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혁명의 시작
자유라는 깃발
아래 분연히 일어설 줄 아는 인간이 되자!
- Che Guevara
게바라는 1955년 여름, 멕시코로 추방당한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쿠바해방운동에
가담해 달라는 피델 카스트로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피델은 그를 쿠바 진격대의 의사로 임명했다.
피델과 나는 밤을 지새우며 토론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그의
부대의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이미 내 자신의 다리가 라틴아메리카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고,
과테말라에서는 가장 잔인하게 숨통을
조였던 제국주의의 실체를 본 후였기 때문에, 압제자에 대항하는 혁명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내 한 몸을 바치는 데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있을 수
없었다.
피델은 비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들이 세운 계획은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낙관적인 태도에 공감하게 되었다.
아무튼 혁명은 코앞에 닥친 현실이었고 온몸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울부짖기만 한다든지
대충 적당히 해치워버린다든지 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게바라와 멕시코에 있던 망명 쿠바인들은 철저하고
강도높은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교관은 스페인 외인부대의 대장으로 게릴라 전투에 다년간 경험이 있는
알베르토 베이요 대령이 맡았다.
베이요는 멕시코에서는 살바로르 태생의 지주로 통하고 있었다.
망명 쿠바인들은 그의 신분을 이용하여 멕시코주 찰코 지방 부근에 있는
오래된 농장을
구입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고된 훈련과 사격연습에 들어갔다.
7.26운동의 지도자들은 수개월 동안 카리브해를 건너
전사들을
무사히 쿠바까지 실어다 줄 튼튼한 배를 찾아 다녔다.
마침내, 피델이 베라쿠르즈주의 리오타투스판이라는 작은 항구에 묶여 있던
고물이 다 된 보트 그란마호를 찾아냈다.
이 배의 주인은 미국인인 로버트 에릭슨이었는데, 피델 일행은
멕시코인 안토니오의 중개로
5만페소를 주고, 이 낡은 배를 별 수 없이 사들였다.
이 배는 1939년에 건조된 것인데 전체 길이는 19미터, 폭 4.5미터로서 정원은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서 약 20명 정도였다.
250마력짜리 두 개의 엔진을 탑재할 수 있었지만 거의 모든 부분을 수리해야 할 만큼
고물
이었다.
그란마호는 1956년 11월 25일 일요일, 동이 틀 무렵 닻을 올렸다.
정원을 훨씬 초과하여 82년이나
승선했다.
게다가 연료, 무기, 전투복, 식량을 적재했으니 최대 시속 9노트에 48톤의 고물 보트는 출발
하자마자 허덕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멕시코에서 쿠바의 동부 오리엔테주 해안까지 가는 가장 길고 비효율적인 항로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도중에
FBI나 멕시코 경찰을 만나는 일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보트는 언제 격침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더구나 승무원들은 모두 배멀미를 했다.
게다가 식량도 충분치 않았다.
게바라는 지병인 천식이 도져서 심하게 고생했다.
그란마호는 마침내 연료가 떨어졌고 휩쓸려오는 파도에
떠밀려 항로를 잃고 말았다.
상륙예상지점인 코로라다스 해안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배는 산호초에 좌초되었다.
해안에 배를
갖다대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82명의 탑승자는 모두 바다에 뛰어들어 자맥질
쳐서 간신히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망그로브 숲은
상륙지로는 최악이었다.
붉은 망그로브 숲은 바다 쪽에서는 두터운 장벽처럼 보였다.
그 거대한 나무들의 밑둥에는 라카로운 빛을 띤
굴조개 따위가 칼끝처럼 빛을 발하며 닥지
닥지 붙어 있었다. 게다가 물 위로 드러난 망그로브의 뿌리에는 바늘깥은 가시가
돋혀있어서
밟으면 발바닥을 쿡쿡 찌르는 것이었다.
발밑은 뻘밭이어서 발을 옮길 때마다 미끄러지기 쉬웠고 마치 뜨듯미지근한
고기국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기분마저 불쾌했다.
게다가 여러 종류의 커다란 게들이 우글거리며 기어올라와 전사들을 괴롭혔다.
설상가상으로 모기나 파리떼가 몰려오면 망그로브숲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세시간이나 걸려서 간신히 이 지긋지긋한 늪지대를 빠져나와
일행은 아침 9시에야 단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오전 9시 30분 원정대원들이 늪지대를 막 벗어나자마자 귀청을 때리는 폭음이
들려왔다.
바티스타의 군대와 비행기가 그들이 상륙한 것을 발견하고 폭격을 개시한 것이다.
11시에는 폭격기 세대가 다시 나타나 피델과
그의 동지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농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원정대원들은 다시 쫓겨 나가야 했다.
게바라는 다음과 같이
쿠바에서의 악몽과 같은 첫 날에 대해 기록하였다.
12월 2일 우리들은 도착예정지인 코로다스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벨릭이란 지점에
상륙했다.
이때 이미 대부분의 장비는 분실되었다. 게다가 새로 준비한 군화를 신었기 때문에 늪지대를
빠져나오는 동안, 대원들의 발은
부르터지고 물집이 생겼다.
문제는 이 상처에 스며들어오는 파상풍균만이 아니었다.
카리브해를 항해하는 도중 내내 몰아친 폭풍속을
7일간이나 헤쳐왔기 때문에 항해에 익수치
못한 대원들 거의 모두가 심한 배멀미로 탈진해버려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다음의 작전을
수행해
내기가 어려웠다.
원정대원들의 모습은 무모한 계획과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는 표본이었다.
물론 초기의 이러한 자살행위에 가까운
실수들이 후에 성공할 수 있는 생생한 교훈이 되었
지만...
장비중에서 우리 손에 남은 것이라곤 총, 탄약대, 눅눅해진 탄환뿐이었다.
대부분의 구급낭과 배낭은 늪지대를 빠져나오면서 잃어버렸다.
밤새도록 제당공장 소유의 사탕수수 밭을 헤치고 걸어나갔다.
전투
경험이 전혀 없던 우리 대원들은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를 행군 도중에 버렸기 때문에
나중엔 식량이 모자라서 사탕수수만으로 허기와 갈증을
달래야 했다.
뿐만 아니라 무심코 버린 음식 찌꺼기가 후에 화를 자초했다.
수색대가 이를 발견해서 우리를 추격하는데 좋은 단서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길을 안내했던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도 커다란 실수였다.
그들이 돌아가서 바티스타의
정부군에게 우리의 행로를 밀고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쿠바진격 부대원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주해야 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레지스탕스들과 접선하는 일은 이미 불가능 했다.
12월 5일 바티스타군은 그들이 숨어있던 알레그리아
델 피오라는 사탕수수 재배지역을 습격했다.
사탕수수밭에서
140명에 달하는 정부군이 그들을 포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세 사람이 전사하고, 게바라를 포함하여
다수가 부상당했다.
대다수의 대원들은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져버려 생사
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리하여 카스트로가 이끄는 게릴라들과
바티스타가
두목인 1만 2천여 용병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실전 속에서 단련된 장교들과 네이팜탄을 비롯하여 무엇 이든 탑재할 수
있는 최신형 전투기, 게다가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 바티스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미제국주의.....
이 모든 것들과 소수 게릴라들은
맞서 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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