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는 연애에 대해서는 매우 쑥맥이었다. 그러나, 뭇여성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틀림없다. 게릴라 전사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부인과 함께 살 수 없었다. 전사들이 개선할 때까지 일다(게바라의 부인)는 딸
일디타와 멕시코시티에서 살고 있었다.
1959년 1월 21일, 두 모녀는 아바나에 도착했다. 게바라를 만나기 위해 쿠바로 돌아온
것이었다.
"제가 어린 딸을 데리고 아바나로 온 것은 1959년 1월 21일이었습니다. 이때 에르네스토는 다른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정직하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녀와는 엘 페드레로 전투에서 서로 알게 되었답니다. 나는 매우 슬펐지만 두사람 사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들은 이혼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그는 이혼하자는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그외에 별 다른 해결방법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1959년 5월 22일에 우리는 정식으로 이혼했고 그는 6월 2일에 재혼했습니다." - 일다 가데아
<체게바라, 투쟁의 나날>(1972) -
다른 여자란 도대체 누구일까? 그녀는 22세의 쿠바인 교사, 알레이다 마르치 데 라
토레이다. "7.26운동연합"의 일원이고, 게바라와는 엘 페드레로 농장의 전투에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거기서 게바라부대에 합류하여
승리의 날까지 그의 곁에서 모든 투쟁을 함께 수행했다. 게바라는 재혼한 알레이다와의 사이에 네자녀를 두었다. 그는 바보스러울
만큼 부정이 넘치는 아버지였다. 그는 아이들을 특히 사랑했다. 지금도 쿠바의 아이들은 체 게바라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말이 재미있다. "체 게바라 사령관은 우리 같은 아이들을 많이 사랑했대요. 그래서 우리도 체 게바라 사령관을
사랑해요." 게바라의 결혼생활이 정상적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것이다. 실제로 거의 모든 혁명가는 결혼생활에
실패한다. 남편의 인생이 혁명과 함께 진행되므로 평범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게바라는 우루과이에서 후에 "게바라의 예언"으로 이름 붙여진 두가지의 연설을 했다. 그 연설 중에서 케네디의 "진보를
위한 동맹"의 속셈을 폭로하고 양키 제국주의를 비난했다. (※ 케네디 대통령,,,,, 체 게바라와 케네디는 둘다 쿠바산
시가를 무척 애용했다고 한다. 차이가 있었다면,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산 시가만을 사랑했고, 게바라는 쿠바산 시가보다, 쿠바의 가난한
민중을 더 사랑했다는 점이다.) 아래는 게바라의 예언중 일부분이다.
"우리 민중이 주권을 되찾지 않으면 안된다.독점자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 독점자본은
이미 쿠바에 침투하여 움직이는데, 그것은 거의 모두가 미국자본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 쿠바는 이제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은 다른 삶의 노동으로 부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일이다." 회의가 끝난 후에는 비밀리에
아르헨티나로 가서 후론 디시대통령과 회견하고, 다시 브라질로 가서 쟈니오구아 드로스 대통령으부터 공식적인 훈장을
수여받았다.
1962년, 미국은 쿠바 국내에 소련의 미사일이 배치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고 해군을 파견하여 쿠바를 봉쇄했다. 후루시초프가 소련 미사일의 철수를 결정할 때까지 봉쇄는 계속되었다. 1962년에서 1964년
이 3년 동안은 게바라에게 있어서나 모든 쿠바인에게 있어서나 매우 격심한 노동의 나날이었다. 그는 이 기간동안 당과 대중조직을
견고하게 꾸미고, 향후 경제계획을 세우는 등 많은 일들을 진행시켰다. 1963년 7월, 게바라는 경제계획 세미나에 참석 하기 위하여
알제리를 방문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그는 관리들과 경제운영을 둘러싼 논쟁을 벌였다. 그 논쟁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논쟁에서 과연 늙은 공산주의자들이 게바라의 노선을 받아들였을까? 고참 공산주의자들은 게릴라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전혀 전투적이지
않았었다. 그들은 게바라에 대한 불신감을 갖고 있었고 그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인식부족을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게바라는 쿠바의 공산주의자들이 취하고 있던 공장자주 관리방식이나 국가계획 경제가 골간이 되는 소련형 사회주의 모델보다도,
정신적 자격(刺激)을 중시하고 통일적인 예산 융자제도를 취하는 중국형 사회주의 방식을 더 선호했다. 게바라와 소련의 동지들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논쟁이나 서로 상대방을 비꼬는 좋지못한 평이 오고가고 했지만 그다지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 이상의 대립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게바라가 소련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한 당내 논쟁에 있어서도 게바라의 동지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쿠바경제는 자력갱생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야 했다. 다양한 체험이나 생각들을 받아들여 가면서.....한편에서는
혁명의 원동력이자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시킬 당이 만들어졌다. 게바라에게 있어서는 두번 다시 맡기는 힘든 어려운 일만 계속
되었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엔 혁명적 과업의 완수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주위에서 염려했던 대로 (왜냐하면 그는 경제전문가가 아니었으므로) 큰 실책을 범하지는 않았다. 레닌도, 카스트로도, 아니면
예수일지라도 그런 경우라면 그와 같이 실천했을 것이다... 여하튼, 쿠바경제는 성장해 가고 있었다. 이러쿵 저러쿵 헐뜯는 사람이
있어도 결국 게바라의 노선에 따라서......
1965년, 그러나 게바라는 경제학자로서는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쿠바경제는 그가 바라는 대로 나아가 주지만은 않았다. 1965년 1월, 그는 장기여행을 계획하고 아프리카로
향한다. 콩고, 기니아, 가나, 다오메이, 알제리, 탄자니아. 그리고 카이로를 방문했다. 알제리에서는 "제2회 아프리카 아시아 연대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는 그곳에서 소련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소련은 돈을 지불하는 나라들에게만 무기를
내줍니다....." 이 연설에는 그의 울분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나 처음의 순수한 열정을 상실해
가고있었다. 민중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염려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힘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실망한 체 게바라는
가슴속에 분노를 가득 안고, 3월 14일 쿠바의 수도 아바나로 돌아와서 피델 카스트로와 모종의 장소에 틀어박혀 밀담을
나누었다. 그후 직장으로 돌아온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취했다. 마치 먼 곳으로 떠날 사람처럼 이것저것을
준비했다. 쿠바혁명때 사용했던 권총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1965년 4월 중순, 홀연히 게바라가 자취를
감추었다.
정부청사에도 사탕수수밭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동요하는 쿠바 민중들에게 피델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게바라는 늘 혁명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나의 관계는 아무
이상없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바라의 실종에 대해서 온갖 소문과 억측이 난무했다. 피델과 싸우다가 죽었다, 도미니카에서
객사했다, 발작을 해서 멕시코시티의 병원에 감금되어 있다, 소련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보냈다, 수도승이 되어 스페인으로
갔다, 반카스트로주의자 그룹이 미국으로 납치해 갔다.......등등
1965년 7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소문이 콩고에서
돌았다. 게바라가 어떤 쿠바인과 더불어 촘베의 용병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해 11월 11일, 피델은 아바나의 채플린
극장에서 게바라에게서 온 편지를 낭독했다. 그것은 양친에게, 자녀들에게, 그리고 피델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였다. 그중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내용을 살펴보면,
"사랑하는 일디타, 알레이디타, 카밀로, 셀리아 그리고, 에르네스토에게... 너희들이 이 편지를
읽게 될 즈음엔 나는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있지 못할 게다. 너희들은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어린 꼬마들은 이내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희들의 아빠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단다. 아빠는
너희들이 훌륭한 혁명가들로 자라기를 바란단다.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을 정복하기 위해 많이 공부하여라. 그리고,
혁명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외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을 늘 기억하여 주기 바란다. 특히,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누구보다 너희들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공부하여라. 그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늘 너희들을 다시 보길 바라고 있으며, 아주 커다랗고 힘찬
키스를 보낸다. / 아빠가"
민중해방을 위한 게릴라군의 한 전사로써 게바라는 영원한 민중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단념하고, 다시 전장속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체 게바라가 한 명언중에 이런 말이 있다.
Seamos
realistas, realisemos lo imposible!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그 누구의 억압도 속박도, 부조리도 없는 모든 민중이 평등한 세상, 기존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는 또다른 제 3의 길, 그가 가슴속에 가지자던 꿈은 이것이었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였기에, 이 꿈이 불가능한
꿈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후에 볼리비아에서 최후를 맞는 순간까지, 그는 이 불가능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믿었던 것이다. 비록 자신이 실패하더라도 반드시, 그를 대신할 새로운 게릴라들이 그 꿈을 이루어 줄
것을.
자신의 모든 것을 민중 해방에 바치기로 한 체 게바라는 투쟁에 뛰어들기 위해 옛 벨기에령 콩고를 훈련장으로
택했다. 그후 1966년 3월, 게바라는 게릴라 훈련을 마치고 콩고를 떠났다. 그리고, 볼리비아의 공산당원과 만나기 위해 파리를
경유하여 프라하로 갔다. 그리고 나서 최종 목적지로 볼리비아를 택했다. 그러나, CIA는 이미 그가 콩고에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유럽을 통해서 볼리비아로 갈 것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이 때문에 게바라는 면밀한 변장작전으로 대응했다. 구렛나루와 콧수염을
깍고 머리도 짧게 잘랐다. 헤어스타일도 커다란 수건을 이용해서 변화시켰다. 그는 우루과이의 상인 아돌포 메나로 변장을
한다.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다른 증명서도 준비했는데, 증명서에 쓰인 이름은 라몬 베니테스 훼르난데스였다. 볼리비아에 입국할
때는 메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메나는 볼리비아의 오지에 별장 하나를 갖기 원하는 사람이었다. 볼리비아는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게릴라 전투의 근거지로 적당하였다.
국민과 유리된 정부, 대중화된 불만, 기근, 정부의 충실한 하수인인 군대, 투쟁의욕이
넘치는 광부들, 게다가 정부내의 부정부패, 그리고 게릴라 활동에 유리한 삼림까지 모두가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남미의 5개국과
국경이 접해 있는 볼리비아는 장차의 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군을 구성할 게릴라 공작기지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미 볼리비아를 비롯하여 라틴아메리카 여러나라에서 새로운 투쟁이 싹트고 있다. 혁명가가 수행해야 할 임무가 위험하면 위험해
질수록 혁명의 싹은 무럭무럭 커나갈 것이다. 즉 한 나라의 해방 후에도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 민족해방이라는 신성한 의무를
완수하도록 끝까지 투쟁해야만 한다."
- 제3세계(A.A.LA)의 연대를 위해 발간된 기관지 트리 콘티넨탈지에 체가 쓴
메시지(1967.4.16) 중에서 -
"라틴 아메리카 대륙은 현대의 오랜 정치투쟁에서 잊혀진 대륙이었다. 그러나,
쿠바혁명이라는 인민대중의 함성이 제 3세계 단합기구를 통해 전세계에 울려퍼지기 시작했으며, 이제야말로 혁명에 대해 명확한 임무를
가진 대륙이 되었다고 할수 있다. 즉, 그 임무란 범세계적으로 제2, 제3의 베트남을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종단계에서 발악적으로 등장한 세계 체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전 세계적인 연합전선을 통해서 이를 타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평소에 점잖은 신사인 미국인들은 전쟁도덕에 있어선 매우 악랄하다. 따라서, 그들에 대항하는 투쟁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쓸데없는 희생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오로지 투쟁만이 미제국주의를 물리칠 수 있다. 적들은 우리로 하여금
투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투쟁을 준비하고 투쟁을 시작할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이런 전쟁이 처음에는 매우 어려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과두지배 계급은 온갖 무력을 동원하여 탄압해오고 온갖 폭력과
악선전을 이용할 것이다. 우선은 살아남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리고, 이어서 베트남에서 실천된 것처럼 무장전선이라는
게릴라의 영원한 규범이 실행될 것이다.
즉, 총에 의한 선전, 적과 대치하여 승부를 거는 전투, 그 자체에 의한 선전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게릴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위대한 교훈이 착취받고 있는 민중들 가슴속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민족정신이
고양되고, 보다 어려운 임무에 대한 준비와 폭력적인 탄압에 대해 저항할 준비가 가능해진다. 적이 있는 모든 지점까지 투쟁의 장을
넓히지 않으면 안된다. 적의 집, 적의 휴식처까지도 전쟁은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적에게 일초의 평온, 잠시의 휴식도 주어서는
안된다. 그 어떤 미국 병사도 자신의 막사에서나 극장, 혹은 거리에서 안심하고 다닐 수 없도록 자신을 독안에 든 쥐로 생각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점점 더 그가 야수와 같이 행동하게 되면 될수록, 그의 발광은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어 갈 것이다." -
1967년 4월, 아바나에서 개최된 "3대륙 단합기구" 회의에서 대독된 게바라의 보고서 -
1966년 8월 : 체 게바라,
볼리비아에 도착, 비슷한 차림으로 변장한 쿠바인 10명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같이 싸웠던 강인한 전사들)도 도착 완료. 1966년
10월 : 산타 크루스 근처에 있는 집을 입수. 약 15명의 볼리비아인과 조직을 형성. 볼리비아 공산당은 게릴라전에 동조하지
않음. 1966년 11월 : 체 게바라, 농촌으로 들어가 게릴라 활동의 준비 개시. 같은 날, 즉 11월 7일부터 저 유명한
<게바라 일기>를 쓰기 시작함.
"오늘부터 새로운 상황에 접어들었다. 밤에 은신처에 도착했다. 여행은 비교적
순조로왔다. 변장도 아주 훌륭히 되었고 무사히 코챠밤바를 통과했다. 파충고와 나는 여기저기 연락을 취하면서 두 대의 지프로 이틀간
돌아다녔다. 은신처 부근에 도착하여 일단 차를 멈추고, 한 대만 몰고 집으로 향했다. 우리가 혹시 코카인을 제조한다는 소문이라도 나서
근처 주민들의 주의를 끌게 되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두우마이니라는 자가 우리 그룹의 화학기사로 일하게
된 것이 수상하다...." - 게바라의 일기 중에서 -
게바라의 일기를 읽어 내려가면 한 사람의 게릴라 전사가 겪는
인생의 희비극을 엿볼 수 있다. 동지의 배반, 낙심과 기쁨, 투쟁과 죽음 등... 체 게바라는 처음에 지형을 숙지하는 훈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게릴라들이 속속 도착했다. 1967년 3월까지 적과의 싸움은 없었다. 그러나 2명이 훈련중
익사했다. 이때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레지 드브레와 시로 브즈토스가 내방했었다. 경찰이 이 두사람을 취조해서 중요서류를 압수하고
그들로부터 게바라의 은신처를 알아냈다. 드브레와 부즈토스는 후에 체포되었고 고문에 못이겨 게릴라의 은신처를 자백한
것이다. 4월11일, 볼리비아군은 게릴라 기지를 수색하면서 그 속에서 게바라의 사진을 찾아냈다. 이 정보를 넘겨받은 미국 CIA는
볼리비아에서 수색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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