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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빈센트 반 고흐 -27-

鶴山 徐 仁 2005. 11. 20. 16:54

1853년 3월 30일,

 빈센트는 가난한 네덜란드 시골의 엄격한  개신교 목사
테오도루스 반 고흐 Theodorus van Gogh (1822~85)와
외향적인 안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투스
Annaornelia van Gogh-Carventus (1819~1906)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고흐의 아버지
Theodorus van Gogh (1822~1885)
 
 
고흐의 어머니
Anna ornelia van Gogh-Carventus (1819~1906) 
 
1869년 7월 숙부의 권고를 받은 빈센트는 테르스테크가 새로 지점장을 맡은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서 판화와 복제화를 파는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빈센트는 열성적이고 세심하며 유능한 직원이었고, 칭찬받을 만한 모범 청년이었다. 
헤이그 시절은 그의 삶에서 가장 밝은 시절이었다.
 
1872년부터 아우인 테오가 화랑에서 함께 일하게 되자 빈센트 는 몹시 행복했다.  
그해 8월 학교를 다니다가 일시 귀향한 테오에게 보낸 짧은 편지를 쓴 것이 
 그 후 그들 사이에서 평생을 두고 오간 편지의 시작이었다.
 

 
고흐의 유년시절
  
하지만.. 그는20살 때부터 인생의 갖은 좌절을 맛본다. 
하숙집딸 로젠니 로이어에게 구혼했다가 거절 당한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 
첫번째 좌절이었다. 
22살, 그는 기독교 실체에 미술품 거래를 혐오한다는 이유로 직장에세 해고 당한다. 
25살이 된 고흐는 신학공부를 하다 그만두고 전도사로 벨기에의 보리나주로 간다. 
그는 지하갱도 300m에 일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고흐는 일주일에 몇명씩 죽어나가는 비참한 이곳에서 전도를 하기 보다는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도왔다.
 
보리나주의 탄광을 소재로 소설을 쓴 에밀 졸라는
소설 속에서 그를 젊은 예수라 묘사했다. 
고흐는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것을 나눠 주었다. 
하지만, 그의 전도사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품위를 떨어들이다는 이유로 1년만에 전도사 직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26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데생기법 책과 물감을 부탁하다.
 
 
 
고흐의 동생 Theo 
 
구필화랑의 유능한 화상이었던 동생 테오는
고흐에게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고 매달 고흐에게 
돈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동생으로 부터 받는 돈은 평생동안 고흐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고흐는 죽는날까지 테오에게 668통의 편지를 보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 
 
전업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고흐는 헤이그, 그렌트 등지에서
거의 독학으로 수업하며  
그림들을 그렸다.
하지만, 정식 그림 수업을 받지 못한 그의 그림은
데생이나 색체 구연에서 
기초가 되어 있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고흐의 드로잉
 

『양배추와 감자가 있는 고요』
(1881년 12월, 이튼.판넬의 종이 Amsterdam, Van Gogh Museum )
 
 
아무도 그의 그림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여인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28살 때에는 이종 사촌인 케이에게 구혼 했지만 거절 당했고, 
아버지와 친척들에게 근친상간을 하는 놈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이사건으로 인해 안그래도 문제아 취급 받게 되던 그는
가족을 포함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 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29살에 고흐는 헤이그에서 알콜중독자에 매독 환자였고
임신중이었던 매춘부 씨엔을 
만나게 된다.
 
고흐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동거를 시작한다. 
이즈음, 고흐와 고흐 가족간에는 건널수 없는 골이 생겨있음을
고흐가 쓴 편지에서 알 수 있다. 
 
" 부모님은 덩치만 크고, 털투성이의 
 지저분한 개를 집안에 두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나를 집에 들이는걸 꺼려한다. 
그들이 계속 개를 집에 두는 이유는 그개가 좋아서가 아니라. 
억지로 참고 있을 뿐임을  개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개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개로 남아있을 것이고, 가난 할 것이고, 화가가 될 이다. " 
- 1883년 12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씨엔 
 
씨엔과의 생활은 비참했다. 
테오가 보내주는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고흐는 방세를 내고, 땔감을 사고 물감도사야 했다. 
몇일이고 굶어야 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결국 고흐는 씨엔과 결별하고 부모의 집으로 돌아 온다.
뇌넨 목사관,
이곳에서 고흐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누에넨의 교회』
(1884년 10월, 누에넨 . 오일 캔버스.
Amsterdam,Van Gogh Museum,Netherlands) 
 
뇌넨에서 머무는 2년동안 200여점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림의 대상은 뇌넨의 풍경 
그리고, 늘 애정을 가져왔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에 초기 대표작 감자 먹는 사람들.. 
이시기 뇌넨에서 수십번 반복된 작업끝에 그려졌다.
 
고흐는 아름답고 이상화된 시골 풍경 보다는 거친 손마디를 가진 농촌사람들에 힘든 
일상을 영원히 남을 그림으로 포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감자 먹는 사람』
(1885년 4월, 누에넨. 오일 캔버스.
Amsterdam,Van Gogh Museum,Netherlands)
  
 
그러나, 고흐는 고향에서나 타지에서나 한푼의 돈도 벌지 못하는 무능력자였고  
변변한 친구도 없이 마을 사람들로 부터 따돌림을 받아야했다. 
그에게 남은 것을 외로움과 그림 뿐이었다. 
이후 5년 동안 벨기에의 안톤 그리고 파리를 거치면서 
 가난과 그의 그림수업은 계속됐다.
 
 
『A Pair of Shoes』
(오일 캔버스, Vincent van Gogh , 1885) 

1885년 파리에서 그의 그림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것은 바로 
인상파 화가들이었다.
화상으로 성공한 동생 테오를 통해 고갱, 모네, 로트렉,피사, 드가등 
인상파 화가들을 만난것이다. 고흐는 인상파 그림에서 충격을 받았다. 
 
 
『프롬나드』모네. 
 
그들의 그림에서는 빛과 공기가 만져졌다.
무엇보다도 인상파 화가들은 고전 회화 기법을 깨고 
주관적인 시선으로 사물을 그린 최초의 화가들이었다. 
인상파와의 만남을 계기로 고흐의 그림은 획기적으로 바뀐다. 
어두웠던 그림은 점덤 밝아 지기 시작한다.
 
 
『A Pair of Shoes』
Vincent van Gogh, 오일켄버스 , 1885 
 
오랬동안 고집하던 고흐 스타일이 자리를 잡아 갔다. 오랜 반복과 시행 착오 끝에  
고흐는 그만의 색깔을 찾은 것이다. 점점 빛나기 시작한 그의 그림들
그리고, 폭발할 듯한 광기는 프랑스 작은 마을 아를에서 그 절정을 맞는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1887년 여름, 파리. 오일 캔버스.
 Detroit Detroit Institute of Arts United States) 
 
 
 
『아를의 도개교』
1888년 3월, 아를. 오일 캔버스.
Otterlo Kroller-Muller Museum Netherlands

 
 
『밤의 카페 테라스』
1888년 9월, 아를. 오일 캔버스.
Otterlo Kroller-Muller Museum Netherlands
 
 
 
『노란집』
1988년 아를, 오일 켄버스
 
고흐는 아를에서 2년간 머물렀다.  
서른 셋, 여전히 가난하고 고독한 화가였던 고흐는
자신의 방을 바뜰리에로 만들며 
화가 공동체를 꿈꾼다.
그 작업에 일환으로 그는 고갱을 그의 집으로 초대했다.
 
 
『고흐의 방』
1888년 10월, 아를. 오일 캔버스.
Amsterdam, Van Gogh Museum Netherlands
 
 
 
 고갱의 초상화
1893년 고갱 작. 오일 켄버스
 
 
그러나, 공동 작업 2개월이 지난 어느겨울
고갱과 심하게 타툰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른다.
 
 
『귀를 자른 자화상』
1889년 1월, 아를. 오일 캔버스.
ALondon Courtauld Institute Galleries United Kingdom
 
 
병원에 입원을 하게된 고흐는 이듬해 1월 노란집으로 돌아 왔으나 
그에겐 환각 증세가 남아 있었다.  
고흐를 불안하게 여기던 주민들은  그를 경찰에 고발했다.  
고흐는 3월 말까지 아를 요양원에 감금 됐다.
그러나, 고흐는 이시기에도 
끝임없는 그림에 열정을 보였다.
 
 
『아를 요양원의 정원』
1889년 4월, 아를. 오일 캔버스.
Winterthur Collection Oskar Reinhart Switzerland
 
 
" 이제 참을수 없는 환각도 사라졌고, 악몽을 꾸는 일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나를 바로 정신병원에 가둬 버리던지, 
아니면, 온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수 있게 내버려 다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림을 시작할때 부터 약속해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것이다.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보네겟지,  
돈은 꼭 갚겠다.
아니면 
내 영혼을 주겠다."
 
-1889년 1월 ,귀를 자르고 한달뒤 쓴 편지
 
고흐는 아를에 있던 2년동안 간질 발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무려 200점의 그림을 그렸다.
  
 
『열 두송이 해바라기』
1889년 1월, 아를. 오일 캔버스.
Philadelphia Philadelphia Museum of Art United States
 
 
 
『우편 배달부 조셉 룰랭의 초상』
1889년 4월, 아를.오일 캔버스.
 
 
그는 마지막 정점을 향해 타오르고 있었다. 
1890년, 프로망스 지방의 쌩래미 요양원을 거쳐
마지막 귀착지 오베르 쉬아지에 정착했다. 
그가 오베르로 간것을 정신과 의사 이자 화가인
가셰박사로 부터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의 우울증과 간질은 점점 심해져 가고 있었다.
고흐가 가셰 박사의 집에 도착한 며칠 뒤  
평론가 알베르로 부터 생애 처음으로 그에 그림에 대한  찬사를 받았다.
 
 
『Daubigny's Garden』
1890년 7월, 오베르. 오일 캔버스
Collection R. Staechelin
-평론에 실렸던 그림-
  
그리고, 이 평론이 실리기 6개월전 그는 그림을 그린후 처음으로 
 유화 작품 한점을 400프랑에 팔았다.
 
 
『붉은 포도 나무』
1888년, 아를
-안 블로슈라는 여류화가 에게 팔린 그림-
 
 
고흐는 비로소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오베르에서 보낸 기간은 겨우 70일 뿐이었다.  
고흐는 70일 동안 77점의 유화와 30점의 드로잉을 남기고 이곳 오베르에서
가슴에 
권총을 쏴 자살했다.
 
 
『오베르의 교회』
1890년 6월, 오베르.오일 캔버스.
Paris Musee d'Orsay France
 
 
1890년 5월 27일, 당시 고흐의 나이는 서른 일곱이었다. 
오베르, 아를, 암스테르담 고흐는 자신이 거쳐 간곳에 선물을 주고 떠났다.  
하지만,  그는 죽은 이후에도 불행했고, 또 다른 불행을 만들었다.  
고흐는 자살을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고
식당에서 장례식을 치뤘다. 
테오는 침울해 있었고, 장례식에 온 사람들에게 고흐의 추억이라며
고흐의 그림을 나눠 주었다. 
그후로 6개월뒤, 고흐에게 화가로의 꿈을 꾸게 했고,
친구이며 형제였던  
동생 테오는 갑작스런 건강 악화로 인해
33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고흐와 테오는 같은 곳에 나란히 뭍혀 있다.  
이렇게 고흐의 신화는 완성 됐다.
 이렇게 남긴 고흐의 유작들은 모두 동생 테오의 미망인 요한나 반 고흐에 소유가 된다.  
그녀는 남편 테오와 고흐사이에 오간 편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들..- 
 
고흐가 죽은 뒤 14년뒤 둘사이에 오간 편지들을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그에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여러 작가들에 의해 계속 소계된다. 
20세기에 이르러 고흐의 작품은 가격과 양 면에서 최고의 가치를 인정 받기 시작한다.  
 
 
『Irises』
1889년 5월, 아를
 -1987년 11월 12일 소더비 경매에서
 경매가격 3억 2천만 프랑 (786억원)에 팔렸던 그림-
 
 
 

『의사 가셰의 초상』
1890년 6월, 오베르. 오일 캔버스.
Private collection
-1990년 일본인 사업가 료에이 사이토에게 984억원에 팔렸던 그림-
 

빈센트 반 고흐..  
그는 횡하지만 번득이는 눈을 가지고 신이 되어 이렇게 다시 살아서 왔다.
 

『자화상』
1889년 9월, 쌩레미.오일 캔버스.
Paris Musee d'Orsay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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