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쿠바해방! 또다른 시작
The people liberate themselves
- Che Guevara
1959년 새해가 밝았다.
피델과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부대가 드디어 쿠바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 피델과 체 게바라의 게릴라군 쿠바 수도 아바나 입성 장면 동영상
보기)
쿠바는 해방된 것이다.
1월 5일, 사법관 마누엘 우르티아가 대통령에,
호세 미로 카르도나가 수상에
임명되었고,
체 게바라는 수도 아바나의 요새인 라 카바냐
지역의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피델과 체 게바라가 이끈 용감한
애국청년들은
세상이 깜짝 놀랄 역사적 과업을 이룩했다.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던 친미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무력을 사용한 싸움이 끝나고 나자, 한층 더
어려운 문제가 다가왔다.
그것은 새로운 혁명이었다!
쿠바가 또다시
양키의 식민지(차라리 양키의 사창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구조를
변혁시켜야만 했다.
피델과 까밀로 시엔후에고스는 아바나의
군정관이 되어 바티스타군의 잔당을 일소하는
일을 맡아했다.
군부와 경찰은 수년에 걸친 내전 기간동안 2만명 이상의 쿠바 민중을
학살했다.
살인, 강간, 고문, 폭력, 강도질에다가 마지막엔 농가에 불을 지르기까지 온갖 만행을 밥
먹듯이 저질러 왔다.
이런
야만적인 폭정을 휘두르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아낌없이 받아왔던
것이다.
이런 인간 쓰레기들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이 옳겠는가?
아니면 처형하는 쪽이 옳겠는가?
게바라는 이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임무(재판권)를 맡았다.
살려두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재차 반혁명을 꾀할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총살하고, 나머지는
징역을 살도록 했으며,
모함을 당한 것으로 밝혀진 극소수만 무죄로 석방하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게릴라들은 멕시코나 과테말라 혁명의
선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전면 개편했다.
직업군인제를 폐지하고 미국이나 부르조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피델과 체 게바라 그리고, 그의 동지들은 수염을 깍는 일도 미루고 제반문제를 검토했다.
1959년 1월, 게바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멕시코의 어느 곳에서
우리가 은밀히 토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혁명의 강령을 쿠바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자 몬카타병영 습격에 참가
했던
한 병사가 이렇게 주장했다.
이건 단순하고도 간단한 일이다. 우리들이 하려고 하는 일은 쿠데타다.
바티스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니
그 놈으로부터 다시 정권을 빼앗으려면 또 한 번의
쿠데타를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바티스타가 100의 이권을 미국에 바쳤다면
우리들은 101의 이권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문제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에게,
'우리들은 확고하게 기초를 다진 후에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된다 보다
중요한 일은 권력을 잡은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체 게바라의 이 말속에
숨은 뜻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권력을 잡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억압받는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잡는 것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힘이 생긴 후
가난한 민중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
또, 어떻게 해줘야 그들이 진정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해내야 할 진정한
혁명이다."
오리엔테의 산과 평지에서, 카므게이의 저지에서, 라스 비야스의 산과 평지 그리고
여러
도시에서의 2년 동안에 걸친 처절한 투쟁 후에 아바나에 개선한 우리 게릴라들은 초창기
와는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농민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는 토지를 소유
하지 못한 농민의 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실천을 통하여 우리의 이론도 정립해나갔다.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수행되었던 "토지개혁"의 깃발
아래 굳게 뭉쳐
우리 게릴라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워 왔다.
우리는 "토지개혁"을 통해 모든 무산자들에게 토지가
돌아가야 하며, 불법 소유자들에게서는 토지를 돌려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수행하는 노력과 치르고 있는 희생이
농민의
해방을 위한 것일 때에는 아낌없이 치루어내야 한다는 것을 농민의 지지와 성원 속에서 배우게 된 것이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줄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인 급진적 토지개혁은 직접적으로 제국주의자
들과 그들에 빌붙어먹는자들 즉, 대토지 소유자, 설탕공장 경영자, 대규모
농장소유자들의
이익과 충돌한다.
부르조아들은 이러한 충돌을 두려워하나 프롤레타리아는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은 이 토지
소유자들에게 불리하게 제정된 법률을 지지하고 있다.
혁명군은 남녀를 불문하고 기본적인 사명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억압과 착취의
굴레로부터 민중들을 해방시키는 사명이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토지를 쟁취하는 투쟁에 그들을 불러 일으켜서 참여시켜야 했고,
그
일을 위해 오리엔테주의 구석구석까지 바로 그곳 출신의 교사들이 파견되었다.
쿠바 혁명정부는 사회 각 분야의 개혁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었고, 민중의 단련된 민주
주의 의식이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농지개혁 구상을 구체화하여, 실현가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혁명적인
법률이 요청되고 있었다. 또한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토지의 재분배와 늘어난 농산
물의 수급을 처리할
대형 유통기구의 마련이라는 두가지의 과제는 혁명정부가 어떻게 해서
라도 실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일은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다.
국내산업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이 과정에서 파생되는 많은 난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컨데 산업장려정책을 진행시킴에 있어서 막 생겨나고 있는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과 이
기업에서 생산해낸 상품을 소비할
국내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대책도 필요하다.
이 시장의 규모는, 구매력은 크지 않더라도 물품을 필요로 하는 농민들의 수요에 맞출
정도
면 된다.
사탕 담배 등을 수송하기 위한 상선도 필요하다.
또한 이전에 우리들의 소유였던 토지, 광산을 되찾지 않으면
안된다.
또 하나, 전력을 확실하게 쿠바민중의 것으로 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요금은 비싸고 아직 실생활에 직접적으로 필요없는
전화회사를 국유화하는 일도
고려해야 한다.
게바라는 피델과 몇가지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던 것은 틀림없었다.
그에게는 조직가로서의
뛰어난 수완이 있었다.
1959년 2월 9일에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쿠바의 시민권을 얻었다.
이즈음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확실히 라울(피델의 아우)과 나는 자주 충돌한다.
그래서 영광스럽게도 우리는 1,2등을 다투를
잔소리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역사책을 찾아보면 우리에게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 주는 모델
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멕시코는 석유를 국유화한 후에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의 대통령 카르데나스는 멕시코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도 멕시코처럼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들의 정책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시비를 걸른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우리들이 이 나라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이고, 이 나라에서 제국주의의 손아귀에 있는 것들을 국유화하는
것과 우리의 주권을 되찾는 것은 같은 문제라는 것이다."
꼼꼼하게 일하고, 착실하고 조직적이면서도 고집을 굽히지 않는,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의
이익보다 민중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처럼 철두철미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의 일하는 태도나
탁월한 능력을 높이 평가한 도르티코스 대통령은 피델의 천거를 받아
게바라를 공업장관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게바라의 나이
3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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