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북좌파의 자명한 진리 곧 공리(公理)는 단순하다. 세상을 선과 악 두 집단으로 나눈다. 선한 집단은 친북좌파와 북한과 그 우호 세력이고, 악한 집단은 한국의 반공 세력과 미국과 그 우호세력이다. 중국과 일본은 각각 북한과 한국의 우호 세력이므로 선과 악으로 대별된다.
그들에게 악마는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과 (맥아더)이다. 그들에게 천사는 김구와 김대중과 노무현과 (김일성 1세~3세)이다. 여기서 김구는 양안(兩岸)의 손문과 같은 위치에 있다. 손문은 국공합작의 상징으로 중공과 자유중국 양안에서 존경을 받는다. 독립운동가로서 민족주의자로서 김구는 좌우 모두에게 존경을 받지만 이승만의 단독정부에 협조하지 않고 통일을 내세우며 스탈린의 괴뢰 김일성을 만나고 왔기 때문에 특히 친북좌파에게 전폭적인 존경을 받는다. 그를 내세움으로써 이승만은 친일파로 매도할 수 있고 자신들은 순혈 민족주의로 세탁할 수 있다. 암묵적으로 김일성에게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다. 맥아더와 김일성 1세~3세를 괄호로 묶은 것은 단순무식한 행동 대원 외에는 이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과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은 1980년대 대학가에서 속옷의 김일성 초상화와 더불어 암구호로 널리 퍼졌다. 그러다가 6.15선언으로 김일성은 주석으로 김정일은 국방위원장으로 조중동에까지 떡하니 자리 잡았다. 28세의 김정은도 제1 위원장으로 꼬박꼬박 불려진다.
현실과 상식에 정반대인 선악 기준이 한국인에게 호락호락 먹힐 리 없다. 6.25를 통해 추상적인 공산주의의 허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공산주의의 실상을 몸으로 직접 배우고, 아프리카의 케냐보다 못 살던 최빈국에서 30년간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모조리 경신하면서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서는 시장경제의 기적을 맛보고, 대통령 선거는 더러 거른 적 있으나 어떤 정권에서도 국회의원 선거는 한 번도 거르지 않아서 자유민주의 마술도 붓두껍 하나로 직접 부릴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한 한국인에게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최면이 잘 걸릴 리 없다.
휴전선에서 김일성 하수인이 아무리 요란스럽게, 단파 방송으로 아무리 새된 소리로 뒤집힌 선악 기준을 반복해도 일선의 군인이나 후방의 일반 국민이나 피식피식 웃었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반공 국민교육이 6.25의 선명한 기억과 상승 작용하여 김일성의 줄기찬 선전선동과 집요한 공작을 분쇄했던 것이다.
공산주의는 과학시대의 새로운 종교라 탄압을 받을수록 더욱 강해지고 교묘해졌다. 수천 년 전통의 고등 종교를 아편으로 추방하고 멋있게 등장한 이성과 논리의 종교라 배운 사람일수록 이에 빠져들기 쉽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은 곳곳에서 양심범이 되어 불철주야로 선악의 기준을 바꾸는 궤변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영희는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극찬했다. 단, 3천만 명이 학살된 것은 쏙 뺐다. 그것은 선한 목적을 위한 필요악 정도로 슬쩍 피했다. 백낙청은 민족과 민주의 절대적 잣대로 대한민국을 사생아로 태어난 깡패 내지 난봉꾼으로 매도했다. 김지하와 조세희는 각각 시와 소설로 천민자본주의를 난타했고(단, 김지하는 1991년부터 친북의 정체를 꿰뚫어봄) 조정래는 대하소설로 이승만을 매국노로, 김일성을 구세주로 뒤바꿔 놓았다. 강만길은 한국의 현대사를 수치의 역사로 뒤바꿔 놓았다.
선악의 기준을 뒤바꾸는 데 사용된 대표적 역사적 사건은 무혈쿠데타인 5.16과 유신헌법과 유혈봉기인 5.18이다. 이중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광주사태다. 그것은 지난 30년간 신성불가침이 되어 누구도 거기에 대해 감히 의문조차 품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실체에 접근하려고 하면 바로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민주시민이 어떻게 40여개에 달하는 무기고를 거의 동시에 탈취했는지, 어떻게 해서 군인에게는 한 자루도 없었던 카빈에 의한 사망자가 군인의 무기인 M16에 의한 사망자보다 더 많았는지, 어떤 언론인도 어떤 학자도 감히 거슬러 취재하고 연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슬그머니 김일성 왕조도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올라섰다. 세계 유일의 3대 공산세습은 한국 대기업의 3대 세습보다 문제가 적은 것으로 암묵적으로 동의하여, 그들은 아예 언급도 않거나 묵살한다. 북한인권은 터부다. 그것은 민족화해에 찬 물을 끼얹는 반민족적 행위로 간주되어, 격렬한 반대에 부딪친다. 대신에 한국의 과거 인권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되풀이되고 드라마로 극화되고 영화로 제작된다.
친북좌파는 성전(聖戰)의 용사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한다. 악을 멸하기 위하는 성전에서 거짓과 욕설과 폭력은 작은 필요악에 지나지 않는다. 300만이 전쟁에서 죽은 것이나 300만이 다가올 성전에 쓰일 무기를 개발하느라 굶어 죽은 것이나 강제수용소에서 누계로 300만이 족히 노예생활한 것이나, 다가올 통일낙원을 위한 필요악에 지나지 않는다. 공산권이 무너지거나 시장경제를 대거 받아들인 것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것은 사상의 순수성을 유지하지 못해서이거나 사상의 유연성을 발휘하여 정치는 그대로 두고 경제에서만 일찍이 레닌이 신경제 정책(NEP)에서 그랬던 것처럼 융통성을 조금 발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목적은 그대로이나 수단이 약간 바뀌었을 따름이다.
민간인을 프락치로 몰아 고문을 가한 것도 민주화운동으로 조작하여 국회의원도 되고 장관도 된 자도 있었는데, 정치와 결별한 지 20년이나 된 국정원에 근무하는 여직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장도 없이 증거도 없이 38시간 부모도 드나들지 못하게 감금한 것이 그들에게는 인권유린에 들어갈 리 없다. ‘내 편이 아니니까!’ 그저 수사 중인 수만 개 사건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가 어떤 죄도 없다는 것이 밝혀져도 음모설을 다시 제기하고 불완전 수사라며 물고 늘어진다.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기껏해야 필요악인 작은 실수에 지나지 않는다. 반미(反美)하고 반(反)정부하고 반(反)기업할 꼬투리만 잡혔다 하면 수십만 수백만 개의 촛불을 들고 온 나라를 무법천지로 만들고도 그것을 당헌(黨憲)의 제일 첫 줄에 언급하며 자랑스러워하면 자랑스러워하지 법치를 후퇴시킨 민주에 대한 모욕으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붉은 통일의 그 날까지 그들은 한 점의 죄의식도 없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주와 평화와 민족의 성전을 계속할 것이다. 그것은 정권을 잡든 안 잡든 계속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양심이 엄숙히 명하는 정언명령(定言命令)이니까!
(2012. 1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