尊號(존호)다. 그런데 太宗이라면 創業(창업)의 君主인 太祖(혹은 高祖) 이후
治積(치적)이 가장 뛰어난 임금에게 올리는 묘호다. 예컨대 唐 태종(李世民), 宋 태종(趙匡義), 淸 태종(洪太始)의 경우가
모두 그렇다. 그들은 그 왕조의 가장 유능했던 守成(수성)의 군주였을 뿐만 아니라 그 왕조의 創業에도 太祖 이상의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다. 이런 典範(전범)을 처음으로 확립한 唐 왕조에서 太宗의 의미는 각별했고, 그 독창성을 독점하려는 욕망이
대단했다. 그런 당의 대국주의적 발상이야 어떻든 廟號 시비에 당면한 신라 조정의 태도는 당당함 그대로다. 여기서 주목되는 또
한 가지는 「良臣 김유신을 얻어 同心爲政으로 一統三韓을 이룩했다」는 대목이다. 즉 신라의 삼국 통일은 김춘추-김유신의 同業(동업)에 의한
것이라는 대내외적 선언이다. 김유신이 人臣(인신)의 몸으로 우리 민족사상 前無後無(전무후무)하게 興武大王(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것은 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다. 꼴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도 안다
그렇다면 김유신에 대한 고려 시대 사람들의 인식은 어떠했던가?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庾信 같은 사람은
온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사대부가 그를 아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거니와 꼴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에 이르기까지
그를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됨이 틀림없이 보통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김유신에 대해 단재는 왜 筆誅(필주)를
가한 것일까? 신라의 삼국 통일을 민족사적 죄악으로 매도한 단재의 인식은 정당한 것인가? 이에 대한 명쾌한 부정이 없는 한 우리의 민족적
전통성은 여지없이 훼손당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단재의 史觀은 그 자신이 지닌 인간적 카리스마로 인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재는 필봉 하나로 일본 제국주의와 앞장서 싸운 우리 초창기 언론계의 巨木이며, 우리의 民族史觀(민족사관)을
세운 우리 민족사학계의 선구자다. 國權(국권) 상실 후 그는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와 북경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旅順(여순)감옥에서 복역중 순국한 대표적 애국지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재의 도덕적 秀越性(수월성) 때문에 그의
역사 인식까지 無誤謬(무오류)의 聖域(성역)으로 받들 수는 없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관한 단재의 인식은 국권상실기에 외세 배격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면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오늘의 한국인이 수용하기에는 自虐的(자학적)이며 自己否定的(자기부정적)이다.
역사를 我(나)와 非我(남)의 투쟁으로 판단한 단재의 인식 역시 인류사를 꿰뚫어 본 예리함은 인정되지만, 그것을 오늘의 우리가 외골수로 추종할
경우 민족의 생존을 기약하기 어려운 측면도 없지 않다. 단재는 세수를 할 때 항상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했다는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세수하면서
잠시 머리를 숙이는 것조차 굴종으로 생각했던 선비였다. 그 때문에 그의 옷섶은 항상 세숫물로 홍건히 젖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역사는 과거 사실에 대한 오늘의 해석이다. 이제 우리는 儒學的(유학적) 가치관을 지닌 金富軾(김부식)도, 국권 상실기의
志士(지사) 신채호도 아닌, 21세기 로 접어든 한국인의 입장에서 김유신과 그의 시대를 재해석해야 할 과제를 갖고 있다.<3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