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게바라의 아바나 입성은 금세기 최고의 미니시리즈라고
할수있다.
규모나 그 길이로 볼때 대하극은 분명 아니고 그렇다고 일회성으로 끝나는
단막극도 아니며 그 스피드 있는 전개와 감동적인 대반전 스토리 및 호화배역진(?)등으로 볼때
미니시리즈가 맞다.
이 거짓말 같은 드라마 한편으로 체게바라와 피델카스트로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도대체 아바나입성, 쿠바혁명의 드라마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아마도 누군가가 그 대본을 미리 입수해 읽었더라면 대단히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흥행성은 전무한 신출내기 작가의 치기어린 습작쯤으로 여기고, 대본 여기저기에 빨간 밑줄을 찍찍 그어대며
나름대로의 충고에 꽤나 진지 했으리.
20대 후반의 대학을 갓 졸업한 일군의 애송이들이 한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이상을 꿈꾸는 것은 전혀 낮설지 않다. 세계의 도처에서, 아마 지금 이 시간에도 열 올리는 축이 꽤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이 현실화 된다는 것은 정말 낮선 일이다. 이 드라마의 흥행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던것도 바로 전례가 없던 일이기
때문이다.
80여명의 애송이들이 그냥 바닷물에 띄워 놔도 시간되면 저절로 가라앉을
낡은 고물배에 몸을 싣고는 폭풍우와 폭격을 뚫고 용감하게 쿠바해안에 상륙했다. 빗줄기 속을 정신없이 도주하다가 한숨을 돌려 인원을
추스려 보니 15명이 남았다. 뒤에 부상을 입은채 합류한 축까지 합쳐서 20명...
상대는 CIA의 특수훈련을 받은 12000여명의 군대와 막강한 재력을 가진
매판자본가 및 정부 일체...
누가 이 싸움을 싸움으로 보겠는가?
그러나 이 게임이 누구나 예측하는 그
결과가 아닌 반대의 경우라면? 그 결과가 바로 영웅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1959년 새해가 밝았다. 피델과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부대가 드디어 쿠바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쿠바는 해방된 것이다. 1월 5일, 사법관 마누엘 우르티아가 대통령에, 호세 미로 카르도나가 수상에 임명되었고, 체
게바라는 수도 아바나의 요새인 라 카바냐지역의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피델과 체 게바라가 이끈 용감한
애국청년들은 세상이 깜짝 놀랄 역사적 과업을 이룩했다.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던 친미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무력을 사용한 싸움이 끝나고 나자, 한층 더 어려운 문제가 다가왔다. 그것은
새로운 혁명이었다. 쿠바가 또다시 양키의 식민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구조를 변혁시켜야만 했다. 피델과 까밀로 시엔후에고스는
아바나의 군정관이 되어 바티스타군의 잔당을 일소하는 일을 맡아했다. 군부와 경찰은 수년에 걸친 내전 기간동안 2만명 이상의 쿠바
민중을 학살했다. 살인, 강간, 고문, 폭력, 강도질에다가 마지막엔 농가에 불을 지르기까지 온갖 만행을 밥먹듯이 저질러
왔다. 이런 야만적인 폭정을 휘두르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아낌없이 받아왔던 것이다.
이런 인간 쓰레기들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이 옳겠는가? 아니면 처형하는 쪽이
옳겠는가? 게바라는 이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임무(재판권)를 맡았다. 살려두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재차
반혁명을 꾀할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총살하고, 나머지는 징역을 살도록 했으며, 모함을 당한 것으로 밝혀진
극소수만 무죄로 석방하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게릴라들은 멕시코나 과테말라 혁명의 선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전면 개편했다. 직업군인제를 폐지하고 미국이나 부르조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피델과 체
게바라 그리고, 그의 동지들은 수염을 깍는 일도 미루고 제반문제를 검토했다.1959년 1월, 게바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멕시코의 어느 곳에서 우리가 은밀히 토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혁명의 강령을 쿠바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자 몬카타병영 습격에 참가 했던 한 병사가 이렇게
주장했다. 이건 단순하고도 간단한 일이다. 우리들이 하려고 하는 일은 쿠데타다. 바티스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니 그 놈으로부터 다시 정권을 빼앗으려면 또 한 번의 쿠데타를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바티스타가
100의 이권을 미국에 바쳤다면 우리들은 101의 이권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문제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에게, '우리들은 확고하게 기초를 다진 후에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된다 보다
중요한 일은 권력을 잡은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체 게바라의 이 말속에 숨은 뜻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권력을 잡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억압받는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잡는 것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힘이 생긴 후 가난한 민중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 또, 어떻게 해줘야 그들이 진정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해내야 할 진정한 혁명이다."
오리엔테의 산과 평지에서, 카므게이의 저지에서, 라스 비야스의 산과 평지 그리고 여러도시에서의 2년
동안에 걸친 처절한 투쟁 후에 아바나에 개선한 우리 게릴라들은 초창기와는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농민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는 토지를 소유 하지 못한 농민의
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실천을 통하여 우리의 이론도 정립해나갔다.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수행되었던 "토지개혁"의 깃발 아래 굳게 뭉쳐 우리 게릴라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워
왔다.
우리는 "토지개혁"을 통해 모든 무산자들에게 토지가 돌아가야 하며, 불법
소유자들에게서는 토지를 돌려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수행하는 노력과 치르고 있는 희생이
농민의 해방을 위한 것일 때에는 아낌없이 치루어내야 한다는 것을 농민의 지지와 성원 속에서 배우게 된 것이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줄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인 급진적 토지개혁은 직접적으로 제국주의자들과 그들에 빌붙어먹는자들 즉, 대토지 소유자, 설탕공장
경영자, 대규모 농장소유자들의 이익과 충돌한다.
부르조아들은 이러한 충돌을 두려워하나 프롤레타리아는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은
이 토지 소유자들에게 불리하게 제정된 법률을 지지하고 있다. 혁명군은 남녀를 불문하고 기본적인 사명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억압과 착취의 굴레로부터 민중들을 해방시키는 사명이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토지를 쟁취하는 투쟁에 그들을 불러 일으켜서
참여시켜야 했고, 그 일을 위해 오리엔테주의 구석구석까지 바로 그곳 출신의 교사들이 파견되었다. 쿠바 혁명정부는 사회 각 분야의 개혁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었고, 민중의 단련된 민주주의 의식이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농지개혁 구상을 구체화하여, 실현가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혁명적인법률이 요청되고 있었다. 또한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토지의 재분배와 늘어난 농산물의 수급을 처리할 대형
유통기구의 마련이라는 두가지의 과제는 혁명정부가 어떻게 해서라도 실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일은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다. 국내산업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이 과정에서 파생되는 많은 난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컨데 산업장려정책을 진행시킴에 있어서 막 생겨나고 있는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과 이 기업에서 생산해낸 상품을 소비할
국내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대책도 필요하다. 이 시장의 규모는, 구매력은 크지 않더라도 물품을 필요로 하는 농민들의 수요에 맞출
정도면 된다. 사탕 담배 등을 수송하기 위한 상선도 필요하다. 또한 이전에 우리들의 소유였던 토지, 광산을 되찾지 않으면 안된다. 또
하나, 전력을 확실하게 쿠바민중의 것으로 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요금은 비싸고 아직 실생활에 직접적으로 필요없는 전화회사를 국유화하는
일도 고려해야 한다. 게바라는 피델과 몇가지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던 것은 틀림없었다. 그에게는 조직가로서의 뛰어난 수완이
있었다.
1959년 2월 9일에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쿠바의 시민권을 얻었다. 이즈음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확실히 라울(피델의 아우)과 나는 자주 충돌한다. 그래서 영광스럽게도 우리는
1,2등을 다투를 잔소리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역사책을 찾아보면 우리에게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 주는 모델 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멕시코는 석유를 국유화한 후에 발전의 길을 걷게되었다. 당시의 대통령 카르데나스는
멕시코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도 멕시코처럼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들의 정책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시비를 걸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우리들이 이 나라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이고, 이 나라에서 제국주의의 손아귀에 있는 것들을 국유화하는 것과 우리의 주권을 되찾는 것은 같은 문제라는
것이다."
꼼꼼하게 일하고, 착실하고 조직적이면서도 고집을 굽히지 않는,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의 이익보다 민중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처럼 철두철미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의 일하는 태도나 탁월한 능력을 높이 평가한 도르티코스 대통령은 피델의
천거를 받아 게바라를 공업장관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게바라의 나이 32세였다.
실천이 없는 이론은 필요없다! - Che
Guevara
피델 카스트로의 추천과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게바라는 국립농업개혁국의 공업부장이라는 경제 부문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1959년 6월, 게바라는 인도, 이집트, 인도네시아, 유고 등을 돌아보는 여행길에 오른다. 표면적으로는 그 나라들의
경제부문에 대한 연구가 주목적이었지만, 게바라 개인으로는 일찍부터 자신이 꿈꾸어 왔던, 자본주의적 방법도 아니고 공산주의적 방법도
아닌 이른바 "제3의 길"을 향한 첫걸음을 시작한 것이었다. 같은 해 11월 28일,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의 총재로
임명되었다. 초대총재가 된 게바라는 셔츠차림으로 업무에 들어갔다. 낡아빠진 군복풍의 셔츠를 걸치고,
빗질도 하지 않은 부시시한 머리로 총재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의 급료를
5천페소에서 1천2백페소로 줄인 일이었다. 이에 놀란 쿠바의 부르조아들은 당황하여 허둥거리며 모두 마이애미로 줄행랑
쳤다. 이즈음, 쿠바의 지폐는 미국에서 인쇄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지폐가 남아 돌아갈
정도로 남발되고 있었다. 잘못하면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쿠바 경제가 붕괴될 수도 있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통한 쿠바의
경제공황을 노렸다. 이를 간파한 체 게바라는 쿠바내에서 지폐를 인쇄하려 했다. 그러나, 아직 쿠바의 인쇄기술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게바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미국에서 쿠바의 지폐를 마음대로 찍을 수 없도록 지폐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인쇄하도록 하고, 위조할 수 없도록 자신의 싸인을 새겨 넣었다. 지폐 난발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쿠바 혁명정부의
전복을 노리던, 미국의 계략은 게바라로 인해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게바라가 중앙은행 총재에 임명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중앙은행의 임원이었던 호세
산티에스테반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행업무 중에서 그가 가장 고심한 것은 외화의 축적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외환수지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외환보유고를 보면서 모든 문제를 분석하곤 했습니다. 그는 새벽 서너시까지 피로도 잊은 채 일을
하고 늘 재정상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와 일치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여러 사람들과
상의했었지요. 간부들에게 자유롭게 발언하도록 하고 최종적으로 그가 결정을했습니다. 부하들이 과실을 범할 때는 엄격하게
질책했었지요. 하지만 항상 인간적이었어요. 심약한 것은 용서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관용을 베풀었죠. 한 인간에 대한 신뢰는 그
사람이 정직하고 혁명적인가 어떤가 살펴보고, 일단 눈에 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금융정책을 오로지
혁명사상을 현실화시키는 무기로서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게바라는 어떤 방법론을 채택할 경우, 그 채택의 근거를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인 측면에서 찾았지요. 중앙은행은 단 하나의 참된 가치 즉 "혁명수행에 있어서의 동지애"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원칙과 일상적인 삶 그 모두에 있어서 가장 인간적이며 혁명적인
사람이었지요."
1960년에 게바라는 자신의 발로 사회주의 국가의 땅을 밟아보는 꿈을 실현했다. 소련, 중국, 불가리아,
북한, 체코슬로바키아등을 방문하고 RDA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강경하고 빈틈없는 체 게바라의 쿠바내 미국재산의 국유화와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통상확대 정책은 미국의 이익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국유화한 토지, 은행, 제당공장, 상사 등은
대부분 양키 자본가들의 소유였었기 때문이다.
참지 못한 미국은 마침내, 쿠바에 대한 공격을 결심했다.
1961년 1월 8일 미국은 쿠바와 국교 단절을 했다. 그리고, 1961년 4월 17일부터 48시간에 걸쳐 미국은 피그만해안을
침공했다.
게바라는 이 전투에 참전하여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그의 게릴라 전술은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미국의 침공으로 쿠바의 육, 해, 공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혁명군은 결국 미국의 공격을 물리쳐내었다. 체 게바라가 버티고 있는, 쿠바군은 이제 더이상
미국에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드디어, 피델 카스트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기치를 높이들고 세계를 향해
공언했다. 쿠바는 사회주의의 일원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에 재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동맹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쿠바의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게바라는 전국 각지에 공장을 건설하는
산업발전 4개년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갖가지 시행착오는 감수해야 했다. 그의 경제 정책의 골격은 아래와
같았다.
급진적 농지개혁, 사탕수수 경작지의 축소, 급속한 산업화, 1차 상품의 수입제한, 산업의 전면적 국유화, 외화축척,
임금제도의 개선... 그러나, 게바라는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즉, 노동자의 투쟁이 한결같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경제투쟁으로 나아간다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체 게바라는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문제 해결이
훨씬 쉽다. 많은 이익을 올리려는 욕심이 그들의 본성이기 때문에 임금인상의 요구가 있어도 여유있게 시간을 끌다가 막판에 가서
임금을 아주 조금 인상해주어 생색만 내면 문제가 해결되니까 말이다."
이제야 게릴라들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지나친 임금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동을 하지않는 매우 고급스런 직업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뼈빠지게 일하고도 기아임금에
허덕이는 심각한 상태였다. 게바라가 생각하기에는 무엇보다도 노동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신성한 노동의 의미에 대한 자각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성한 의무감에 의해 노동하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비교적 짧은 시간내에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자국보다는 '의식의
개혁' 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금전욕이나 명예욕 혹은 체제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과
지도자에 대한 신뢰 그리고, 자기 자신들을 위한 공동체의 더나은 미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상태에 이를 때, 더이상 노동이 괴로울 필요가
없어지고 즐거운 의무가 될 것이다. 물질적 유혹이란 새로운 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과거의 유물이다. 그것은 완전히
척결되어야만 한다. 우리들이 그런 부조리한 것들과 싸워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주의 정신의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쿠바 사람들처럼 놀기 좋아하고 소란스러우며, 행실이 분방한 국민을 하나의 기치 아래 결집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쿠바에는 기술자도 전문직 노동자도 없었고, 경제 계획도,
예산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론에서 실천으로!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으면서 생산성을 높이고 태만함, 결근,
여럿이 모여서 복잡거림 등의 생산성 하락요인을 없애기 위한 새로운 기술의 습득, 유능한 관리자의 육성, 양키의 간섭을 배제한 자주적
공장운영...
이런 사항이 게바라에게 부과된 중대한 과제였다. 게바라는 노동 그 자체보다는 자유의지로 하는 잉영노동을 더 많이
요구하였다. 그것은 생산성 향상을 위한 하나의 요인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대중교육의 원천이다. 모든 사회적 과제 배후에 있는
목적은 새로운 인간의 창조인 것이다. 게바라는 붉은 자발노동대를 만들고, 한 사람의 노동자로 돌아가 사탕수수를 거두고
노동자 주택의 건설에 참가했다. 이 모든 것이 노동자 교육의 일환이었다. 물론 게바라 역시 다른 노동자들과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입었다. 이순간 그는 중앙은행 총재도, 쿠바의 2인자도 아닌, 한사람의 노동자였다. 그는 민중을 사랑했고,
그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 사람답게 사는 것을 보고자 했다. 아래는 그 당시 체 게바라와 함께 일했던 한 노인의
증언이다.
"체 게바라는 좋은 옷이라든가 새구두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어요. 한번도 우리
노동자보다 좋은 음식을 먹은 적도 없었구요. 우리와 같은 노동자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지급받은 것을 먹고
입었어요. 그는 특권을 갖는 것도 매우 싫어했지요. 자신의 부하에게조차 어떠한 특권도 행사하지 않으려고 항상
자신을 경계했어요. 그는 살아있는 동안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이 게릴라 병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지요. 이만하면
대단한 인물아닙니까?"
증언을 마친 노인의 눈에선 어느새, 한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또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귀중한 경험이었어요. 그는 일을 나갈 때는 제일 먼저였고 퇴근할 때는 맨
마지막이 었거든요. 게다가 대개의 경우 가능한 한, 일을 마무리하려고 하다가 너무늦어 돌아갈 수 없을 때는 작업장에서
그냥 노숙했지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마룻바닥에 아무렇게나 웅크리고 잤어요. 침대에서 자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요."
"그는 노동자에게 공손하고 싹싹했지요. 함께 자발적 잉여노동을 할 때나 공장으로 갈 때, 처음에는
아무도 호감을 갖지 않았어요. 그래도 게바라는 우리와 함께 어울려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자유롭게 이야기를 한다든가, 물을 마시려고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면서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었지요. 그는 우리 같은 노동자들에게는 체 게바라 사령관이
아니었어요. 그저 한사람의 노동자 친구였어요." "산타 코로마 농장에 있었을 때, 새벽녘
무렵이었는데, 게바라가 갑작스런 천식 발작으로 시달리고 있었어요. 내가 '왜 잠시도 쉬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약을 꺼내오면서 이렇게 대답했지요. '그렇게 닥달하지 말아요.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요.'"
"그는 매우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우리 노동자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나 알아듣기 쉬운 말을
사용하였고, 그가 세운 계획들도 아주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를
존중하고, 이해해 주었습니다."
1961년 8월 게바라는 쿠바대표로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에 갔다. 그곳에서는 OEA(미주기구=미국의
지배기구의 하나)의 '경제사회심의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당시의 라이프지에 이에 대한 자세한 기사가 실렸다. "어떤 때는 화려하고 잘난 척하는
또 어떤 때는 온화하고 호감을 주는, 구렛나루를 기른 이 쿠바대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참석자는 게바라가 능숙하게 외교적인 제스쳐를 쓴다고 하여
<체체>라고 이름 붙였다. 게바라의 이상한 언동은 그를 적대시하는 그룹에게 있어서는 조소거리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 망명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한편으로는 좌익의 보호를 받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진보를 위한
동맹"의 스폰서인 미국을 공격하면서, 쿠바가 동맹의 자금원조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을
했다. 각국의 대표들은 게바라야말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소련의 침입과 지배를 불러들일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자리에서 NO라고 딱 잘라 대답했다. 푼타 델 에스테 헌장에 서명한 각국 대표들은 만족해 하며 해산했다. 쿠바로 돌아가는 길에
게바라는 대부분의 산업을 국유화시켰던 쿠바경제가 이젠 위기에 직면했고, 미국과의 암거래가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고 실토했다. 소련권으로부터의
원조는 만족할 만큼의 효과가 없고 쿠바에는 적당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게바라는 적대국인 미국과 예전처럼 식민지적 상업거래가 아닌
동등한 입장에서의 거래가 성립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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