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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식 칼럼] 대통령의 분노/ 조선일보

鶴山 徐 仁 2011. 9. 25. 09:29

사설·칼럼
박두식 칼럼

[박두식 칼럼] 대통령의 분노

입력 : 2011.09.20 23:39

박두식 정치부장

대규모 停電 사태가 人災로 드러나자
대통령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이번 일은 일회성 사고가 아니라
임기末이면 터지는 국가 위기에 대한 사전 경고

그날 대통령의 말은 거칠었다. 10년 넘게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해 온 측근조차 "깜짝 놀랐다"고 했다. 대통령은 전날 발생한 대규모 정전(停電) 사태에 화를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대통령이 직접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를 찾아가는 일정을 급하게 잡았다. 대통령은 한전 간부들을 모아놓고 "당신들은 잘 먹고 잘 사니까…", "여러분은 형편없는 수준", "아주 불쾌하다"는 등의 말을 쏟아냈다. 그러고 나서 "돌아가겠다"며 책상을 치면서 일어났다고 한다. 국가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 것은 드문 일이다.

당시엔 몰랐지만 우리는 그날 대재앙의 문턱까지 갔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는 나라가 초가을 무더위에 전력 수요(需要) 예측을 잘못해 국가 전체가 암흑 속으로 떨어지는 블랙아웃(blackout) 위기를 맞는 도저히 믿기 힘든 사태가 벌어질 뻔했던 것이다. 대통령이 "부끄럽다"고 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날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임기 3년 7개월 동안 가장 힘든 하루였을 것이다. 정전으로 뒤숭숭하던 바로 그 무렵, 청와대 홍보수석이 거물 브로커의 로비를 받은 혐의로 검찰의 소환 통보를 받자 사표를 냈다. 이 정권에서 현직 청와대 수석이 비리 사건에 얽혀 스스로 물러난 것은 처음이다. 그 수석은 정권 출범 때부터 죽 청와대에서 일해 왔고,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굵직한 일들을 다뤄온 까닭에 '그림자 실세'라는 말까지 들었던 인물이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의 진위(眞僞)는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다. 대통령은 자신과 함께 임기를 마칠 것으로 믿었던 그의 사퇴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공직 기강의 축이어야 할 청와대 수석의 비리 연루 의혹이 국민과 공직 사회에 불러온 충격은 더 컸다.

여권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대통령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대통령이 올 들어 공개석상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잦아졌다. 대통령은 지난 5월 저축은행 사태와 관련한 금융 당국의 비리가 계속 터지자 금융감독원을 찾아가 "연봉을 9000만원씩이나 받으면서 비리를 저지르느냐"고 했다. 얼마 후 장·차관 국정토론회에선 "나라 전체가 비리투성이 같다"고도 했다.

대통령은 답답한 마음에 작심하고 호통을 치면서 분위기를 다잡고 있는지 모른다. 이 처방은 당장은 효과가 있어 보인다. 정전 사태의 책임을 둘러싸고 엉뚱한 변명을 늘어놓던 정부 부처 책임자들과 전력거래소·한전 관계자들은 대통령이 화를 낸 이후 겉으론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와 함께 요즘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감사원 등에선 '공직 기강(紀綱)'과 관련한 회의가 자주 열린다. 1년 5개월가량의 임기가 남은 이 정권도 이제 공무원과 공기관을 어떻게 움직여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시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평소 "임기 마지막 날까지 똑같이 일하겠다"고 해 왔다. 5년 단임(單任) 대통령제인 우리나라에서 임기말은 가장 취약한 시기다. 실제 대통령 임기말만 되면 권력 비리, IMF 외환 위기, 국론 분열 같은 진통이 되풀이됐다. 대부분 사람의 잘못에서 비롯된 위기들이었다. 최근 벌어진 대규모 정전 사태는 해당 공직자와 공(公)기관들이 주인 의식을 갖고 자기 집안일처럼 다뤘다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남은 임기 동안 이런 유(類)의 재난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전 경고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여권 인사들은 "공무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공직사회와 5년 단임 정권의 관계는 역대 어느 정권도 풀지 못한 난제(難題)다. 대통령 임기에 따라 달라지는 게 관가(官街)의 인심(人心)이다. 대통령의 호통과 질책이 늘고, 사정(司正) 활동이 강화되면 당장은 눈치를 보겠지만 오히려 정권이 임기말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로 비칠 수 있다. 공직사회는 누구보다 먼저 그런 조짐을 읽어낼 수 있는 집단이다.

대통령이 한전 본사를 찾아 호통을 쳤던 그날, 새 한전 사장에 김중겸현대건설 사장이 선출됐다. 김 사장은 능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그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가 대통령과 같은 지역 출신에, 같은 대학을 나왔고, 대통령이 몸담았던 회사 출신이라는 사실을 더 크게 보고 있다. 임기말 위기는 대개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터져 나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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