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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직후 54년2월 北사단장 납치사실 첫공개

鶴山 徐 仁 2005. 10. 23. 19:25
북파공작원 대부 김동석씨 회고록 발간
“친일혐의 소련군에 체포된 박정희 탈출 도와”
서울=연합뉴스
입력 : 2005.10.23 10:17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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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부터 5.16쿠데타 시기까지 휴전선을 넘나들며 첩보활동을 벌였던 북파공작원의 실상을 담은 회고록이 발간돼 관심을 모으 고 있다.

’북파공작원의 대부’ 김동석(82) 전 함경북도지사(예비역 육군 대령)는 23일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This man 전쟁영웅 김동석’에서 첩보부대 지대장으로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에 참전했던 사실과 동해안을 무대로 11년 동안 활동했던 첩보부대인 제36지구대 활동을 공개했다.

김씨는 ’북파공작원은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간다’는 불문율이 있으나 영화 ’실미도’로 북파공작원 실상이 공개됐고 김성호 전 국회의원이 주도해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회고록을 발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씨의 증언 가운데 관심을 모으는 대목은 정전 직후인 1954년 2월 인민군 사단장 이영희를 납치한 부분이다.

김씨는 회고록에서 “휴전 직후인 1954년 2월8일 적진에 잠입한 육군첩보부대 제36지구대 공작대원들이 강원도 통천 부근에서 인민군 사단장 이영희를 매복 중 생포 , 귀순케 했다”며 생존자인 H,J,K씨의 실명을 소개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이 인민군 포로가 됐고,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중부전선 시찰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돗드 준장은 수용소내 포로들에게 1주일동안 억류됐다”며 “북한군이나 중공군 장성급이 유엔사에 의해 사망하거나 포로가 된 경우는 알려진 바 없다”고 말했다.

이어 “공전의 히트를 친 이영희 사단장 생포사실은 휴전협정과 남북관계 그리고 한.미관계에 얽혀 (묻히는 바람에) 반세기 동안 소문만 무성했지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기술한 적이 없다”고 털어놨다.

그는 “제36지구대는 휴전전까지 원산 남방 고성에 제1지대, 원산만 능도와 여도에 제2지대, 명천 앞 양도에 제3지대를 배치해 기상 조건에 따라 월 2~3회 침투공작을 했다”면서 “휴전 후에는 강원도 모 해변으로 철수해 공작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6.25전쟁 중에는 인민군 제54고사포 대대장인 김대영을 귀순시켜 동해안 일대에 배치된 북한군 대공포 진지를 파악한 뒤 무력화시켜 유엔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는 데 기여했다.

김씨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남다른 인연도 관심거리다.

김씨는 “박정희와 정일권이 일본군으로 만주에 근무하다 무장해제당한 다음 귀국을 서두르다 (1945년 10월) 일본 육사 교육을 받은 ’친일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소련군에 체포됐다”며 박 전 대통령과 얽힌 비화를 소개했다.

이송 도중 두 사람은 화물기차에서 뛰어내려 인근 산 속으로 도주했고 당시 조선애국의용대 대장으로서 동포들의 귀국활동을 돕던 김씨를 만나 안전하게 국경선을 넘어 남한으로 가도록 도와줬다는 것이다.

김씨는 “한 사람은 용모가 준수하고 사교적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얼굴이 까무잡잡한데 지독하게 담배를 피우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눈동자가 살아 있더라”고 당시의 박.정 일행을 회상했다.

김성호 전 국회의원은 “북파공작원들이 작전만 수행했지 전반적인 지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으나 첩보부대장 출신인 김씨가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회고록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육사 8기인 김씨는 제17연대 중대장과 육군첩보부대(HID) 파견대장, 제36지구대장을 지내고 예편한 뒤 삼척군수와 강릉시장, 목포시장, 함경북도지사, 대한유도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미 제2보병사단은 2002년 5월 한국전쟁 중 김씨의 첩보활동 공로를 인정해 2사단 박물관에 ’김동석 영웅실’을 설치하고 맥아더.리지웨이.백선엽 대장과 함께 ’한국전쟁 4대영웅’으로 선정했다.

김씨는 26일 오후 전쟁기념관에서 중견가수인 딸 진미령(본명 김미령)씨, 김성은 전 국방부장관 및 북파공작원 출신들이 모인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 름   조갑제 날 짜   2005년 10월 23일 일요일
박정희는 소련군에 잡힌 적 없다
오늘 연합통신 보도에 따르면 김동석(82) 전 함경북도지사(예비역 육군 대령)가 23일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This man 전쟁영웅 김동석’에서 "박정희와 정일권이 일본군으로 만주에 근무하다 무장해제당한 다음 귀국을 서두르다 (1945년 10월) 일본 육사 교육을 받은 ’친일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소련군에 체포됐다”며 박 전 대통령과 얽힌 비화를 소개했다고 한다.

<이송 도중 두 사람은 화물기차에서 뛰어내려 인근 산속으로 도주했고 당시 조선애국의용대 대장으로서 동포들의 귀국활동을 돕던 김씨를 만나 안전하게 국경선을 넘어 남한으로 가도록 도와줬다는 것이다. 김씨는 “한 사람은 용모가 준수하고 사교적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얼굴이 까무잡잡한데 지독하게 담배를 피우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눈동자가 살아 있더라”고 당시의 박.정 일행을 회상했다.>

김동석씨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박정희, 정일권 두 사람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대에서 근무했지 일본군으로 근무한 적이 없다. 박정희가 소련군에 잡혔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박정희 중위는 열하성의 滿軍 제9단에서 근무하다가 일본의 패전을 맞자 중국사람들에게 무장을 해제당했다. 그는 같은 부대에 있었던 한국인 장교 李周一(전 감사원장), 申鉉俊(초대 해병대사령관)과 함께 1945년9월 하순에 북경으로 가서, 일본군 및 만군에서 근무하던 한국군인들을 모아 임시로 편성한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박정희가 소련군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북경은 중국 장개석 군대의 관할 범위였지 소련군이 장악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1946년5월초에 다른 광복군들과 함께 배편으로 부산항을 통해서 귀국했지 김씨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고 귀국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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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고 있는 '근대화 혁명가 朴正熙 전기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나오는 대목을 소개한다.

<만리장성 북쪽의 열하성에 포진하고 있던 만군8단의 네 조선인 장 교들. 8월9일 소련군의 참전을 가장 먼저 안 것은 반벽산의 단본부에 있던 단장부관 박정희 중위였다. 그는 7월1일자로 중위로 진급했었다. 8단은 만리장성 북쪽에 흩어져 있는 전병력(약4천명)을 흥륭에 집결 시켰다가 상부의 명령에 따라 내몽골의 다륜으로 북진하라는 작전임 무를 부여받았다. 박정희는 이런 명령을 신현준의 제6연을 비롯한 예 하 부대에 전달했다.

그때 방원철이 속해 있던 중화기중대는 만리장 성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 일군과 합동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통신 이 되지 않았다. 당시 만군은 대대급 부대만이 발전식 무전기를 갖고 다녔다. 한 30분간 발전기를 돌리고 통신기를 틀어야 송수신이 되는 퇴물이었다. 방원철이 선임장교로 있던 중화기중대가 만리장성 남쪽 에서 작전을 마치고 반벽산에서 20리쯤 떨어진 고산자의 본부로 돌아 온 것은 8월13일 오후. 목욕을 하려는데 박정희 중위가 전화를 걸어 왔다. 긴장된 목소리였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지금부터 기밀유지를 위해서 조선어를 쓰 겠습니다. 지난 9일 소련군이 침공하여 전면전에 돌입하였습니다. 우 리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서 흥륭에 집결했다가 다륜으로 진격하게 되 었습니다. 내일 새벽 5시까지 반벽산에 도착해주십시오. 반벽산에서 부대를 정비하여 흥륭으로 향합니다.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꾸려주십 시오.".

이 순간 방원철도 아차 했다. 그 한 달 전 평천에 주둔하던 헌병 상위 문용채가 엽서를 보내왔던 것이다. '건국동맹 군사분맹'의 연락 책인 문용채는 이 엽서에서 '나는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봉천으로 간다.

방 중위도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는데 휴가를 얻어 서 우선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라고 했다. 방 중위는 이 편지를, '이제 일제의 패망이 임박했으니 휴가를 내어 후방으로 빠졌다가 거사하자'는 취지로 이해했다. 그래서 상부에 휴가를 신청 했더니 일군의 합동작전이 끝난 뒤 한 달간의 휴가를 주겠다는 약속 을 받았던 것이다. 방원철의 중화기중대 약2백50명은 당나귀 50마리 에다가 짐을 싣고서 14일 새벽에 반벽산으로 출발했다.

폭우가 쏟아 지기 시작했다. 반벽산에 집결한 8단 병력은 행군대열로 재편성하여 바로 흥륭으로 출발했다. 반벽산 흥륭은 약60㎞의 거리였지만 강원 도 산악지대처럼 험했다. 차는 다닐 수 없었다. 당나귀와 보병으로 구성된 긴 행렬이 연일 계속되는 폭우를 뚫고 걸어갔다. 절벽과 계곡 을 따라 난 길을 걷자니 하루 50리가 고작이었다. 방원철의 중대에서 는 졸면서 걷던 병사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기도 했고 급류를 건너 다가 떠내려가기도 했다.

신현준의 중대도 식량과 탄약을 실은 당나귀가 물에 떠내려가는 사고를 당하는가 하면 정체불명의 부대로부터 야간기습을 당하기도 했다.

알고보니 우군부대가 오인사격을 해온 것이었다. 8월15일, 16일도 행군이었다. 일본이 항복한 사실도 모르고 그들은 걷고 있었다. 폭우 를 맞으면서 잠을 자고 깨어나면 또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발전기를 한참 돌려야 작동하는 무전기를 켤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8월17일 방원철의 부대가 흥륭에 거의 당도하였을 때 무전기를 작동시켰다.아 무 방송도 잡히지 않았다.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데 중국어 방송이 나 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장개석의 육성연설이 방송되고 있었다. 방원 철은 그 연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본은 14년에 걸친 중국 침략전쟁에서 완전히 패망하여 항복하 였습니다. 동북지방에서는 조선 사람들이 우리보다도 더 심한 압제를 받았습니다. 조선사람들 중에는 일본인에게 빌붙어 나쁜 짓을 한 사 람도 있습니다만 일체의 보복행위를 금하는 바입니다. 동북변사처를 조직하여 왕장군(중국군 소속 조선인 김홍일장군을 지칭)을 파견하기 로 하였으니 자중자애해주시기 바랍니다.".

뒤따라오던 신현준은 흥륭에 당도하여 중화민국의 청천백일기가 휘날리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신현 준, 방원철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인 8단장은 매우 원만하게 이 사태 를 관리했다고 한다. 박정희 등 조선인 장교 네 명은 일본인 장교 13 명과 함께 무장해제를 당했다. 당제영 단장은 일본인 장교들을 흥륭 소재 일본군게도 부대에 인계했다. 다른 만군 부대에서는 일본인 장 교들이 중국인 사병들에 의해서 피살되는 사고가 빈발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25시

만군 중위 박정희가 일본인 장교들과 함께 그 만군에 의해서 무장해 제를 당했을 때 느꼈던 감상은 신현준 상위처럼 착잡했을 것이다. 그 의 회고록 '노해병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만주군 장교가 된 이래로 계속 소중히 아끼고 있던 손때 묻은 군도, 권총, 쌍안경을 고스란히 바치게 되었을 때의 그 심정이란 마치 하늘 을 날던 새가 날개를 잃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조국해방 의 기쁨을 안고 희망찬 장래를 기대하면서 전진하기로 결의하였다'.

머나먼 만리장성 산중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해방의 그날을 맞은 박 정희, 아니 다카키 마사오는 그러나 잃은 것이 더 많은 자신을 발견하 게 되었다. 교사라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군인의 길을 결단했던 그 는 일본이 항복하는 순간 자신이 서 있던 자리가 바로 일본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원폭과 소련의 참전에 의하여 앞당겨진 해방이었기에, 그 해방의 소식조차도 이틀 뒤에야 알았듯이 이 결정적인 순간 에 박정희는 역사의 격류속에 무력한 존재로 내던져지고 말았다.

일제 의 압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반발한 그였지만 그 일본 장교들과 같은 취급을 받아 군도도, 계급도, 월급(약 1백50원)도 박탈당한 박정희였 다. 이때야 비로소 그는 박상희형이 그토록 말리던 만주행을 후회도 해보았을 것이다. 민족해방의 순간에 서서 기쁨보다도 걱정이 앞서게 된 박정희의 25시. 나라가힘이 없으면 국민이 구차해진다는 이 실감, 해방이 몰고온 모순과 곤혹과 갈등의 이 체험이 박정희를 자주인으로 빚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만군 8단은 흥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장비를 접수했다. 그런뒤 당일 밤으로 흥륭지역에서 퇴거할 것을 명령했다. 당제영 단장이 예하부대에 하달한 훈령은 이런 요지였다고 신현준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내용이 양반스러웠기 때문이다.

'1. 오늘 밤에 한해서 초병들은 사전 허가없이는 일체의 사격행위를 금한다. 2. 우리 8단이 오늘 작별하는 일본군 게도부대와 재회할 때는 적대관계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3.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까지 동맹 관계를 맺고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전우였다는 사실을 저버릴 수는 없 다. 4. 의리를 존중함이 인간의 도리일진대,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도리를 다해야 하느니라'.

8단의 당제영 상교(대령)는 박정희 등 조선인 장교들을 직위해제한 뒤에도 8단에 손님처럼 남아 있게 해주었다. 그런 상태에서 8월을 다 보내고 벌써 만리장성으로 남하하는 가을 기운을 느끼게 해주는 9월 어느날, 박정희와 이주일이 신현준을 찾아왔다. 방원철은 봉천을 향해서 떠난 뒤였다. 박정희가 입을 뗐다.

"이제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택할 진로에 대하여 의견 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중국사정은 형님이 제일 잘 알고 계실 터이니 귀국을 위해서 어떤 노선을 선택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시오".

"군자는 대로행이라고 하는 말을 명심해야 하네. 봉천을 경유하여 귀 국하는 길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데다가 봉천까지의 철로가 두절되 어있네. 북경을 경유하는 길이 멀기는 하지만 가장 안전하지 않을까".

만주국이 망했으니 만군 8단은 고아처럼 되어버렸다. 당제영 단장은 장개석과 모택동을 놓고 어느 편에 붙을까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8단은 부대를 정비한 뒤 밀운이라는 도시까지 이동하여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박정희 등 세 사람은 이 기회에 밀운까지만 동행한 다음 헤어지 기로했다. 세 조선인은 당 단장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기차편으로 북경으로 향했다. 신현준은 회고록에서 9월 21일에 북경에 도착했다고 쓰고 있다. 박정희 일행은 동포가 경영하던 음식점 덕경루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앞날을 걱정했다.

만주-중국 전선에서 해방을 맞은 조선인 장병들은 북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수십명이 덕경루에서 기숙하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최용덕 중국군 소장을 동북판사처장에 임명하여 이들을 광복군 산하에 편입시키려고 했다. 신현준 이주일 박정희는 이 광복군에 들어가기로 했다. 북경 시내 북신교라는 곳에 제지공장이 있었다. 이 공장 건물과 마당이 광복군의 병영이 되었다. 박정희는 광복된 뒤에 광복군에 들어간 것에 대해서 쑥스러워했다고 전한다.

(中略)

미군정당국은 수송선단을 배치하여 열심히 실어날랐다. 광복군 평진대대 사람들은 1946년4월29일 북경을 떠났다. 천진의 당고항에 도착하 여 1주일간을 대기하다가 5월6일에 미 해군 수송선에 올랐다.

5월8 일 부산항에 도착한 수송선에서 귀국자들은 이틀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때 한국에서는 콜레라가 무섭게 번지고 있었다. 박정희도 다 른 하선자들과 함께 미군 검역당무자들로부터 디디티(DDT)가루를 뒤 집어쓰는 전신소독을 받았다. 이 가루를 밀가루로 오인하여 "왜 그 아까운 것을 버리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 군정당국에 서는 약간의 귀향비도 나누어 주었다. 5월10일에 부산항에 상륙한 박정희는 신현준, 이주일 등 다른 귀국자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장충단 근처에 있던 귀국자임시수용소에서 며칠 머물다가 구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