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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하라
존 F. 케네디
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레온 트로츠키
대부2
더글라스 맥아더
시몬
볼리바르(카리요오에 대한 해설이 있음)
살바도르 아옌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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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본명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세르나. 이 사람을 처음 알게 된 것이 과연 어느 때부터인지 내 기억의 창고를 아무리
뒤져봐도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벌써 그렇게 나이가 들어버린 것일까? 하지만 확실히 기억에 남는 것은 나는 고등학생 무렵, 이 사람처럼
살겠다고 스스로에게 숱한 다짐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직업 혁명가로서 그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모델이었고, 세계사 위인
전기를 아무리 뒤져봐도 이보다 더 멋있는 인물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한반도에 대규모 폭격을 자행하여 비무장의 민간인까지 학살하고, 핵폭탄 사용을 강력히 주장했던 더글라스 맥아더를 존경했었다.(물론 그 시기엔 그런 사실을 몰랐다.) 더글라스
맥아더로부터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까지의 간격은 또 얼마나 멀고 먼 것이었으며 그러기까지 나의 삶은 또 얼마나 멀리 유랑해온
것일까?
원래 지금의 홈페이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를 만들기 전에 나는 체 게바라에 대한 홈 페이지를 만들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미 좋은 페이지가 있으므로 그와 중복되는
페이지를 굳이 또 만들어야 할 필요성도 더 좋은 홈페이지를 만들 수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인터넷의 기본정신은 지식과 정보의
공유라는 나의 믿음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게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링크라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은가? 지식과 정보는 나누면 나눌수록 좋은 것이며
그것이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더욱더 좋은 일이 아닌가? 애초 그에 대한 관심이 시작될 무렵 국내엔 그에
대한 자료들이 거의 없던 시기였다. 심지어 그의 무덤이 어디인지 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무덤이 알려지고 그의 유해가 송환되었고,
그의 생존을 원치 않았던 구소련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시기가 된 지금에 와서 그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과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인지 말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반면에 이 글을 쓰고
있는 2001년 현재는 그의 유해가 발굴되어 쿠바로 송환(1997년)되었고, 국내에서도 그의 평전이 발간되어 비교적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난
뒤이기 때문이다.) |
어린 시절의 체 게바라 - 두 살
무렵에 앓기 시작한 천식은 일생을 두고 그를 괴롭혔다.
말을 타고 있는 체 게바라 - 그의
게릴라 전술은 마오쩌뚱의 게릴라 전술과 함께 현재까지 유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체 게바라는
게릴라 시절의 검소한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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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그에 대한 간략한 전기적 지식을 나열하는
것(그렇다고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보다는 그에 관해서 평소 지니고 있던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보는 쪽으로 글을 쓰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이다. 물론 그에 관한 좀 더 좋은 사이트가 있으므로 그 사이트를 소개하는 것 역시 잊지 않을 일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지금의 이 글은 게바라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 위한 것이다. 그에 관한 이 글은 대충 다음의 몇 가지 질문에서 비롯된다. 첫째, 체 게바라가
의사로서 안정된 삶의 지위를 떠나 직업혁명가로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체 게바라가 쿠바에서 했던 일은 무엇인가?, 셋째, 체
게바라가 쿠바 혁명 이후 안정된 직위와 안전을 버리고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넷째, 체 게바라가 꿈꾸었던 이상은 현재도 유효한가?,다섯째,
그에게 바쳐진 대중적이고 다소 상업적인 열광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다. 이 글을 다 읽고 난 뒤 그런 질문들에 대한 좋은 답을 드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함께 생각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믿는다.
첫째, 체 게바라가 의사로서 안정된 삶의 지위를 떠나 직업혁명가로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체 게바라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체 게바라를 다른 혁명가들과 다른 존재로 우리들에게 인식시키게 된 계기는 그가 언제나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혁명의 최일선에서 행동했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에서 미숙아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귀족의
후손이었고, 어머니 세실리아 데 라 세르나 역시 독립전쟁 당시의 군인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르주아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집안은 자유주의적 좌파에 속하는 무신론자들이었다. 그의 집안이 비록 부르주아 출신이었다고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집안은
아니었다.
평생동안 체 게바라를 괴롭힌 천식은 그의 나이 두 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천식을 앓자 그의 가족은 아들의 건강을 위해 코르도바(근처의 알타그라시아)로 이사를 했고, 아들의 건강을
위해 그의 아버지는 에르네스토에게 여러 가지 운동을 가르쳤다. 그는 돈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옷차림이나 외모에 신경쓰지 않는 소탈하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는 종종 고독을 즐기며 미친 듯이 책을 읽고 공부도 열심이었다. 그러나 청년 게바라는 모험을 즐기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나이 17세 무렵 모터를 붙인 자전거를 이용해 아르헨티나 중부 지방을 여행하는 등 잠시도 집에 붙어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이 여행 후에 자동차 운전과 비행기 조종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1950년에 이혼하고 만다. 그는 어려워진 집안 살림 때문에
스스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의학부에 입학한다. 자신의
지병인 천식으로 인해 그의 관심이 의학에 쏠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는 기회만 있으면 여행을 떠났다. 1952년에는 같은 의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스(알베르토는 그보다 나이도 많고, 체 게바라에게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해준 인물이다)와 10개월여 동안 모터사이클을 이용해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한다. 그는 이때 갖은 고생을 하며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비참한 삶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특히 상파울루 나환자촌에서의
노동을 통해 "인간의 사랑과 유대감은 고독하고 절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싹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를 떠나 잠시 미국의
마이애미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는 이때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관계 속에 그 실상을 깨닫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는 귀국한 후,
의학공부에 몰입하여 1953년 3월,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다.
게바라는 라틴 아메리카 여행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이
처한 현실과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쳐 미래가 보장된 의사에서 급진적인 혁명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의사가 된지 두 달만에 게바라는 의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아르헨티나를 떠나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 볼리비아로 갔다. 그러나 이 무렵까지 게바라의
주된 관심사는 아직 정치적인 문제에 가 있지는 않았다. 라틴 아메리카는 서서히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곪아터지기 직전이 되자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시도했던 개혁시도가 수구보수세력의 저항에 부딪치며 좌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개혁 시도가
좌절되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게바라는 좀더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이념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런 그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1954년
콰테말라에서 벌어진다. 중남미의 작은 나라 과테말라의 선거에서 자유주의적 좌파인 하코보 아르벤즈가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과테말라의
비참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혁신적인 정책을 실시했으나 과테말라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츠가 대부분의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아르벤즈는 그런 경작지를 국유화시킨 후 그것을 다시 인디오와 빈농에게 재분배하는 개혁을 실시하고자 했다. 게바라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런
아르벤즈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민중은 물질적으로 굶주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굶주려
있다"는 아르벤즈의 사상에 대한 경외심을 평생동안 간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아르벤즈 대통령의 경제개혁 조치는 미국의 경제적 이해와 충돌하게
된다.
미국은 이 당시부터 직접적인 무력 침공보다는 CIA에 의한
비밀공작을 통해 제3세계를 지배하려는 공작을 펼치게 되는데 그 첫 무대가 과테말라의 아르벤즈 정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를 대변해줄
우파 인물인 호세 카스티요 아마스를 통해 과테말라 내에서 군부 쿠데타를 획책한다. 그리고 이런 군부 쿠데타에 앞서 괴벨스에게서 배웠음에 틀림이
없는 정치적 선전공작을 펼친다. 그것은 방송과 언론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유언비어와 악소문을 퍼뜨리며 과테말라의 합법적인 정부를 흔들어
놓는다. 가령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퍼뜨린다던지, 특정 지역을 점령했다던지 하는 식의 소문을 퍼뜨려 우파
쿠데타에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이런 과테말라의 사례를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목격하게 된다.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서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는 독재자들은 거의 대개가 미국의 군사학교 출신이라는 점, 합법적인 선거에 의한 정부라 할지라도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경우 헌법을 수호해야할 책임이 있는 군대, 경찰, 의회가 등을 돌리거나 방관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좀더 자세한 내용은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편을 참조하시길) 결국 과테말라의 아르벤즈 정권은 무너지고 만다. 아르벤즈는 미처 피신할 틈도
없었고, 게바라는 이때 처음 무기를 들고 저항을 시도했으나 그들의 저항은 애초부터 상대도 되지 못했다.
게바라가 평온할 수도 있었던 자신의 행로를 포기하고,
혁명의 일선으로 달려나가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중요성을 깊이 깨우쳤기 때문이었다. 과테말라 정부의 전복이
계기가 되어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학습을 시작했다. 이 학습을 통해 알게된 것은 가난하고 착취받는 나라의 혁명정부는 계속적인 착취와
수탈을 위해 미제국주의와 결탁한 자본가 세력에 의해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과테말라 침공을 통해 게바라는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와 민중의 삶을 착취하는 현장을 목격했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와 세계 민중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둘째, 체 게바라가 쿠바에서 했던 일은
무엇인가?
체 게바라는 과테말라의 현지 사정이 악화되자 그곳 친구인 엘 파토호와
함께 멕시코로 갔다. 당시 멕시코는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모여들었고 그는 이곳에서 에르네스코 게바라 데 라 세르나에서 체
게바라가 되었다. 이때가 1954년 9월 21일이었다. 그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준 사람들은 1953년 쿠바의 몬타카 병영 습격 사건에서 살아남은
일련의 혁명가들이었다. 게바라가 처음부터 이들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다른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적 지도자들을 만나고
싶어했지만 그들이 체 게바라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체제 내의 혁명을 꿈꾸었기 때문에 게바라처럼
혈기왕성한 젊은이에게 관심을 보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게바라를 비롯해서 라틴 아메리카의 성공한 혁명가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정통적인 이념보다는 오히려 마오주의에 경도된 것처럼 보이거나 후일 신좌익(New Left)쪽에서 오히려 더 지지를 받게 되는
것은 이 당시에 이미 유럽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공산당이 일종의 교조주의적인 도그마에 빠져 있었던 탓도 크다고 할 것이다. 망명지 멕시코에서
게바라와 그의 친구 파토호는 극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게바라는 이곳에서 진보적인 여러 정치사상과 이론, 그리고 각국의 민족해방전쟁의
사례들을 공부한다. 그리고 게바라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다. 1955년 여름, 멕시코로 추방당한 피델 카스트로와의 만남은 게바라에게 인생의
전기를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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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미국 CIA의 중남미 비밀공작과 과테말라 아르벤즈 정권의 몰락
CIA가 확립되기 이전에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반미정권들을 처리한 방식은 해병대를
파견하여 군사적으로 억누르는 것이었다. 1950년대에는 그와 달리 CIA 비밀공작을 활용했다. 파워스는 그 이유를 주로 라틴 아메리카 인민의
반미감정에서 찾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냉전시대에 소련과 이데올로기 경쟁을 하는 처지에서 공개적인 군사개입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일부러 소란을 피울 필요 없이 되도록 은밀한 방법을 찾게 되었다. 둘째,
1940년대 후반에는 이탈리아에서 MFL고 1953년에는 이란에서 CIA는 비밀정치공작을 성공시킨 경험이 있었다. 이렇게
은밀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단이 확보된 마당에 공개적인 군사개입보다는 은밀한 CIA공작을 택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CIA가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서 전개한 공작은 열의 아홉이 선전 및
심리전적인 요소를 포함한 것이었다. 여기서 계획된 군부 쿠데타 지도자는 미국 캔자스주의 육군 지휘참모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카를로스
카스티요-아마스 대령이었다. 카스티요-아마스는 인근에 있는 온두라스에서 7백 명의 반란군을 훈련시켰다. 미 국무장관 포스터 덜레스는 공개적으로
아르벤스 정권을 비난했다. 거기다 공군사령관은 일찌감치 반군에 가담했다. 그러자 아르벤스 정부는 계엄을 선포하고 민병대를 조직하고 무장시키기
위해 체코에서 무기를 들여올 것을 검토했다. 그러자 이런 민병대 조직 계획을 싫어한 과테말라 군부는 크게 경계심을 가졌다.
1954년 6월 18일 드디어 카스티요-아마스 군대는 온두라스에서부터 국경을 넘어
과테말라 접경지역 6마일 지점에 진지를 치고는 수도인 과테말라 시티에 주로 삐라를 살포하고 폭탄을 두어 개 떨어뜨렸다. 이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미국 CIA가 동원한 '자유의 소리' 방송이었다. 이 방송을 통해 수많은 명령을 하달하는 것처럼 해서 미국의 지원 아래 있지도
않은 수많은 반란군이 행동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전투상황을 보도해댔다. 이러한 심리전을 통해 과테말라 사회와 정권내부를
혼란시키고 내부분열을 조장했다. 아르벤스 정권 내 좌파는 전면적인 저항을 주장한 반면 군부는 타협적 태도를 보였고, 중산층은 미국이 지원하는
반군을 상대로 한 전쟁을 반대했다.
쿠데타가 진행되는 와중에서 심리전에 사용하고 있던 공군 전투기 세 대 중 두 대가
파손되었다. 덜레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공군기 증파를 요청했다. 아이젠하워는 즉각 승인했다. 결국 6월 27일 아르벤스는 카스티요-아마스는
미국 대사 존 포리포리의 대사관 비행기를 타고 입성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 공작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처음에는 반대했던 미국 내 일부 관리도
CIA 비밀공작의 신봉자가 되었다. 이후 과테말라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수십 년에 걸친 살인적인 억압정치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세계와 미국-20세기의 반성과 21세기의 전망/ 이삼성 지음/ 한길사
중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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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과 나는 밤을
지새우며 토론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그의 부대의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이미 내 자신의 다리가 라틴아메리카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고,
과테말라에서는 가장 잔인하게 숨통을 조였던 제국주의의 실체를 본 후였기 때문에 압제자에 대항하는 혁명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내 한 몸을 바치는
데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있을 수 없었다. 피델은 비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들이 세운 계획은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낙관적인 태도에 공감하게 되었다. 아무튼 혁명은 코앞에 닥친 현실이었고 온몸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울부짖기만 한다든지 대충
적당히 해치워버린다든지 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쿠바는 풀젠시오 바티스타라는 억압적인 독재체제 하에
있었다.(한 마디로 당시 쿠바는 미국 영화 <대부2>에도 잘
나타나고 있지만 미국의 휴양지이자 배설구였다.) 게바라를 비롯한 망명 쿠바인들은 스페인 외인부대
출신 군인에게 게릴라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들을 무사히 쿠바로 데려다 줄 배를 찾기 시작한다. 그 배가 바로 그란마호였다. 그런데 이 배는
지독하게 낡은 고물 배였고,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해 태울 수 있는 인원조차 20여 명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혁명의 열기에 불타올랐고,
이들의 거사 계획이 사전에 유출되고 있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1956년 11월 25일 새로운 전설을 탄생시키며 배를 출발시켰다.
그들의 출항은 이미 알려져 있었고, 쿠바 연안에는 이 꿈많고 철없는 게릴라들을 바닷속에 그대로 수장시키기 위해 삼엄한 해안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낡은 그란마호는 마침내 연료가 떨어지고 파도에 떠밀려
항로조차 잃고 만다. 결국 상륙예상 지점인 해안에서 2Km 가량 떨어진 산호초에 좌초되고 말았다. 82명의 탑승자는 모두 바다에 뛰어들어 추격을
회피하려 했지만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맹그로브 숲은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설치한 대서양 방벽처럼 게릴라들의 앞 길을
가로막았고, 독재자 바티스타의 군대와 비행기가 그들을 공격했다.
12월 2일 우리들은
도착예정지인 코로다스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벨릭이란 지점에 상륙했다. 이때 이미 대부분의 장비는 분실되었다. 게다가 새로 준비한 군화를 신었기
때문에 늪지대를 빠져나오는 동안, 대원들의 발은 불어터지고 물집이 생겼다. 문제는 이 상처에 스며들어오는 파상풍균만이 아니었다. 카리브해를
항해하는 도중 내내 몰아친 폭풍 속을 7일간이나 헤쳐왔기 때문에 항해에 익숙치 못한 대원들 거의 모두가 심한 배 멀미로 탈진해버려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다음의 작전을 수행해 내기가 어려웠다. <체 게바라>
그러나 이런 사상 최악의 상륙작전은 그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갖은 고난과 위험의 전초전에 불과했고, 이때 살아남은 원정대원들은 이후 쿠바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82명의 원정대원 중에 첫날 상륙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1956년 12월 25일 생존자) 피델 카스트로, 우니베르소 산체스, 후안 알메이다, 시로 레돈도, 라미로 발데스, 알만도
로드리게스, 레네 로드리게스, 프란스스코 곤잘레스, 라휄 챠오 산타나, 에피게뇨 아메이헤이라스, 카리스트 모잘레스, 까밀로 시엔후에고스,
레이날도 베니테스, 라울 카스트로 그리고 에르네스토 게바라 며칠 후에 여섯 사람의 생존자가 합세한다. 호세 모얀, 루이스 크레스포, 훌리오
디아즈, 카리스트 가르시아, 카를로스 베르무데스 까지 스무 명에 불과 했다.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20명의 게릴라들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독재자 바티스타의 1만 2천여 정규군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는 살아남았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들의 명성을
드높인 최초의 사건은 라플라타 병영 습격이었다. 1958년 초 바티스타 정권은 게바라를 비롯해 카스트로를 수없이 잡아죽였다. 그들의 시체를
공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죽었다던 게릴라들은 어느새 살아나 다시 독재자의 뒷덜미를 잡았다.
1957년 초,
우리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산악지방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라 플라타강 하구에 위치한 소규모의 병영(라 플라타 병영)을 습격하여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험준한 산간벽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알려져 쿠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습격은 게릴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투쟁의 준비가 완전히 끝났음을 확인하게 하는 계기였고, 부대전체에 있어서는 앞으로 다가올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것이었다.
게릴라군은 이 라 플라타 병영 습격사건으로 다수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체 게바라>
쿠바 혁명은 어쩌면 언론이란 매스미디어의 매력을 적절히
활용한 혁명이었다. 그들은 뉴욕 타임즈의 허버트 매튜즈 기자를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 속의 게릴라 기지까지 불러들여 기자 회견을
했으며(1957년 2월 17일), 같은 해 4월에도 미국의 방송국 기자인 봅 티버를 초청하여 회견을 했다. 이런 회견 장면이 미국 전역에
방영되었고, 산속의 게릴라군과 도시의 레지스탕스들에게 점차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제 쿠바는 산 속과 도시에서
통일전선을 구축됐으며 이러한 통일전선은 게릴라라는 물고기들의 바다가 되어 주었다.
쿠바 게릴라들의 주된 구성원은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이해관계 때문에, 혹은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참여했다가 도망가기도 하고, 심지어 밀고를 하기도 했다. 게바라는 이런 게릴라 부대를 지휘하며
엄격한 규율을 세웠고, 마침내 규율이 엄정한 게릴라 부대원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1958년 12월, 마침내 바티스타군은 쿠바 전역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게바라 부대는 산타클라라 공격을 통해 마침내 바티스타 정권의 마지막 숨을 끊어 놓게 된다.
1959년 1월 1일, 새해의 첫날 새벽, 독재자
바티스타는 현금과 보석 자루를 훔쳐 비행기에 싣고,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도망쳐버렸다. 그는 자신의 경호원이나 수행원들도 모두
버렸다. 마침내 쿠바는 해방되었다. <체 게바라 ② 에
계속> |
스크랩]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 Ernesto Che Guevara,1928~1967
)2. | 人物情報 곳집
200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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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sta siempre Comandante
Che Guevara (안녕히 체게바라 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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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체 게바라가 쿠바 혁명 이후 안정된 직위와 안전을 버리고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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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바도르>
호세 마르티
에밀리아노 사파타
장 뽈 싸르트르
제임스 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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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 게바라를 비롯해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 쿠바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들이 쿠바를 사회주의로 이끌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로 이끌 것인지는 쿠바를
바라보는 많은 나라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혁명을 이끌었던 그들 자신도 분명히 결론짓지 못하고 있던 문제였다. 혁명이 성공한 뒤인
1959년 6월 게바라는 인도, 이집트, 인도네시아, 유고 등지를 돌아보게 된다. 그는 이 때 완전히 자본주의적 방법도 아니고, 공산주의적
방법도 아닌 새로운 경제 정책을 꿈꾸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동서냉전의 첨예한 이데올로기 경쟁 속에서 그의 낭만적인 경제정책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고, 그들은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59년 11월 28일,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의 총재가
되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날 회의 중 카스트로가 이 중에서 경제학자(economist)가 있는가? 하고 묻자 게바라가 서둘러
손을 들었다고 한다. 카스트로가 놀라며 자네가 경제학자였단 말인가? 하고 되묻자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게바라가 공산주의자(communist)가
있느냐고 묻는 줄 알았다며 손을 내렸지만 상황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은행 총재가 되도록 했다. 초대총재가 된 게바라는 여전히 부시시한 머리에
군복 차림으로 업무를 보았다. |
체 게바라와 존 F. 케네디의 공통점과 차이점
- 두 사람 모두 쿠바산 시가를 엄청나게 사랑했다는 것, 그러나 두 사람의 차이점은 케네디는 쿠바산 시가만 사랑했지만 게바라는 그 시가를 만들어
낸 쿠바와 쿠바 민중까지 사랑했다.
볼리비아 산중에서 체포된 직후 체 게바라 -
어쩐지 우리나라의 녹두장군 <전봉준>과 비슷한 인상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언젠가 읽은 글 중에 시대와 불화하여 혁명을 꿈꾼 자들의
인상은 하나같이 비슷하단 글을 읽고 감탄한 적이 있다. 80년대 거리를 메운 수배자의 얼굴을 보라. 저마다 녹두장군같지
않았는가!
체 게바라의 최후 - 미국은 CIA를 통해 이
라틴 아메리카의 게릴라를 끊임없이 조사했고, 결국 그린베레를 동원해 볼리비아 산 중에서 그를 포로로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비록 그의 육신은
사로 잡을 수 있었지만 그의 영혼만큼은 포로로 할 수도, 죽일 수도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는 심문에 게바라는 "혁명의 불멸성을 생각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던 듯 하다. 그를 가둠으로써 느끼는 불안보다는 그를 죽임으로써
당하는 비난이 훨신 가볍다고 생각한 그의 적들이 서둘러 사살했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언젠가 그 혁명의 불멸성을 이렇게 풀이한 적이
있다.
"내가 패배해도 승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에베레스트 산정에
도달하려다가 많은 사람이 실패했지만, 결국 에베레스트는 정복되었습니다."
체 게바라가 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편지
(이 글은 체가 쿠바혁명 이후 쿠바 공직에 봉직하던중, 자신은 혁명가이지 정치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쿠바
제2인자의 자리를 버리며 아프리카와 남미의 혁명현장으로 향할때 카스트로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이다.)
"나는 공식적으로 당이 가지는 민족적 지도력에서 차지하는 나의 위치, 수상으로서의 지위, 고위 실력자로서의
지위 그리고 쿠바 시민권, 이 모든 것을 사양합니다. 그 어떤 법적 절차도 나를 쿠바에 묶어두지 못합니다. 유일한 끈은 약속이 그렇듯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또 다른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지나간 생활을 돌이켜볼 때 나는 혁명의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충분한 자부심과 헌신적인 마음을 가지고
일해왔다고 믿습니다. 나의 유일한 중대 실수는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투쟁을 시작할 때 부터 보다 당신을 더 신뢰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다는 것과 지도자와 혁명가로써의 당신의 자질을 충분히 그리고 빨리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화려한 날들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같이 있으면서, 찬란하지만 아직은 슬픈 카리브해 위기의 날들을
우리의 민중과 더불어 살아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 어떤 정치가도 당신보다 화려하게 산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런 주저 없이
당신을 따랐다는 점과 위험과 원칙에 대하여 사고하고 그것을 직시해 평가하는 데 있어 당신과 일치했다는 점도 자부심을 갖습니다. 세계의 또 다른
국가들은 저의 순수한 노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쿠바 최고 지도자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당신이 하지 못한 것을 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당신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기쁨과 슬픔으로 엉클어집니다. 하나의 건설자로써 내 마음을 여기에 두고
갑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 중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자식처럼 받아주었던 쿠바 국민들을 두고 떠납니다. 그런 사실들은 나를
몹시 가슴아프게 합니다.
나는 당신이 가르쳐 준 신념, 우리 민중의 혁명정신, 그리고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것입니다.
그래서 대항해 싸워 성서러운 의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전장으로 떠납니다. 이러한 것들이야 말로 깊은 상처를
치료해줍니다.
다시 언급해두고자 하는데 쿠바혁명으로 생기는 의무감을 떠나 어떤 책임감으로부터 쿠바를 자유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나의 최후의 시간을 그 어떤 다른 하늘 아래에서 갖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은 쿠바국민 특히 당신에
대한 생각일 것입니다. 당신의 가르침, 모범에 대해 감사드리며, 나는 나의 행동 최후결과에 충실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쿠바
혁명가의 한사람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그러한 자격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나는 아내와 자식에게 어떠한 물질적 재산도 남겨두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정부가 그들의 생활과 교육을 위해 충분한 것을
제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우리 민중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승리를 위해 끝없는 전진을 조국이냐 죽음이냐 나의 모든 혁명적 열정으로써 당신을
포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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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쿠바중앙은행 총재가 되지마자 행한 가장 첫번째
일은 자신의 월급을 5천 페소에서 1천 2백 페소로 줄인 일이었다. 이때까지 상황의 추이를 바라보며 계산기를 두드려대던 쿠바의 많은 부르주아들이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미국의 마이애미로 도망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쿠바의 지폐는 미국에서 인쇄되고 있었다. 혁명이 일어난 뒤 미국은
쿠바의 새로운 정부를 괴롭히기 위해 많은 지폐를 시중에 풀었고, 인플레이션이 심해졌다. 결국 게바라는 지폐 인쇄를 체코에 맡겼고 지폐에 자신의
사인을 남겼다. 그는 밤을 세우며 일했지만 그의 경제정책이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1960년, 게바라는 사회주의 국가들을 순방하게 된다.
소련, 중국, 불가리아, 북한, 체코슬로바키아 등을 방문했다. 그러나 이때 그가 이들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해 좋은 인상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피델의 아우인 라울과 잦은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라틴 아메리카에 침투해 있는 미국의 자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미국을 자극하게 된다는 점과 자국의 경제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점에서 뜨거운 감자와 같은 것이다.결국 쿠바는 쿠바
내 미국 재산을 국유화하고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통상 교류 확대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때까지 관망하던 자세를 취하던 미국은 쿠바와 국교 단절을
한다. 그때가 1961년 1월 8일의 일이었다.(이에 대한 일화 중
하나는 평소 쿠바산 시가를 즐겨 피우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시중의 쿠바산 시가에 대한 사재기를 하게 한 후 마침내 쿠바와 국교단절 문서에
서명했다고 한다. 그가 이 시가를 모두 다 피울 수 있었는지는 약간 의심스럽다. 그는 1963년 11월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1961년 4월 17일부터 48시간 동안 쿠바의 피그만 해안을
침공한다. 사실 미국이 쿠바 혁명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비밀작전을 수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1959년 3월에 일단의 쿠바 망명인들을
동원해 쿠바 진공 작전을 실시하고자 했으나 쿠바 내 반 카스트로 세력이 보잘 것 없었고, 쿠바 군의 보안체제가 예상외로 강력해 실패로 돌아가자
본격적인 침공 계획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 작전은 아이젠하워 정권 시절 입안되어 승인되었고, 케네디 대통령 당시에 실행되었다. "힘있는 자가
정의로와 약한 자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한 케네디 대통령이 한 일이었다. 케네디와 미 CIA는 그들이 과테말라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수행한 일련의 비밀공작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쿠바에서의 작전도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하게
좌절되고 만다. 그들의 쿠바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와 세계 여론이 미국의 이런 음모에 대해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미국이 쿠바에 대한 비밀공작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몽구스 작전이라 불리우는 일련의 공작들을 통해 쿠바가 제3세게 국가들의 모범적인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의 모델이 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는 경제봉쇄 정책과 카스트로 암살에 관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카스트로가 피우는 시가에 폭발물을 장치하는 것까지 계획되었었다고 한다.
해외지도자 암살 계획과 관련하여 미국 상원 처치 위원회가 1975년까지 밝혀낸 바에 의하면 카스트로란 인물 한 사람에 대해서만 1960년부터
65년의 기간 동안만 적어도 8 차례 이상의 암살 기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미국의 조치들은 카스트로로 하여금 사회주의의
일원이 되었음을 선포하도록 만든다. 게바라는 이때 쿠바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전국 각지에 공장을 건설하는 산업발전 4개년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런 경제정책은 그 모델을 찾기 어려웠고, 해외 차관도 미국에 의해 봉쇄당하고 만다. 또한 게바라는 자본주의가 뿌려논 경제
시스템의 문제에 봉착한다. 그것은 혁명이 노동자 농민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아직 그 결실을 맺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기간 동안
노동자, 농민은 좀더 많은 경제적 혜택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문제 해결이 훨씬 쉽다. 많은 이익을 올리려는 욕심이 그들의 본성이기 때문에 임금 인상의 요구가 있어도 여유있게 시간을
끌다가 막판에 가서야 임금을 아주 조금 인상해주어 생색만 내면 문제가 해결되니까 말이다."
게바라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 다소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처하고자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노동자 한사람 한사람이 신성한 노동의 의미를 자각하게 되면 물질적 욕구보다는 신성한 의무감을
갖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골수에 밴 노동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했다. 물질적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성한 의무감에
의해 노동하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의식 개혁에 의한 노동생산성 향상은 단기간 내에는 효과를 볼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에 따른
보답이 보이지 않을 경우 급속히 쇠퇴하고 만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테면 게바라 자신이야 얼마든지 헌 옷을 입고, 배급을 받으며 인민대중을 위해
일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겠지만 다른 노동자들까지도 그렇게 느낀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의한 쿠바 봉쇄와 카스트로 암살 음모, 반혁명
기도, 경제정책의 어려움 등은 신생 쿠바의 여러 어려움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들은 기존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도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도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 압박은 날로 더 심해졌고,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조차 쿠바를 이해하지 못했다. 1961년 8월 게바라는
쿠바대표로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OEA의 '경제사회심의회'에 참여했다. 그는 쿠바로 돌아가는 길에 대부분의 산업을
국유화시켰던 쿠바 경제가 이젠 위기에 직면했고, 미국과의 암거래가 다시 이뤄지고 있다고 실토하며, 소련 등 사회주의 체제 국가들로부터의 원조가
만족할 만큼 효과가 없으며 쿠바에는 적당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게바라는 쿠바의 인민대중을 위해서라면 그 자신이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았던 미국과도
경제교류를 재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민중이 주권을
되찾아야만 한다. 독점자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 독점자본은 이미 쿠바에 침투하여 움직이는데 그것은 거의 모두가 미국 자본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 쿠바는 이제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은 다른 자의 삶과 노동으로 부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일이다." <체 게바라>
1962년, 미국은 쿠바 국내에 소련의 미사일이 배치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쿠바로서는 미국의 거듭된 침략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에 본때를 보여줄 필요를 느꼈으며 소련으로서는 자신들의 턱밑에 설치된
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에 대항할만한 기지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것은 쿠바로 하여금 필요 이상으로 미국을 자극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으며
사회주의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소련의 위신과 명예를 실추시켰고, 동시에 쿠바가 소련에 기대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게바라와 카스트로에게
다시 한 번 확신시키는 일이 되었다. 소련은 쿠바를 보호해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쿠바 미사일 사태는 다시 한 번 전세계인들에게
쿠바라는 나라를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쿠바 민중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일이었다. 게바라는 유럽의 공산당과 사회주의자들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 옛날 인터내셔널 찬가를 부르던 꿈꾸었던 게바라에게 있어 그들은 속물에 불과했다.
사실 체와 피델이 쿠바에서 혁명을 시도하고 있었을 무렵에도
쿠바에 공산주의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도시와 노동자 중심의 혁명 노선을 주장했고, 농촌과 농민을
중심으로 한 혁명 노선을 주장한 체와 피델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의 공산당은 심지어 체와 피델을 사회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이 부족한 인물들로 불신하기 까지 했다. 사실이 또한 그랬다. 체와 피델이 생각하기에 그들은 말만 앞세우는 자들이었고, 혁명의 열기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게바라는 소련식의 관리형 사회주의 모델보다는 정신적 각성을 중시하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사실
코민테른의 일방적인 지시만으로는 혁명 열기에 고양된 일반 대중들을 이끌 수 없었다. 그러나 게바라는 기본적으로 소련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어쨌든
동지였기 때문에, 그러나 소련도 게바라에 대해서 우호적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1965년 1월 게바라는 콩고, 기니, 가나, 알제리,
탄자니아와 이집트 등을 방문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소련을 비난했다. "소련은 돈을 지불하는 나라들에게만 무기를 내줍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쿠바로 돌아왔을 때(3월)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격렬한 토론에 임해야만 했다. 이제 카스트로는 혁명이 성공한 뒤의 쿠바를
이끌어야만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인물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아직도 혁명가로 행동하는 체 게바라를 통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게바라는
인간이 물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체제를 꿈꾸었다. 그는 '인간의 욕망이 물질로부터 자유롭고, 노동이 유희가 되는 경제'를 꿈꾸었으며 화폐,
기업 뿐만 아니라 국가 개념까지 부정하는 극좌적 이상을 돌출시켰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당시 일국 사회주의 혹은 국가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의 세계 정책을 비판했고, 소련이 쿠바에 대해 유상 차관을 지원하는 것도 비판했다. 체 게바라의 이런 비판은 근본적으로는 옳은 것일지는
모르나(국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라면 트로츠키주의) 현실적으로는 대내외적인 갈등의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소련 역시 이런 게바라의 경제정책을
비판했고, 노동자, 농민들도 자발적 임금의 삭감이라거나 자발적 잉여노동 문제에 반발했다. 그리고 4월 중순 게바라는 쿠바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정부청사에서도, 사탕수수밭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많은 풍문이 떠돌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카스트로에 의해
숙청당했다거나 소련에 의해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게바라는 콩고에 있었다. 그해 11월 11일, 피델은 아바나의
채플린 극장에서 게바라에게서 온 편지를 낭독했다. 그것은 양친에게, 딸 일디타에게, 그리고 피델에게 보낸 세통의 편지였다.
게바라는 라틴 아메리카 해방을 위해 아니 세계의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한 전사로서 쿠바 시민권을 포기했다. 그가 단지 고매한 이상만으로 다시 전선에 복귀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의심 많은 이들은 오직 인간만이 순전히 정신적인 이유만으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게바라는 또다시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게릴라로 돌아갔다. 그것이 그를 다른 혁명가들과 다르게 만드는 점이었고, 동시에 그의 행복한 점이었다. 그에게 피델이
없었다면 자신도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행정관료로서 평생을 보내야했을 것이기 때문에….
넷째, 지금도 체 게바라가 꿈꾸었던 이상은 현재도
유효한가?
라틴 아메리카는 시몬 볼리바르가 라틴 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을 수립하려던
이상이 무너진 이래 미국의 뒷뜰 이상의 정치적 각성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테말라의 아르벤즈 정권을 비롯한 각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그들의
이상을 점진적이고 평화로운 방식의 개혁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을 때조차 그들의 이상과 열망은 여지없이 무너졌고, 막대한 피해만을 강요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벌어진 쿠바의 혁명은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피압박 민중들에게 희망의 복음과 같은 것이었다. 아메리카 신대륙은 앵글로 색슨에 의한 북미와 스페인, 포르투갈에 의한 중남미로 구분된다. 이중
북미에서는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에 의해 원주민들의 대대적인 학살이 자행되었고, 그 결과 원주민의 역사와 정체성은 거의 대부분 절멸하고, 유럽에
의해 이식된 정체성을 지닌 백인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거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원주민 학살이라던지 여러 잔혹한 행위들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북미에서 행해진 일련의 학살에 비해 살아남은 원주민가 문화가 많았다. 시몬 볼리바르를 비롯해서 많은 라틴 아메리카인들이 라틴
아메리카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좌절한 뒤 라틴 아메리카는 단순히 엑조틱한 풍경화의 한 자락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서 세계적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본격적인 간섭 정책을 펼쳐 이들 나라를 자신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두었다. 초기에 이런 정책은 단순히 경제적 수탈, 군사적
침략에 의한 것이었으나 차차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저항에 부딪치자 지식인들과 문화를 고아범위하게 흡수하고 포섭하고자 했다. 그 결과 라틴
아메리카는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문화마저도 심각한 대미종속 관계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한 때에 일어난 쿠바 혁명은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지식인들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중남미 좌파는 앞서 아르벤즈와 뒤에 아옌데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점진적이고 개량주의적 노선을
견지했다. 그들은 혁명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서구의 사회민주주의를 자신들의 모델로 삼았고,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회 및 계급구조에 기초한 이론을 채택했다. 그리고 노조를 중심으로 도시노동자 계급에 지지를 통해 집권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혁명에 성공한 지역은 시에라마에스트라의 험준한 산맥을 기반으로 농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쿠바 혁명의 성공이었다.
물론 카스트로와 게바라 이전에도 중남미 지역에서 무장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세기부터 시작한 쿠바의 호세 마르티, 멕시코의 비야, 에밀리아노 사파타,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
니카라과의 산디노 등 많은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 때로는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해서 이어져왔지만 그러한 무장투쟁이 결국 성공하여 정권을 장악한
것은 쿠바 혁명이 처음이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을 비롯하여 많은 전세계 많은 무장 게릴라들이 쿠바 혁명을 하나의 교훈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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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 & 참고사이트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실천문학사/ 2000년 - 20세기가 저물어가는
마지막 해인 2000년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 책이 바로 이 <체 게바라 평전>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이상 열기를 분석해내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게바라는 분명 스타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소모되는 스타와는 달리 우리 속에서 되살아나는
스타라는 점에서 다르다. 게바라에 대한 이 책은 사실 생각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의 삶에 덧씌워진 신화적 행동에 대한 탐구가
부족했다기 보다는 그만큼 그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컸던 탓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이 지닌 약점은 당시 게바라를 둘러 싼 시대적 분위기나
정치적 현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잘 드러나 있지 않고, 다루고 있더라도 상당히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체 게바라의 라틴여행일기/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지음/ 이재석 옮김/ 이후/ 2000년 - 국내에서
구해 볼 수 있는 게바라의 저작물 중 거의 유일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예전에 그가 쓴 게릴라 전술에 관한 글이 다른 책에서 일부 삽입된
적은 있다. 이 책은 그가 모터 달린 자전거를 이용해 라틴 아메리카의 곳곳을 살펴보던 시절의 일기이다. 아직 게릴라가 되기 전 청년기의 게바라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다.
체 게바라/ 장 코르미에 지음/ 은위영 옮김/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99/ 1999년 -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은퇴한(?) 독재자의 아들이 사장인 출판사에서 체 게바라에 대한 책이 나온다. 장 코르미에는 유럽에서는 인정받는 게바라 전문가 중
하나이다. 다만 그의 글이 재미없다는 단점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꼬집을 구석은 없다. 사실 고마워해야할 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우리는 게바라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체 게바라/ 유현숙 지음/ 자음과 모음/
1997년 - 특이하게도 이 책은 국내 작가가 쓴 소설이다.
지난 97년에 대학로 샘터 서점에 서서 한참을 뒤적이다가 결국 사지 않고 뒤돌아서 나왔는데 나중에 구입하려고 했을 때 절판된 것을 알았다.
국내에는 꽤 많은 체 게바라 매니아들이 있다. 물론 그들이 다른 매니아들과 다른 점은 삶에 있어서 그를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는 점일
것이다.
체 게바라 /리우스 지음/ 오월/1991년
- 불행히도 이 책이 지금도 나오는지 알 수 없다. 헌
책방에서 만나게 된다면 이 시리즈를 구입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당시 오월 출판사에 다니는 친구가 있었는데 내게는 추억의 책이기도
하다. 한 가지 더 알려드릴 것은 만화책이라는 사실이다. 아주 유익하므로...꼭 읽어보시길.
현대게릴라전 연구/ 오상카 외 지음/ 편집부
편역/ 세계/ 1985년 - 나로서는 추억의 책이다.
소비에트 빨치산부터 마오의 홍군 전술, 게바라, 알제리민족해방전선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그야말로 현대게릴라전 연구서이다. 상당히 오래 전 책이기
때문에 그동안 어디에 처박아두었는지 한참을 찾았다. 누가 뭐래도 게바라는 게릴라였다. 이 책에는 그와 쿠바 혁명가들의 혁명과정이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사상/ 이성형 편/
까치/ 1999년 -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서
까치 출판사에서 여러 좋은 출판물을 많이 내고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이다. 국내의 라틴 아메리카 학회 소속 학자들이 각자 논문을 만들어
라틴 아메리카의 과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물들을 통해 그들의 역사와 사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꾸미고 있다. 이번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글은 그 중 전북대 송기도 교수님의 논문이 큰 힘이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를 찾아서/ 곽재성, 우석균
지음/ 민음사/ 2000년 - 위의 책이
약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하는 책이라면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입문서 구실을 할 수 있는 책이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간략한
통사와 더불어 문화, 예술, 환경 등에 대해서 곽재성, 우석균 두 명의 필자가 재미있게 잘 다루고 있다. 게다가 이 책의 한 가지 장점을 더
추가하자면 인터넷 시대답게 관련된 사이트들을 두루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점을 꼽으라면 적은 분량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만큼 대충대충이 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옥에 티인 셈이고, 라틴 아메리카 읽기를 시작하는 분들은 이 책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무난하리란 생각이다.
『세계와 미국』-20세기의 반성과 21세기의
전망/ 이삼성 지음/ 한길사/ 2001년 -
밀레니엄을 결산하는 의미에서 한길사가 마음먹고 출판한(뭐 단순히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책이다. 이삼성 교수가 서문에서도 밝혀두고 있듯이
미국과 세계에 관한 연구는 단순한 정치사나 외교사적 서술일 수는 없다. 우리의 존재양식, 우리의 사유양식 그리고 결국 우리 자신의 문명에 대한
연구이다. 이 책은 미국에 대해 관심있는 이들은 물론 관심이 없는 이라도 꼭 읽어보아야할 좋은 책이다.
『20세기 사람들』/ 한겨레신문 문화부편/ 한겨레신문사/ 1995년
체 게바라 홈페이지 - 사실 체 게바라에 대한 인터넷 사이트들이 왜 이 곳 한 곳밖에 없겠는가? 국내외에 많은 인터넷 사이트들이 체 게바라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사이트는 상당히 오래되었고, 다른 사이트들에 비해 내용의 충실도도 상당히 높은 곳이다. 링크도 매우 잘되어 있다. 내
경우엔 이 사이트 하나만 가지고도 다른 사이트들을 찾아 헤먀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게바라에 대해 충분한 탐구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 사이트가 존재했기 때문에 바람구두는 <문화망명지>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게바라의 게릴라 캠프가
세워졌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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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바르가스 요사는 "(쿠바 혁명으로) 우리 나라들(중남미 국가들)에서 혁명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그
당시까지만해도 혁명은 우리의 사고에서 낭만적이고 먼 얘기였다. 우리는 혁명을 우리와 같은 나라에서는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아카데믹한
개념으로 취급하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마르케스의 쿠바에 대한 지지 역시 이러한 인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산중에서 게릴라로서 일생을
마감한다. 결과적으로 게릴라로서 그가 성공한 곳은 쿠바의 경우에만 국한된다고 할 것이다. 1966년 3월, 게바라는 게릴라 훈련을 마치고 콩고를
떠났다. 볼리비아의 공산당원과 만나기 위해 파리를 경유하여 프라하로 갔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는 볼리비아였다. 그러나 CIA는 이미 그가 콩고에
있었으며 유럽을 통해서 볼리비아로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바라는 볼리비아가 라틴 아메리카 혁명의 중요한 기지가 될 것이라 믿었다.
볼리비아는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게릴라 전투의 근거지로 적당하였다. 국민과 유리된 정부, 대중화된 불만, 기근, 정부의 충실한 하수인인 군대,
투쟁의욕이 넘치는 광부들, 게다가 정부의 부정부패.... 그리고 게릴라 활동에 유리한 삼림까지 모두가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남미의 5개국과
국경이 접해 있는 볼리비아는 장차의 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군을 구성할 게릴라 공작기지로서 매우 이상적인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게바라가 볼리비아
산중에서 죽게 되기까지는 사실 많은 복잡한 판단착오와 이유들이 있었다.
우선 게바라 자신이 CIA 가 자신을 집요하게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그가 전술전략적으로 게릴라 기지를 건설하기 전에 맹렬한 공격에 휩싸인 점, 볼리비아 내 좌파
지식인들이 그를 지원해주지 않은 점, 소련(혹은 쿠바)이 암묵적으로 그의 죽음을 방기했다는 점, 미국이 일개 게릴라를 사살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과 특수부대를 지원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1967년 3월까지 싸움은 없었다. 그러나 2명이 훈련중 익사했고, 이때 방문한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레지 드브레와 시로 브즈토스가 후에 체포되었고 고문에 못이겨 게릴라의 은신처를 자백한다. 그리고 같은 해 4월에 볼리비아군은 본격적인
'게릴라 사냥'을 시작했다. 2천명 이상의 병사와 대게릴라전 미국인 특별고문관들(그린베레), CIA의 앞잡이들을 투입하였다.
게바라는 이들의 집중적인 추적과 밀고로 인해 부상당한 채
포로로 잡히고 만다. 그리고 CIA는 이 너무나도 위험한 포로를 살려두느니 죽여버리는 것이 오히려 편리할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이때까지도 체 게바라를 죽임으로써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란 사실을 깨우치지 못했던 것이다. 입회인으로서 게바라의 총살을 목격했던 사람은
두 명의 기자였다. 그들은 볼리비아 출신의 알카사르와 프랑스인 레지 드브레였다. 11시15분, 볼리비아인 하사관 마리오 테란이 사형집행인 역을
자원하였고, 부상당한 게바라에게 마구 총질을 해댔다. 그리고 볼리비아군의 페레스 중위가 게바라의 목에 총을 쏨으로서 확인사살을 했다. CIA는
세계가 체 게바라의 죽음을 믿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게바라의 양 손목을 잘라 피델에게 보냈다.
1967년 10월 9일 12시, 라틴아메리카 해방전쟁에
생명을 바친 한 사나이가 죽었다. 게바라가 꿈꾼 이상은 현재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아직도 멕시코에서 사파티스타들이, 페루에서 투팍
아마루가,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게릴라들이 그들의 이상을 위해 무력과 평화적인 방법을 동원해 투쟁하고 있다. 그 방법이 반드시 옳다고는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체 게바라의 이상이 현재까지도 위험한 것은 사실이다.
체 게바라의 결혼식
다섯째, 그에게 바쳐진 대중적이고 다소 상업적인 열광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 세기의 야만이 저물고 또 다른 세기가 밝아오던 지난 1997년 여름 볼리비아의 비야그란데의 공동묘지의 한 무덤이 열리고 신화처럼
되살아난 게릴라가 있었다. 그가 바로 체 게바라였다. 게바라의 죽음 이후 그의 죽음은 영원히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주기를 두고 대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되살아나곤 했다. 심지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쿠바가 죽은 게바라에 의해 먹고 산다는 풍문이 있을 만큼 그에 대한 환호는
열렬하고 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열기가 드디어 우리나라에게까지 번져들어 2000년 그의 전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상업적인 열광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한때는 위험한 인물로 치부되어 좌우로부터 모두 집중적인 공격을 받던 그가 이제는 더이상 위험하지 않다는 뜻일 수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지금의
현실이 또다른 체 게바라를 꿈꿀 만큼 어렵다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이 전자라는 측의 의견은 그가 박제가 되어버린 제임스 딘처럼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해버렸고 그의 혁명적 이상은 거세된 채, 자유로운 반항아의 이미지만으로 현재 팔리고 있다고 추측한다. 일생동안 자본주의에 반대했지만 그의
얼굴이 담긴 배지와 T-셔츠가 불티나게 팔리는 자본주의적 현상에 대해 게바라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것은 마치 사냥당한 짐승의
머리가 사냥꾼의 거대한 저택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처럼 슬픈 일일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게바라의 주장이 더이상 현실 세계에서 먹혀들 수
없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사회민주주의 진영이나 신좌익에게 유익한 아이콘으로
사용되어 온 것은 사실 오래전부터이다. 그의 죽음이래 소련을 비롯한 국가사회주의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진영으로서 그의 모습은 그런
반항아의 이미지와 대중적 스타의 이미지를 동시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 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탄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게바라를 읽고 그에 대해 탐닉한다는 외면만을 놓고 비판한다면 이런 상업적인 열광의 그늘 뒤에 숨겨져 있는 다른
의미를 너무 쉽게 버리는 것이 된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행이 그의 이상과 사회주의적 현실 사이에서의 괴리를 그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인정하여 이루어진 것처럼 지금 당대의 게바라는 현실적 폭발력을 상실했을 지도 모르지만 잠재된 폭발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80년대 우리 사회의
많은 지식인들이 , 민중들이 전태일 평전을 통해 그들의 안락한 일상에서 떨쳐 일어났던 것처럼 게바라 열풍은 앞으로의 그런 일탈을 꿈꿀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이미 한 세기 전의 인물이자 머나먼 라틴 아메리카의 한
혁명가를 현재의 젊은이들은 알지 못한다. 불과 10여년 전의 우리 현실을 많은 이들이 잊은 것처럼 비록 게바라 열풍이 상업적인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삶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게바라의 열기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1990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이 대선에서 패배한 후, 그 정권에서 11년간 장관직을 수행했던
신부이며 시인인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산디니스타 정권은 결국 실패한 것이 아닌가"는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니카라과 민중이 산디니스타 정권을 통해서 하늘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잠깐 동안 본 하늘은 그들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져
있을 것이고 이것은 후에 다시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힘이 될 것입니다." 일견 이해되지 않는 이 대답은 게바라의 죽음의 의미와 일맥상통하지 않나
생각된다.
왜나햐면 그들은 체 게바라를 통해 잠시라도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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